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콜럼버스’로 불리는 그가 기존의 철학 개념을 비판하고 내놓은 이성과 경험의 개념은 획기적이었다. 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것만큼이나 철학의 지평을 넓혔다. 그동안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초월론적 차원을 발견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전복시켰다. 이는 감각적인 발견이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생각의 출발선에서 사회와 관계, 현상과 법, 양심과 도덕, 경험과 사고 등 한 사람에 대한 탐구가 집대성된 결과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지럽고 혼란하고 어려운 상황은 계속된다. 지나고 보면 역사에 남는 굵직한 사건만 기억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 비슷하지만 다른 고통과 역경, 시련을 마주하면서 극한 진통을 겪어내면서 자기 삶을 진행시킨다. 살아야 한다. 버텨야 한다, 끝까지 달려야 한다고 이를 악물지만 흔들리는 세상의 파고에 바로 설 자신을 잃는다. 이 시점에서 해답 없는 질문을 쏟아낸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다른 인생으로 대체할 수 없는 오롯이 자기만의 삶이다. 백사장에 뿌려진 한 톨의 모래에 불과한 ‘나’이지만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세상을 똑바로 살아가야 한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고 싶다. 그렇다면 어디를 바라보고 무엇에 기대야 하는가. 그 답을 찾고 싶다면 ‘인간’에 집중하여 다양한 층위를 분석하고 조망하고 정리하여 내놓은 칸트식 해법을 보자.
■ 저자 이라야
문학박사. 아동ㆍ청소년 책 작가로 활동하며 철학자들을 만나기 위해 책으로 나들이 가는 사람이다. 인간 존재의 탐구에서부터 현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각도의 시각과 새로운 인식을 캐내는 철학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발견하고 캐낸 값진 논리를 들여다보며 그 가치를 확인하는 것을 즐기며,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고민하는 지점에서 먼저 고민하고 풀어준 철학자에게 매료되어 그와 동행하기를 좋아한다.
특히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은 칸트는 ‘이성’을 깊이 보여주는 등불이기에 나들이 나선 길을 늘 밝혀준다. 조금씩 밝아지는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얘기 나누길 즐기며 더불어 사는 기쁨을 전하고 있다.
독자에게 가 닿은 책으로 《퍼스널 리셋》, 《올드 보이 선생님》, 《미확인 바이러스》, 《가짜 정우 진짜 정우》, 《수상한 캠프》, 《기막힌 효도》 등이 있다.
■ 차례
prologue
만만찮은 세상에서 가장 사람답게 사는 법
제1장 현명함을 위하여
순수함으로 울타리를 치지 마라
사후 ‘천국’보다 현세의 ‘오늘’을 누리는 삶
자기애가 넘치는 금쪽이의 훈련법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나로 인한’ 삶으로의 변화
‘선’이 보편 법칙이 되면 놀라운 세상이 펼쳐진다
‘살아간다’는 것이 곧 목적이자, 절대적 가치가 된다
부정당한 나의 선함을 읽어낼 ‘신’의 존재
편협한 ‘끼리끼리 문화’ 속의 당신은 맹인이 된다
‘세상’이라는 놀이터에서 이성적 사고와 신나게 뛰어놀기
아는 만큼 세상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제2장 바른 가치를 위하여
마음속 죽은 양심을 깨우는 선한 죽비 소리
마천루를 오르는 가장 중요한 방법, 첫 계단 밟기
자유에게 ‘자유’를 선물하자
부딪히고 깨지고 새살이 돋으며 만들어지는 단단한 사고
갈등의 깊이만큼 성숙해진다
내 삶의 기준으로, 나다움을 만들어 가는 세상
‘Only one’, 단 하나의 당신은 오직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
북극성처럼 불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도리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시선
무엇에 감탄하고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내면의 흔들림이 심할수록 자기 안의 천사에 의지하라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고 눈과 귀를 열어라
제3장 자신을 위하여
새장을 벗어나 창공을 향한 자유의 날갯짓
실수도, 실패 앞에서도 서슴지 않는 당찬 발걸음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성은 자기 마음대로 기를 수 있는 화초가 아니다
‘해야만 하는 일’은 곧 내가 반드시 ‘할 수 있는 일’
소소한 감사를 잊는 행위가 곧 사악함이다
논리 있는 주장은 콩을 팥으로 만들 수 있다
수천 년이 지나도 굳건히 건재할 권선징악의 윤리
명예를 얻을 수 있다면 흔들리는 갈대가 되지 마라
행복할 방법을 찾는다면 손에 책을 들어라
표현의 자유 앞에서 망설이지 마라
제4장 우리를 위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땅에 묻어두지 마라
가늠할 수 있는 행복은 손에 쥐면 시시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할수록 당신의 존재가 빛난다
뒤틀린 내면으로는 올곧은 형상을 만들 수 없다
행복은 바로 여기, 지금 이 시간, 당신과 함께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무시무시한 방관자의 터널
‘대단해!’라는 그 쉽고도 힘이 되는 한마디
잔뿌리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나무를 지탱한다
절대적인 진리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법
촛불의 심지처럼 곧은 의지로 세상을 밝혀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뒤집을 선무당이 된다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사람이 주는 가르침을 배워라
제5장 합리적 사고를 위하여
부의 비결은 재산의 소유가 아닌 재능의 발휘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이고 들린다
새로움이 발현되는 곳은 늘 있던 바로 그 자리
유난은 당신만 떠는 게 아니다. 누구나 그렇다
권력의 그늘막을 벗어나 오롯이 홀로서기
경험은 사고와 판단의 탄력성을 높인다
욕구는 받아들이고 무한대로 부풀어 오르는 욕망은 잠재우자
쉼을 주는 일상의 공백이 신선한 바람을 느끼게 한다
생각의 붓을 들어 세상의 도화지에 삶을 그려라
상상만으로도 충만한 행복이 찾아온다
제6장 바라는 이상을 위하여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자유와 책임은 당신 몫이다
무조건 희생만으로 평화는 유지되지 않는다
용도가 분명한 그릇은 쓰임이 한정돼 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다
자신의 위풍당당함은 지식에서 나온다
자부심은 어디에서도 팔지 않고 누군가 공짜로 주지도 않는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할 때 진심이 통한다
지식을 켜켜이 쌓아야 삶이 조각된다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신성함에 손을 내밀라
여유를 찾아 떠난 여행조차 쉼을 얻기보다 경제적 한계, 시간의 제한 등 치열한 현실감을 맞보기 십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칸트가 손을 내밉니다. 길을 찾아 떠나고, 숨을 내쉴 숨구멍을 찾고 삶을 밝혀줄 깊이 있는 시선과 만나보세요.
나는 오늘 칸트를 만나 행복해졌다
현명함을 위하여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나로 인한’ 삶으로의 변화
어떤 이들은 칸트가 이상적 도덕법칙과 법치국가만 강조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칸트 철학의 핵심은 ‘자기 의지’이다. 자신의 이성, 교육, 양심, 자유, 평화, 사고는 누구도 강제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영역으로 지극히 개인적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 판단에 의한 행동은 자신의 몫이며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된다. 대표적으로 언어(말)로 본다면 혼자 하는 독백이나 혼자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아니라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다. 막무가내로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 사회적 관계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말과 행동을 조종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때는 말과 행동에 진솔한 마음을 담아 전한다. 반대로 상대에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대립되는 의견을 말할 때는 객관적이고 단호한 어휘를 구사한다. 이렇게 상황과 관계에 따른 감정과 사고의 영향으로 어떤 행동과 말이 결정된다.
칸트는 우리 행동의 기준이 누구나 수긍할 만한 ‘보편’의 범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수가 행복해지는 윤리를 선택하고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훈련된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실행될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일깨우는 것이다.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보면 공익광고나 언론에 나오는 미담도 우리 삶을 바른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함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보편의 윤리적 의식을 주입해 주는 것이다.
능동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의지를 발동시켜 자기 나름의 행동의 원칙을 세우고 실천한다. 자신을 위한 일이지만 결국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바람직한 행동이 될 때 보편성을 획득하고 행복에 이르게 된다. 이를 위해 자기에게 유리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 자기 보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자기애를 실현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망쳐버릴 사회를 ‘나로 인해’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인식하고 개선해야 우리도, 사회도 성장한다. 스스로 책임감을 강화할 때 더불어 살기 좋은 사회가 이루어진다. 이는 불변의 진리이다. 칸트는 이 원리를 우리의 삶에 제시하며 개인의 의지로 실천하기를 바랐다.
바른 가치를 위하여
다름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시선
차별금지법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다. 이 법의 범위는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 등 일상의 전반에서 일어나는 차별이다. 누구나 들었을 때 ‘인간은 자유롭고 동등한 존재’에 적용되는 이 법이 아직 입법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의된 이래 출범하는 국회마다 발의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규정하는 법안은 통과한 적이 없다. 법안이 발의될 때마다 인식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전반적인 차별금지법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성별, 인종, 나이, 장애, 외모, 출신지, 국적, 가족 형태, 성적 지향, 성 정체성, 학력, 종교 등 이렇게 많은 분류에서 우리의 차별적 시선이 꽂힌다. 하지만 차별적 시선이라고 해서 혐오나 미움, 증오, 조롱처럼 극단적인 꺼림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불편해하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 회피나 동정의 시선, 무시나 폄하도 여기에 해당한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품는 마음까지 포함된다면 모두 ‘차별’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조차 그들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된다.
교육이나 인식의 전환으로 차별의 정도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말끔히 해소되지는 못했다. 간혹 TV 프로그램을 보면 차별당한 당사자들이 나와 사례를 들려줄 때가 있다. 그걸 보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폭언이나 따가운 시선, 편파적인 언행이나 불공정한 대우가 아직도 자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동등한 인격체라는 개념 자체가 파고들 틈이 없다.
당신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재, 우리 사회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니 자신은 이런 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양에서 동양인이 차별받는 상황에 분개한다. 자신과 관계된 혹은 주변인이 차별받았다고 하면 그 상대를 욕한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게 차별에 관한 문제, 인간 존엄성의 문제이다. 다름을 다르게 보지 않는 시선이 필요하다. 다름을 인정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는가. 당신이 차별적 시선을 꽂는 그도 당신과 동등한 존재이다. 다양성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있다. 다르지 않으면 사회는 유지되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다.
현재 차별받는 사람들의 시위나 투쟁을 조금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주자. 그만큼 그들은 절실하며 호소할 길이 막혀있을지 모른다. 일시적 관심과 단편적 조치로는 해결이 안 되는 문제를 껴안고 살며 힘들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나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시위하기 전에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들의 시위로 그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다. 장애인이 아니기에 알 수 없었던 사회의 문제의식에 대해 한 사람의 인식을 전환하도록 이끌어 준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사람들이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해나간다면 우리 모두 자유롭고 인간으로 부여받은 존엄성을 모두 보호받지 않을까.
자신을 위하여
행복할 방법을 찾는다면 손에 책을 들어라
행복의 조건은 무궁무진하다. 경제력, 학벌, 좋은 직업, 외모, 능력, 성공, 성취감 등. 여기서 더 세분하면 다양하고 그 층위 또한 무수히 많다. 어떤 사람은 작고 소소한 부분에도 행복을 느낀다면 누군가는 남부러워하는 것을 가지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차이는 만족도에서 오는데 무엇에 집중해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알아둘 것은 즐거움과 행복은 동반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지식이 인간의 행복도를 높여준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를 행복의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을까. 나아가 이 말에 당신은 동의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지식은 ‘공부’로 인식된다.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상 십 대를 죽어라 공부하며 보내야 한다. 좋은 대학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공부를 못 하면 잘하는 아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된다. 학교뿐만 아니라 친구 사이에서도 심지어 부모에게까지 인정받기 힘들다. 그러나 공부만 잘하면 학교를 빛내줄 애, 자랑스러운 내 친구, 효도하는 자식이 된다. 그래서 싫든 좋든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식을 머리에 쑤셔 넣으며 많이 알기 위해 달달 외우고 머리를 굴려 문제의 정답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머리에 쌓여 지식으로 자리 잡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렇게 밤낮없이 한 공부는 지식이 아니라 정보다. 그러니까 쉴새 없이 정보를 머리에 입력한 것이다.
이제 ‘지식=공부’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다. 정보에 사고가 덧입혀져 얻은 하나의 성과로 여기에는 단편적인 사실과 경험적 의식이나 자각이 뒷받침된다. 이를 바탕으로 자기 가치관이나 삶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예로 ‘배고픔’을 생각해 보자. 공부에서 배고픔은 ‘위가 비어있는 상태’이다. 즉, 몸이 생명을 유지하는 욕구의 충족을 원하는 것이다. “이때 몸에 필요한 양분을 공급해 줘야 하는데 단백질, 탄수화물, 무기질 등 각종 영양소로 제공해야 이를 해소할 수 있다. 단백질이 들어있는 식품은 ….” 이런 식으로 교과서나 학습서에 서술된다. 그러나 이 배고픔을 경험에서 가져와 보자. 다이어트를 위한 공복을 선택했더라도 좋다. 먹지 못해 느끼는 음식에 대한 갈망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괜찮다. 이때의 느낌과 감정을 되살려 보자. 필요한 것은 음식이고 참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을 안다. 정보 외에 몸의 변화와 움직임까지 학습되어 지식이 된다. 이는 배고픔의 상태를 아는 것을 넘어 이해를 부른다. 누군가 며칠 굶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빵을 건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기아에 이르고 사망할 수 있다는 이론적 ‘정보’와 배가 고팠던 경험이 융합하여 만들어낸 지식이다. 이 지식이 자기 행동을 이끌어 배고픈 사람을 돕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식이며 칸트가 말하는 행복을 증진시키는 도구이다.
자신이 가진 빵을 남에게 주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행복은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겠다. 정신적 행복이 더 충만함을 가져다준다. 당신은 빵을 건넸지만, 그는 생명을 건네받았다. 그 사람은 물리적인 배를 채웠지만 당신은 인간애를 실현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로 인해 당신 삶은 훨씬 풍요로워지게 되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행복해질까’를 고민하고 있다면 당장 지식을 충전하라. 당신은 이미 많은 정보를 가졌다. 이를 경험이나 사고로 활성화시켜 행복의 충전량을 높이자. 지금보다 더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비결이다.
우리를 위하여
잔뿌리 하나하나가 모여 거대한 나무를 지탱한다
집 주변에 난 풀을 뽑았다. 두두둑, 풀뿌리가 움켜잡고 있던 흙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손에 전해지는가 싶더니 너무나도 쉽게 뿌리를 드러냈다. 정체 모를 그 풀은 사전에서 찾아보니 애기똥풀이었다. 약으로도 쓰인다는데 굵직한 중심 뿌리에서 가느다란 줄기의 뿌리가 수십 개 뻗어 있고, 그 뿌리에 실처럼 가는 뿌리들이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이 실오라기 같은 뿌리들까지 합세하여 이 풀 한 포기를 키워낸 것이다. 이유 없이 달린 것이 없으니 이것들 하나씩 끊어내면 결국, 이 애기똥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이와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룬다. 큰 틀에서 보면 개인과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가 되고 세계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간과하고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산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인식이 삶의 기저에 깔려있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는 젠가라는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젠가는 보드게임의 한 종류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게임이라고 한다. 직육면체 나무토막을 기둥처럼 쌓아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나무토막을 하나씩 빼낸다. 그리고 그 빼낸 나무토막을 맨 위에 다시 얹는다. 어느 지점의 나무토막을 뺄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그러나 나무토막을 뺐을 때 기둥이 무너지면 진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이 게임에서 처음에는 어떤 나무토막을 빼도 기둥은 쓰러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구멍이 생겼을 때는 젠가 하나를 뺐을 뿐인데 기둥이 와르르 무너진다. 바로 이것이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증명해 주고 있다. ‘나 한사람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사회에 여러 구멍을 만들고 결국 사회 전체의 질서가 또는 시스템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거리 화단이나 빈터를 보면 꼭 들고 다니다가 마신 음료 잔이 놓여 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러한 현장은 절대 의식이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그런데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주위에 상당하다. 손에 들고 다니기 불편하고 나 하나쯤 버린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 없다는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슬며시 내려놓은 것이다. 쓰레기 문제를 건드리려고 한 얘기는 아니다. 우리 의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회에서 당신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개개인이 깨어있는 사고의 바른 가치를 실현한다면 우리 사회는 밝아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질서가 무너진 현장에는 ‘나 하나쯤이야.’라는 의식이 쓰레기처럼 쌓여있다. 나사 하나를 잘못 조이면 기차가 멈추고 다리가 무너진다. 그러기에 ‘나 하나’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잔뿌리들이 없으면 어떤 식물도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다. 성장이 정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열매 맺지 못한다.
칸트는 자신이 스스로 개선의 의지를 보일 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미래 세대까지 이어지는 이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이제부터는 ‘나만이라도!’라는 개념을 장착하자. 나로 인해 달라지는 세상을 보는 일, 생각만으로도 흐뭇하지 않은가.
합리적 사고를 위하여
아무리 기를 써도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이고 들린다
사건과 사고가 많은 요즘이다. 좁게는 개인적인 일상의 문제부터 넓게는 국내 사회, 정치적 이슈까지. 더 광범위하게는 세계적 상황이나 쟁점까지 우리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역사적 흐름에 관심을 끄고 살고 싶지만, 지구촌 어딘가에서 벌어진 전쟁이 유가에 영향을 주어 내 지갑에 타격을 주고, 국가 경제나 기업 활동에 제한을 불러오기에 관심 밖으로 밀어낼 수도 없다. 자기 일에만 충실하고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만족하며 유유자적 살고 싶지만 이조차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휩쓸려 살 수도 없다.
이럴 때일수록 시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주관이나 관점, 가치관을 확고히 가져야 한다.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야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긍정하고 수용하는 사건에 대해 왜 그런지 이유가 분명해야 하며 그것이 주는 효과나 그로 인해 유발되는 결과까지 생각하며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에 관한 문제가 정치적 이슈라고 해보자. 폐기물, 오염수, 전력 부족, 미래 세대 등 자신의 일상과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당장 눈앞에 쌓인 업무와 부담되는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닌데 여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래서 관련된 사람들이 잘하겠지 하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미래와 지구를 위한 일인지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문제에 관한한 자기 관점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누군가 의견을 묻는다면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라고 반문하지 않을까. 최소한 자신은 바빠서 지금 그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핑계대고 싶으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 어떤 문제든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면 모든 이슈와 정책에서 비껴갈 수 없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명의 주축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비판적인 견해의 사건에도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와 인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론이나 대중의 선동, 심리 유도에 휘말리면 자기 삶의 방향성이 흔들린다. 칸트는 사회 구성원의 존재로 살아갈 때 이러한 점을 우려했다. 만약, 그의 우려대로 ‘내용 없는 생각’과 ‘개념 없는 직관’에 의해 좌우된다면 가볍고도 자기중심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거나 실속 없는 헛된 생각은 오랜 시간을 투자해 깊은 사고의 끝에 이르러도 자기 행동의 동력을 마련하지 못한다. 추상적이며 모호해서 자기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자신이 본대로만 믿는 직관도 현상만 보게 되어 왜 그런지 원인까지 가닿지 못한다. 심사숙고할 지식이나 정보의 기반이 충분하지 않기에 정확한 사리를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나 무념을 인정하지 못하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우려와 반대로 ‘내용 있는 생각’과 ‘개념 있는 직관’은 어떻게 갖춰지게 될까. 매우 어려운 지점이지만 일상에서 터득할 방법도 많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후험적後驗的 감성을 키우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 본 사람이 이별 후 남겨진 이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감정과 정서, 감성을 두루 섭렵하기는 어렵다. 무식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경험 부족으로 무지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독서’를 추천한다. 장르와 분야에 관계없이 책에는 더 넓은 세상과 다양한 사람이 들어있다. 인류의 역사가 걸어온 사건은 물론이고 사회적 배경이나 인간의 심리까지 통찰할 수 있다. 또한, 소설이나 문학 장르는 사회적 약자나 인간의 심리, 인간관계나 내면의 갈등까지 담아내 한 사람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더 나아가 논픽션 책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현상이나 미래, 전망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책들을 읽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개념이 정리된다.
자신이 아는 만큼 세상은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법이다. 사회적 약자의 소리를 들어본 자들이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기후 변화의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일회용 빨대 하나를 덜 사용한다. 자신에게 의견과 주장이 생기는 것은 자기 생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길이다. 여기에 깊이를 더하자.
바라는 이상을 위하여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 신성함에 손을 내밀라
누군가 ‘나는 신성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정할 수 있는가.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하다.”라는 의미로 자신을 대우해 달라는 말이니 우리는 헛웃음을 칠 것이다.
그런데 가끔 잘못된 종교관이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 집단의 최고 우두머리를 신성하게 모시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된다. 그들은 그 우두머리의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한다. 자신처럼 열등한 사람이 그 존재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불손하다는 것이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기 어렵지만 분명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독재국가의 정치적 이념으로 신성시하는 것이라면 특수한 문화로 이해한다지만 인권과 평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한 개인을 신성시하는 일은 이해되기 어렵다. 더구나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과 전문직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에는 ‘그들이 왜?’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정말 그들은 그 존재를 신성하다고 믿는 것인가.
100년 전 칸트는 인간은 신성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성별의 구분 없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도 신성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면 칸트는 기독교적 사고가 뿌리 깊은 지역에서 태어나 신앙심 깊은 부모에게 양육되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적 세계관은 그의 삶의 지침이 되었다.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유일신의 관점과 인간은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성할 수 없다.
신성하려면 하나님과 같거나 비슷한 경지에 올라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은 탐욕과 정욕을 버릴 수 없고 성경에서 금하는 죄를 짓게 마련이므로 절대로 신성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실질적으로 법에 저촉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나 미움과 시기, 질투, 욕심 등 고결함에 위배되는 생각을 많이 했기에 개인적으로 인간이 신성하지 않다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아마도 사고와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그렇다고 공감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고 험담으로 상대를 비방하거나 헐뜯었을 것이다. 기억에 없다면 스스로 거짓말 한 번쯤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를 잘 아는 칸트는 그래서 인간은 신성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격에 깃든 ‘인간성’은 신성하다고 보았다. 칸트가 말하는 인격은 물건(物件, 동물도 포함된다)과 구별되는 자아의식이다. 이런 의식의 인간 본성은 신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양심’을 생각해 보자. 상대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심장의 두근거림, 험담했던 상대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줄 때의 미안함, 커닝한 뒤 잘 나온 시험점수를 받아든 민망함 등 우리의 양심은 자신의 잘못을 고해하게 만든다. 입 밖으로 내어 처벌받거나 용서받지 않아도 자신의 본성에 의해 가책받는다. 칸트는 이러한 우리의 인간성이 고결하고 거룩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추구하고 지향한다고 보았다.
경쟁의 시대, 이타주의보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 물질이 인권보다 앞서는 시대, 사회적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되살려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각자 마음에 품고 있는 신성함을 밖으로 표출해 내야 한다. 시간이나 경쟁에서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나’로 인해 세상이 따뜻해진다면 기꺼이 그 신성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칸트의 말대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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