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고독한 행복
 
지은이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은이), 우르줄라 미헬스 벤츠 (엮은이), 홍성광 (옮긴이)
출판사 : 열림원
출판일 : 2024년 06월




  •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어차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보면서도,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를 즐기고 인생의 향유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위대한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전하는 현실적인 행복을 위한 266가지 아포리즘과 만나보세요.


    쇼펜하우어의 고독한 행복


    우리의 행복은 우리를 이루는 것에 달려 있다

    휴식 없이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진지할수록 그만큼 더 진심으로 웃을 수 있다.


    이 모든 현실, 즉 충만한 현재는 물속의 산소와 수소처럼 아무리 필수 불가결하고 밀접한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반쪽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서 기인한다. 객관적인 측면이 아무리 멋지고 좋다 해도 주관적인 측면이 아둔하고 열악하면 열악한 현실과 현재가 되고 만다. 이것은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도 날씨가 나쁘거나 질 나쁜 카메라로 찍으면 변변치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 있어, 자신의 의식 속에서만 갇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그를 도와줄 방법이 별로 없다. 무대 위에서 어떤 사람은 제후의 역할을, 다른 사람은 고문관의 역할을, 또 다른 사람은 하인이나 병사, 또는 장군 등의 역할을 한다 해도 이러한 차이는 단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현상의 핵심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똑같이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가련한 희극배우에 불과하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다. 지위와 부의 차이에 따라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행복과 즐거움의 내적 차이가 결코 그런 역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도 한풀 벗기고 나면 궁핍과 고통에 시달리는 똑같은 가련한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가장 효과적인 위로는 우리보다 더 불행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의욕과 성취 사이에서 흘러간다. 소망은 근본적으로 곧 고통이다. 성취는 금세 포만을 낳는다. 목표는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그것이 지니고 있던 매력은 사라지고, 새로운 형태의 소망과 욕구가 다시 나타난다. 그게 아니라면 황량함, 공허, 무료함이 뒤따르고, 이에 대한 투쟁은 곤궁에 대한 투쟁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고통스럽다. 소망과 충족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으면 이 둘에 의해 생기는 고뇌가 최소한으로 줄어들고, 가장 행복한 인생행로를 이루게 된다.


    취미는 향유의 지속적인 원천이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그렇지만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적어도 열 개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남는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즉 충족은 짧은 시간 동안 불충분하게 이루어진다.


    심지어 최종적인 충족 자체도 겉보기에만 그럴 뿐 소망이 하나 성취되면 즉시 새로운 소망이 생긴다. 이는 마치 거지에게 늘 던져주는 적선이 오늘 그의 목숨을 이어주어 고통을 내일까지 연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의식이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여러 욕망의 충동에 내몰려 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지속적인 행복도 마음의 안정도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좇거나 피하고, 재앙을 두려워하거나 기쁨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이 요구되는 의지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의식을 충족시키고 움직인다. 그러나 마음의 휴식 없이 진정한 행복은 불가능하다.



    자신만의 믿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우리 행위의 수행자이다

    모든 위로의 시작은 인간이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사람이 실제로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는 자신의 표상(쇼펜하우어 철학에서 ‘표상’이란 오감,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의해 인지되는 대상을 말한다.)으로서의 세계다. 따라서 그는 그 세계의 중심이다. 각자는 모든 것의 중심이다.


    모든 생명체 안에는 세상의 완전한 중심이 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기심 또한 이러한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죽음으로 생명체가 소멸한다고 믿는 것은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모든 현존은 오직 죽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 최종적이고 근본적인 비밀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이 내부에 가장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고, 모든 사물의 본질을 한 가닥의 실로 파악할 수 있다.


    물리학적 진리는 외적으로 매우 뜻깊은 부분이 많을지 모르지만, 내적인 진리는 부족하다. 이것이 지적·도덕적 진리의 특권이다.


    인간의 인식과 통찰력을 증진하려고 노력할 때 사람들은 끌어당겨야 할 짐의 저항과 마찬가지로 모든 노력에 맞서 땅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시대의 저항을 항상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더라도 자신만의 진실이 있다는 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진실은 동지인 시간이 합류하자마자, 오늘이 아니라면 적어도 내일에라도 승리를 완전히 확신할 것이다.


    모든 위로의 근거와 시작점은 인간이 무에서 생겨나지 않았다는 가르침이다.

    의식에 관한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책임질 수 있다는 효능감은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의식은 자신이 행동의 수행자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존재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면, 즉 책임질 능력이 있으려면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양심이 말하는 책임과 책임 전가성으로부터 의지가 자유롭다는 매우 확실한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사실로부터 다시 의지는 본질적인 것 자체이며, 단순히 행동이 아닌 인간의 현존과 존재로서 그의 고유한 면모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 원형, 의식하기, 보다 높은 예술

    -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위해 붙인 촛불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빛난다. 모두를 위해 생각하고자 한다면 그대 스스로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의욕과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성격을 보여줄 수 있고, 올바른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밤은 모든 것을 검은색으로 물들여 놓는다. 때문에 잠들기 전이나 밤에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사고는 꿈을 꿀 때와 거의 비슷하게 사물을 심하게 일그러뜨리거나 왜곡시킨다. 게다가 신변에 관련된 일일수록 사고가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끔찍해진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모든 끔찍한 형상이 꿈처럼 사라져버린다. “밤에는 색이 물들어 있지만, 낮에는 하얗다”라는 스페인 속담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지만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녁이 되면 분별력은 벌써 눈과 마찬가지로 대낮처럼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 시간은 중대한 문제나 특히 언짢은 문제를 성찰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아침이 제격이다.


    아침은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일이나 육체적인 일을 막론하고 어떤 일을 할 때도 예외 없이 적합하다. 아침은 하루 중 청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명랑하고 싱싱하며 경쾌하다. 기운이 넘쳐 뭐든지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있다. 늦잠을 자서 아침을 단축하거나 쓸데없는 일이나 잡담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아침을 인생의 정수라 간주하고 어느 정도 신성시해야 한다. 반면에 밤은 하루 중 노년에 해당한다. 우리는 밤이 되면 힘이 빠지고 말이 많아지며 경솔해진다. 하루하루가 조그만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매일은 깨어남인 출생으로 시작해, 죽음인 수면으로 끝나는 작은 삶이다. 그러므로 잠드는 것은 나날의 죽음이고, 날마다 깨어나는 것은 새로운 출생이다. 그러니 깨어나는 일을 완전히 해내고 싶을 때, 일어날 때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출생의 고통으로 간주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신은 본질적으로 자유민이지 부역자가 아니다. 정신은 자신이 좋아서 어떤 일을 기꺼이 하고 그것에 빠질 뿐이다.


    매일 아침 깨어날 때 의식은 백지상태지만 금방 다시 채워진다. 먼저 전날 밤의 주변 환경이 다시 우리에게 들어와, 바로 이 환경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전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그 환경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하여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빠르게 불러일으켜, 어제 몰두했던 모든 일이 다시 눈앞에 존재하게 된다. 정신 건강은 이런 일이 제대로 일어나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의 강점과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탐구했다면, 뛰어난 천부적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여 온갖 방식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항상 재능을 발휘하기에 적합하고 유효한 쪽으로 나아가되, 천성적으로 소질이 거의 없는 것은 추구하지 말고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우리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을 시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지점에 도달한 사람만이 항상 신중하고 온전히 그 자신이 될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알기에 자신을 결코 곤경에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때때로 자신의 강점을 느끼는 기쁨을 함께하며, 자신의 약점을 상기시키는 고통, 즉 아마도 더없이 큰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굴욕감은 거의 겪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가치와 무가치가 결정된다면 비참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웅이나 천재의 삶도 그의 가치가 명성에, 즉 타인의 갈채에 의존한다면 역시 비참한 삶이다. 오히려 모든 존재는 그 자신 때문에 살아가고 존재한다. 그 때문에 또한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한 사람을 이루는 것은 어떤 종류와 방식이든 무엇보다도 주로 독자적인 그 사람 자신의 모습이다. 여기에 큰 가치가 없다면 그는 별로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타인의 두뇌에 비친 그 사람의 모습은 부차적이고 파생적이며 우연에 내맡겨진 것이라서 참된 본질과는 간접적으로만 관계 맺을 뿐이다. 대중의 두뇌는 참된 행복이 머물기에 너무 참담한 무대다.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곤 환영과 같은 행복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반적인 행복의 전당에는 얼마나 잡다한 무리가 모여 있는가!


    어떤 사람이 무엇보다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사상가는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사고하는 사람과, 남을 위해 사고하는 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전자의 사람들이 참된 사상가이며,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서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다. 그들에게 생활의 즐거움과 행복은 바로 사고에 있기에, 그들만이 사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후자의 사람들은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그럴듯하게 드러내 보이기를 원하고, 그리하여 세상 사람으로부터 얻기를 기대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다.



    객관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위대하다

    : 자신과 타인과의 교제에 관하여

    - 현재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조심해서 행동하고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조심함으로써 손해와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아량에 의해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있다.


    올바른 개념으로 인도된 행동은 결과적으로 의도한 현실과 일치할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자기 행동거지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나와 타인의 처지, 상태, 사정이 같지 않고 따라서 두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해도 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충분히 숙고하고 날카롭게 통찰한 후에 자신의 성격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독창성은 실천의 문제에서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행하는 일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은둔적인 생활 방식은 우리의 정서적 안정에 전적으로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되어, 그들의 이러저러한 견해에 계속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좋은 사회는 어디에나 있고, 꼭 필요하며, 무척 제한적이다.


    작은 일에 가차 없는 사람은 큰일에도 무자비할 것이다. 성격의 작은 특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나중에 더 큰 특성을 가진 성격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를 비난해야 한다. 같은 원칙에 따라, 사소한 일로라도 나쁘거나 비열한 성격을 드러낸다면 소위 좋은 친구와도 즉시 헤어져야 한다. 그래야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고 있는 매우 나쁜 속임수를 방지할 수 있다. 배신자들 사이에 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우리가 타인의 견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 그러한 견해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는 것은 적당한 정도를 초과하므로, 타인의 태도에 대한 이런 관심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광기 또는 오히려 선천적인 광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행동을 할 때 거의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견해에 신경을 쓴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여태까지 염려하고 불안해한 이유의 거의 절반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상처받고 너무나 병적으로 민감한 우리의 모든 자존심의 밑바닥에, 또한 뽐내고 뻐기는 태도와 모든 허영과 허세의 밑바닥에도 그러한 우려가 자리하고 있다. 이 같은 우려와 병적인 집착이 없다면 사치가 지금의 10분의 1로 줄어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 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을 느낀다. 그 대신에 우리는 가끔 "이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이때 잃어버리는 것은 재산, 건강, 친구, 애인, 배우자, 아이, 말, 개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대체로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러한 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유한 식으로 사물을 바라본 결과 첫째, 우리는 그러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에 즉시 예전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고, 둘째, 잃어버리지 않도록 온갖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친구를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식들의 건강에 유의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지로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해 우울한 현재를 밝게 하려고 하거나 신기루와 같은 수많은 희망을 생각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희망은 환멸을 품고 있어 냉혹한 현실에 산산이 부서지면 절망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고통이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지려고 하지만 가진 게 없어서 생겨난다. 이러한 통찰에서 가능한 한 의욕을 없애는 것이 스토아주의의 정점이고, 삶의 지혜 중 으뜸이다.


    어리석은 자는 삶의 여러 향락을 좇다가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현자는 재앙을 피한다.


    뛸 듯한 기쁨이라는 것도 모두 오류이자 망상이다. 모든 소유물과 행복은 단지 우연으로부터 빌려온 것에 불과하므로, 다음 어느 순간에 다시 돌려달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그러한 망상의 소멸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고통도 망상도 오류에서 비롯된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다. 현자에게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환희도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떤 사람에게 실천 없이 그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지혜는 색과 향기로 다른 식물을 흥겹게 하지만 열매를 맺지 않고 떨어지는 장미와 같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료하게 존재하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어떤 개념 뿐인 이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다가 그 개념 없이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몇 개념이 있다. 예컨대 지혜가 그러하다.


    ‘지혜’는 내 생각에 단순히 이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완벽성도 나타내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지혜를 사물 전반에 대한 완전하고 올바른 지식, 즉 사람에게 완전히 스며들어 어디서나 그의 행동을 인도하는 지식이라고 정의하겠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포기할 때 이익을 얻는다.


    덕은 의지의 특성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혜는 무엇보다 지성에 속한다. 가장 위대한 지혜는 현재를 즐기고 현재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현실만이 실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사고의 유희에 불과하다.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 우리는 외부적 영향에 의해 반도덕적 충동을 일으키는 감정적 자극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원칙들에 맞서는 동기와 상관없이 그 원칙을 고수하고 준수하는 일은 극기이다.


    물리적 측면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일은 아무리 멀리서 행복하게 추구한다 하더라도 암울한 결과만 남는다. 도덕적인 측면에서만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심층이 사색을 위해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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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