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지은이 : 박정하 (지은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3년 12월




  • 서양 철학사의 중앙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저수지에 비유되는 칸트! 그의 저술서 중 계몽주의의 완성자이며 철학적 모더니티를 성숙시킨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실천 이성이 어떻게 의지를 규정하여 우리가 의무를 지키게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근대의 이성을 완성한 철학자, 칸트

    근대 이성의 완성자

    칸트는 근대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평가받는 철학자이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흔히 중세의 신중심주의에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로 넘어왔다고 말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때 ‘인간’은 개인을 가리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양 고대, 특히 그리스의 사상도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은 사회에서 독립된, 사회 이전에 더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비로소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는 공동체적 인간이다.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안에서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만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충족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폴리스에서는 좋은 인간이기 이전에 좋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흔히 ‘정치적 동물’, 혹은 ‘사회적 동물’로 번역하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 ~ BC 322)의 유명한 명제는 정확한 의미를 따지자면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근대의 인간은 이러한 공동체적 인간, 즉 공동체 속에서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받는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으로서 원자적 인간이 먼저 있고, 사회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성립된다. 사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개인이다. ‘사회 계약론’이라 부르는 근대의 주류 사회철학 이론이 이런 생각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개인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근대 주체의 모습을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글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계몽이란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미성년의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런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신체적이거나 환경적인 요인 등으로 인하여 이성의 결핍 자체에 있을 경우에는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고자 하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몽의 표어로 우리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즉 ‘과감하고 지혜롭고자 하라!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칸트의 역사철학’)


    이처럼 어떤 권위나 힘의 강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자율적인 근대 주체의 모습이다. 결국 주체를 주체이게끔 하는 실질적 내용은 바로 이성인 것이다.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주체 역할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을 주체로 확립했다는 것은 각 개인이 바로 이렇게 자율적으로 이성을 사용할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확립했다는 의미이다.


    칸트는 근대적 이성의 핵심 기능을 비판 기능이라고 보았다. 계몽주의가 등장하는 근대 초는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판의 시대’였다.


    비판적 이성은 한편으로는 권위와 힘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기존 권위에 의해 진리로 강변되는 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따지는 이론적 활동으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절대적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실천적 활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이성을 확립하고 정당화했기 때문에 칸트는 근대 이성의 완성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이성은 둘인가 하나인가?

    칸트가 쓴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보통 ‘3비판서’라 부르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이다. 책 제목에 모두 붙어 있는 ‘비판’이란 말이 바로 이성의 주된 능력이 비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이렇게 두 개의 이성이 등장해서 칸트가 이성을 왜 둘로 나눈 것인지 궁금해진다. 둘은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같다면 왜 이름을 달리 쓰는지 등이 궁금해진다. 결론적으로 말해 두 이성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름을 둘로 나누어 달리 부를까? 하나의 이성이 서로 다른 관심과 영역에서 사용되면서 역할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역할이 어떻게 달라질까? 이성은 이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실천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파악하고 세계에 대한 삶을 얻고자 하는 이론의 영역에서 이성을 사용할 때, 앎을 얻기 전에 경험에 앞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어서 이 앎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원리, 즉 ‘선험적 원리’를 이성이 제공해준다. 반면에 실천의 영역에서 이성을 사용할 때 우리는 행위의 궁극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성은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의지란 무엇일까? 앎이 이미 있는 것을 아는 활동이라면 의지는 아직 없는 무엇인가를 원하는 능력이며, 원하는 것을 얻도록 행위하는 능력이다. 결국 실천 이성은 우리의 의지가 삶의 궁극적 목적, 예를 들면 선과 같은 것을 추구하도록 규정하는 능력이다. 달리 말해 이성을 실천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 의지가 선만을 추구하도록 이성을 통해 규제하고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하나의 이성이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가장 근본적 틀과 원리를 제공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의지가 선을 추구하도록 규정해주는 전혀 다른 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성의 두 기능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할 수밖에 없다. 이 중 첫째 과제를 ‘순수이성비판’에서 탐구했고,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둘째 과제를 탐구한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이전의 철학을 반성하고, 나아가 새롭게 움트는 과학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지식이 무엇인가를 탐구하여 새로운 철학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했다. 중세 철학의 중심에 있었던 형이상학은 크게 일반 형이상학과 특수 형이상학으로 나뉜다. 일반 형이상학은 사물을 탐구하되 개별 사물의 특성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단지 있는 것으로만 탐구하는 것, 즉 있는 것의 있음, 존재 방식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특수 형이상학은 있는 것 중에서 특별한 것, 즉 자연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 예를 들면 영혼이나 신이나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특히 이전의 형이상학에서 이러한 특수한 대상에 대한 지식은 근거도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인정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칸트는 이전 형이상학의 지식을 비판하고 새로운 형이상학을 추구하기 위해 지식의 조건, 의미 있는 앎의 조건 자체를 반성해보고자 했다.


    형이상학은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주어진 경험 세계에 만족하지 않고 그 근거를 찾고 캐묻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영혼, 세계, 신 같은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을 중세에는 최고의 학문으로 칭송했지만 근대에 와서는 혼란이 발생했다. 정반대의 주장이 제기되어도 어느 것이 진리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고, 그러다 보니 근거 없이 공론만 일삼게 되고 급기야 우리가 과연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도 만만찮게 제기되었다. 감각 경험을 기초로 하여 형이상학을 다시 확립해보려 했던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노력이 단기간 희망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감각 경험에 기초하면 이전 형이상학이 공허하고 문제가 많다는 것을 비판하기에는 상당 부분 효과적이지만 새로운 형이상학을 기초 짓기에는 역부족이 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세계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유한인지 무한인지 같은 형이상학의 주장들의 진위를 따지기 이전에, 과연 그러한 문제가 우리 인간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지, 그런 문제에 대해 의미 있는 이론적 앎과 지식이 성립할 수 있는지를 먼저 검토해보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론적으로 본래 대답할 수 없는 것임에도 대답을 찾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형이상학의 문제를 탐구하는 우리의 사고 능력, 즉 ‘이성’을 검토하여 이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해보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순수이성비판’은 형이상학을 튼튼하게 성립시킬 수 있는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인식 능력, 앎의 능력, 다시 말해 이성의 이론적 능력 자체를 비판해본 작업이었다.


    ‘실천이성비판’의 과제와 성격

    칸트는 저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이는 물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선험적인 규정 작용에 의해 대상 세계가 인간 사유의 보편적인 형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실천적으로도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위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세계는 보편적인 인과율에 따르는 순수하게 기계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 속에서 도덕적 의도 및 목적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이성적 체계를 발견한다. 이런 내적인 체계를 통해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며 또한 자연을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킨다. 자연은 기계론적 법칙을 따르며 그 자체로는 목적론적인 의미가 없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실천만이 목적을 부여한다.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지성만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하는 목적이 자연 속에서 실현되기를 요구하고 세계가 그 목적에 따라 변혁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이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도덕적, 또는 목적론적 이성이 바로 의지의 원리이다. 세계의 목적은 세계 자체를 넘어서 있는 무엇이며, 성취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세계를 변혁하는 힘은 실천 이성으로 작용하는 인간의 의지이다.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이 도덕적 의지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을 수행한다.


    ‘실천이성비판’의 칸트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실천의 주체인 인간이 주관적으로 세운 준칙이 어떤 경우에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마치 이론 철학에서 범주와 같은 주관의 순수 지성 개념이 왜 한갓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 실재성,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달리 말해 한갓 주관적인 규칙이 어떻게 객관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가는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을 통틀어 중요한 문제이며, 그 점에서 칸트는 관념론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천 영역에서의 철학적 탐구가 ‘실천이성비판’에서는 크게 보면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째 단계는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이에 기반하여 도덕 법칙에 의해서만 의지를 규정할 수 있음을 확인하여 정언 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확립하는 작업이다. 둘째 단계는 첫째 단계의 결과를 바탕으로 도덕적 의지의 전체적 대상을 규정하는 작업, 즉 도덕 행위의 결과로서 실현되어야 할 목적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칸트가 둘째 단계에서 제시하는 실천 이성의 전체적/무제약적 대상은 바로 최고선(das hochste Gut)이다. 그리고 이 최고선을 확보할 필수적 전제로서 영혼의 불멸성, 신의 현존 같은 요청을 끄집어냄으로써 이성 신앙으로 넘어간다.


    이러한 ‘실천이성비판’의 작업은 결국 칸트 철학 체계 전체에서 보자면 칸트 철학의 중요한 특징인 ‘두 세계론’ 중 당위의 세계, 도덕의 세계의 전모를 파헤치는 작업이다. 칸트 철학의 두 세계론은 존재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를 엄격히 나누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 즉 ‘이미 있는 것’은 우리 인식의 대상으로서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당위의 세계, 즉 ‘아직 없지만 있어야 할 것’은 우리 행위의 대상으로서 도덕의 세계에 속한다. 안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아는 것이지 아직 없는 것을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은 이미 있는 것의 세계, 즉 현상계로 제한된다. 이미 있는 세계, 즉 자연은 결정론적인 인과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식이 가능하며, 과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 중에는 과학의 영역, 사실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또 하나의 풍부하고 오히려 더 중요한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위의 영역, 도덕의 영역, 가치의 영역이다. 칸트가 오히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이 영역이다. ‘순수이성비판’이란 저작에서 칸트가 한 작업은 좁게 보자면 현상 세계로서의 자연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성립 가능함을 밝힌 것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뉴턴의 자연과학이 참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넓게 보자면 사실은 과학이 의미 있게 성립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히 밝혀서 과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과학의 틀 속에 들어올 수는 없지만 사실은 인간에게서 더 중요한 문제를 올바로 다룰 수 있는 올바른 철학이 필요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올바른 철학, 즉 ‘진정한 형이상학’의 중요한 내용이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실천이성비판’은 칸트의 철학적 탐구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천이성비판’ 읽기

    도덕 법칙은 무엇인가

    도덕 법칙의 특성

    이미 살펴보았듯이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보통 어떤 원칙을 토대로 행위하고 실천한다. 거짓말과 관련해서 보면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혹은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는 거짓말은 해도 된다” 혹은 “내게 불리하면 거짓말해도 된다”는 원칙 중 어느 하나를 토대로 행위한다. 그리고 어떤 원칙을 가지느냐에 따라 내가, 혹은 상대방이 문제 상황에 처했을 때 선택하는 행동은 전혀 달라진다. 그런데 칸트는 이런 원칙을 준칙과 실천 법칙으로 나눈다. 전자는 주관적인 원칙이고 후자는 객관적인 원칙이다.


    주관적인 실천 원칙인 준칙은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나는 꼭 지켜야 하는 실천 원칙이다. 실천 법칙을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침 6시에 꼭 일어나야 한다”는 원칙은 주관적인 원칙이다. 내가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정해놓은 것이라서 나만은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규칙을 어기면 “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야?”라며 스스로 책망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서 이 원칙은 준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 법칙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아침 6시에 꼭 일어나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밤에 길거리를 지키는 경찰이기 때문에 새벽 4시에 퇴근합니다. 그런데도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할 경우, 그 사람에게 아침 6시에 꼭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준칙에는 행위하는 사람 본인이 자신의 조건과 특성과 욕망에 맞추어서 정한 실천 규칙들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꼭 지키고자 하는 규칙이다. 반면에 실천 법칙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원칙이다. 이성적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적용해도 올바른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나 마땅히 지켜야 할 객관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세운 규칙은 준칙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각자가 가진 서로 다른 경험은 무시하고 오직 이성에 근거해서 세운 규칙은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 칸트가 도덕 법칙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실천 법칙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구나 지켜야 할 명령이 실천 법칙인 것은 맞지만 명령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모두 다 실천 법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오직 명령 중에서 정언 명령만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 정언 명령이란 무조건 지켜야 할 명령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이 되려면 우선 명령이어야 하고, 그중에서도 무조건적 명령, 즉 정언 명령이어야 한다. 이 점을 하나씩 설명해보기로 하자. 우선 앞에서 다룬 주관적인 준칙도 실천을 위한 원칙이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명령이 아님을 벌써 보았다. 개인적 규칙에 불과하므로 꼭 누구나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준칙은 사람에 따라, 또 같은 사람도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규칙은, 필요하다면 “아침 5시에 일어나야 한다”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정언 명령만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명령이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칸트의 대답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성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개개인의 특성에 상관없이 항상 성립한다는 것이다. 필연적이라는 말은 무조건 반드시 성립한다는 뜻이다. 실천과 관련해서 보면 감정의 변화나 우연적 조건에 상관없이 반드시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이 붙은 가언 명령은 필연적일 수 없다.


    도덕의 토대, 자유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가

    칸트에서 자유는 두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는 초월적 자유이고, 둘째는 실천적 자유이다. 초월적 자유는 우선 소극적 의미의 자유이다. 이론 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 안의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원인-결과의 계열을 생각해보면, 원인의 원인, 또 그 원인의 원인을 계속 생각해갈 수 있다. 그런데 유한한 자연에서 이러한 계열이 무한하게 갈 수는 없으므로 무언가 출발점을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출발점이 되려면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을 통해 생겨난 게 아니라 스스로 생겨난 것, 즉 스스로 원인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 출발점은 더 이상 다른 것의 결과가 아니므로 이 원인-결과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며 이 고리를 가능하게 하는 최초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의 원인-결과 고리에서 벗어날 때 초월적 자유가 성립한다.


    실천적 자유

    칸트는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도덕 법칙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토대로 자유에 더 적극적인 성격을 부여하고자 한다. 실제로 자유가 존재함을 보여주어 실천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초월적 자유가 소극적 의미의 자유였다면 실천적 자유는 적극적 의미의 자유이다. 앞서 여러 번 말했듯이 도덕 법칙은 우선 모든 질료, 즉 원하는 목적이나 대상에서 독립해야 한다. 나아가 준칙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법칙다운 형식을 갖출 때 도덕 법칙으로 성립한다. 여기서 질료에서 독립한다는 측면이 바로 앞서 말한 소극적 의미의 자유, 곧 초월적 자유를 말한다면, 실천 이성이 스스로 법칙을 수립한다는 측면은 적극적 의미의 자유, 곧 실천적 자유를 말한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바로 자율로서의 자유를 표현한다. 이 자유를 통해 준칙은 최상의 실천 법칙과 일치할 수 있고, 법칙다운 형식을 갖추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결국 자유는 도덕 법칙의 존재 근거이고 도덕 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 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 자유가 있어야 도덕 법칙이 성립할 수 있고, 도덕 법칙이 있는 것을 보면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해 자유가 없다면, 도덕 법칙은 우리 안에서 결코 성립할 수 없을 것이고, 동시에 만약 도덕 법칙이 우리의 이성에서 먼저 명료하게 생각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의식하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도덕 법칙이 아니었더라면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을 자유를 자신 안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실천적 자유가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밝히는 가장 핵심적 주장이다. ‘실천이성비판’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순수 이성이 그 자체로 실천적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독자적으로, 곧 모든 경험적인 것으로부터 독립해서 의지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자신의 준칙에 모두가 지켜야 할 법칙으로서의 형식을 부여하면서 자율적으로 의지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의지의 자유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한편으로는 감성 세계에 속하는 것이기에 다른 작용하는 원인과 같이 반드시 원인-결과의 자연 법칙에 종속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실천적인 일에서는 예지적 질서에 속한 것이기에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최고선 이해하기

    실천 이성이 목표로 하는 것, 달리 표현하면 실천 이성의 대상은 무엇일까?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최고선이다. 실천 이성도 나름의 대상과 객관을 추구한다. 물론 이 대상은 우리의 욕망이나 자연적 욕구가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앞에서 밝혔듯이 욕망이나 욕구의 경우 대상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만, 실천 이성의 경우 목표와 대상이 실천 이성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순수 의지와 실천 이성을 규정하는 것은 오직 도덕 법칙뿐이다. 실천 이성이 한편으로는 도덕 법칙에 의해 규정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의 객관이나 대상, 혹은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이때 실천 이성의 대상이 바로 최고선이다.


    그렇다면 최고선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덕과 행복이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최고’는 가장 높다는 것, 즉 ‘최상’을 의미할 수도 있고, ‘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최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무조건적임을 말한다. 달리 말해 다른 어떠한 것에도 종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완전하다는 것은 더 큰 전체에 속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체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덕을 갖춘 인격이 동시에 행복도 누리게 되는 상태인 최고선은 바로 완전선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도 덕은 언제나 완전선의 조건 역할을 하는 최상선이다. 덕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항상 이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유쾌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행복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어떤 관점을 취하더라도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행복이 최고선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도덕 법칙에 알맞은 덕스러운 태도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즉 최고선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최상선을 이루는 것인데, 덕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최상선이다. 거꾸로 표현하면 덕을 성취하는 것이 일단 도덕의 목표이고, 덕을 성취하면 최상선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최고선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다. 덕에 도달했기에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이 실제로 행복까지 누릴 수 있을 때, 그때야말로 제대로 된 완벽한 선이 실현되어 최고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착하게 사는데 그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고 고통받고 불행한 삶을 산다면 완전히 좋은 상태라고는 할 수 없다. 정말 착하게 사는 사람이 행복까지 누리는 상태가 되어야 정말 완벽하게 좋은 상태, 즉 최고선이 실현된 상태일 것이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