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의 윤리학
 
지은이 : 폴 우드러프
출판사 : 교유서가
출판일 : 2022년 03월




  • 기부의 대의명분과 정도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하며 기부해야 하는지 9명의 철학자들이 윤리학의 관점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전합니다.


    기부의 윤리학


    서문: 기부의 윤리학(폴 우드러프)

    필란트로피(philanthropy)는 사람과 기관 모두의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삶은 필란트로피에 달려 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 또한 좌우하기도 한다. 필란트로피는 기부금을 지원받는 기관에서 가르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대의명분중에서도 철학을 후원하기 위해 기금을 조성하는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극소수많이 필란트로피의 여러 난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필란트로피에서 철학은 윤리학의 다른 주제들보다 더 중요한데 이것은 이론상의 차이가 서로 다른 필란트로피 실천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결과주의는 대체로 생명 구조나 건강 회복과 관련해 가장 큰 선(善)을 행할 수 있는 곳에 기부하라고 촉구한다. 제1세계에 속한 우리에게 이것은 아주 먼 곳의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받은 덕윤리는 기부에 대한 보다 지역적인 접근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칸트가 암시하듯이) 정의로운 세상이었다면 부의 원래 주인이었을 이들에게 부를 돌려주라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의라면, 정의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누가 그들 부의 정당한 소유자인지 판단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정의는 체제적 빈곤이 침해하는 권리들을 포함한 인권의 보장을 요구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윤리학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접근법을 모색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기부는 왜 해야 하는가? 인색한 부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관대함은 유덕한가?. 기부는 의무일까? 의무라면 기부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뒤따른다. 필란트로피의 의무는 좁은 의무인가, 넓은 의무인가? 좁은 의무라면 필란트로피의 의무는 특정한 대의명분들에 한정되며, 어쩌면 특정한 만큼만 기부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기부의 대의명분과 정도를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어쩌면 필란트로피는 초과의무적(supererogatory)인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의무로서 요구받는 정도를 넘어서는 선행이기에 실천한다면 칭찬할 만하지만 실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란트로피와 이타주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 이기적이거나 사리를 추구하는 필란트로피스트는 존재할 수 있는가? 필란트로피스트는 종교, 예술, 교육, 인권, 동물권, 기아나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대의명분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가?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돈을 예술에 기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이 책은 탁월한 철학자들의 논문을 모은 것으로 대체로 이 주제를 처음 다루는 철학자들이다. 새로운 생각과 목소리를 필란트로피에 관한 철학적 논의로 이끄는 것이 목표였다.


    당대의 철학자들은 필란트로피에 대해 윤리학의 다른 주제에서보다 통례에서 크게 벗어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란트로피의 대의명분에 거의 기부하지 않는 것 같고 그나마 실행한 기부도 최대로 효율적인 경우가 드물다. 필란트로피를 통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을 행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았을 때 위험이나 손해 거의 없이 아이를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직관을 공유하며, 아이를 익사하게 방치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거리가 멀면 이러한 직관은 흐려진다. 지구 반대편에서 우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에 관한 소식을 듣고도 수표책을 꺼내지 않는 것은 잘못일까?


    실제로 자선 기부에서 종종 지역 편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편파성은 비합리적인가? 도덕적 실패를 나타내는가? 만약 그렇다면 대단히 만연한 실패이다. 또 자기 지역의 기부는 종교, 교육, 예술에 치우쳐 있다. 이 대의명분들은 꽤 칭찬할 만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아나 말라리아의 참화(ravage)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는 대의명분들에 비하면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도덕 이론은 공동의 도덕적 직관들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칸트는 독자들이 거짓 약속 등의 문제들에 대해 동의한다고 가정한 다음 자신의 이론이 그러한 동의의 근거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필란트로피의 경우 일부 당대 철학자들은 다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흔히 윤리적 기부로 여겨지는 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원칙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과 다른 종류의 기부를 주장했는데, 이러한 기부를 ‘효율적 이타주의’라고 일컬었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가장 큰 선을 행한다는 양적인 증거가 제시될 수 있는 대의명분에 대한 기여를 요구한다. 효율적 이타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는 피터 싱어이며, 이 책의 필자 중 한 명인 윌리엄 매캐스킬 역시 효율적 이타주의를 지지하는 유려한 글을 저술했다.


    효율적 이타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결과주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지금까지 등장한 이 운동의 주요 대변인들은 결과주의자들이다. 역시 이 책의 필자인 엘리자베스 애슈퍼드는 정의에 근거해 효율적 이타주의를 지지했다. 칸트주의자들과 덕윤리학자들은 비슷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작은 선을 선택하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마다 차이가 있다.


    만약 내가 옥스팜(Oxpam)에 기부하면 가장 큰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지역 도서관에 기부해 더 작은 선을 행하기로 했다면 잘못된 것일까? 강경한 행위 공리주의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크지만 다른 학파의 윤리학자들은 의견이 다를 것이다. 제프 맥머핸은 이 책에서 전혀 기부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더 작은 선을 위해 기부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토머스 E. 힐 주니어는 칸트주의자가 왜 예술과 교육에 기부하는 것에 찬성할 것인지를 설명하며, 브랜던 보쉬는 공리주의적 고려사항들과 경쟁하는 자기충실성 개념을 주장한다. 크리스틴 스완턴의 덕 이론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새로운 비공리주의적 사고방식들을 제시한다.



    1장 필란트로피 기부의 의무와 선택-칸트주의적 관점(토머스 E. 힐 주니어)

    토머스 E. 힐 이전의 철학자들은 칸트의 이론이 필란트로피에 미치는 영향을 거의 탐구하지 않았다. 힐은 칸트 해석에 특출한 이력이 있으며, 칸트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은 윤리적 쟁점에 칸트주의적 방법론은 독자적으로 적용한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주된 방법론은 합리성에 근거한 체계적인 도덕 입법과 관련이 있다. 칸트주의자들은 이것을 인간적인 조건에 적용해 이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들이 동의할 만큼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원칙들을 제안한다.


    칸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필란트로피가 이행하는 것은 넓은 의무 또는 불완전한 의무이다. 이것은 타자를 어떻게, 언제, 얼마나 많이 도와야 하는지에 관해 명시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타자의 행복을 우리 자신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엄격한 의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 원칙은 우리에게 필란트로피스트가 되라고 요구하면서도 그 실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긴다. 그것은 우리가 가족, 친구, 이웃 모두에게 공정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토머스 E. 힐이 이해하는 선행의 원칙은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의사결정의 과정이 아니며, 그 어떤 경우에서도 어떤 행위를 취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않는다. 결국 선행의 원칙은 도덕 입법 체계에서의 한 가지 원칙이며, 많은 사람들이 더 요구하는 다른 원칙들이 적용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상호부조의 원칙은 본질적으로 칸트주의적이며 선행의 의무보다 확정적이다.


    토머스 E. 힐은 여러 반론에 대응하면서 왜 칸트가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타자의 행복을 바라는 의무를 규정하는지 설명한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므로 이를 명력으로 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칸트 윤리학이 초과의무, 즉 의무를 넘어서는 것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모든 선행은 타자의 행복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엄중한 의무를 간접적으로 수행한다. 이 의무하에서 선한 행위는 여러 방식으로 도덕적 가치를 지니며, 어떤 -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 선행은 성자나 영웅의 것에 속하기도 한다.


    토머스 E. 힐은 결론에서 세 가지 난제를 다루는데, 첫 번째는 정의이다. 어떤 경우 부의 소유는 정부가 시정하지 못한 부정의의 증거이다(라고 칸트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부자들에게는 보상이라는 확정적 의무가 주어진다. 이것은 필란트로피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이다. 토머스 E. 힐이 해석하는 칸트주의적 도덕은 가치 있는 대의명분들에 기부하라고 요구하지만, 무엇이 가치 있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다. 타자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가치 있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넓은 의미의 인간 존엄성에 중요한 교육과 예술을 후원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 세 번째는 동기의 문제이다. 가끔씩 칸트는 동정심에 의한 기부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토머스 E. 힐은 그런 시각이 어째서 지나친 단순화인지 설명한다. 칸트는 도덕적 관점에서 동정심이 어느 정도 가치 있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2장 덕윤리, 두터운 개념, 선행의 역설(크리스틴 스완턴)

    크리스틴 스완턴은 이 책의 대다수 독자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이론이자 일종의 덕윤리인 두터운 개념 중심주의(Thick Concept Centralism, TCC)를 제시한다. 두터운 개념은 충실성, 상냥함, 사랑, 공정성 등을 포함한다. 옮고 그름과 같은 얇은 개념(Thin concept)은 유덕하게 드러났을 때 두터운 개념에 비하면 기껏해야 부차적인 것이다. 충실한 행위는 언제 유덕한가? 크리스틴 스완턴에 따르면 충실한 행위가 덕의 과녁 -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중용 -을 맞힐 때이다. 스완턴은 행위가 유덕하려면 행위자가 유덕해야 한다는 행위자 중심적 관점을 거부한다.


    크리스틴 스완턴의 일반 명제는 그의 이론으로 필란트로피의 특정 역설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역설들이 이른바 복지주의적 결과주의 전통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전통은 덕은 제쳐둔 채 도덕은 복지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선의 추구에 있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틴 스완턴이 반기를 드는 이 전통은 옳고 그름과 같은 얇은 도덕적 개념에 의존하므로 더 좋은 상태보다 더 나쁜 상태를 선호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스완턴의 표현에 의하면 단순한 사유에서 멈춘다.


    크리스틴 스완턴의 접근법은 우리가 타자와 함께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우리는 ‘타자와 유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여러 자질을 함양해야 하는데, 이러한 자질에는 우리에게 특별한 개인과 단체 그리고 프로젝트에 대한 관심이 포함된다.


    크리스틴 스완턴은 자신의 이론이 다음과 같은 역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1. 왜 필란트로피는 지나친 요구처럼 느껴질까? 사람들이 단순한 사유에 얽매인 나머지 개인적 유대에 대한 존중으로 필란트로피를 완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왜 초과의무 - 의무를 넘어서는 건 역설적으로 보일까? 덕의무를 ‘행위자의 본성과 발전에 따라 보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성인과 영웅은 그렇게 보정된 의무를 초월하는 이들이다. 3. 필란트로피스트는 이유에 근거해 행동 방침을 정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자선단체를 어느 정도 지원해야 하는가?


    여기서 크리스틴 스완턴은 서사적 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서사적 맥락에서는 복지 최적화와 무관한 사랑과 충실의 유대 같은 요소들에 의해 유덕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4. 나의 기부로 인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왜 기부를 해야 하는가? 이런 경우에는 기부해야 할 몫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설령 기부하더라도 그로 인한 결과에 나의 지분이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틴 스완턴의 대답은 복잡하다.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경우에 행위 실패는 유덕할 수도 무덕할 수도 있다. 두 경우의 차이를 알려면 두터운 개념이 필요하다. 특히 공정(fairness)을 두터운 개념으로 취급해야 한다.


    크리스틴 스완턴의 이론은 다채롭고 생산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복지주의보다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이론의 결론이 필란트로피에 대한 일상적인 생각에 더 가깝다는 것도 인식할 것이다.



    3장 선의 이행과 최대선의 이행(제프 맥머핸)

    제프 맥머핸은 효율적 이타주의의 옹호자로서 자신의 논증 결과에 실망한다. 기부가 초과의무적이라면 - 즉 기부하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 비효율적 기부가 잘못된 것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이에 제프 맥머핸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작은 선행이 초과의 무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에게 도전한다. 리오나 헴플 리가 인류 복지에 한 푼도 기부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인류 복지가 아닌 개들의 복지에 우선적으로 기부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제프 맥머핸은 이 결과에 대한 일부 반례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일련의 미묘하면서도 효과적인 차이점을 도출한다. 더 작은 선의 이행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이 실제로 발견되지만 이것은 더 큰 선의 이행에 추가적인 대가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경우들이다.


    리오나 헴슬리는 개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는데, 만약 자신의 유산을 인류 복지에 사용하기로 마을을 돌렸다면 개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희생시켜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희생은 (우리가 처음에 동의하기로 한) 리오나 헴슬리가 이행할 의무가 전혀 없는 것, 즉 필란트로피 실천의 대가에 추가된다. 리오나 헴슬리의 사례는 극단적이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더 효율적으로 기부한다면 측정 가능한 선행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선 기부를 통해 지원하는 - 예술이나 교육 등 -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예술에 기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리오나 헴슬리의 선택에 대한 제프 맥머핸의 변호는 그가 처음부터 밝힌 가정에 의존한다. 문제의 유산은 법적‧도덕적으로 리오나 헴슬리가 마음대로 기부할 수 있는 그의 소유라는 것이다. 만약 그 돈이 법적으로는 그의 소유이나 도덕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리오나 헴슬리는 그 돈이 도덕적으로 속한 곳에 기부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초과의무적이지 않다. 기부가 초과의무적인 것은 도덕적으로 자기 돈에 한해서일 뿐이다. 제프 맥머핸은 기부가 어느 정도부터 초과의무가 되는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4장 극심한 빈곤은 부정의한 비상사태(엘리자베스 애슈퍼드)

    이 글은 효율적 이타주의에 관한 논의 - 구조적 부정의를 바로잡는 것이 나은지, 개별적 기부를 통해 구조적 부정의의 결과를 보상하는 것이 나은지 - 에 크게 기여한다.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에서 발생한 부정의의 결과는 극심한 빈곤이다. 극심한 빈곤은 최소한의 영양을 섭취할 식단 등 생존에 필수적인 것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쟁점은 부유한 행위자들 - 본인과 가족의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서 극빈층을 도울 수 있는 이들 -의 의무가 무엇인가이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부정의의 시정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엘리자베스 애슈퍼드를 양측이 마치 경쟁관계에 있는 것처럼 논쟁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효율적 이타주의가 정의의 의무라는 것이다. 극심한 빈곤은 부유한 행위자에게 두 가지 의무, 즉 부정의를 시정할 의무와 극심한 빈곤이라는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보완적 의무를 부여한다. 엘리자베스 애슈퍼드는 인권을 세 가지로 나눈 헨리 슈의 분석을 바탕으로 앞의 두 가지 의무가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행위자가 비정부기구(NGO)에 기부해야 한다는 의무는 보완적 의무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의무는 인간의 자급적 생계권이 부여하는 1차적 의무가 위반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장에는 효율적 이타주의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반론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설득력 있는 답변이 포함되어 있다. 비상시 예비책으로서의 효율적 이타주의는 다른 필요한 개입 조치를 대체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 그의 논증은 여기에서 요약하기에는 너무 복잡하지만 관련 담론에 크게 기여하는 내용이므로 널리 읽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5장 자기충실성 및 정체성과 자선단체의 선택(브랜던 보쉬)

    브랜던 보쉬는 자선단체 선택에 있어서 선하고 비자의적이며 비공리주의적인 고려사항이 존재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버나드 윌리엄스의 유명한 논증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기충실성이 공리주의적 추론의 근거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해악을 막기 위해 평생 헌신해온 가치를 저버리라고 요구받는 경우가 그러한 예일 것이다.


    브랜던 보쉬는 정체성 이론을 바탕으로 요구되는 자기정체성이라는 개념을 보다 구체화한다. 그가 보기에 정체성이란 스스로 주장하는 표찰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선택하는 것이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특정한 이유에 근거해 행위하거나 최소한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 일관되게 선택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체성이 있다는 것은 덕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는 방식이다.


    브랜던 보쉬가 전개하는 이론에서 정체성을 저버리게 되는 때는 유의미한 이유를 고려하지 않을 때뿐이다. 인권이라는 대의명분에 공감하면서도 기부금의 대부분을 다른 대의명분을 위해 기부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인권에 대한 공감에서 나오는 신념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만 가능하다. 자선 기부는 정체성과 관련한 질문에 특히 중요한데, 바쁜 사람들이 윤리적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대체로 기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는 일반적으로 필란트로피에 관한 철학 저작에서 간과되어왔다. 윤리적 신념이나 소수 집단에 대한 연대의 표현으로 수표를 쓰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기부에는 효율성과 상관없이 타당한 윤리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결론 부분에서 브랜던 보쉬는 모금의 특정 전략(그 유명한 아이스버킷챌린지 등)이 자기충실성에 도전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브랜던 보쉬의 글은 필란트로피라는 주제로 대학원생들 대상으로 개최댄 전국 대회에서 소개되었다. 그의 글이 선택된 것은 필란트로피에서 간과하기 쉬운 주제에 대해 독창적이면서도 탁월하게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6장 기부는 지나친 요구가 아니다(윌리엄 매캐스킬, 안드레아스 모겐센, 토비 오드)

    5장까지 읽은 독자들은 지나치게 요구적이지 않은 기부는 의무라고 동의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요구적인 것은 무엇일까? 일부 독자들은 피터 싱어의 희생의 원칙이 과도하게 요구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장의 필자들은 매우 약한 희생의 원칙을 채택한다. 부유한 나라의 중산층 대부분은 수입의 10퍼센트를 (사실상) 효율적 이타주의에 의거해 기부하라는 것이다. 3명의 필자는 이 원칙이 지나치게 요구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며, 그것이 필란트로피적 의무를 소진시키지는 않는다고 본다.


    필자들의 논증은 부가 웰빙에 미치는 효과에 근거한다. 극빈층을 위한 작은 부의 증가는 세계에서 부유한 기부자의 부가 그만큼 감소되어 줄어드는 웰빙보다 훨씬 더 많이 극빈층의 웰빙을 증가시킬 수 있다. 즉 효율적 이타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편익과 적은 비용을 발생시킨다. 이 놀라운 연구와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널리 알려져야 한다. 엘리자베스 애슈퍼드의 주장과 더불어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너그러운 독자들은 분명 기부 금액을 늘릴 것이다.



    7장 후기: 정의와 자선 기부(폴 우드러프)

    우리가 자선 기부로 여기는 모든 것이 필란트로피적인 것은 아니다. 그중 일부는 정의를 고려해 요구된다. 이러한 고려는 효율적 이타주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엘리자베스 애슈퍼드가 보여주듯이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도 있다. 부유한 나라에서 우리 다수의 부와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치른 희생을 바탕으로 획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필란트로피의 의무뿐만 아니라 서로 경합하는 정의의 책무들까지 있을 수 있다.


    필란트로피의 의무는 광범위하고 이행방식이 다양할 수 있다. 정의의 의무는 분명 더 좁아야 하는데, 특정 수혜자들에게 그리고 (일부의 경우) 특정한 만큼 이행되어야 한다.


    후기에서는 우리가 정의에 의해 갖게 될 수 있는 나눔의 책무에 대한 범위를 알아보고, 공정한 분배의 논증을 도입하며, 승차를 전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무임승차자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한다.


    아버지는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적 대의명분을 위해 기증하거나 유증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그리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장들에 영향을 받아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여길 대의명분을 위해 전적으로 기부하지는 않지만 소득의 10퍼센트 이상을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내가 받은 교육 덕분에 그동안 나의 생활과 소득이 가능했기에 그 돈의 일부를 교육 분야에 환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필란트로피에 관한 우수한 최근의 작업이 대부분 실시된 옥스퍼드대학의 철학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비슷한 이유에서 나는 예술 분야에도 선별적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나는 필란트로피가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가치와 개인 정체성이라는 내밀한 쟁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브랜던 보쉬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부는 기부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에 자신의 책무가 있다고 여기는지에 관한 기부자의 의식을 반영한다. 필란트로피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대로 돈을 사용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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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