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지은이 : 존 스튜어트 밀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18년 06월




  • 존 스튜어트 밀의 대표작인 『자유론』은 출간 된 지 1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큰 사랑을 받는 책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오늘날, 국가를 향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자유론


    서론

    자유와 권력은 다툼의 역사가 있다. 과거에는 이런 다툼이 (인민들 사이에서도) 일부 계급과 정부 사이에 일어났다. 이때 자유는 정치 권력자의 압제에서 보호받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는 권력자들이 일반 인민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불가피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이때는 한 사람이나 한 부족이 지배 권력을 장악했고, 세습 또는 정복을 통해 권력 행사를 지속해왔다. 이들의 지배에 보통 사람들은 도전할 생각도, 도전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또한 공권력의 힘으로 시민들의 사적인 삶을 구석구석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국가가 모든 시민들의 육체적, 정신적 삶 전반에 걸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 나라 안에서 약자들이 번번이 이들과 같은 지배자들의 침탈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 모두를 제압할 최고 권력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을 바로 자유라고 불렀다.


    권력을 제한하는 방법에는 정치적 자유와 권리라는 이름으로 어떤 불가침 영역을 설정하고 권력자가 이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국가의 중대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구성원 또는 그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의 동의를 얻도록 헌법으로 규정하는 것, 이 두 가지로 설정되었다. 이로써 국가의 중대사를 관리하는 지배자는 인민이 언제든지 바꿔버릴 수 있는 대리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민주 공화정이 세워졌고, 정부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람들의 관찰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법이나 권력이 지나치게 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의 주도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기제는 훨씬 강력해졌다. ‘자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자기 이외 나머지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정치 체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인민의 의지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들 또는 인민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일부 사람들의 의지를 뜻한다. 정치 영역에서 ‘다수의 횡포’가 온 사회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큰 해악 중 하나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 권력자의 횡포와 권력 남용을 방지하는 것만으로는, 즉 권력 행사의 한계를 설정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사회가 통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 사회는 다수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 개별성을 방해하고, 사회의 표준에 맞도록 획일화시키려고 한다.


    관습은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행동 규칙의 타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관습이 이성적인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인식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관습이 이성이 아니라 관습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둘러싼 의견이 이성에 근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특정 개인의 선호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사회가 요구하는 혹은 다수가 따르는 법칙이 그렇다.


    도덕 감정이나 의지가 형성되는 데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성, 편견, 미신, 사회적 호감, 사회적 반감, 부러움, 질투, 교만, 오만 같은 것들이 그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회 지배 세력으로 부상한 한 계급의 이익과 계급적 우월 이식이 그 사회의 도덕률을 크게 좌우한다. 이것은 법이나 여론이 특정 행동을 촉구하거나 금지시키는 행동 규칙을 결정하는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즉,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세력이 실질적으로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사회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 따지기 보다는, 사회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해야 하는지 캐묻는 데 주력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시 말하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본인 자신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러나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할 수 없다.


    자유의 영역은 그럼 무엇인가? 인간 자유의 기본 영역은 다음의 셋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내면적 의식의 영역이 있다. 이것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양심의 자유, 생각과 감정의 자유, 절대적인 의견과 주장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이다. 셋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에서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모든 성인이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자유는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는 자유이다. 우리의 육체, 정신, 영혼의 주권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생각의 자유라는 하나의 항목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는 말하고 쓴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자유가 상당한 정도까지 보장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자유의 철학적, 실천적 원리에 익숙하지 않다. 이러한 원리는 특정 자유를 넘어 훨씬 더 넓게 적용될 수 있으므로 이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

    여론을 빌려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정부의 타락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강조되었던 때는 이미 지났다. 이 후 정치적 논란을 둘러싸고 실제적으로 이 자유가 침해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민이 스스로 자유를 강제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론을 빌려 인민 스스로가 자신들의 자유를 구속한다면, 이는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동원해서 억누르려는 의견이 사실은 옳은 것(진리)일 수 있다. 만일 억압된 의견이 옳다면 그와 같은 억압의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특정 의견이 잘못되었다는 확신 아래 다른 사람들이 들어볼 기회조차 봉쇄해버린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무오류성)고 가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특히 막강한 권력자나 절대적인 복종에 익숙한 사람들이 대개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실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인간은 사고의 한계로 인해, 현실적인 문제에 관한 판단이 틀릴 수 있다. 숱한 논리들이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데, 이는 시대적인 사례를 들어보아도 알 수 있다. 각 시대에 수많은 의견들이 나타나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우습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이렇듯 어떠한 의견 또는 판단이 완벽하게 옳다고 확신하기 힘들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토론, 비판 과정을 거친 뒤에야 최고 수준의 이성적 합리성을 확보(진리의 도출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힘과 가치는 그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잘못을 시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며, 이럴 때에 비로소 판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확실성이다.


    유용성을 내세워 생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는 어떤가. 오늘날 어떤 한 의견이 사회에서 정당화될 때 중요한 기준은 그 주장이 옳다는 것보다는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발상을 따르게 되면, 어떤 주장이 진리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것이 유용하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토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효용의 문제가 진리 추구의 첫 시발점이 되는데, 유용성이나 효용의 가치는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 많은 논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중요한 문제만 치우쳐 논의하여 모든 의견을 정확하게 따져 볼 수 없게 된다. 누군가의 어떤 의견이 중요하지도 않고, 치명적으로 나쁜 결과를 낳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개인적인 주장을 펴는 과정에서 마땅히 변호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사례를 보자. 법을 내세워 인류가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할 훌륭한 사람들과 그들의 주장들을 박해하는 경우들을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먼저 모든 도덕 철학자들의 원조이자 원형인 소크라테스는 불경과 부도덕이라는 죄목 아래 유죄를 선고받고 죽음에 이르렀다. 1,800년 전 예수 또한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실수를 저지를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사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경우이다.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그리스도교적인 사람으로서, 절제와 정의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거리낌 없이 허용했다. 그 또한, 자신과 다수 대중이 절대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그토록 불행한 과오를 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들 이야기 한다. 예언자들을 살육했던 우리 선조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법의 이름으로 가하는 박해의 구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적어도 그 생각의 표현을 금지하는 법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대중의 마음속에는 무관용의 성향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실제로 선동하기만 한다면 특정 대상을 실제로도 박해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여론이 법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지닌다. 사람들은 관용적이지 못한 다수 의견 앞에서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게 된다. 또는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리게 된다.


    그렇다면 진리에 대한 자유 토론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실로 토론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의견은 진리의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의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진리란, 미신에 지나지 않으며, 진리를 설명하는 단어들을 우연하게 조합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에 자연과학과 도덕철학 모두에서 왜 다른 주장이 진리가 될 수 없는지를 끊임없이 증명해보아야 한다. 판단에 대한 아무런 증명을 가하려고 하지 않을 경우, 보통 사람들이 하듯이 가장 마음이 끌리는 쪽을 선택하거나, 전문가의 말을 따르기 쉽다.


    종교적 혹은 도덕적 신념과 토론의 자유는 어떤가.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왔는가? 그들을 사람들을 둘로 나눠 한쪽은 이성적인 확신에 따라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다른 한쪽은 믿음에 입각해서 무조건 그것을 수용하도록 엄격히 구별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다. 평신도들은 이단자들이 쓴 금서(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판론이 되는)를 읽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늘 칭송받는 일을 보고 들으면서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습관적으로 교리를 따르게 된다. 그들은 흔히 자신들의 신념 체계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하면서 다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부정적 비판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을 보자.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철학과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한 부정문 형태의 질문으로 구성된다. 변증법은 어떤 문제에 대해 그 본질은 모른 채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만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본인은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나아가 스스로의 무지를 깨달은 뒤 그 의미와 논거를 확실하게 파악한 바탕 위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고안된 최상의 기법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진리를 찾아내기 보다는 이론상의 약점이나 실천상의 과오만 지적하는 부정적 논리를 좋지 않게 보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조류가 되고 있다. 이런 부정적인 비판은 궁극적인 결과의 측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보잘것없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긍정적인 지식이나 확신을 획득하는 데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더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진리의 부분적인 성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서로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으로 확연히 구분되기 보다는, 각각 어느 정도씩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럴 때 통설이 채우지 못하는 진리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도록 그 통설에 도전하는 이설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수가 받아들이는 의견이 비록 올바른 기초 위에 서 있을지라도 이처럼 부분적인 진리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통설이 빠뜨리고 있는 진리의 어떤 부분을 구현하는 다른 모든 생각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오류와 혼돈을 초래하더라도, 마땅히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럴 때만이 진보와 개선이 가능하다.


    이에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통설 가운데 어떤 중요한 주제에 관한 것들은 절반 이상의 진리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윤리 같은 것은 그런 문제에 관한 한 전적으로 옳기 때문에 그것과 어긋나게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든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는 셈이 된다.”는 반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도덕이라 불리는 것은 예수나 그의 사도들이 세운 것이 아니고 그들보다 훨씬 뒤 가톨릭교회가 초기 500년에 걸쳐 조금씩 체계화한 것이다. 동시에 그 도덕이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불완전하고 일방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본 지향은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이고, 적극적이라기보다 소극적이고, 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악을 억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수동적인 복종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모든 기성 권위에 대해 순종할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둔 윤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모습을 띤 윤리 체계도 인류의 도덕적 쇄신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치에서도,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보수 정당과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 정당이 둘 다 존재하는 것이 건전한 정치적 삶을 위해 중요하다. 상대편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가 이성과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장 인류의 복리를 위해 필수적인 개성

    인간은 “책임과 위험을 그들 스스로 부담하는 한”, 즉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행동의 자유를 갖는다. 인류가 불완전한 상태, 진리에 도달하기 전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해야하듯이 여러 생활의 실험이 있는 것이 유익하다. 이 의견을 실험해볼 자유의 영역이 보장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이 복지를 이루는 유력한 요소라는 점을 알면 좋으련만 이 개인의 자발성은 본질적 가치, 독자적으로 존경받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관습에 만족하고 이 자발성을 오히려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방해물로 질시한다.


    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와 생활 상황의 다양성이 필요한데,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 개성의 활력과 다양한 변화가 발생하며 이것이 결합하여 독창성이 생긴다. 물론 인간은 주어진 경험의 결과를 알고 그로부터 이익을 누리도록 교육, 훈련되어야한다. 하지만 그 경험을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이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고 정상적인 상태다. 경험이 협소할 수도 그것이 올바르게 해석된 것이 아닐 수 있으며, 그 해석이 옳아도 자신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으며, 관습이 좋고 적합하다 해도 단지 관습이라는 이유로 복종하는 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독특한 천부적인 여러 능력 가운데 어느 것도 자신 속에 교육시키고 발견될 수 없게 한다. 단지 관습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은 아무런 선택도 안하는 것이다. 이성은 도리어 약화되며, 자신의 능력을 통해 그것을 알아야만 인간 그 자신을 완성하고 미화할 수 있다.


    이해력이 우리의 것인 동시에 욕망, 충동도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강렬한 충동은 균형을 잃을 때만 위험하고 인간이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욕망이 강해서가 아니라 양심이 약해서이다. 타인보다 강렬하고 다양한 욕망, 감정을 가진 자가 더 나쁜 짓을 많이 할 수도 있지만 좋은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이 강렬한 감수성이 덕성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자신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낳으며 이런 것의 양성을 통해 사회는 그 의무를 다하고 그 이익을 옹호한다.


    고대에 자발성과 개성은 사회가 그것을 훈련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지나치게 능가할 수 있었기에 사회는 그것을 억제. 통제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가 개성을 인정하며, 인간성을 위협하는 것은 개인적 충동과 선호이 과다가 아니라 결핍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모든 이들은 ‘나’, ‘나의 성장. 발달’을 묻지 않고 ‘나의 지위에 적합한 것.’, ‘나의 신분에 어울리는 것’을 물으며 자신의 기호보다 관습의 길을 택한다. 그들의 기호는 집단적이며 이 때 어떤 욕망도 쾌락도 없이 인간적 성능은 죽어버린다.


    칼뱅 파는 인간의 죄는 제멋대로 하는 것으로 오로지 복종 속에서만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무조건 가르침대로 따라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 신은 그것들이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 양성. 발전되는 것을 보고 더 기뻐하지 않을까? 그 능력이 증대될수록 신이 좋아하지 않을까? 또한 칼뱅파와 다른 견해에 의하면 인류는 인간성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여받았다. 이러한 자아 긍정은 그리스적 자기발전의 이상과도 유사하다.


    개인은 개성이 발전할수록 자신에게 타인에게 모두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타인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는 사항을 타인의 불쾌감을 이유로 속박한다면 그 무엇도 발달시키지 못하고 속박에 대한 저항에서 나오는 힘을 발달시킬 뿐이다. 개성을 파멸하는 것은 모두 전제적이다.


    인간사는 독창성을 지닌 자, 새로운 진리의 발견자, 계몽된 자 등의 천재들에 의해 발전되어 왔고 유지되어 왔다. 이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만 숨을 쉴 수 있고 이들은 본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개인적이다. 이 천재들의 참된 의미는 사상과 행동에서의 독창성이며 독창성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아무도 하지 않은 최초의 일에 착수하게 만든다.


    이 세계는 평범한 사람이 우세한 세력이 되어 왔다. 지금도 역시 여론이 세계를 지배하며 군중의 힘이 공공관계는 물론 사생활의 도덕적.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 이런 이유로 현대의 개인은 군중 속에 매몰되었다. 그들 각자의 사고는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문을 통해서나 연설 등으로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럴 경우 모두가 평범해진다.


    나는 천재적 강자를 찬양하는 영웅 숭배론에 찬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강자는 타인을 강제하여 따르도록 할 수 없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지시할 수 있는 자유만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의 의견이 지배적 세력이 될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건 숭고한 사상을 고수하는 확고한 개성뿐이다.


    모든 사람이 몇 개의 전형에 따라 만들어져야한다고 볼 수 없다. 어떤 이가 상식만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방식대로 생활을 계획해야하는데 이는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다르다. 인간은 동일한 정신적 환경 하에서 건전하게 생활할 수 없으며 모두 정신적 발전을 위해 서로 다른 상태를 요구한다.


    지금 어떤 곳에서도 취향의 다양성이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든가 누구나 다 하는 일을 안하는 이는 비난을 받는다.


    현재 여론은 개성이 너무 뚜렷이 표현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이 상황에서 엄청난 기력이 활기찬 이성에 의해 지도되고 강렬한 감정이 양심적 의지에 의해 분명히 통제되지 않는 대신 박약한 감정과 쇠잔한 기력만이 남는다. 이성의 힘은 필요 없고 복종만 필요하다. 오늘날 영국에서 사업에 소비되는 기력 외의 기력은 없고 남은 기력은 모두 오락을 위해 소비된다. 또한 오늘날 영국인은 집단적 차원에서만 위대하다고 여겨지지만 지금의 영국을 만들어온 것은 개인적으로 위대한 것을 성취해온 사람들이었다.

    관습의 횡포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지속적 방해물이며 더 좋은 것, 자유의 정신 혹은 진보, 개량의 정신과 적대관계에 있다. 자유가 있다면 개인의 수만큼 많은 수의 개량이 뿌리내릴 수 있다. 진보의 원칙은 관습의 지배에 반대하고 관습의 속박에서의 해방을 요구했고 이것이 인류사의 주요한 관심 사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관습의 횡포가 완벽한, 예컨대 동양 일반, 지역에서는 역사가 없다. 그들 국민도 과거엔 독창적이었으나 개성을 갖지 못함에 따라 진보가 정지한다. 유럽도 그러면 어떨까? 그러나 우리는 변화하기 쉬운 만큼 진보적이다. 우리가 막상 반대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성이다.


    유럽이 정체하지 않고 발전한 것은 성격과 교양이 매우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런 유럽이 전체를 동일화하려는 중국식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과거엔 신분, 이웃, 직업이 달랐지만 지금은 모두 같은 것을 읽고 보고 들으며 같은 곳에 가고 같은 대상에 희망과 공포를 가지며 같은 권리와 자유를, 그것을 주장하는 같은 수단을 갖는다. 교통기관의 개선, 상업과 제조업의 증대, 여론의 우위는 이를 촉진했다.



    4장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가지는 권한의 한계

    개인이 자신을 지배하는 힘의 한계는 무엇이고 사회의 권위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사회가 계약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해도 사회의 보호를 받는 모든 개인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 일정한 행동 규칙을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규칙이란 서로의 이익(권리)을 침해하지 않을 것, 사회나 그 구성원을 위해와 방해로부터 방어하고자 부과되는 노동과 희생을 각자가 자기 몫만큼 부담할 것이다. 사회는 이 부담을 강제할 수 있으며 이익을 침해할 경우 법으로 규제할 수 있다.


    이것이 이기적 무관심인가? 어떤 개인도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권한은 없다. 자신의 복지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다. 일반인도 자신의 감정, 환경에 대해서 어떤 타인이 갖는 것보다 월등히 뛰어난 지식의 수단을 갖는다. 타인은 그의 판단을 도울 고려 사항이나 그의 의지를 강화할 권고를 할 수도, 심지어 강요를 할 수도 있지만 최후의 심판자는 그 자신뿐이다.


    어리석은 행동, 저속하거나 타락한 취향을 보이는 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그들은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에 사전에 이를 경고하는 것은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기피할 권리를 지닌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 권리 침해 등은 도덕적 비난의 정당한 대상이고 중대한 사례이면 도덕적 보복, 징벌의 대상이 된다. 행동 뿐 아니라 이런 행동을 낳는 성향도 부도덕하며 비난의 대상이 된다.


    분별력과 개인적 존엄성 부족으로 받는 경멸과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에 받아야 할 비난은 다르다. 그가 우리를 불쾌하게 하면 우리는 불쾌감을 드러내고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의 생활까지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그런 행동의 결과로 인해 그가 벌을 덜 받도록 노력해야한다. 연민이나 혐오의 대상은 되지만 원한, 분노의 대상은 아니다. 만일 그가 동포를 보호하는 데 필요한 규제를 어긴 경우 그의 행동이 초래하는 나쁜 결과는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미치게 된다. 이 경우 명백한 징벌로 보복해야한다.


    이런 주장을 많은 이들이 거부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모든 행동은 다른 구성원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순 없다. 자신에게만 재앙을 주는 일을 해도 좋지 못한 영향은 타인에게 미칠 수밖에 없다. 재산을 잃으면 재산을 지원받는 사람들에게 해이며 국가 재산의 감소이다. 또 좋지 못한 실례를 남겨 세상에 해악을 끼친다고 볼 수도 있다. 미성년자처럼 자기통제 능력이 없는 성년자도 사회가 보호해야하며, 사람들의 행복을 해치고 생활 개선을 방해하는 도박, 술주정, 음란, 나태, 불결은 금해야 한다.


    이 반대론의 주장은 나도 인정한다. 타인에 대한 명백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그는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예컨대 어떤 이가 방탕으로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는 그가 방탕해서가 아니라 가족이나 채권자에 대한 의무를 태만히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극히 타산적인 투자에 돌려졌다 해도 도덕적 죄악임은 마찬가지다. 그 사회에 죄를 범하는 것은 공중에 대한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사회에 대한 특별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자신 이외의 특정한 개인에게 명백한 침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 행동에 의해 발생하는 불편은 인류의 자유라고 하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사회가 참을 수 있는 불편이다. 오히려 이 경우 교육의 전권을 장악한 사회가 구성원 대다수를 유아 상태로 내버려두어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했으므로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할 몫이다. 그리고 이런 간섭은 속박에 대한 반항을 불러오고 사회의 명령에 반하는 일을 감행하는 것이 강한 기백과 용기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러한 안 좋은 보기를 보이는 경우, 그들에게 정당하게 비난받게 하여 마침내 그러한 나쁜 행동의 보기라는 명예롭지 못한 결과가 어떤지 드러나게 되므로 이는 오히려 유익하다.


    사회도덕이나 타인에 대한 의무에 관한 문제에서는 공중, 지배적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경우가 더 많지만 행동하는 사람 자신과 관련되는 문제에서 법으로 소수자에게 부과되는 경우 공중의 의견은 틀릴 수도 있다. 이건 단지 일부 사람들이 타인의 이해관계에 대해 갖는 의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완고한 종교인처럼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자기에게 해를 주는 것이라 보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감정과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이런 예로 특정 종교적 의견을 갖는 사람들이 자기와 동일한 종교적 의례, 특히 종교적 금욕을 지키지 않는다는 정도의 이유로 타인들에게 품게 되는 반감이 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증오하는 이슬람교도들이 그렇다.


    스페인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시인하는 의식 외의 방법으로 절대자를 예배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다. 이를 가톨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까지 강요하려는 시도는 간섭이다.


    영국의 경우에도 청교도 세력이 강했던 시기에 공중 오락, 사적 오락을 금지했던 적이 있다. 자기들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쾌락을 어느 누구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원리가 허용되면 어느 나라의 대중이나 다른 우세한 계급의 판단에 따라 이 원리가 실행될 경우 반대할 수 없다.


    민주적 사회기구를 지향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미국에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생활방식이 나타나면 이에 불쾌감을 갖는 다수의 감정이 유효한 사치금지법으로 적용된다. 또 사회주의적 견해가 널리 퍼진 경우, 특히 노동자계급 사이에는 이미 널리 퍼져서 노동자들은 숙련공과 동일한 임금을 주장하고 폭력적 방법으로 이를 강제하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공중 스스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까지도 법으로 금지할 무제한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무절제한 금주를 저지한다는 명분의 금주법을 요구하는 운동이 영국에서 추진되고 있다.


    특히 이를 주장하는 스탠리 경은 발효성 음료의 매매는 무질서를 조정하고 격화시켜 안전에 대한 기본권을 침해하고 이러한 매매는 나의 세금으로 구제해야할 빈곤층을 낳으며 그 과정에서 이익을 얻기에 평등권을 침해한다며 사회적 권리의 침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 원리는 어떤 개별 자유에 대한 침해보다 위험하다. 내가 유해하다고 보는 의견이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사회적 권리는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은 휴일 준수법이다. 협정이 설립되어야 준수되며 일부 사람들이 일을 하면 모두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법에 의해 휴일이 보장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업무에 대해서까지 이를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또한 휴일의 오락을 법으로 금지하려는 태도에도 적용될 수 없다. 일요일의 오락 금지는 종교에 의해서만 논리가 정당화되는데, 타인을 종교 계율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는 사상은 종교적 박해의 기반이었다.


    영국에서도 모르몬교인들이 무법적 폭력으로 생명을 잃고 추방당하고 심지어 이들을 타도하겠다고 원정군마저 파견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이들이 비난받는 것은 일부다처제의 허용 때문이다. 나도 이 제도가 여성을 속박하고 남성을 여성에 대한 상호 의무에서 벗어나 우대받게 한다는 면에서 반대하지만 이 제도는 다른 모든 형태의 결혼제도와 마찬가지로 여성 측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자기 나라 법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모르몬교는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도, 풍습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그것을 버릴 자유도 주었다. 원한다면 선교사를 파견하여 그 사회제도에 반대하는 교의를 설파하는 한편, 공정한 수단을 사용해 그들 자신의 사회에 같은 교의가 만연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데도 이를 강제로 억압하는 것은 부당한 간섭이다.



    5장 적용

    개인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 외의 타인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사회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개인의 행동에 혐오나 반발의 감정을 지닐 때 사회는 오직 충고, 교훈, 그의 행동에 대한 회피만 할 수 있다. 또 개인은 타인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며 사회가 사회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한 개인은 처벌을 받게 된다.


    타인의 이익에 대한 침해, 침해 가능성이 어떤 경우에도 사회적 간섭의 정당화 조건이 되진 않는다. 개인 사이의 이익 충돌은 사회제도가 불완전한 피할 수 없으며 각자가 이러한 결과에 개의치 않고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인류의 일반적 이익을 위해 좋은 것이다. 성공을 위해 사용된 수단이 사기, 배신, 폭력 등 사회의 일반적 이익에 위배되는 경우에만 제한이 가해진다. 이런 이유로 생산자와 판매자에겐 거래의 자유가 보장되어야한다. 물론 이런 거래가 여러 목적을 위해 합법적으로 통제될 순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어떤 특정 물품의 확보를 어렵게 하는 일은 생산자, 판매자의 자유를 침해해서가 아니라 구매자의 자유를 침범한다는 의미에서 부당하다.

    이러한 사례 중 하나가 독약 판매이다. 독약은 살인을 목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금지될 수 있으나 이런 금지는 무해한 목적이나 유익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고 예방 또한 공적 당국의 정당한 직무이지만 확실한 위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위해의 가능성만 있는 경우 당사자만이 판단할 수 있다. 이 경우 위험을 경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벤담이 말한 ‘미리 지정된 증거’는 독약 사용에 의한 범죄를 매우 어렵게 만들고 동시에 독약을 합법적인 다른 목적에 사용되고자 하는 사람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 이는 계약을 맺는 경우 법이 계약 이행을 강제하는 조건으로 계약자의 서명, 입회인의 증명 등 일정한 형식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 이는 뒤에 말썽이 생길 경우 계약이 합법적이며 계약 당시 무효화할 사정이 전혀 없었음을 입증할 증거로 삼기 위해서 행해진다. 마찬가지로 허위 계약이나 그것이 폭로된 경우 그 계약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것과 같은 사정 아래 맺어지는 계약의 발생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범죄 수단이 되기 쉬운 물품 판매의 경우 물품을 매매한 정확한 시간, 구매자의 성명과 주소, 매각한 물품의 품질과 수량을 상세히 기록하게 하고 물품 구입의 목적까지 물어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는 남의 눈을 속여 그 물품을 악용하려고 할 때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타인에 대한 정당한 의무 이행을 게을리 했을 때 강제로 그 의무를 이행하게 할 수 있다. 또 행동자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경우엔 법으로 금지될 수 없지만 공중 앞에서 행해졌을 때 미풍양속을 해치게 되는 것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외설죄이다.


    행동자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권장하며 교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엄밀히 말해 자기 관련 행동이라기보다 사회적 행동이고 고로 사회적 통제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면 무엇이 정당한가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암시를 주고받는 것도 자유로워야한다. 다만 권유자가 그 충고에 의해 사회와 국가가 유해하다고 인정한 것을 장려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 할 때 그것도 정당한가? 예컨대 매춘이나 도박은 허용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매춘집의 주인이 되거나 도박장 경영주가 되는 것이 자유롭게 인정되어야하는가? 이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복지 사이 경계선에 놓인 것이라 답하기 쉽지 않다.


    이 입장에 대해선 쌍방 다 할 말이 있다. 개인적 자유를 주장하는 측은 우리가 지금까지 옹호한 원칙이 진리라면 사회는 개인만이 관련되는 일에 대해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도 남에게 충고할 수 있는 권리와 더불어 설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반대로 사회의 복지를 주장하는 측은 국가나 사회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최소한 토론할 문제라고 가정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교사자는 국가가 나쁘다고 믿는 일을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 공공연히 장려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집이나 타인의 집에서, 그들의 돈으로 회원과 방문객에게만 출입을 허용하는 장소에서 도박을 하는 일은 자유롭게 인정되어야하며 그러나 공개도박장은 안 된다. 이 금지가 유효하지 못하지만 이 금지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영업할 수밖에 없게 되고 고로 도박을 하려는 자만 도박 장소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포주나 도박장 주인은 처벌하면서 매춘 행동자와 도박자는 처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일반적 매매 행동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가? 그러나 주류 판매자가 음주를 장려하여 이익을 챙기는 것은 명백한 해악이다. 고로 그들에게 제한을 가하고 보증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경우가 아니라면 합법적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그럼 국가는 특정 물품의 판매를 간접적 방법, 예컨대 술값 인상이나 주류 판매소 수 제한 등을 통해 억제할 권리를 갖는가? 가격 인상은 그 인상된 가격만큼 수입이 증가하지 못한 사람에겐 금지 조치이며 특별한 취향에 대한 벌금이다. 이는 그들 자신의 판단에 맡겨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세입을 증대하기 위한, 재정상 목적을 위한 과세는 불가피하다. 그렇기에 과세의 경우 최대한 갖지 않을 물품, 적당량을 초과하면 분명히 유해할 물품을 특별히 선정하여 국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점까지 허용되어야한다. (-> 담배 세금 때문에 담배 파는 국가.) 이 판매는 독점적 특권으로 만들 수 있다. 이미 정평이 나 있거나 품행이 단정한 사람들에게만 맡기는 동시에 상점 개폐 시간에 대한 규정으로 공중의 감시를 받도록 하고 치안 방해 행동이나 법 위반 행위가 발생할 경우 허가를 취소해야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규제는 원칙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예컨대 술집 출입을 어렵게 하기 위해 그 수를 제한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불편을 주며 노동 계급을 공개적으로 어린이나 야만인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자유를 교육할 최선을 노력을 다한 경우에만 그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할 수 있다.


    자유에 관련된 사람들의 의사가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자신을 노예로 파는 계약을 허용해야하는가? 그러나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자신을 노예로 파는 단 하나의 행동을 제외하고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를 요구할 수 없다.


    자신만이 관련된 모든 일에 절대적 자유를 요구한다는 원칙은 계약에 있어 필요에 따라 그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계약에 있어 타인에 대한 도덕적 의무가 생겨나고 그 의무는 파기할 수 있어도 무시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결혼이 그렇다. 또 그 계약이 제3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 예컨대 결혼에 있어 아이가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자유는 법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도덕적 자유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이처럼 타인의 그처럼 중요한 이익에 영향을 미칠 결정을 하는 경우 반드시 모든 사정을 고려해야하며 이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게 된다.


    국가는 개인만이 관련되는 일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하지만 타인에게 행사할 권리를 개인에게 부여하는 경우 그 권리에 대해 감독해야한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전제적 권리에 대해서 국가는 아내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법적 보호를 받게 해야 한다. 자녀의 경우도 부모의 일부로 생각하기에 법이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여론의 반박을 받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유보다 권력을 더 존중한다.


    국가에겐 교육을 어느 정도 요구하고 강제할 권리가 있다. 누구나 한 사람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이상 그를 교육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다. 하지만 이 의무를 수행하게 하자고 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를 선택권으로 생각한다. 이 의무화로 인해 국가 자체가 직접 교육하는 수고는 줄어든다. 국가는 교육을 부모에게 일임하여 자유에 맡기고 수업료 지원에만 만족해야한다.


    나는 국민 교육의 전부나 대부분을 국가가 장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이는 다양성을 억압하는 압제이다.


    교육을 의무화하는 법을 실시하는 수단은 국가시험뿐이다. 이 시험의 대상은 사실과 실증과학에 한정해야한다. 그래서 모든 논쟁적 진리에 관해 젊은이들이 혼란에 부딪치지 않게 해야 한다.


    부모의 법적 의무가 부과되지 않는 경우는 교육 문제만 아니라 생명을 낳는 경우에도 해당한다. 많은 유럽의 나라들에선 결혼 당사자가 가정을 유지할 만한 경제력이 없을 경우 결혼을 금지하는데, 이는 국가의 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며 법은 유해한 행동에 대해 금지하는 것이다. 이는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간섭에 대한 반대론으로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행해져야 할 일이 개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편이 더 좋은 경우다. 어떤 일을 누가 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 최적임자는 그 일과 직접 이해관계를 갖는 사람들이다. 이 원리에 따라 생산 과정에 대한 의회와 행정부 관리의 간섭은 부당하다.


    둘째 개인은 국가 관리처럼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개인에게 위임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정신 교육의 수단으로 바람직하다. 활동 능력을 왕성하게 하고 판단력을 단련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배심제, 지방자치제, 유지 집단에 의한 산업, 자선사업의 경영을 장려하는 이유다. 이는 시민에 대한 특별한 훈련이다. 이는 개성과 행동방식의 다양성이라는 이익을 낳는다는 면에서 더욱 장려될 필요가 있다. 국가의 사업은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국가권력의 부당한 확대로 인한 커다란 해악 때문이다. 국가의 직권 외에 다른 직권들이 더해지면 희망과 공포를 지배하는 세력이 더욱더 확대될 뿐 아니라 일반 공중 속의 야심찬 인물들이 더욱더 국가나 정권을 잡으려고 호심탐탐 노리는 어떤 당파의 앞잡이로 만들게 된다. 행정기구가 효율적이고 과학적으로 구성될수록, 즉 행정기구를 움직이는 수완이 교묘할수록 이 폐해는 더욱 크다.


    국가가 가장 유능한 인재로 가득 차 있다면 그들은 한 군데로 집중되어 방대한 인원의 관료제를 이룬다. 남은 재야 사람들은 오로지 관료제에 기대를 걸고 일반 대중은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해 관료의 지도와 명령을 받고자 하며 능력 있는 야심가는 관료에 기대어 개인적 영달을 꾀하려 한다. 재야 민중은 실제 경험이 결여되어서 관료를 비판하거나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며 이런 관료제 하에서는 관료들의 이익에 위배되는 어떤 개혁도 실현될 수 없다.


    이것이 러시아 제국의 현주소다. 관료들은 차르가 내리는 칙령을 회피하여 암묵적 거부권을 행사하고 그로 인한 책임을 모두 국가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다 궐기하여 혁명을 일으켜 국민의 승인을 받아 정권을 다시 잡은 뒤 관료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다시 작동한다.


    프랑스는 국민 대부분이 군에 복무하여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그들을 지휘하고 즉석에서 작전 계획을 세울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등장한다. 미국의 경우 국가가 없어도 어떤 단체도 즉시 국가를 조직하여 통치를 비롯한 모든 공공업무를 충분한 지성과 질서와 결단을 가지고 수행할 수 있다.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는 국민은 반드시 자유를 누린다.


    관료제에선 관료가 반대하는 일은 행해질 수 없다. 가장 유능한 인재를 조직에 흡수하여 모든 사람에 대한 속박이 완전해 지는 일이 벌어진다. 중국의 관리가 그러하다. 중국에서 그들은 게으른 인습의 노예로 전락한다.


    관료 집단 자신의 능력을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자극은 재야인사의 빈틈없는 비판이다. 즉, “국가의 능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인재를 가능한 분산시키되 중앙 국가는 되도록 최대한 정보를 집중하게 하여 그 지식을 널리 보급하게” 해야 한다.


    고로 지방자치행정에서 모든 사무를 그 지역 주민이 선출하는 개별 공무원에게 세분하여 부과시키는 것이 좋다. 지방 사무를 맡는 각 부서에는 중앙 감독기관을 두어 중앙국가의 지부 구실을 하게 한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여러 가지 정보와 경험을 얻게 된다. 또 그 기관은 사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알고 이 지식이 다른 지방으로 이전될 수 있다. 이 기관의 실제 권력은 지방 공무원을 지도하기 위해 제정된 법에 그들을 강제하여 복종시키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중앙 국가는 오로지 그러한 규칙의 집행을 감독하고 정당하게 실시되지 않을 경우 사정에 따라 법원에 제소하거나 선거민에게 호소하여 공무원을 파면한다. 구빈법위원회가 구빈세 징수자들에게 실시하려 한 중앙 감독제가 그런 것이었다.


    결론은 이렇다. 국가는 개인의 노력과 발전을 북돋우며 자극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이다.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고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 해도 결국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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