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지은이 : 이충녕
출판사 : 도마뱀출판사
출판일 : 2023년 06월




  • 철학은 정말 어려운 것일까요? 우리는 왜 철학을 알아야 할까요? 철학은 내 삶을 어떻게 바꿀까요? 10만 구독자가 주목한 유튜브 채널 〈충코의 철학〉을 운영하는 20대 철학자가 알기 쉽게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철학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물처럼 산다는 것 - 노자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시작될 때, 양쪽에서 모두 물을 주목했다는 것은 완전한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서양에서는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전까지는 신화적인 믿음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일차적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탈레스는 세상의 근본 원리를 물이라는 하나의 물질에서 찾았다. 이런 원리적 사고가 미세입자의 운동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적 사고의 발판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철학이 태동하던 시기에 동아시아에서도 똑같이 물이라는 대상에 주목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노자이다. 탈레스가 세상 만물이 생성되고 운동하는 과학적인 원리를 물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면, 노자는 물의 움직임 안에서 천하를 얻는 정치적인 원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노자는 그 생애가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주나라의 도서관장을 지내다가 나라의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소 한 마리에 올라타 유유히 관문 밖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관문을 나서기 전, 그는 관문을 지키는 관리가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자 5천 자의 글을 써주었는데, 그것이 『도덕경』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신비로운 이미지 때문에 노자의 철학은 속세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자연 친화적인 말, 또는 치열하고 답답한 경쟁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 정도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노자의 철학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서 최선의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치학적 이론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은 현대의 게임이론과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노자가 물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물처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물에 관한 노자의 말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구절이다. 여기서 선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남을 위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은 사회 안에서 탁월함을 발휘하며 최고에 오르고, 그것을 필요한 만큼 오래 유지하며 사람들과 화합을 이루어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노자는 이러한 어려운 일을 이루기 위한 전략으로서 물처럼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그렇다면 물은 어떤 특성을 가졌길래 물을 본받아 행동하면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일까?


    먼저, 물은 다른 것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흘러간다. 보통 다른 사물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위로 뻗어나가려 한다. 나무는 햇볕이 있는 위로 자라나야 좋은 나무이며, 건물은 안전한 높이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 좋은 건물이다. 사람 역시 양지바르고 공기가 맑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반면, 물은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밑을 향해서 흐른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어두운 곳으로 흘러간다. 그곳은 어두침침하고 냄새가 나는 하수구일 수도 있으며, 깊숙한 진흙탕일 수도 있다. 물은 그런 곳을 피하지 않는다. 그저 길을 따라서, 깊이, 더 깊이 흘러간다.


    이런 물의 특성을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곳에 가는 것을 서슴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일을 도맡아 할 것이다. 처음에 보기에 이런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하찮게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밑으로 어두운 곳으로 흘러 들어가 남들이 쳐다보지 않은 분야에서 자신의 입지를 가져온 사람이 나중에 가서는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가기를 스스로 자처함으로써 전체 시스템의 가장 밑을 떠받치는 곳에 숨어 들어가 그곳에 대한 장악력을 키운다. 그럼으로써 나중에는 시스템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양지바른 곳에서 잘 닦여진 길만을 걸어간 사람들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이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그들이 이 시스템 속에서 많은 도움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에 큰 혼란이 생기고 시스템이 붕괴하여 지금 운 좋게 누리고 있던 안정적인 체계가 무너진다면, 물처럼 밑으로 흐르지 않고 나무처럼 햇빛을 쫓아 위쪽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 가장 낮은 곳에 가기를 스스로 자처할 수 있어야 위기와 혼란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도 가장 위대해질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노자는 물에 관해 이야기하며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라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익숙하게 듣는 그 말을 남겼다. 물은 가장 약하고 가장 부드럽지만, 가장 강하고 굳센 것들을 압도하는 힘을 품고 있다. 이는 진부한 말이지만, 실생활에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잘하려다 보면 자꾸 힘이 들어가고 뻣뻣해진다. 그럴 때면 항상 물의 부드러운 움직임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철학의 원리 1 : 절대주의를 의심하기 - 소크라테스

    나훈아의 <테스형!>이 큰 인기를 끌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생의 의미를 질문하는 노래이다. 왜 나훈아는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대개 안다. 그렇다면 왜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은 그토록 독점적인 유명세를 차지할 만한 정당성을 갖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에서 철학을 시작한 사람이며, 그 뒤로 펼쳐진 모든 철학, 모든 학문, 나아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전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사고방식의 시초가 된 사람이다. 나는 그 사고방식을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중도라고 표현하고 싶다. 시각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상대주의자일 수도 있고 절대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는 기존에 확고한 지식이라고 받아들여지던 앎의 체계를 깨부수려고 했던 사람이며, 특정 지식의 절대화에 격렬히 저항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지식이 단지 사람에 따라,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반대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된 자세를 동시에 취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 자기모순인 듯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조상으로 대우받는 것은 바로 이 상반된 견해를 매우 획기적으로 통합했으며, 그럼으로써 앎이라는 것 전반에 걸쳐 우리가 취해야 할 모범적인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안다. 내 생일이 언제인지, 친구 이름이 무엇인지, 미국 대통령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앎은 굉장히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많은 경우 앎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걸까? ‘붉은 노을’이라는 제목? 노래의 멜로디? 가사? 어렴풋한 느낌? 여기서 <붉은 노을>에 관한 앎이 과연 무엇인지 엄밀하게 설명하라고 해본다면,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사례로, 우리는 인천을 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인천은 무엇일까? 인천의 부지? 인천 시민들의 집합? 인천의 행정체제? 아마 우리가 인천을 안다고 말할 때는 보통 이 여러 가지 요소가 아주 불분명하게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인천을 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말하는 데 별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인천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인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면 과연 인천을 안다고 말하는 게 적절한 것일까? ‘앎’은 이토록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지만, 그 정체는 신비에 싸여 있다.


    소크라테스는 앎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질문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 이전까지는 앎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인천을 안다고 말할 때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비로소 처음으로 “앎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아는가?” 하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전환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소크라테스는 말꼬리를 잡음으로써 많은 사람의 미움을 받았다. 그런데 그 말꼬리 잡기가 서구의 지식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진보의 시작이었다. 말꼬리를 잡지 않는다는 것은 주어진 지식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럴 때 그 지식은 고정된 지식, 절대화된 지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지식은 더 이상의 발전을 멈추고 정체된다.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고 늘어져야만, 끊임없이 비판하고 문제점을 개선하려 노력해야만 지식은 더욱더 좋은 모습을 갖춰나간다.



    칸트의 윤리학: 나비효과로 살인을 저질렀다면 - 칸트

    선과 악은 자주 말해지는 주제이다. 영화에는 선한 주인공 무리가 있고, 악한 반동인물 무리가 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선하고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악에 가득 차 나쁜 짓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한 선과 악이라는 현상과 관련해 우리가 가끔 묻곤 하지만, 결코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지나치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무엇이 선한 걸까?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해 완벽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쯤 세상이 조금은 덜 복잡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엇이 선한지에 대해 철학자들은 나름의 좋은 설명을 내놓으려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조금 독특한 생각을 했던 철학자가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칸트이다. 선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정말 독특하지만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지지와 사랑을 받는다.


    칸트의 생각이 독특한 점은 우연히 선한 것과 우연하지 않게 선한 것을 강하게 구별했다는 것이다. 자, 지금도 이 세상에서는 당연히 수많은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의 의지로 선한 일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저 우연히 선한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한 사업가가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풍력발전소 건설에 투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투자하여 건설한 풍력발전소 덕분에 우리나라의 미세먼지가 크게 줄었다고 해보자. 이때 그 사업가는 분명히 선한 일을 한 것이지만, 그 선한 일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것이다. 그저 돈 때문에 투자했을 뿐인데 선한 결과가 뒤에 따라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 청년이 강가를 지나가다가 강에 빠진 어린아이를 보고 마음속에 선한 의지가 끌어올라 얼른 물에 뛰어들어 아이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 보자. 이때 이 청년은 전혀 우연에 의존하지 않고 선한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관점에 따라서 선한 행동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선한 행동을 한 것이 중요하지, 그 과정은 어떠해도 상관없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실 행동의 결과만 놓고 보면 사업가의 선한 파급력이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그가 풍력발전소에 투자한 덕분에 공기의 질이 개선되면 미세먼지 관련 질환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수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청년은 그저 한 아이의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결과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청년보다 사업가가 더욱 선한 일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어쩐지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든다. 아무리 결과적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그 선한 결과가 그저 우연에 의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선한 의지로 한 행동에 비해 더 선하다고 볼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칸트는 바로 이 부분에 집중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언제나 우연적 요소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내가 의도한 대로 모든 게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에서의 행동은 많은 경우 의도한 그대로의 결과로 이어지 않으며, 때로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저 주차하려던 것뿐인데 옆 차를 긁기도 하고, 흔들리는 버스에서 내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꽉 줬을 뿐인데 넘어지려는 옆 사람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행동의 결과를 바탕으로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정당할까? 누구나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완전히 알 수 없다. 완전히 선한 의지로 행동했는데 세상에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고, 완전히 악한 의지로 행동했는데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수도 있다.   


    내가 오늘 버스터미널에서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를 부축해드려 고속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드렸는데 그 할머니가 고속버스 운행 중에 버스 기사와 말다툼하는 바람에 고속도로에 10중 추돌사고가 발생해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할머니를 도왔던 나의 선행은 순식간에 수십 명을 죽음으로 이끈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내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결코 완벽히 예측할 수 없다. 과장을 보태자면 결과는 무작위다. 그렇다면 결과가 아닌 다른 데서 선와 악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칸트는 오직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말한다. 칸트의 주장은 어떤 결과가 발생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선한 의지만큼은 그 자체로 선하다는 것이다. 만약 결과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따진다면, 선이 되는지 악이 되는지는 일종의 도박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내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기상천외한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결과보다는 오히려 의지에서 선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로 이어지건, 애초에 선하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누구도 나무랄 수 없는 순수한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고 태도를 바꾸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 - 후설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크 후설은 지식과 태도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한 바 있다. 후설은 특정한 종류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태도를 바꾸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평소 우리는 별 의식 없이 특정한 태도를 취한다. 수학을 공부할 때 ‘나 이제부터 수학을 공부하기 위한 태도를 취해야지!’라고 수학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은 수학을 공부하는 상황이 되면 자동으로 수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동으로 태도가 바뀌지 않는 경우이다. 어떤 학생들은 수학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수학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런 학생들은 아무리 훌륭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간단한 함수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후설은 이런 일이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도 자주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속한 지식의 전통에 익숙한 사람은 이미 특정한 태도를 오랫동안 무의식적으로 취해 온 상태이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태도를 바꿔서 다른 분야의 지식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설은 직접적이고 투박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판단중지’이다. 판단중지란 평소에 세사을 바라보던 판단의 방식을 잠시 멈추고 순수하게 그 순간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에 집중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평소에 자신이 회사원의 시각에서만 회사를 바라봤다면, 학생의 시각에서만 학교를 바라봤다면, 국민의 관점에서만 국가를 바라봤다면, 한번 지금까지 당연하게 내렸던 판단을 중지하고 순전히 그때 떠오르는 느낌대로 그 대상을 고찰해보자. 그러면 그간 자신의 유연하지 않은 태도 때문에 막혀 있었던 이해의 통로가 뚫릴 수도 있다. 이런 판단중지는 철학자나 여타 학자에게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지식을 얻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다. 



    존재는 시간이다 - 하이데거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체험하는 시간보다는 추상적인 시간을 곧장 떠올린다는 것이다.


    “시간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듣고 ‘퇴근하고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지금까지 지나왔고, 앞으로 취직의 문이 기다리고 있는 길’처럼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시간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그보다는 대개 ‘1초, 2초 흘러가는 것’이라는 양적이고 추상적인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이해 방식이 진정한 시간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고 생가했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가장 근원적인 시간은 우리가 미래를 예감하고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그런 시간이다.


    여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 여름까지의 시간이 앞에 펼쳐진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했던 여행을 추억하면 과거로 시간이 쭉 뻗어나간다. 만약 이렇게 우리가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과 사건이 없다면, 즉 우리가 기대하고, 두려워하고, 바라고, 후회하고, 추억하는 그런 고유의 의미들이 있는 지점이 없다면 시간은 그저 동일하게 쭉 펼쳐진 사막 혹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공간같이 느껴질 것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따르면 엄마가 오시길 기다리는 마음이나 어제의 즐거웠던 데이트처럼 의미가 있는 지점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시간을 ‘셀 수 있다.’ 엄마를 기다리면서 하나, 둘, 셋 하며 시간을 세어보는 경험이 있어야만 시간이 흘러간다는 게 뭔지, 시간을 더하면 더 긴 시간이 된다는 게 뭔지, 긴 시간과 짧은 시간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기대했던 것보다 엄마가 빨리 오시면 그 시간은 ‘짧은’ 것이고, 기대했던 것보다 엄마가 늦게 오시면 그 시간은 ‘긴’ 것이다.


    만약 이러한 시간의 짧고 긺에 대한 체험적인 이해가 없다면, 5분과 1시간 사이의 차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온통 하얀색뿐인 벌판 안에서는 한 걸을 가든 만 보를 가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듯이, 체험적인 의미가 있는 지점들이 없다면 5분이나 한 시간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사형수 - 카뮈

    사형수는 모든 희망을 빼앗긴 사람이다. 그는 부자가 될 수도 없고, 가족을 이룰 수도 없고, 명예를 얻을 수도 없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모든 희망을 버림으로써 그는 오히려 가장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불안도, 집착도 없다. 그는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저 현재의 순간을 살게 된다. 그렇게 그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감옥 안의 환경이 허락하는 한 그는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다. 무언가를 꼭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꼭 안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카뮈의 사형수 이야기는 진짜 사형수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미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사형수다. 죽을 운명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에게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여러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사형수와 달리 우리에게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많은 일을 이룰 가능성이 열려 있다. 아이를 갖는다든지, 아름다운 집이나 안정적인 노후를 보낸다든지 하는 일들은 상상만 해도 아주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 같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희망이 때로 족쇄로 다가올 때 카뮈의 사형수를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기분 전환이 될 수 있다. 우리도 결국 모두 사형수의 신세이므로, 본질적으로는 어떤 희망에도 집착해야 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희망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역설적으로, 그렇게 해서 희망이 없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다시 희망을 품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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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