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지은이 : 강신주
출판사 : 사계절
출판일 : 2011년 02월




  • 니체, 스피노자, 원효, 데리다 등 철학자들의 인문 고전을 통해 고민과 불안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솔직하게 삶에 직면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남들이 보는 ‘나’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고, 타인과 맺은 비뚤어진 관계들을 제대로 바로 세워보세요.


    철학이 필요한 시간
      
    프롤로그 : 고통을 치유하는 인문정신 
    솔직함과 정직함은 내가 만난 시인을 포함한 모든 인문정신의 핵심에 놓여 있다. 

    이제 시인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과 감정에 직면하도록 하자.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 즉 관습, 자본, 그리고 권력이 만든 피고름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희망할 수 있고, 우리의 뒤에 올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자, 혹은 시인을 포함한 모든 작가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 소설, 영화, 그리고 철학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정직하게 치부를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는 자신도 정직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시를, 그리고 철학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정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쉽게 풀어보도록 하자. 여러분은 누구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전자가 페르소나(Persona)라면, 후자는 맨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르소나를 찢어버리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거짓된 인문학은 여러분에게 더 두텁고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할 것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간혹 인간이 겪는 고통의 양은 불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단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을 일시불로 갚느냐, 아니면 할부로 갚느냐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일시불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반면 자기 최면과 위로에 빠진다는 것은 할부로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다. 할부로 고통을 겪는다면, 할부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일시불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고통을 겪어내자. 그러면 남은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우리에게 덤으로 남겨질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페르소나와 맨얼굴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아주 오랫동안 사귀었고 결혼까지 꿈꾸었던 연인으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은 사람이 있다. 그 다음 날 그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하여 상사와 동료들과 반갑게 아침 인사를 나눈다.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미소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알고 있다. 삶은 마치 연극처럼 진행되고 있고, 그렇게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마치 능숙한 배우처럼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가면을 벗고 자신의 맨얼굴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몇몇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주려고 하는 순간, 친구는 자신이 해고당했다며 슬퍼한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다시 친구라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괜찮아. 너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번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거야.”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 『앵케이리디온(Encheirdion)』

    에픽테토스(Epiktētos, 50?∼138?)에게 ‘작가’는 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연기해야 할 배역들을 모두 정했다는 것이다. 연기를 마치면, 그러니까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우리는 모두 배역에 충실했던 배우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충실하게 자신의 배역을 잘 소화하고 연극판을 떠나면 된다. 괜히 신이라는 작가에게 투덜거려서도 안 된다. 

    에픽테토스의 신이 종교적이라서 불편하다면, 작가를 사회나 그 속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들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사회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특정한 사회 속에 던져져 살아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이다. 이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배역을 맡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가면을 쓰고서는 살 수가 없다. 외롭기 때문이다.

    자신의 맨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불가피하게 쓰고 있는 페르소나만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페르소나가 자신의 맨얼굴이라고 믿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럴 경우 맨얼굴은 페르소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쭈글쭈글 망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에픽테토스는 자신의 맨얼굴을 가꾸는 방법에 대해 넌지시 알려준다.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은 모든 일이다. - 『앵케이리디온』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그는 우리의 삶이 연극판처럼 진행된다는 사실을 통찰했지만, 연극을 맡은 배역 이면에 있는 맨얼굴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했다. 그에게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 즉 우리 자신의 고유한 믿음, 충동, 욕구, 혐오 등 우리 자신의 맨얼굴에 해당하는 것도 페르소나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에픽테토스는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간파했던 철학자였다. 다시 말해 페르소나에 집착하다가 맨얼굴을 망각하거나, 혹은 맨얼굴에 신경 쓰다가 페르소나를 경시하는 것, 이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에게 맨얼굴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맨얼굴이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불행히도 맨얼굴을 관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너의 사이
    타인에 대한 배려 - 공자, 『논어』
    간혹 나는 노약자 지정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를 야단치며 그 자리에 앉는 나이 든 사람을 본다. 이 노인에게는 노인들을 위한 자리에 젊은이가 앉아서는 안 된다는 당당함이 엿보인다. 노인은 젊은이가 몸이 불편하지를 헤아려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일어나라고 야단을 치는 노인이나 무엇에 쫓긴 듯이 자리를 뜨는 젊은이에게는 윤리적이라고 헤아릴 만한 데가 전혀 없다.

    두 사람 사이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애정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야단칠 때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도 몰라”라고 혀를 끌끌 찬다. 이렇게 한탄하면서 그들의 뇌리에는 한 명의 사상가, 즉 공자(孔子, BC 551∼BC 479)가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예(禮)를 중시했던 공자는 노약자 지정석에 피곤한 몸으로 앉아 있는 젊은이를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 

    공자가 태묘에 들어갔을 때 일일이 물어보았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누가 저런 추인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했는가? 태묘에 들어가서 일일이 묻고 있다니!”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다.” - 『논어(論語)』 「팔일(八佾)」

    태묘(太廟)란 예(禮)를 만들었다는 주공(周公)의 묘를 가리킨다. 당시 공자는 예에 대해 가장 정통한 사람으로 중원에 이름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묘를 참배할 때 그는 모든 참배의 절차를 태묘의 관리인에게 일일이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공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조롱한다.  

    공자는 태묘 관리인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했던 것이다. 분명 공자는 태묘 참배 예절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공자가 관리인보다 태묘에서의 예를 더 잘 안다는 듯이 행동한다면, 태묘 관리인의 입장은 무엇이 되겠는가?

    어차피 태묘를 지속적으로 관리할 사람은 공자가 아니라 그 관리인이다. 공자는 그가 자긍심을 갖고 태묘를 관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지엽적인 예식 절차보다 공자가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은 태묘에서 만난 관리인에 대한 배려였던 셈이다. 

    공자에게 예절은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 타인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없다면, 예절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통찰 때문에 공자는 예절의 맹목적인 추종자가 아니라, 최초의 동양 철학자로 남을 수 있었다.

    이런 공자가 노약자 지정석이란 제도를 기계적으로 따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 그는 서글픈 마음을 금치 못할 것이다. 공자의 눈에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맹목적인 예절과 제도만이 있을 뿐,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감수성과 애정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물의 가능성 - 데리다, 『주어진 시간』
    누구나 알다시피 선물이 어떤 대가도 없이 주고받는 것이라면, 뇌물은 대가를 전제하고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뇌물과 선물은 정의처럼 그렇게 분명히 구별되는 것일까?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그 선물의 액면가와 유사한 대응 선물을 고르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관례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선물이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선물이나 뇌물과 관련된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선물과 관련된 우리의 허위의식을 그 뿌리에서부터 파헤쳤기 때문이다. 조금 복잡하지만, 선물에 대한 그의 논의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 『주어진 시간(Donner le temps)』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데리다가 선물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논점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우리의 의지만이 선물을 선물로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선물을 선물로서 주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다. 신혼의 어느 부부를 생각해보자. 남편은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런 식사를 ‘선물’로 받게 된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신혼부부가 갖는 설레는 행복의 비밀이 있다. 반대로 월급날이 되면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 봉투를 아내는 ‘선물’로 받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해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댁은 남편의 월급 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부부는 여전히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대부분의 부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아내의 식단이 좀 더 나아지고, 동시에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남편의 반찬 투정도 심해지기 쉽다. 월급을 받고 아내는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제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늦게 들어와 저녁 식사라도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것이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신혼부부의 설레는 사랑, 선물을 주고받았던 살가운 관계가 이제 분업 체계로 흡수되어 증발되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형식적인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남편은 밥을 먹었으니 돈을 벌어와야만 한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서 수행하는 자신의 노동이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대로 아내는 이제 돈을 받았으니 제때에 식사를 차려야만 한다. 그녀는 아내로서 수행하는 가사 노동이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신혼부부의 사랑을 유지시켰던 선물의 논리가, 마치 음식과 돈이 교환되는 식당에서처럼 뇌물의 논리로 변질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는 사랑도 기대할 수 없고, 선물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이제 채권과 채무의 관계, 즉 뇌물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는 지혜를 고민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는 설레는 사랑과 진정한 행복의 조그마한 가능성이 찾아들 것이기 때문이다.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
    여가를 빼앗긴 불행한 삶 -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오징어를 잡을 때, 선원들은 배에 가득 화려한 등을 밝힌다. 이것이 바로 집어등이다. 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오징어의 시선을 끌기 위해 마련된 치명적인 유혹의 장치인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오징어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 드라마, 축제, 대중음악, 광고 등등 대중매체가 던져 놓은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가장 모던하고 새로운 것, 이것들을 가지기만 하면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주는 것들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펼쳐지는 화려하고 섹시한 패션,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기다리느라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광고 속에 등장하는 모던한 상품. 어느 것 하나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영화 제작자이자 대중문화 비판가 기 드보르(Guy-Ernest Debord, 1931∼1994)는 자본의 유혹 논리를 성찰했던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스펙터클의 사회”에 포획되어 훈육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현실 세계가 단순한 이미지들로 바뀌는 곳에서는, 이 단순한 이미지들이 현실적 존재가 되고 또한 무자각적인 행동의 효과적인 동인이 된다. 스펙터클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전문 매체들에 의존해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경향으로서(세계는 더 이상 직접 파악될 수 없다),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 - 『스펙터클의 사회(La Société du Spectacle)』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의 화면,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의 모니터, 나아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의 화면에 이르기까지 각종 기기에 펼쳐지는 대중문화는 인간을 유혹한다. 유혹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것이다. 기 드보르가 현대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규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스펙터클은 글자 그대로 황홀하고 매력적인 볼거리를 가리킨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가 시간을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착각했다. 그렇지만 여가 시간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이 결코 아니다.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볼거리들에 사로잡히거나 아니면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여가 시간은 자유로운 창조의 시간이나 여유로운 휴식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상품들로부터 유혹당하도록 고안된 시간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 드보르는 여가 시간 동안 우리가 노동의 결과에 대해 “굴복”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스펙터클 사회는 인간으로부터 상품에 대한 시각적 감각을 제외한 일체의 현실 감각을 박탈해버린 거대한 매트릭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역설적으로 스펙터클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다.

    촉각으로 접할 수 있는, 즉 자신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여 현실 감각을 키워야 한다. 단지 이것만이 권력과 자본이 내건 집어등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치안으로부터 정치로 - 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지금 우리는 대의민주정치를 따르고 있다. 우리는 대표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일정 기간 양도한다. 그러나 과연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만약 권리를 양도했다면, 그 순간 우리는 권리를 가지지 않은 자, 즉 노예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물론 대표자를 뽑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주인 행세를 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 순간을 제외하고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 상황에 주인 행세를 할 수가 없다. 대표자가 선출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권리를 모두 양도한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는 대의민주주의의 맹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냥 지나가시오! 여기에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도로 위에서 볼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거기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치안은 공간이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한 주체-인민, 노동자, 시민-의 현시/시위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곧 거기에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10 Thèses sur la Politique)」

    랑시에르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서울 시청 앞 시민광장이나 청계천광장에서 일어났던 최근의 충돌은 결국 치안과 정치가 부딪쳤던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울시는 시민들이 정치적 행위를 할 때마다 시민광장이나 청계천광장을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다. 광장을 통제하는 경찰들은 모여드는 시민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냥 지나가시오! 여기에 아무것도 볼 것 없어!” 그렇지만 시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시민광장이나 청계천광장을 직접민주주의의 전당으로 바꾸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랑시에르가 주장했던 진정한 의미의 정치다. 그에게 있어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곧 거기에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자들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집행하는 행정력으로 지탱된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대의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정치를 치안, 즉 폴리스(police)의 힘으로 상징했던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자장면을 먹기로 법으로 정했는데, 짬뽕이나 볶음밥을 먹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고자 할 수 있다.

    이것을 막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에서의 치안이자 정치다. 그렇지만 랑시에르는 치안으로서의 정치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정치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정치(politics)란 대의민주주의의 논리를 넘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체들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정치는 부단히 직접민주주의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슈미트는 자신의 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적과 동지’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회 내부의 불평등을 교묘하게 은폐시키는 범주이기도 하다. 음식점 주인이 무서워서 음식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논리도 ‘적과 동지’라는 범주에 의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욕망과 욕구들은 ‘적’ 앞에서 임의적으로 통일되면서 억압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국가는 혹은 치안은 적에 직면하는 위급한 상황을 조장해서 내부의 갈등을 미봉하려는 전략을 취해왔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랑시에르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의 진정한 범주는 ‘평등과 불평등’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의 이념이 실현되기 전까지 정치는 사라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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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