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앞에 선 인간
 
지은이 : 니콜라스 필립슨(역:배지혜)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3년 05월




  • 중세는 인류의 암흑기가 아닌, 과거의 유산 위에서 점차 미래로 나아가는 찬란한 시대였습니다. 인류 지성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중추, 중세를 다시 주목해 봅니다.


    신 앞에 선 인간


    그리스도교를 세계종교로 성장시키다_사도 바울로

    그리스도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장본인

    예수와 바울로가 살았던 당시 지중해 연안의 세계는 많은 면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 내에 보이기 시작한 분열의 조짐은 확실히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바울로는 엄격한 바리사이파 교육을 받은 만큼 철저하게 유대교 토양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고향 다르소로 상징되는 헬레니즘 정신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처럼 율법에 충성하던 바리사이 바울로는 신의 율법을 위한 뜨거운 열정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돌아선 것은 환상 중에 예수가 부활했음을 생생히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바울로는 회개 체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온 세상의 메시아로 선포해야 할 소명을 자각하게 되었다.


    바울로는 또한 예수가 실제로 행했고 말했던 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실천한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였다. 그가 받았던 바리사이파 교육과 구약에 대한 해박한 지식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친숙했던 헬레니즘 세계의 관념들도 그의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바울로는 이미 본 바와 같이 아테네의 아레오파고 법정에서의 연설을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그의 서간들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고자 그리스 철학의 표상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어리석다고 판다하는 이 세상의 지혜를 비판하지만, 그것을 그 자체로서는 인정하며 그리스도교의 이론 전파에 활용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신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통하여 신의 선민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복잡한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도 신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했다. 인간은 그 온갖 ‘율법’을 꼼꼼히 지켜야 신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모든 인간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신의 뜻을 신뢰하며 자신을 내맡기는 일이다.


    바울로에 의하여 그리스도교의 이방인 선교는 전 로마제국에서의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참된 토착화가 이루어졌다. 그의 이러한 신학적 통찰과 선교적 실천은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가 전체 세계의 역사를 변혁시킬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티나에 널리 퍼져 있던, 소위 ‘묵시문학적 패러다임’은 모든 반대자를 무찌르고 승리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바울로에 의하여 로마제국 전역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패러다임 전환에 결정적 역할을 한 최초의 신학자는 두말할 것 없이 바울로였다.


    이처럼 유대교의 작은 ‘분파’였던 그리스도교는 바울로에 의하여 마침내 세계종교로 발전했다. 이로써 동방과 서방은 엄청난 군사적 권력을 바탕으로 통합을 시도했던 알렉산더대왕 때보다 이 종교 안에서 더 긴밀히 결합되었다. 유대교는 이미 보편적 유일신 신앙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종교가 되지 못했지만, 그 뿌리에서 나온 그리스도교는 인류의 보편적 세계종교가 되었다. 모두 바울로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울로가 없었다면 가톨릭교회도, 그리스-라틴 교수신학도, 그리스도교적 헬레니즘 문화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교차점에서 탄생한 중세철학의 유구한 역사도 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상적 대화에서처럼 그리스도교와 주변 문화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화 역시 대화에 참여하는 상대자를 변화시켰다. 그리스도교는 그것이 자라난 헬레니즘 문화를 변화시켰고, 바울로를 통해서 받아들여진 헬레니즘 문화는 다시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근본적으로 다른 색채를 부여했다.



    사상과 학문의 원천, 신플라톤주의_플로티노스

    플라톤의 계승자, 철학과 신학의 원천이 되다

    플로티노스는 ‘실천이 이론의 귀결이자 표현’이라는 그의 명제를 행동으로 보여준 철학자이다. 그는 덕을 실천하는 현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했지만, 덕의 초심자에게는 본받을 수 있는 덕의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플로티노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스승으로 삼았다. 자기 생일은 무시했던 플로티노스였지만 두 스승의 생일만큼은 자신의 학원에서 기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학생이 스승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으로는 최고 ‘예술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학생은 선생의 가르침을 넘어서 스스로 일의 이치를 깨달아야만 한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초상화를 절대 그리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당시 제자들은 유명한 화가를 플로티노스의 강의실에 몰래 들여보내 스승의 모습을 기억시킨 다음, 다시 다른 곳에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그만큼 플로티노스는 겸손하게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지만, 그를 추종하던 많은 제자들은 그에게서 진정한 스승을 발견했다. 이미 4세기 전반에 그는 ‘최근의 모범’으로서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나란히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


    플로티노스가 제시한 신플라톤주의가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갈 무렵, 그리스도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교적 성장과 함께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이를 위하여 거쳐야 했던 논증과 정의 과정에서는 철학과 수사학에서 빌려온 개념과 범주가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과정에서 엄격한 의미에서의 자기 철학을 출발점으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시의 지배적인 철학이던 신플라톤주의에 의지했다.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한 대표적인 신학자로 동방교회에서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 서방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된 플로티노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로 회심할 발판을 마련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엔네아데스’ 6집 모두를 이미 읽고, 플라톤의 가장 순순하고 선명한 가르침이 플로티노스에 이르러 최고의 빛을 발했다고 극찬했다. 특히 카시키아쿰에서 썼던 초기 작품들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로티노스에게서 받았던 깊은 감명이 잘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후기 작품들에서도 점차 그리스도교 교리와의 차이를 주목하면서도 플라톤주의를 ‘사상의 귀족’이라 칭하며 자기 신학의 토대로 삼았다. “플로티노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저 사도 바울로 이래로 다른 사상가들에 비하여 보다 의미심장하게 그리스도교 신학에 영향을 주었던 자(루돌프 오이켄)”라는 평가는 그러므로 과장이 아니다.


    플로티노스에서 비롯한 신플라톤주의는 이렇게 서양 고대 후기의 대표적인 철학사조로 종래의 철학 전통을 대통합하여 중세에 전해주었다. 서구 라틴 중세와 비잔티움 및 이슬람은 신플라톤주의의 중개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에 접근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중세 후기의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사상가들의 관심을 끈다. 대표적으로 파도마의 마르실리우스 (Marsilius of Padua), 피코 델라미란도라(Pico Della Mirandola), 조르다노 부르노(Giordano Bruno) 등이다.


    플로티노스는 근대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와 노발리스, 셸링, 헤겔의 독일 관념론 등을 거쳐 현대 베르그송과 하이데거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플로티노스의 사상은 철학 분야를 넘어서서 미켈란젤로를 위시한 르네상스 예술가들, 심지어 괴테, 에머슨, 워즈워스, 예이츠와 같은 시인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었다.



    철학의 힘으로 뻗어나간 그리스도교

    분서갱유로도 지우지 못한 위대한 신학자

    오리게네스의 엄청난 지적 능력과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작품들의 수를 듣게 되면, 그에 비하여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사는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총 대주교와 로마제국의 박해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던 오리게네스는 죽은 후에도 다시 한번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그리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진리 탐구와 의미를 갈구했던 오리게네스는 그 열정이 지나치면서 몇 가지 오류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스도교 초기의 이단들처럼 그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플라톤주의와 이를 비롯한 당대의 철학체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놀라운 신학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교의상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 성자는 성부보다 낮고 성령은 성자보다 낮다는 종속설(從屬說)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만물복귀설(apokatastasis panton)을 주장했는데, 만물은 종말에 자신들의 궁극적 근원으로 되돌아가며 또한 신은 모든 것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구원 행위는 모든 영혼, 심지어 악령과 악마까지도 정화의 고통을 통해서 마침내 신과의 일치에 이르게 한다. 이는 지옥에 관한 전통적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플라톤주의의 영향도 보인다. 오리게네스는 타락한 천사들과 함께 영혼이 신에게서 떨어져 나가, 육체에 갇혀 인간이 되었다는 영혼선재설(pre-existence of the soul)과 정령설(精靈說)을 인정했다. 더 나아가 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주장하는 정통 교리와 달리 창조를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오리게네스는 살아 있을 때 매우 명망 높은 신학자였지만, 이러한 오류가 그를 후대에 평가절하하게 만든 계기를 제공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일 실체에 관한 교리’가 확립되면서 그가 주장한 종속적 삼위일체설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다.


    이후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오리게네스의 이론들에 대한 반대를 반영하여 그의 이론을 따르던 과격한 수도승들을 이단으로 선포하고 추방했다. 이에 따라 그의 많은 작품이 소실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부 교회 회의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오리게네스에 대한 존경은 그의 제자들과 후대의 독자들에게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성경의 일부만을 집중적으로 해석했던 다른 주석가들과 달리 그는 성경의 모든 책을 철저하게 주해했다.


    성경과 관련된 오리게네스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도교 주석 전체에 기여했으며, 중세 때 네 가지 성경 의미에 관한 체계적 학설을 마련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많은 제자들과 적대자들이 자신의 이상을 토대로 그리스도교를 더욱 정통적인 형태로 선포할 수 있도록 신학의 학문체계를 수립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론적 훈련뿐 아니라 실천적 훈련 또한 매우 강조했다. 그는 강의에서 말한 내용이나 이상을 스스로 실천하거나 일치시키려고 애썼다. 또한 그는 학생들에게 모든 덕의 본보기를 소개하여 그들이 이를 따르도록 북돋았다. 그만큼 누구보다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존중하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도 오리게네스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리스도교 영성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깊은 신비 신학적 영성 이해는 바실리우스(Basilius),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of Clairvaus) 등을 위시한 그리스도교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에바그리우스(Evagrius),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 대 그레고리우스(Gregorius) 교황, 고백자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이상이 되었다.


    르네상스 동안 오리게네스의 저서들은 플라톤주의 철학자 피코 델라미란돌라와 에라스뮈스와 같은 위대한 인문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16세기 이후에도 오리게네스는 한결같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오리게네스의 신학적 성과는 그의 활동 시기를 함께 고려해야 비로소 정당한 평가가 가능하다. 그는 325년부터 개최된 4차 공의회에 의하여 그리스도교 교의가 확정되기 이전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신학자였으며 지성적으로 매우 비범한 인물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오리게네스가 정통 신앙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저서가 학문 연구에 매우 유익하고 그의 천성과 인품이 어떤 교부보다 뛰어나다는 점은 분명 본받을 만하다.



    인간의 이성으로 꽃피운 사랑의 신학

    신국론, 사랑으로 선포한 신의 나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사랑의 윤리’에 따라 인간을 두 가지 유형, 육체에 얽매여 살면서 변할 줄 모르는 낡은 사람과 신의 성령으로 재생하여 거듭난 새 사람으로 구분한다. 낡은 사람이란 외적인 사람, 땅의 사람이며, 새 사람은 내적인 사람, 하늘의 사람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구분을 토대로, 대상에 대한 사랑의 일치, 즉 공통된 대상으로 향하는 각 사람의 사랑은 자연스럽게 거기에 하나의 집단을 이룩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시편 상해’LXIV,2). 신을 무시하고 자기만을 추구하는 사람을 하는 인간들은 바빌론, 즉 ‘땅의 나라(civitas terrena)’에 속하게 된다. 이들은 낡은 사람의 생홀, 시간적인 것을 사랑의 공통 목적으로 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언제나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희망에 사는 내적인 사람은 신을 따르는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예루살렘, 즉 ‘신의 나라(civitas Dei)’의 백성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구분은 그의 대작인 ‘신국론’을 통해서 유명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동체의 차원에서도 자신의 윤리를 이루는 핵심 개념인 ‘사랑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땅의 나라와 신의 나라는 각각 ’사사로운 사랑‘과 ’사회적 사랑‘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사로운 사랑’이란 그 나라 국민의 일부만을 사랑하는 사랑,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신과 자신 사이의 일대일 관계에만 집착하는 사랑이다. 이는 사회의 분열, 온갖 차별과 편중, 오만과 탐욕과 인색만을 키울 뿐이다. 반면 ‘사회적 사랑’은 공동선의 사랑, 화해와 통일과 공평을 도모하는 사랑이다(‘신국론’XII,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신의 나라는 교회 안에 있고 땅의 나라는 바빌론과 로마의 이교도적인 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국가가 곧 땅의 나라 또는 악마의 나라인 것은 아니다.


    국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사회성의 발로이며 가족 사회의 자연스러운 발전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정치와 그 평화를 멸시하지 말고, 본인은 비록 신의 나라를 지향하며 이 세상에 순례자로서 길을 가더라도 지상의 평화를 향유해야 마땅하다(‘신국론’XIX, 13-17). 더욱이 신의 나라와 땅의 나라라는 관념은 도덕적이며 영성적인 것이고, 그 둘은 어떤 현실적인 체제, 즉 교회와 국가 등과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교도이면서 교회에 속하여 있을지라도, 만일 그의 행위의 원리가 자기에 대한 이기적 사랑일 뿐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그는 영성적으로는 땅의 날에 속하여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한 국가 관리의 행위를 신의 사랑에 의해서 주도하고 정의와 사랑을 추구한다면, 그는 영성적으로 신의 나라에 속하여 있다고 할 수 있다(‘시편 상해’LI,6).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구별을 토대로 로마제국 전체의 역사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른 구원의 역사 안에서 영성적이고 도덕적인 의미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모색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보는 역사는 우주에 미학적 조화를 갖추면서도 궁극을 예시하는 도덕적 추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상적 목표는 바로 ‘신의 나라’이다(‘신국론’XI,17). 역사는 신과 인간의 두 의지가 만들어내는 합작품이기 때문에, 비록 두 나라가 공존하면서 갈등하는 파행을 겪을지라도 결국에는 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또 다른 면에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바로 이 역사가 신의 섭리와 은총을 통하여 인간의 개선과 구원을 이끌어내는 인류의 교육과정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도는 향후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에 의하여 발전될 역사철학‘의 시발점이 되었다.



    최후의 로마인, 죽음 앞에서 철학의 신에게 묻다

    고독 속에서 탄생한 최초의 스콜라철학자

    선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철학의 위안’의 해결책이 현대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무신론적 실존 철학자들은 무죄한 이들의 학살을 허용하는 신을 철저히 거부했고, 이것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에티우스는 ‘역겨운 종교인들’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훈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 눈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 철저한 고독을 느끼며, 자신이 겪는 불행에 대하여 ‘적어도 이해 가능한 설명’을 찾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보에티우스는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서 철학의 여신이라는 또 다른 자신과 대화했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던 소크라테스는 보에티우스에 비하면 ‘행복한’ 죽음을 맞은 셈이었다.


    보에티우스는 본래 세 단계로 이루어진 원대하고 야심찬 기획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인문정신의 총체인 ‘자유학예’에 대한 철저한 탐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서의 라틴어 번역, 마지막으로 이 두 철학자의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조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거대한 계획은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보에티우스는 마지막 작품 ‘철학의 위안’을 통하여 자신의 전문 분야였던 철학의 입장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자는 자기 스스로 존재를 지닌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인 신의 섭리에 따라 존재를 지닐 뿐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원리를 이해할 때, 인간의 고통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이 제시될 수 있다.


    보에티우스의 신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신관과 매우 잘 부합한다. 그의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등과 관련된 많은 사상은 전적으로 철학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에서 영감을 받았더라도, 답변만은 온전히 철학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악인들의 성공 앞에서 좌절하기 쉬운 선한 사람들에게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보에티우스를 처형함으로써 그에게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동고트족의 귀족들은 오늘날 어느 누구에게도 영광스럽게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악행이라는 어둠을 배경을 쓰인 ‘철학의 위안’이 인류의 빛나는 고전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더 나아가 보에티우스는 비록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철학자로서 두드러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과 수학, 음악 등을 전해준 전달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보에티우스는 라틴 세계에서 전개되어 오늘의 서구 철학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라틴어로 된 많은 학술 용어들도 마련해 놓았다.


    더욱이 보에티우스는 위대한 철인들의 저작들을 번역함으로써 정확한 논증을 추구하는 학문적 방법을 시작했고, 여러 주해서들을 통하여 중세에 성행한 주해들의 모범을 제공했다. 또한 철학 용어의 범주를 신학에 사용함으로써 신학과 철학 양자의 발전에 모두 기여했다.


    보에티우스의 사상에 나타나는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 인격에 대한 정의 등의 문제는 철학을 매우 풍부하게 해주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설명하기 위하여 철학의 전문용어와 방법론을 이용하려던 그의 기획은 약 400년 후 스콜라철학이 태동될 때 중요한 모범이 되었다. 앞서 살펴본 인격 개념뿐만 아니라 신과 ‘존재 자체’를 연결하는 시도와 같은 것은 중세 전성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여 ‘존재의 형이상학’으로까지 발전했다.


    보에티우스 이후 스콜라철학이 시작도기까지 문화적 침체기에 대부분의 학자는 주로 이전의 학문적 발전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가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면서 최초의 스콜라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를 비롯하여 사도 바울로, 플로티노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들은 찬반을 떠나, 인간의 본성이나 ‘신’, 심지어 역사와 철학에 대하여 서구 사람들이 생각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대표적인 중세 사상가들이 현대사회에서도 적용할 만한 값진 원리들과 원칙들을 대단히 풍성하게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로의 보편적 구원관, 플로티노스의 존재의 질서체계, 오리게네스의 비판적 성경 연구,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윤리’, 보에티우스의 인격관 등은 현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지침 역할을 한다.


    더욱이 이들은 단순히 이론적 탐구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라, 혼란했던 시대에 자신의 소명을 다하려는 정직한 지성인이었다. 한 시대가 가고 또 하나의 다른 시대가 오는 전환기에 큰 혼돈을 겪으면서도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았다. 한 시대의 재난이나 변화의 변화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응시하고 파악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개인적으로는 진솔한 삶을 살았고, 시대의 지성인으로서는 끊임없이 지혜를 추구했던 이 사상가들이야말로 ‘역사의 시그니처’가 될 수 있는 훌륭한 멘토가 아닐까?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