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지은이 : 뤽 페리 외(역:이세진)
출판사 : 더퀘스트
출판일 : 2015년 08월




  • 옛 철학자들의 말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여전히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불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철학의 다섯 가지 흐름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드립니다.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첫머리에: 여행을 준비하며_철학의 대모험
    1. 철학의 정체
    철학은 도덕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클로드 카플리에(이하 붉은 글씨): 철학의 대모험을 그 기원에서 오늘날까지 쭉 훑기 전에 본격적인 여행을 위해 지도와 장비를 챙겨봅시다. 전문가들도 철학의 정의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지만 그래도 우리가 어떤 범위 안에서 움직일 건지는 정해 놓자는 얘기예요. 철학의 답변은 도덕의 명령, 정치적 이상, 현자들의 가르침이 제시하는 답변과 어떻게 다릅니까?

    뤽 페리(이하 검은 글씨): 그 점을 이해하려면 먼저 중대한 구별을 짚고 가야 합니다. 중대한데 너무 쉽게 은폐되거나 잘못 해석되는 구별이죠. (아마도 인류의 태동기부터) 줄곧 우리 삶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개의 가치 영역에 기준을 뒀습니다.

    공적인 토론, 나아가 철학적 토론에서조차 그 두 영역을 한데 뒤섞는 경향이 있지만 말입니다. 한쪽 영역에 도덕적 가치가 있고, 다른 쪽 영역에는 내가 영적 가치 또는 실존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요, 정말로 철학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그 두 영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차이가 뭐죠?

    도덕적 가치의 정의만으로도 응당 책 한 권이 나오겠지만 여기서는 핵심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세상의 모든 도덕관, 그러니까 스토아학파, 부처, 예수, 나아가 공립학교의 시조들을 막론하고 모든 주요한 도덕관에는 중대한 두 가지 요구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남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들을 도덕적으로 대해야 해요(다들 알다시피 세계인권헌장은 집단 차원에서 이러한 존중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명백한 이 존중에는 선의, 친절, 호의 등이 추가되지요. 폭력, 존중 없음, 악의를 권면하는 도덕관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방금 언급한 또 다른 가치들의 영역, 다시 말해 영적인 문제들을 건드리는 영역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짚고 넘어가는 겁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종교적인 뜻으로가 아니라, 헤겔이 "영(정신)의 삶"이라고 했을 때의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 영역에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표상들,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작용이 이루어집니다.

    왜 그 영적인 영역 또는 실존적인 영역이 특히 철학의 소관이 될까요?

    상상해 볼까요? 우리가 마법의 지팡이로 요술을 부려서 모든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도덕적으로 대하게 됐다고 칩시다. 자기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이웃, 요컨대 잠재적으로는 모든 타자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선의와 친절을 베푼단 말이에요.

    그럼 인류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바뀌겠죠. 전쟁, 학살, 민족말살은 사라지고, 강간이나 도둑질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요. 군대, 경찰, 감옥은 사라지고, 어쩌면 사회적 불평등에서도 아주 악랄한 양상들은 없어질지 몰라요. 이렇게 상상하니 도덕적 가치와 영적 가치의 차이를 단박에 알 수 있겠죠?

    이 우화가 현실이 된대도, 아무리 타자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산다 해도, 우리가 결국 늙고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 소중한 존재와의 이별 같은 시련도 그대로일 테고요. 인류가 그런 유의 도덕의 마법에 걸려 엄청나게 변모해 봤자 소용없어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 우리 자신의 죽음, 안타까운 결말의 연애, 또는 반복되는 삶에서 오는 권태는 어쩔 수 없죠. 수많은 가치와 정동이 개입하는 주제들도 마찬가지예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가치들, 나는 그런 것들을 영적인 또는 실존적인 가치들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도덕적 가치는 결국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하는 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잘 사는 삶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요컨대 도덕은 인간관계상의 예의와 평화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필수불가결하지만, 우리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의 요체는 가르쳐주지 못한다 이거죠. 가령 사랑이라든가, 더 넓고 강렬한 삶, 죽음의 비극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생의 여러 시기, 죽음, 애도, 사랑에 대한 문제, 우리 자식들의 교육문제, 진부함과 권태의 문제, 이 모든 실존적 문제는 독일 철학이 영의 삶이라고 제대로 명명했던 영역, 곧 영성이 속해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문제들과 맞닿아 있다는 얘깁니다.

    필멸자에게 좋은 삶이란 뭘까요? 내가 조금 전 제시했던 얘기들로 알 수 있듯이 실존적 의미의 문제는 도덕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도덕은 당연히 좋은 삶의 필요조건입니다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도덕적 세계에 입각해서도 얼마든지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어요. 

    2.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의 다섯 가지 주요 답변은 실제로 서양사상사의 중요한 계기들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 답변들은 여타의 문명, 특히 아시아, 인도, 서아시아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그 답변들의 중요한 특징과 핵심을 재빨리 소개하고 뒤에서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대답: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
    최초의 답변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태동기부터 여러 신화 속에 암암리에 반영됐습니다(기원전 7세기 작품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만 바도 그렇죠). 그리스 철학 전통의 위대한 사상가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특히 스토아학파는 그러한 생각을 이어받아 웬만큼 세속화함으로써(신들을 제거함으로써) 개념적이고 논증적인 담론으로 옮겨냈지요(일단 소피스트, 원자론자,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반 문화는 제쳐놓겠습니다).

    이 첫째 답변은 세계가 혼돈, 곧 무질서가 아니라 완벽하게 조화로운 질서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세계를 코스모스, 곧 아름답고 선한 우주적 질서라고 불렀죠. 모든 존재는 우주의 위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연스러운 자질에 걸맞게 부여받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이제 조화로운 세계, 그 신적 질서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불멸에 참여하게 된다는 원리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추상적으로 들려요.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어 했나요?

    네,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첫째 대답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그리스인들은 과거와 미래가 인생을 짓누르는 두 가지 커다란 악이라고 여겼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는 인간이 현재에 사는 것을 방해해요. 과거가 행복했다면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가 불행했다면 스피노자의 멋진 표현대로 "슬픈 정념들", 곧 후회, 회한, 부끄러움, 죄의식에 빠지게 되죠.

    이로써 행동을 회피하고, 주도성을 옥죄고, 지금의 인생을 누리는 능력이 쇠퇴합니다. 이때 인간은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이라는 또 다른 허깨비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로마 철학, 특히 스토아철학의 시각에서 희망은 인간을 상실로 이끌 수밖에 없어요(뒷날 그리스도교가 희망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정반대죠). 희망은 인간이 지금의 현실과 맺는 관계를 왜곡할 뿐 아니라 현재의 즉각적 가치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미래에 대한 사변을 끌고 들어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동차, 머리모양, 구두, 친구, 하여간 뭔가를 바꾸면서 이제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커다란 착각이라고 봐요. 향수와 소망, 과거와 미래, 그런 건 다 무無입니다. 과거는 이제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과거와 미래는 유일하게 실재하는 시간의 차원, 즉 현재를 놓치게 하는 상상의 확대 적용일 뿐입니다. 


    제2기: 유대-그리스도교 시대_하느님과 신앙이 우리를 구원할지니
    7. 귀족주의 윤리를 향한 전면적 비판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다
    귀족주의 도덕관과는 달리, 인간의 존엄성이 타고난 재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의 행실에 달린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애초에 어떤 자질을 타고났든, 태어날 때부터 부와 편의를 얼마나 누렸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자유와 의지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납니다. 억지 평등주의를 앞세워 그러한 불평등을 부정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지요. 자명한 현실을 부정하는 셈이니 소용없고, 도덕의 관점에서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유독 힘세고 아름답고 똑똑하게 태어나는 걸 어쩌겠어요.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보통 사람이나 다운증후군에 걸린 사람보다 명석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이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윤리적 차원에서 중요한가요? 그리스도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자기가 받은 몫을 어떻게 하는가예요. 달리 표현하자면, 자질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와 그것으로 이뤄낸 일이 한 인간의 도덕성을 입증한다고 할까요.

    이 단순한 제안이 얼마나 깊은 윤리적 의미를 지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귀족주의 윤리가 굳어진 세상에서 이 제안은 명실상부한 지각변동, 제대로 평가해야 할 혁명이죠. 이로써 근대적인 평등사상, 가령 정신박약자도 뉴턴, 아리스토텔레스, 아인슈타인과 똑같은 존엄성을 지닌다는 생각이 나올 수 있었어요.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 정초』도입부에서 이 사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종교와 분리하여 세속화합니다. 그는 신 앞의 평등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 곧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평등에 이 사상을 정초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굉장하다고 생각하는 칸트 논증의 골자는 이겁니다. 타고난 재능은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이지만 인간의 존엄이나 미덕을 이루는 것은 재능 자체에 있지 않다.

    그 증거로 모든 자연적 재능은 선에 쓰일 수도 있고 악에 쓰일 수도 있다 이거죠. 명석한 두뇌를 질병, 기근, 학살에서 많은 이를 구제하는 데 쓸 수도 있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가스실을 설계하는 데 쓸 수도 있잖아요!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그게 바로 최악이다"라는 라틴어 격언도 있어요. 달리 말해, 똑똑한 사람일수록 악으로 기울면 위험하고 해로운 인물이 됩니다.

    칸트가 끊임없이 선한 의지만이 정말로 선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희한하게도, 철학자들조차 이러한 칸트의 성찰을 지나친 엄격주의, 인간의 현실과 동떨어진 경직된 도덕성으로 잘못 이해할 때가 많아요. 가령 샤를 페기는 "칸트는 순수한 손을 지녔으나 정작 손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칸트야말로 본인이 "도덕 세계의 뉴턴"이라고 봤던 루소 이후 처음으로 인간의 행위에 토대(자유와 선한 의지)와 목적성(자유의 영역 확장)을 부여했다는 의미에서 손을 고안해 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이해하고 수용하게 하는 이론들이나 타고난 자질과는 무관하게 말예요.

    그럼요, 자명한 얘기죠! 칸트는 도덕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재능 자체가 아니라 재능에 부여하는 목적성이라고 말합니다. 지성은 최선으로 쓰일 수도 있고 최악으로 쓰일 수도 있으니 지성 그 자체가 아니라 지성을 이끄는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칸트가 말하는 선한 의지고요.

    이 생각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엉뚱한 관념론적 발상으로 비판받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빤한 얘기로 치부될까 두려울 정도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일부 철학자들, 특히 스피노자 주의자들이 칸트를 비판하는 태도를 볼 때마다 경악하곤 합니다.

    그들은 칸트의 생각을 (오해하든가) 일절 거부하면서, 현실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로지 현실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만이 선하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우리는 결코 전체로서의 현실에 도달할 수 없거니와, 그 점을 논외로 치더라도 선한 의지가 개인의 도덕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아요.

    9. 자연과 율법을 사랑으로 화해시키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예수와 산상수훈으로 돌아왔습니다. 산상수훈은 유대교와 그리스 사상 양쪽 모두와의 절연을 나타내고, 우리가 살펴봤듯이 헤겔은 그 둘 사이의 대립을 풀이해 줬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월적 신성에 접근할 수 없으며, 그런 신성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적대적 자연은 지배하거나 개발하는 방식으로만 써먹을 수 있죠. 자연에 부과되는 율법의 초월성은 절대적 의무의 형태를 취하고요.

    반면 그리스인들은 신성을 자연에 완전히 내재하는 것으로 여기죠. 그 신성은 자연이나 우주의 질서와 거의 동일시됩니다. 인간은 조화롭고 올바르며 아름답고 선한 자연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법은 코스모스에서 비롯된 것이요, 코스모스의 신성한 조화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삶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예수는 또 하나의 길을 제시합니다. 자연(타고난 성향)과 율법의 화해, 그러나 이 화해의 방법은 그리스인들의 방법과 뿌리부터 다르죠.

    산상수훈을 처음부터 살펴봅시다. 예수가 갈릴리 지방을 돌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그를 좇는 군중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잘 들을 수 있게 우뚝한 봉우리에 올라가 설교를 하는데, 이때의 일은 《마태오의 복음서》5~7장에 기록되어 있고, 조금 생략된 형태로 《루가의 복음서》6장 17~49절에도 나와 있어요. 예수는 당시의 유대교 정통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겨냥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든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5장 17~20절

    일견 예수는 율법을, 가령 십계명을 전혀 바꾸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시종일관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강조하지요. 달리 말해서 예수는 율법 이하가 아니라 율법 이상을 요구합니다.

    문자에 정신을 더해야 한다는 얘기죠. 율법을 한 치 틀림없이 준수하더라도 마음이 깃들지 않으면 허사예요. 이러한 율법의 완성은 일종의 초월이고 우리를 신에게 붙잡아놓는 사랑, 그 아가페가 이 초월을 가능케 합니다. 사랑은 생기를 불어넣고, 율법을 그 본연의 정신으로 완성하며, 단순하게 실천이성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율법을 충족시키죠.

    예수는 이 설교에 이어서 유대교 율법(주로 십계명)에서 따온 예들을 듭니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러면서 각각의 경우에 문자와 정신, 진심과 기계적인 준수를 대조해 설명해요. 율법은 좋은 것이며 그 내용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는 율법을 한 자도 바꾸지 않겠노라 분명히 천명하되, 진심 없이 율법을 따르면, 다시 말해 자연과 상반되는 계명을 의무로만 여길 때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서, 아가페의 인도로 마음이 움직여서, 요컨대 칸트식으로 말하면 감성의 성향,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율법은 완성돼야 하는 겁니다.


    제4기: 해체의 시대_인간, 이상으로부터 해방되다
    15. 쇼펜하우어: 염세주의에서 행복론으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기술
    지금까지 쇼펜하우어가 급진적 염세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이렇게 뿌리부터 염세적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절망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이른바 행복의 기술을 논할 수 있게 됐나요?

    사실, 이렇게까지 인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철학에서 쇼펜하우어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의 전략은 의지라는 폭군에게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들을 찾는 거였죠.

    명확한 표상의 세계를 반박하는 것이 의지의 세계요, 그 세계에서 생의 부조리가 불거진다면 의지와 무의미의 지배에서 빠져나가는 길들을 찾아야지요. 쇼펜하우어는 세 가지 초탈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게 바로 예술이 주는 위안, 경건 연습으로서의 도덕, 평정심에 이르기 위한 영성이지요.

    실제로 예술은 우리가 충동의 삶,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지의 폭정을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위안이 됩니다(그런데 니체는 예술에서 정반대의 역할을 보지요. 그는 예술이 생의 무의식적인 힘을 막아준다기보다는 되레 그 힘을 가장 강렬하게 고양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쇼펜하우어는 또한 루소와 비슷한 경건의 도덕을 설파했습니다. 그는 이 도덕이 우리를 의지의 세계에서 구할 수 있다고, 말 그대로 일종의 구원의 길을 나타낸다고 봤죠. 그러한 도덕은 동물, 나무, 풀, 요컨대 의미 없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쇼펜하우어 사상의 이런 면모는 생태주의 철학의 근간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평정심 또는 열반으로 나아가는 영성으로만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불교 사상을 폭넓게 수용합니다. 두려움 중의 두려움이라 해도 좋을 모든 인생의 근본적인 두려움, 그건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죠. 결국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이 두려움이에요. 세상의 부조리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두려움에 좌지우지되니까요.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 전부가 죽음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그는 스토아주의자 에픽테토스와 에피쿠로스주의자 루크레티우스의 핵심 주제를 이어받고 있지요.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의 모든 사유가 아케론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죠. 아케론이 뭡니까, 지옥의 강, 다시 말해 죽음의 상징이잖아요.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종교도 없고 철학도 없을 거라고 썼습니다.

    그는 철학이나 종교나 형이상학적 불안을 극복한다는 동일한 기획에 입각해 있다고, 종교는 신과 믿음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기를 바라고 철학은 인간과 명철한 이성에 기대려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어요(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철학이 우리가 이 대담 초반에 언급했던 세속적 영성, 신 없는 구원론일 겁니다). 현대 철학자 중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신 없는 구원론을 설파한 사람은 없었죠. 비록 쇼펜하우어도 표현은 조금 완곡했지만 말입니다.

    예술, 연민의 도덕, 철학이 제공하는 위안의 역할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영적 성찰, 평정심에 도달하기 위한 성찰의 주요 이념들은 무엇인가요?

    그 이념들은 개인 개념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자란 무엇보다 개인은 죽어도 종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모든 결과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죠. 이러한 생각을 쇼펜하우어 철학의 근본 범주로 옮겨본다면, 죽음이 표상의 세계에만 있고 의지의 세계에는 없다 정도가 되겠지요.

    사실 개인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표상의 세계에 속한 의식의 허상입니다. 의지의 세계는 맹목적인 힘들의 조직이기 때문에 개인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죠. 그런데 바로 이 개인(허상)은 죽지만 의지, 생명, 종은 죽지 않아요. 의지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소멸되지 않기 때문에 현자는 자신이 개인으로서 죽을지언정(표상이라는 의식의 허상적 차원에서는 죽지만) 의지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곧 여기에 참여하는 자연의 힘을 통해서는 살아남는다는 것을 압니다. 쇼펜하우어가 쓴 대로, "항상 사는 것은 종이요, 개체는 종의 불변성과 자기동일성에 대한 의식을 통해서 기쁘게 안심하여 존재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행복의 원리가 어떻게 확고해지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개인으로서 죽기는 하지만 어차피 개인성은 허상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기쁘고 안심이 됩니다.

    스피노자 철학과도 비슷하게, 나는 인간, 동물, 식물 등 모든 존재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점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연민의 도덕과 생태보호주의가 비롯되지요. 이러한 조건에서라면 죽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시각은 특히나 우스워집니다.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개인으로서 영생을 누리게 될 거라 약속하니까요.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유대-그리스도교에 반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세속화한 모든 종류의 인격주의, 데카르트주의, 계몽주의에도 반대합니다. 그 대신 의지 수준에서 모든 존재의 공동체를 상징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으로서 불교를 (아마 스토아주의도 함께) 매우 높이 평가했어요. 그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한 우주적 질서에 속하고 영원한 코스모스 안에서 서로 이어져 있죠.

    16. 니체: 있는 힘껏 열렬하게, 생을 살아라
    니체의 허무주의 비판 chr(124)_pipe 우상을 타파하라
    우리는 이미 앞에서 철학사를 개괄하면서 니체를 해체철학의 길잡이로 삼았지요. 그래서 그의 주요 주제들은 이미 웬만큼 알고 있는데요, 일단 간략하게 종합해 놓고 좀 더 깊이 들어가볼까요.

    니체 사상의 중심에는 일단 그가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허무주의와는 전혀 다른 의미죠. 니체는 환멸에 젖어 아무것도 믿지 않는 냉소적 태도가 아니라, 생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와 이상을 추종하는 태도를 허무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니체 용어에서 허무주의는 뭔가 세상에 염증을 느끼는 자세가 아니라 되레 그 반대예요. 허무주의는 항상 현실에는 이상을, 지상에는 천상을, 이승에는 내세를, 자연법(이상적인 법)에는 실정법(현실적으로 행사되는 권리)을, 작금의 상황에는 앞으로 도래할 천국을 대립시켜 생각합니다.

    허무주의의 철학적 모태는 플라톤의 이원론입니다. 이 이원론은 가지적 세계(이데아계)와 감각적 세계(동굴의 세계, 우리를 속이는 허상적 세계)로 구분하지요. 그리스도교, 그러니까 니체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이 "서민을 위한 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미래의 낙원 대 지금의 현실로 바꿔놨을 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점에서 플라톤주의의 대중화된 완결판이죠. 가지적 세계는 투명성, 빛, 모순 없는 지성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영원한 세계입니다. 결국 쇼펜하우어가 기술한 표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죠.

    감각적 세계는 그에게 실수, 불순, 배덕의 세계이자 육체, 성, 모든 종류의 허상의 세계이며 죽음과 유한성의 세계입니다. 이 같은 대립은 모든 형이상학적, 종교적, 정치적 이상들에 유효합니다. 신, 진보, 민주주의, 혁명, 사회주의, 인권, 과학, 국가, 공화국, 그 어떤 것이라도 말이에요. 

    이러한 이상은 현재의 삶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더 참되고 고귀하고 아름답고 바람직하다는 대의에 우리의 의지와 삶을 종속시키느라 현실에 전념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니체는 이런 것들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천국이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나 우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째서 현실에 대립되는 이상에 대한 사유는 모두 허무주의로 치부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동안 세계에 등장했던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허무주의 아닙니까? 스피노자만은 예외입니다. 니체가 스피노자만큼은 정신적 형제처럼 여겼지요.

    아무튼, 니체의 기본 논지는 인간은 오로지 현실을 부정하고 깎아내리기 위해서만, 현실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만(허무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아무것도 없음에서 왔지요) 이상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 이상은 어떤 성격을 띠든 간에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한 철학자의 근본적인 직관이라고 일컬었죠. 인간은 지상에서의 삶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서 천국을 만들어 낸 겁니다.

    우리 사회를 가증스러워하기 위해서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를 약속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의 충동을 비방하기 위해서 인권을 힘주어 말하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 행동, 우리 삶이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다는 듯이 뭔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상을 만들어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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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