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
 
지은이 : 니콜라스 필립슨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23년 05월




  •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경기 침체, 노동 불안정성 등 여전히 위태로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인간의 도덕심’을 강조했던 애덤 스미스를 제대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애덤 스미스


    옥스퍼드대학교와 흄

    스미스는 옥스퍼드 시절에 대해 매우 말을 아꼈다. 이 시기에 주고받은 편지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간결한 편지 세 통뿐이다.


    그중 하나가 어머니에게 쓴 것인데 편지를 자주 쓰지 않아 죄송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744년 7월의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더 자주 편지를 쓰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매일 어머니를 생각하지만 항상 우편물 수거 시간이 지날 때까지 편지 쓰는 것을 미루게 됩니다. 일이 있거나 친구와 함께 있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제 게으름 때문입니다.”


    베일리얼칼리지의 기숙사 비용 장부를 참고하면 스미스는 거의 계속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스넬 장학금과 1742년부터 워너 장학금을 통해 매년 추가 지급된 8파운드 5실링, 그리고 가족이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돈으로 소박하지만 꽤 편안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미스가 어떤 강의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지도교수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도서관에 출입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평생 책을 사랑했던 그는 아마도 형편이 될 때마다 책을 샀을 것이다.


    어쩌면 옥스퍼드만이 아니라 에든버러의 서점에서 우편 주문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서관을 이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베일리얼칼리지의 학부 도서관은 스미스가 찾는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고, 대도서관과 보들리안 도서관은 문학 석사 이상에게만 공개되어 있었다.


    다만 친절한 교수들이 그를 대신해 책을 빌려줬을 가능성은 있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윌리엄 스미스가 옥스퍼드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애더버리에 있는 훌륭한 도서관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는 배우기 위해 옥스퍼드에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글래스고대학교의 교육과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두면서 자기만의 관심사를 발전시키고자 했고, 이를 실현했다.


    스튜어트에 따르면 스미스는 이 시기에 정치, 순문학, 이념사, ‘사회의 발전’에 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모든 분야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인류의 정치사에 관한 연구는 애덤 스미스의 호기심과 야망의 지평을 무한대로 넓혀줬다."


    "... 이 분야는 그의 다재다능함과 종합적인 천재성을 모두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사회의 행복과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도 만족시켰다."


    "... 한가할 때면 덜 복잡한 순문학을 연구한 덕분에 이 연구는 더욱 다각화됐는데, 애덤 스미스는 옥스퍼드로 떠난 이후부터 이 연구에 줄곧 열정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 그 후에도 연구에 대한 애정은 계속됐고, 나이를 먹은 후에도 젊은 시절 얻은 지식을 간직하고 있었다."


    "... 그의 기억은 대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발견의 연결성과 순서를 가장 잘 추적할 수 있는 과학의 역사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의 자연적 진보에 관한, 그가 가장 좋아하던 이론에 예시를 제공해줬다.”


    그가 고대와 근대 세계의 정치 구성을 다룬 동시대 문학에 대해 거의 백과사전과 같은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한 것도, 다른 시대의 다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예절과 관습에 주목하는 연구에 대한 평생의 관심을 발전시킨 것도 옥스퍼드 시절일 것이다.


    특히 지난 세기에 프랑스에서 발전한 인간 본성의 원칙에 관한 방대하고 복잡한 자료를 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훗날 애덤 스미스는 혼자 프랑스어를 공부한 일을 회상하기도 했는데, 아마도 커콜디에서 데이비드 밀러에게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울 때처럼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하고 다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 같다.


    스미스는 선한 행동이 가장 악한 욕망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욕구에 더 관심이 있었다.


    발달의 여러 단계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요구하는 물질적, 도덕적, 지적 욕구와 자긍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에 관심을 가졌고, 이런 주제들은 그의 도덕철학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당대 프랑스 문학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스미스는 러신을 매우 존경했고, 그의 작품 ‘페드르(Phaedre)’가 “어쩌면 모든 언어를 통틀어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스미스가 생각한 것처럼 러신은 “각 장면의 감정과 행동에 자유롭게 이입할 수 있도록”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프롤로그를 사용하여 줄거리를 설명하는 훌륭한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극을 보는 관중에게 삶과 명예를 해치려는 위협적인 욕망을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등장인물을 보여줄 수 있도록 극의 중심 목적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여주인공 페드르는 에우리피데스의 여주인공과는 달랐다. 그녀는 필멸의 존재인 평범한 인간의 예법을 초월하는 요구에 응답했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다루기도 한 페드르라는 인물은 평범한 청중들이 “방종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녀와 아들의 근친상간에 공감하며 심지어 페드르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여성이었다. 바로 그 방종과 죄책감은 어떤 면에서는 청중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도록 설득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두려움, 수치심, 후회, 공포, 절망은 이로써 더 자연스럽고 흥미로워진다. 애정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차적 열정은 필연적으로 더 격정적이고 맹렬해진다. 우리가 동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이런 부차적 열정들일 것이다.”


    스미스는 프랑스 도덕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아주 생생하고 복잡한 심리적 딜레마를 상당히 다른 심리학적 관점에서 관찰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마리보의 발자취를 따랐다.


    스미스는 옥스퍼드 시절 마리보의 작품을 탐독하며 매우 존경했다. 


    마리보는 니콜이 쓴 일반 시민들의 도덕적 딜레마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런 딜레마가 파스칼과 그 추종자들의 딜레마만큼 시급하고 복잡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마리보는 애디슨의 ‘스펙테이터’를 존중하며 1721년부터 1724년까지 자기 나름대로 ‘스펙테이터 프랑세즈(Spectateur Francais)’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가 관습 연구에 관심을 둔 이유는 “인간사를 성찰하는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마음의 과학(La science du coeur)”의 기반을 다지는 데 도덕주의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허치슨과 마찬가지로 그는 “알고 느끼는 것의 분별없는 측면”에 관심이 있었고, 어떤 면에서 스미스는 그런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얻는 데 소설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스미스의 에든버러 강의

    스미스는 1748년과 1751년 사이 에든버러에서 강의한 수사학과 법학 강의, 그리고 사후 출판된 철학 및 과학의 역사에 관한 소논문을 통해 인간 중심 과학의 기초를 제시했다.


    수사학 강의에서는 우리의 사회적 담론을 규정하는 적정성 감각에 대해 논의했고, 법학 강의에서는 정치사회 안에서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의 기반인 정의감에 대해 논의했다.


    두 강의 모두 흄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스승의 철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 이를 통해 당대의 철학 연구에 대한 매우 독특하고 시사적인 비판을 제공한 제자의 결실이었다.


    스미스의 강의는 철학 자체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스미스는 직업적, 사회적 활동이 시작되는 10월 또는 11월에 첫 수사학 강의를 열었다.


    최고민사법원이 개회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며, 영지에서 시간을 보내던 교외의 대지주들과 그 가족이 도시로 돌아오는 시기였다.


    1748년 가을에 열린 강의는 더 있었다. 명예혁명 이후 법, 의학, 자연과학, 고전 언어에 관한 공개 강의가 활발히 열렸고, ‘칼레도니안 머큐리(Caledonian Mercury)’에는 수학, 실증철학, 의학, 화학, 지리학 강의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스미스처럼 인기를 누리는 강사는 많지 않았다. 헨리 홈의 제자들과 전기 작가인 우드하 우즐리(Woodhouselee) 경에 따르면, 스미스는 “주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로 구성된 점잖은 청중”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가 어디서 강의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스미스가 논리 및 형이상학 교수인 존 스티븐슨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강의가 대학 교정에서 열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니드리 골목에 있는 철학학회실이나 음악학회실에서 열렸을 수도 있고, 그곳이 아니더라도 대학과 의사당 주변 도심에는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많았다.


    1749년에 이어 1750년에도 강의가 열린 것으로 보아 꽤 성공적인 강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스미스는 자신감 넘치고 매력적인 수정주의자로서 강의하며 탁상공론 속에서 중요한 주제를 가려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런 주제를 다룬 고전 작품 대부분이 “아주 어리석은 데다 전혀 교훈적이지 않고”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좋은 문체에 대한 언급이 “보통의 방식에서 멀어질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함과 완벽함에 훨씬 더 가까워진다”라는 터무니없지만 대중적인 믿음으로 왜곡되어 해석되고 있으며, 수사학을 취미 이론의 한 측면으로 여기는 현대적 시도가 이론적으로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는 주장에 수강생들이 동의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수강생 대부분에게 익숙했던 감정의 작용을 고려하면서 언어의 사용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특성을 어떻게 하나의 포괄적인 원리로 묶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방식으로 수사학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그가 글래스고에서 배운 유클리드 기하학이 바탕이 된 ‘수학적’ 방식이었다.


    이 방식에서는 공리로서의 포괄적 원칙이 제시되며, 분석은 여기에 의존한다.


    수강생들에게 이런 공리의 진정한 가치는 그의 분석의 기반이 되는 추론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와 그런 정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예시의 양과 질에 달린 것으로 보았다.


    그의 수사학에서 기반이 된 공리는 언어가 적정성을 바탕으로 사용될 때, 즉 타인과 자신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사용될 때 가장 매력적이며 설득력을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제안은 스미스의 수강생 중에서 젊은 성직자와 법률가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안됐다.


    이들은 학교에서 키케로와 애디슨을 읽고 효과적으로 사회적, 언어적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적정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약 그들이 수사학에 관한 존 스티븐슨의 대학 강의를 들었다면, 스미스가 유창한 문체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원리를 돌아봐야 한다고 제안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스미스는 이 원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것보다 인간 본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더 넓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정성을 갖춰 언어를 사용하는 기술은 관습과 도덕, 소통의 영향력을 갈고닦는 기술이며 타인이 우리의 감정에 대응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성격’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수사학은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고 완성되는 방식에 관한 연구뿐만 아니라 사회성 및 인간 중심 과학에 관한 연구와 연관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주제임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의 야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지만, 추측을 기반으로 이뤄진 언어학 소고의 서론 부분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이 추론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전제가 필요하다”라고 솔직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수사학자가 생각해온 것처럼 언어를 신이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인간이라는 종만큼 역사가 긴, 인류의 생존과 행복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발명품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다고 봤다.


    자기 주장의 추측적인 특성을 강조라도 하듯, 그는 원주민 남성과 여성이 ‘공통의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기호와 소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우화의 형태로 제시했다.


    “함께 같은 장소에 정착하게 된 두 명의 원시인은 자주 마주치며 관심을 가지게 된 대상을 나타내는 신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그들이 머물렀던 동굴, 식량을 얻은 지역에 있는 나무, 그들이 마신 샘물은 모두 특정한 이름으로 구분될 것이다."


    "... 이런 대상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알려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특정한 신호를 사용하는데 서로 합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 나중에 그들이 다른 나무, 동굴, 분수를 만나 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이전에 비슷한 종류의 대상에 붙였던 것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 동물들 사이의 연관성, 나무들 사이의 연관성, 그리고 그들이 그런 대상을 표시하는 단어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종류의 대상이 같은 단어로 표시될 수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 따라서 원래는 하나의 대상을 의미했던 단어는 특정 부류의 사물을 가리키는 고유의 이름이 될 수 있다.”


    스미스가 에든버러에서 했던 강의에 대한 문서나 보고서, 메모는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사상에 대해 우리가 아는 모든 정보는 1762~1763년 글래스고대학교의 학생들이 작성한 강의 노트와 다소 어리둥절하게도 1766년 다른 과목의 강의에서 남겨진 것으로 보이는 강의 노트에서 추측한 것이다.


    이 기록들로 그가 1750~1751년경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어떤 이들은 스미스의 분석에서 기반이 된 재산에 관한 추측적 역사 연구가 그의 경력 후반에 이뤄졌거나, 적어도 1750년 까지는 발전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755년에 작성됐으나 발표되지 않은 논문에서 그가 직접 언급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사상은 정부에 관한 이론과 실제에 대한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충분히 발달해 있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 논문을 직접 읽은 적이 있는 스튜어트는 “스미스가 자신의 입지를 공고하게 확립하고 싶어 했던 정치적, 문학적 주요 원칙들에 대해 꽤 긴 의견을 남긴 논문이었다”라고 언급했으며, “‘국부론’에 등장하는 주요 의견 중 여러 개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스미스는 이번에도 수정주의자로서 수강생들에게 중요한 학과목을 새로운 기반 위에 재정립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푸펜도르프의 관점에서 법학의 목적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법학은 시민 정부가 따라야 하는 규칙에 대한 이론이다. 여러 국가의 다양한 정부 제도 기반과 그 기반이 얼마나 이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정부의 목적을 나열하면서 정의의 규칙과 국가 안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와 ‘정부의 운영이라고 부르는 행정규제라는 것’이 특히 부를 증진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논의하겠다고 공지했다. 


    푸펜도르프나 허치슨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의와 사회성을 증진하는 데 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리라고 분명히 예상했을 것이다.


    스미스는 모든 정의 체계의 타당성이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어떤 원칙보다 ‘정의감’과 더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이런 의식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여겼다.


    여기에서도 스미스의 답은 일반적인 삶과 역사에서 찾은 예시를 통해 설명된 공리로 요약됐다.


    그의 수사학 체계에서 기반이 된 이 원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그의 법학은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됐을 때 우리가 느끼는 정당한 분노가 정의감을 낳는다는, 절대 평범하거나 자명하지 않은 설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의는 가질 권리가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박탈당했을 때 또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다치게 할 때 침해된다.” 


    그러나 그런 분노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자신이 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편에 서서 함께 걱정하고, 폭력적인 공격으로부터 그가 소유한 물건을 지키거나 부당하게 빼앗긴 것을 무력을 사용해 되찾는” 경우 분노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답했다.



    ‘국부론’과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

    그는 문명의 진보에 대한 자신의 논의와 관련이 있는 재산과 정부의 역사 원리를 정식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글래스고 강연의 서문이었던 ‘인류의 자연적 필요 및 욕구’와 그런 요소들이 문명의 진보 및 인간 정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길고 섬세한 논의는 전략적으로 노동력을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이기심이 미치는 힘과 개선을 향한 욕구에 대한 통찰, 재치 있는 일화를 배치하여 전략적으로 축소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다.


    “우리가 저녁 식사에 오를 음식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제빵사의 자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모든 사람이 노동을 통해 소유하게 된 재산은 다른 모든 재산의 기본 토대이므로 가장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시민 정부는 재산의 안전을 위해 구성됐으므로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부자를 보호하기 위한 또는 재산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재산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 될 수사학을 발전시키고 있었고, 이런 새로운 학문을 추종하는 사람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스미스는 자신의 체계를 도덕철학자로서가 아니라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케네와 같은 경제학자로서 소개했는데, 그가 자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인 유일한 경제학자였기 때문이다.


    서론과 계획에서 그는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를 국가에 공급하는 노동력에 대한 자금 또는 재고, 다양한 사회에서 사용되는 기술, 재주, 판단력, 다양한 형태의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용한 노동력과 비생산적인 노동력이 책의 주제라고 밝혔다.


    이런 주제들을 통해 그는 노동 생산력이 개선되는 원인과 근대 정부의 상업 정책을 논의할 수 있었으며, 자유시장에서 부는 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정부의 수익이 순환하며 나타나는 결과로써 연구되어야 한다는 케네의 견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부는 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분업이 이뤄질 수 있느냐 아니냐에 달렸다는 스미스의 유명한 논증은 농업이 ‘모든 상품의 어머니’이며, 군주국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경제활동 형태이고, 농업에 사용되지 않는 모든 노동은 비생산적이라는 케네의 주장과 어긋났다. 


    게다가 케네의 모델은 프랑스와 유럽 대부분의 특징인 자급 농업 체계가 아니라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바람직한 경작’ 체계를 전제로 했다. 이에 더해 ‘법적 독재’ 행위를 통해 개량된 농업 체계를 도입될 수 있다고 가정했는데, 이런 유토피아적 제안에 대해 흄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남겼다.


    “그들은 소르본대학교가 망한 이후 현존하는 가장 기괴하고 오만한 사람들이다.”


    ‘국부론’의 첫 번째 편에는 스미스의 이전 글래스고 학생들이 친숙하게 여겼을 주제들이 등장한다.


    부의 진보가 노동의 분업에 달렸다는 그의 위대한 공리를 다시 소개하는 부분을 비롯해 노동의 가격을 결정하는 물물교환과 거래, 교환의 진보에 관한 설명, 시장에 의한 노동 분업 과정에서 발생한 제한에 관한 논의가 여기에 해당한다. 


    화폐의 기원에 관한 설명과 가격 및 가치의 진정한 결정 요인은 화폐가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주장, 노동력과 상품의 자연 가격과 시장 가격의 비교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연 가격과 시장 가격이 다르다는 주장은 유럽에서 부의 진보가 더디게 진행된 원인에 대한 그의 분석과 자유시장의 작용을 방해하는 법 및 관습에 대한 비판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국부론’에서 이런 비판은 더 넓고 깊이 확대됐고, 스미스가 느낀 역설과 분노는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드러났다. 


    이런 비판의 뿌리가 그가 ‘국부론’을 작성하던 마지막 해에 프랑스와 글래스고에서 케네를 비롯한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들과 함께 개발하고 다듬은 일반 경제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인간 본성의 원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부의 창출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를 표현하는 언어는 교환, 유통, 시장의 작동 원리와 관련되어 있었다.


    우선 그의 이론에서 중요했던 부분이 확장됐다.


    그때까지 노동력의 가격에 집중했던 가격과 가치에 관한 논의는 이제 상품의 가격과 가치가 “정확한 척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일상생활을 지속하기에 충분한 대략적인 평등에 따른 시장의 흥정”에 의해 어떻게 “조정되는가”에 관한 논의로 확장됐다. 


    특이하게도,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이 성향이 "“설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그가 수사학 강의에서 다뤘던 명료한 제안은 생략됐다. 


    아마도 이런 제안이 실질적 가격과 명목 가격에 대한 훨씬 더 중요한 논의와 이런 논의가 시장의 작용을 이해하는 데 미치는 중요성으로부터 독자의 주의를 분산시킬까 봐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미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암묵적이지만 분명했다.


    정치와 통치 권한이 지주와 상업 계층의 손에 달린 나라에서 지배층을 교육해 공익을 지키는 것은 정치경제의 원리를 이해하는 철학자의 몫이며, ‘철학가이면서 정치인’인 이들의 키케로식 이상이 이토록 흥미를 끌거나 시급해 보인 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국부론’의 길고 긴 첫 번째 편에서 스미스는 개인이 원하는 대로 자기 노동력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는 사회에서 국가의 생존과 번영의 기반인 노동력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야만적 사회의 경험을 사유재산 및 정부 체계를 소유하고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안전”을 누리는 사회와 대조하기 위해 추측적 역사의 방법을 사용했으며, 같은 조건하에서 전체 사회의 노동량은 개인의 노동량과 똑같은 방식으로 배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비유는 의도치 않은 개인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고, 즉시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신조가 됐다. 


    그는 상대적으로 짧은 두 번째 편에서 재고나 자본의 축적과 순환에 대해 논의하며 이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그 자신과 스코틀랜드 문인들이 인간 중심 과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으로 생각했던 개선 원리를 이론으로 확립했다.


    프랑스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의 진보가 분업, 개선에 대한 욕구, 상대적인 안정뿐만 아니라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이 적절하게 축적되어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글래스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재고가 어느 정도 생기기 전에는 분업이 일어날 수 없으며, 분업이 발생하기 전에는 재고가 거의 축적되지 않을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노동 빈곤층의 재고는 너무 적어서 필수적인 소비에 대부분 사용되기 때문에 부의 진보는 무역, 제조업,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잉여 재고에 달려 있었다.


    스미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장에서 이런 자원이 어떻게 사회의 다양한 부분을 통해 순환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소비와 보급의 순환적 과정이라는 관점을 통해 이 과정을 묘사했고, 정치가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직접적인 소비를 위해 비축할 수 있는 재고를 유지하고 늘리는 것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모두의 유일한 목적이며, 국민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이 바로 이 축적된 재고다. 국민의 부와 빈곤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을 통해 직접적 소비를 위해 비축된 재고를 풍부하고 충분하게 공급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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