우리는 한마디로 ‘위대함(greatness)’을 강제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잘나지 못하면 도태하고 그 책임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내가 능력 없고 내가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기에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충분한 삶’이란 누가 봐도 괜찮다고 할 만한 물질적/지위적 충분함을 누리면서도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될 모든 나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삶이다. 이런 삶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배터리가 다 채워지면 위험해서 80% 정도를 완충 기준으로 세팅하듯이, 채울 여지가 남아 있되 절대로 전부 채울 수는 없는 불완전과 미완의 충분함이다. 이 충분함으로 우리는 상호 의존적인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망각하지 않게 되며, 삶에서 기꺼이 실패를 감내하고 희로애락을 온전히 느끼면서 목적의식과 도전정신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최고, 완벽함, 위대함, 탁월함 같은 것들만 생각하지 않으면 최악으로 전락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저 충분하면 된다. 충분하기만 하면, 모두가 다 충분하기만 하면, 모든 게 평화롭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대해질 아무런 까닭이 없다. 그 대신 전혀 다른 목표를 서로에게 권유할 수 있다. 서로 좋고, 행복하고, 어떤 때는 나쁘고, 어느 때는 함께 슬프고, 그러다가 다시 좋고 행복할 수 있는 충분한 현실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이다.
■ 저자 아브람 알퍼트
저자 아브람 알퍼트는 작가이자 교육자이다. 프린스턴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서 철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21세기 인간의 조건, ‘민주주의의 미래’, ‘사회적/경제적 변혁’이라는 세 가지 의제를 중심으로 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정책을 제안하는 더뉴인스티튜트(The New Institute)의 일원이다. 유대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청년 시절부터 평등주의에 입각한 다인종/다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인종주의에 극렬히 저항하면서 불교 철학, 노장 철학, 이슬람 철학, 아프리카 철학 등 전세계 다양한 사상을 학계와 대중에 전파하고자 부단히 애써왔다. 2014년부터 2021년까지 다문화 평론지 ‘쉬프터매거진(Shifter Magazine)’를 공동 편집했고, 2018년에는 다인종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작품을 소개하는 잭샤인먼갤러리(Jack Shainman Gallery) 내에 학제 간 예술 및 이론 프로그램(Interdisciplinary Art and Theory Program)을 신설해 고문으로 활동했다.‘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 ‘가디언(Guardian)’ 등 여러 매체에도 꾸준히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근대적 자아의 세계적 기원, 몽테뉴에서 스즈키까지(Global Origins of the Modern Self, from Montaigne to Suzuki)’(2019), ‘부분적 깨달음: 근대 문학과 불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완벽하지 않은 채 잘 사는 법(A Partial Enlightenment: What Modern Literature and Buddhism Can Teach Us About Living Well Without Perfection)’(2021)이 있다. 다음 책으로 “철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역설한 아프리카계 독일 철학자 안톤 빌헬름 아모(Anton Wilhelm Amo)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 역자 조민호
역자 조민호는 안타레스 대표이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단행본 출판 편집자로 일하면서 인문 및 경제경영 분야 150여 종의 책을 기획/편집했고 저작권 에이전트로도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지루할 틈 없는 경제학’(2022년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이코노믹 허스토리’, ‘세네카가 보내온 50통의 편지’,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15분 만에 읽는 아리스토텔레스’, ‘리더십의 심리학’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며_충분한 삶이란 무엇인가
제1장_위대함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
충분함의 철학적 기원/위대함을 넘어서려는 오랜 역사/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물질 경제와 지위 경제/잃어버린 아인슈타인들/번아웃을 막는 길/춥고 외로운 할렐루야/모두를 위한 충분한 삶
제2장_우리 자신을 위하여
태초에/바보야, 경제만 문제가 아니야/덕의 귀환/능력주의, 위대함 이데올로기/위대함을 뛰어넘는 덕/있는 그대로의 세상/보장되지 않는 만족/투쟁에서 탄생한 철학
제3장_우리 관계를 위하여
낭만적인 이야기/순환의 여행/웃음 이론/선한 사마리아인의 역설/천국으로 또는 낚시터로/장자와 혜자 이야기/어디 두고 봅시다/이 정도로 충분하다면/충분한 관계의 정치
제4장_우리 세계를 위하여
핀의 길/노예의 길/충분한 전환/이기적 박애주의/충분한 세상을 위한 계획/지위 경제의 한계/롤스의 사고 실험
제5장_우리 지구를 위하여
두 마리 유인원/적자생존의 진실/충분함으로의 진화/위대한 녹색 혁명의 위험/적은 것으로 더 많이 vs. 적은 것에서 더 많이/부담과 보상의 공유/자연과의 충분한 관계/충분한 숭고함
나오며_충분한 삶을 위하여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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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누구는 계속 잘살고 누구는 계속 못살까요? 그 이유가 정말로 개인의 ‘능력’에 있을까요? ‘경쟁’에서 이겼거나 졌기 때문일까요? 내 삶과 우리 세상을 바로잡는 충분함의 철학이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드립니다.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
위대함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
‘위대함’이라는 낱말을 선택하면서 나는 ‘위대한 것’과 ‘선한 것’ 사이의 오랜 구분을 확장하고 싶었다. 일찍이 영국 시인이자 사상가 존 밀턴(John Milton)은 그 유명한 대서사시 ‘실낙원(Paradise Lost)’(1667)에서 ‘선함’을 ‘위대함’보다 높은 가치로 규정했다.
이 구분에서 ‘위대함’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할 힘을 가리키며, ‘선함’은 윤리와 품위에 따라 행동함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위대함’과 ‘선함’은 종종 대립하곤 한다.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정치가, 기업가, 예술가가 특별히 선한 혹은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위대함과 선함이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국가 차원에서도 역사적으로 위대한 강대국이라고 해서 꼭 선하지는 않았고, 윤리적으로 선한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위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은 강대국으로서의 능력을 선함과 연결해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주장하며,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은 자신을 “선량하니까 위대하다”고 포장한다. 달리 말해 그럴 만하니까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물론 위대하면서도 선한 누군가도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 개인의 위대함과 선함일 뿐 모두에게 충분한 세상을 만드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위대함을 추구하는 가치 체계는 모두가 충분한 삶을 방해한다. 능력주의 관점에서 모두의 충분함을 추구하는 세계관은 얼토당토않게 비칠 것이다. 사람들 대다수는 부와 권력이 특정 민족, 인종, 종교의 우월성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나오거나 세습돼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의로운 사회 질서가 누구나 자신의 역량을 펼칠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는 보상으로 동기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위대한 몇몇 사람들을 지원하고 독려하는 체계가 그들의 성과를 촉진함으로써 이른바 ‘낙수 효과’를 가져와 결국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여긴다.
내가 위대함을 넘어 모두가 충분한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노력하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최고가 되려면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이 삶의 다른 가치 있는 것들과 잠재력을 무시하게끔 만들어 올바른 열정을 잠식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위대한 아버지야”, “그녀는 위대한 선수야”, “이 책은 위대해”처럼 ‘위대함’이라는 낱말을 쓰지 말자는 뜻도 아니다. 나는 엄청난 위업을 묘사하고자 이 최상급 형용사를 사용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내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과하게 보상하면서 부러우면 너희도 위대해지라고 자극하는 케케묵은 섭리론, 대부분 인간 존재의 다양한 가치와 역량은 무시해버리는 사회 구조와 잘못된 세계관이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과 우리 자신과 서로를 향상할 수 있어도 위대해지지는 못할 수 있는 그런 충분함이다. 내가 이 책에서 모두가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충분히 괜찮은 세상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좋은 삶을 누리면서도 세상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인식하는 세상이다. 서로의 고유한 역량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서로의 결점을 편견 없이 인정하며, 사회 구조가 모두의 충분함을 위해 작동하고, 모든 인류가 자연 세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전히 슬픈 일, 힘든 일, 외로운 일을 겪을 것이고, 짝사랑의 애달픔과 배반의 고통과 자연재해의 무서움을 경험할 것이다. 세상은 결코 완벽한 위대함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모두에게 충분히 괜찮을 수는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모두를 위한 충분한 삶
지금쯤이면 여러분도 더는 오해하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충분함’은 ‘아무래도 괜찮음’과 동의어가 아니다. 충분함은 어떤 상황도 참고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충분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충분함은 차오름을 수반한다. 다만 차올라 넘치면 충분함이라고 할 수 없다. 충분함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사상가들은 미국 작가이자 민권 운동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표현처럼 충분함이 두 가지 상반된 요구를 충족해야 하는 개념이라고 이해한다. 충분함은 “어떤 유감이나 원한 없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과 동시에 “결코 불의를 일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평등함”이다.
충분한 삶은 실패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런데도 충분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실패를 딛고 일어나 모두의 평등과 존엄을 요구한다. 세상이 충분하므로 우리도 서로에게 충분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는 굴복이 아니다.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불만과 결핍으로 인한 자기파괴를 방지하되 자신과 타인을 위한 더 나은 삶, 모두에게 의미와 접근과 활기가 충만한 세상을 새롭게 상상하라는 요청이다. 마땅히 우아하고 섬세해야 할 세상에서 우리 모두의 운명과 상호의 존적 관계로 이어진 우리 존재가 누구인지 생각하라는 요청이다. 나아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일상적 노동에서부터 우리를 편안한 안식처로 이끄는 일상적 친밀감에 이르기까지, 우리 세상의 온갖 가치가 위대함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하찮게 치부되고 있음을 인식하라는 요청이다.
충분한 개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고 겸손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목소리를 낼 권리, 평등하고 존엄할 권리, 우리 각자가 모두 세상에 이바지하고 있음을 인정받을 권리를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품어야 할 열망은 사회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서겠다는 게 아니라, 피라미드 정상에 서는 게 중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의 덕을 모두의 충분함을 위해 더불어 노력하는 역량에서 찾을 것이다. 당연히 크고 작은 실패를 맛볼 수 있다. 실패 가능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창의적이고 적응력이 뛰어난지, 우리가 얼마나 세상의 복잡성에서도 안정적일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충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위대해질 필요는 없다. 삶이 가치 있으려면 뭔가에 능숙하고 탁월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 사회는 우리가 충분히 좋은 삶을 누릴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위대함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자신, 우리 관계, 우리 세계, 우리 지구를 훼손한다. 이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고 해서 충분함이 위대함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함의 종착지는 위대함도 완벽함도 아니다. 그래서 충분함에는 끝이 없다. 충분함은 늘 여지가 있고 늘 차오르는 상태다. 채우기만 하면 위대하고 완벽할 것 같은 그 여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태다. 충분한 삶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을 부드럽게 포용하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면서 모두의 충분함을 헤아린다.
충분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는 진보의 동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모두가 충분한 세상이 될 때까지 위대함의 이데올로기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렇게 모두가 충분한 세상을 달성하더라도 진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함을 포용할 것이기에 우리 세상은 영원토록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충분함이다. 더 적은 불안과 더 많은 의미, 더 적은 방관과 더 많은 배려, 더 적은 불평등과 더 많은 민주적 협력, 더 적은 파괴와 더 많은 자연과의 조화가 충분함을 이뤄가는 요소들이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모두에게 충분한 삶이라는 이상은 우리 개인이 삶의 목표를 모든 사람에게 적절하고 충분한 세상을 지향하고 그런 세상의 일원이 되는 쪽으로 정하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이상이 개인인 우리를 독려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충분하려면 개인이 충분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인데, 더 높고 원대한 목표를 위해 우리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의 이익 경쟁을 동력 삼아 경제 성장을 도모하는 사회 체계에 반기를 들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개인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를 얼마만큼 창출하느냐에 지독할 정도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심지어 문화, 예술, 스포츠, 지식 가치도 돈으로 환산한다. 이런 체제는 우리 자신을 경제적 도구로만 정의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지극히 제한된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충분한 세상에서 우리는 이익 때문이 아닌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저 충분히 괜찮은 게 아니라 우리의 능력과 열정을 추구하기 위한 정신적/정서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는 충분함이다. 물론 누누이 말했듯 충분한 세상이라도 여전히 불완전하다. 아무도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이지만 사회에서 꼭 필요한 노동 분야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노동을 무작정 누군가에게 전가하기보다 노동의 합당한 대가를 보상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는 공평한 분배가 우리 모두의 사회적 부담이 될 것이다.
이는 충분한 삶의 추구가 분명히 우리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면서도 단순한 개인적 자기계발이 아닌 이유다. 반쯤 깨우침을 주고 반쯤 격앙하게 만드는 책 ‘신경 끄기의 기술(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2016)에서 마크 맨슨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경 끄기가 필수다. 신경 끄기야말로 세상을 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것과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태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그의 논지는 무조건 신경을 끊고 살자는 게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것에 연연하지 말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그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하지만 마크 맨슨이 제시하는 신경 꺼야 할 목록에는 몇 가지 분명한 문제가 있다. 모두 현실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연결돼 있어서 여러분 혼자 신경 끈다고 달라질 게 없다. 그 이후도 없다. 그의 거침없는 입담에 잠깐이나마 속이 후련해질 수는 있겠지만, 신경 끄라는 임무 이후의 임무가 없기에 개인과 사회의 연결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더 크고 넓은 임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나만 마음 편하면 된다는 발상은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나 좋자고, 나와 상관없다고,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꺼져”라고 외칠 때 그 꺼지라는 대상이 타인에게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혼자서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의 어려움에 관한 그의 지혜를 사회의 비전으로 전환하는 윤리 체계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기 때문이든, 인간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 때문이든 상관없다. 어떤 이유를 끌어오든 간에 우리는 모두 충분해야 한다. 나는 이를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 ‘충분한 보편주의(good-enough universalism)’라고 부른다. 이는 충분히 좋은 것에 대한 보편주의지만, 완벽한 보편을 지향하는 보편주의는 아니다. 충분한 보편주의는 개인과 집단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pluralism)’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자신의 충분함에 더해 타인의 충분함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충분한 보편주의는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개성, 역량, 잠재력을 활용해 모두에게 충분히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회의 좋은 측면, 즉 협력, 연결, 배려의 미덕에 의존할 수 있으나 강요하지는 않는다. 충분한 보편주의는 완벽하게 위대한 유토피아 건설이 목표가 아닌, 서로가 충분하면서도 불완전성은 인정하는 세상을 추구하므로 ‘절대성(absoluteness)’이라는 개념은 수용하지 않는다. 이를 우리 개인의 세계관으로 미리 설정해두면 모두의 적절함과 충분함에 대한 규범적 지평을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 관계를 위하여
위대함 추구는 삶에서 맺게 되는 관계의 유형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위대함 추구는 자녀를 사회의 위계와 지위 경제에서 높은 위치를 확보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가 경쟁 체제를 뚫고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길 원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최고만 될 수 있다면 뭐든지 자신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원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부모 노릇 제대로 하는 훌륭한 부모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훌륭한 부모가 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압박을 가하고 자녀를 향해서도 너무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모 자신과 아이들 모두의 충분한 삶을 방해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하버드를 목표로 공부하던 어떤 패기만만한 여학생이 있었다. 평소 학업 성적이 좋았는데도, 부모 특히 아버지는 딸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과할 정도로 높아서 매일 같이 응원을 빙자한 압박을 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랫동네에 사는 같은 학교 남학생 아버지가 아들의 하버드 입학을 돕기 위해 하루 4시간만 자면서 라틴어와 비올라를 가르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잠만 쿨쿨 잘 자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1년 뒤 그 친구가 하버드 입시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천 명이나 되는 지원자 중에서 너무나 많은 학생이 라틴어를 잘하는 데다 비올라 실력도 전문 연주자 수준이었단다. 아버지와 아들은 깊은 실의에 빠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아들도 남들에게 없는 나름의 특권을 누렸더랬다. 여학생 쪽도 떨어지긴 매한가지였다. 그 아버지도 딸아이와 똑같이 실의에 빠졌다. 네 사람 모두 자신들을 실패자라고 느꼈다.
혹시 여학생과 남학생 중 한 사람이 하버드 입학에 성공했다면 그 아이는 기대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모든 인생이 그렇듯 이 아이들의 삶은 충분하지 않을 수 있고, 사고나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며, 쟁취가 아닌 우연의 결과일 수 있고, 노력과 상관없는 한순간의 실수로 흠집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도 “해라”, “이뤄라”, “올라서라” 하며 끝없이 울려 퍼지는 머릿속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지는 고민할 겨를이 없고 능력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싸워 이길지에만 골몰해야 한다. 완벽함에 대한 공포의 물벼락은 갑자기 쏟아지는 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젖어들어 어른으로 성장해서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온몸을 흠뻑 적시게 되는 것이다. 이 무의식의 공포는 매우 심각해 우울증과 불안감은 물론 각종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그래도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인간관계에 가해지는 압박과 불안이 능력주의로 대표되는 위대함 추구 문화가 초래한 문제임을 알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을 대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관계 문제의 핵심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최고의 부모, 친구, 동료, 연인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우리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우리가 최고, 완벽함, 위대함, 탁월함 같은 것들만 생각하지 않으면 최악으로 전락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우리의 관계는 그냥 충분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를 왕자나 공주로 떠받들어주는 엄마나, 언제나 “다해줄게!” 부모나, 아주 이따금 축구 연습장에 데려다주는 아빠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친구와 2년에 한 번씩 연락 줘서 안부를 물어주는 친구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위대해질 아무런 까닭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전혀 다른 목표를 서로에게 권유할 수 있다. 서로가 좋고, 행복하고, 어떤 때는 나쁘고, 어느 때는 함께 슬프고, 그러다가 다시 좋고 행복할 수 있는 충분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소모적이고 경쟁적인 관계 대신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충분한 부모, 자식, 친구, 연인이 되는 일도 분명히 쉽진 않지만, 적어도 이 관계가 남들과 비교할 대상은 아님을 깨우칠 수 있다. 나는 비로소 나와 가족, 친구, 동료, 제자들과의 관계가 내 인생에서 충분하다고 여길 수 있었는데, 위대함을 향한 수많은 유혹에 온전히 저항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스스로 신체적/정신적 건강 상태를 살피고 번아웃에 빠질 만큼 나 자신을 혹사하지 않자 자연스럽게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관대해졌다. 내가 사랑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단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반대로 내 단점도 솔직히 인정하면서 모쪼록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정직해지려고 결심했고 정직하게 행동하고자 부단히 애썼다. 나는 평소보다 더 큰 배려가 필요한 순간을 인지하게 됐고, 그럴 때면 특별한 관심을 제공하거나 요청했다. 나는 나 혼자서 내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고 그럴 때마다 무작정 도와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가 일치한다는 확실한 판단이 섰을 때만 이해관계를 생각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대함을 추구하고자 애쓰지 말고 모두에게 충분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서 의미와 가치를 찾자고 설득했다.
웃음 이론
완벽함과 위대함으로 가는 길은 싸움과 눈물로 가득하지만, 충분함의 길은 온전한 삶으로 이끄는 유머러스한 경로를 제공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나는 충분한 삶을 살려면 인생에 어느 정도의 고통과 비극은 있음을 인식해야 하고 그마저도 충분함에 포함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강하게 설득하려다 보니 우리 삶의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희석되는 듯해서 걱정된다. 그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충분한 삶이 선사하는 희극과 즐거움을 간과한다면 큰 실수이자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것이다. 충분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활짝 웃을 수 있는 이유다.
웃음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 중 하나는 제3대 샤프츠베리 백작(Third Earl of Shaftesbury)인 영국 철학자 앤서니 애슐리 쿠퍼(Anthony Ashley Cooper)의 ‘공통의 감각, 재치와 유머의 자유에 관한 에세이(Sensus Communis, An Essay on the Freedom of Wit and Humor)’(1709) 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른바 ‘이완 이론(Relief Theory)’이라고 불린다. 유머와 웃음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미국 철학자이자 종교학자 존 모리얼(John Morreall)에 따르면 웃음은 증기 보일러의 압력 완화 밸브처럼 우리 신경계의 긴장을 이완하는 역할을 한다. 즉, 웃음은 억압이나 불안 때문에 생긴 부담스러운 정신적/감정적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게 해준다. 웃음의 심리적 이완 기능에 주목해 이를 구체화한 인물은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다. 그는 웃음으로 개인의 무의식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방출되면서 정서적 긴장감이 해소되고 안도감을 되찾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 예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동생의 죽음을 유머로 승화시킨 이야기를 들려줬다. 마크 트웨인은 동생이 철도 공사를 하던 중 폭발이 일어나 하늘로 날아갔고, 그가 다시 땅으로 내려왔을 때는 반나절 치 일당만 받고 누워 있었다고 썼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고 웃게 되는데, 마크 트웨인의 동생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적 빚을 진 상태에서 이야기가 유머러스하게 끝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감정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이때 나오는 웃음이 이와 같은 감정적 빚의 해방을 표현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억압된 성적 욕망과 농담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 성적인 유머는 성적 욕구가 억압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농담이 성적 욕구를 해소해준다기보다는 성적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면서 쌓인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프로이트의 유머 이론은 꽤 잘 들어맞지만, 웃음의 기능을 더 확장해 웃음이 위대함을 추구하면서 생긴 부담스러운 정신적/감정적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개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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