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벗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좋은 벗을 사귀고 참된 교유를 쌓을 것인가? 친구의 정의, 교우의 기쁨, 올바른 사귐의 도리부터 진짜 벗과 가짜 벗을 구분하는 방법까지. 키케로, 세네카,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그리스·로마 시대의 격언과 일화, 《성경》과 《이솝우화》 등 우정에 대한 서양 고전을 총망라했다. 서학과 유학이 다르지 않음을 증명해 중국에서 크게 유행했으며,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토대를 마련한 책이다. 조선에 유입된 후에는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 등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시야를 넓히고, 당파와 신분으로 경색된 조선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조선에서 《교우론》이 본격적으로 읽히고 우정론이 유행한 것은 18세기 후반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 이른바 연암 그룹에 의해서였다. 마테오 리치가 《교우론》을 펴내고 200년 가까이 지나서야 이 책이 조선에서 전폭적으로 수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조선에는 동서남북으로 당파를 나눠, 같으면 무조건 한편을 먹고, 다르면 미워하고 배격하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난무했다. 사농공상으로 신분을 가르며, 사(士)마저 당색과 적서(嫡庶)로 차별했다. ‘내 영혼의 반쪽’인 벗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세상에서 연암 그룹은 서양 고전이 전하는 우정의 가르침에 열광했다. 그들은 개방적이었던 국제정세에 힘입어 중국의 선비들과 우정을 맺었고, 숱한 편지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을 꿈꾸었다. 서양 선교사의 저작을 계기로 신분의 경계,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 수평적 우정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 저자
마테오 리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자는 서태(西泰), 호는 시헌(時憲)이다. 1552년 이탈리아 마체라타에서 태어나 1571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해 1583년 광동성 조경(肇慶)에서 정식으로 전교를 시작했다. 승려 복장 때문에 봉변을 당한 후 자신을 ‘승(僧)’이라 일컫던 불교 코드를 버리고 유복(儒服)으로 복장을 바꿔 ‘도인(道人)’이라 칭하는 등 유학의 접근법으로 전교의 방향을 전환했다. 1601년 북경에서 명나라 만력제(萬曆帝)를 알현했고, 서양의 학문을 소개해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 중국 고위 관료들과 교류했다. 1610년 5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 세계지도에 해설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등을 펴내 초기 서학을 중국에 알린 서학동전(西學東傳)의 선구다.
‘교우(交友)’는 ‘벗과 사귄다’는 의미로, 《교우론》은 황족 건안왕(建安王)의 요청으로 저술되어 1599년 간행되었다. 서양 문화에 대한 중국의 거부감과 경계심을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고 우정의 주제에만 집중했다.
마르티노 마르티니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명은 위광국(衛匡國), 자는 제태(濟泰)다. 1614년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태어나 1631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1643년 마카오에 도착해 절강성 난계(蘭谿)에서 전교를 시작했다. 유학이라는 현지적응주의적 접근법과 관련해 교황청으로부터 교리를 위배했다는 오해를 사 로마로 소환되었으나, 교황을 설득해 1658년 다시 마카오로 돌아왔다. 1659년 북경에서 청나라 순치제(順治帝)를 알현했다. 이후 항주에 장대한 성당을 건립했고, 성당이 완공된 1661년 4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 통사를 최초로 서방에 알린 《중국역사초편십권(中國歷史初編十卷)》, 중국 지도를 담은 《중국신지도집(中國新地圖集)》 등을 라틴어로 펴내 한학을 서양에 소개한 동학서전(東學西傳)의 기수다.
‘구우(逑友)’는 ‘진정한 벗’이라는 의미로, 《구우편》은 《교우론》의 내용을 확장해 1661년 간행되었다. 당시는 천주교가 중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 이후였으므로, 우정의 주제를 선교의 방편으로 활용해 《성경》을 다수 인용하는 등 신앙을 전면에 내세웠다.
■ 역자 정민
한문학 문헌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우리 시대 대표 고전학자.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선 지성사의 전방위 분야를 탐사하며 옛글 속에 담긴 깊은 사유와 성찰을 우리 사회에 전하고 있다.
저서로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살핀 《비슷한 것은 가짜다》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 다산 정약용을 다각도로 공부한 《다산과 강진 용혈》 《다산 증언첩》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18세기 조선 지식인과 문헌을 파고든 《호저집》 《고전, 발견의 기쁨》 《열여덟 살 이덕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이 밖에 청언소품집인 《점검》 《습정》 《석복》 《조심》 《일침》, 조선 후기 차 문화사를 총정리한 《한국의 다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산문집 《체수유병집-글밭의 이삭줍기》 《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 어린이를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지었다.
다산의 청년기와 천주교 신앙 문제를 다룬 《파란》 이후, 조선에 서학 열풍을 불러온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해 제25회 한국가톨릭학술상 번역상을 수상했다. 서학 연구의 연장선으로 초기 교회사를 집대성한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집필해 제5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대상을 받았다. 《역주 눌암기략》 《역주 송담유록》을 비롯해 서학 관련 주요 문헌의 번역과 주석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 차례
서언
교우론
마테오 리치의 짧은 서문
교우론
《교우론》을 판각하며 쓴 서문 _풍응경
대 서역 이마두 공이 지은 《우론》의 서문 _구여기
《교우론》의 제사 _주정책
《교우론》의 짧은 서문 _진계유
양강총독채진본 《교우론》 1권 제요
구우편
《구우편》의 짧은 서문
상권
1 참된 벗을 얻는 일의 어려움
2 참된 벗과 가짜 벗의 구별
3 참된 벗은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4 마땅히 어떤 벗을 택해야 할까
5 좋지 않은 벗의 해로움
6 좋은 벗의 유익함
7 참된 사랑의 능력
8 참된 사귐의 바탕
9 참된 벗은 벗의 이치를 따르고, 의리가 아닌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
10 스스로 착하지 않은 것 외에는 참된 벗은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 없다
11 벗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 풀기
하권
12 벗의 선악은 물들기가 쉽다
13 벗과 사귀는 사람은 성을 내면 안 되고, 다만 온화하고 부드러워야 한다
14 사귐은 증오를 품어서는 안 되고 질투하여 다투어서도 안 된다
15 사귀는 벗을 비방하지 말라
16 벗을 사귐에 자신을 뽐내지 말라
17 혀가 둘인 사람은 벗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18 벗을 사귐에 선물하는 것은 벗을 사귀는 것이 아니다
19 선물의 마땅함을 잘 활용하라
20 로마 황제 마르쿠스가 그의 벗 피라모에게 준 편지
《구우편》 서문 _장안무
《구우편》 서문 _서이각서 _축석
《구우편》 서문 _심광유
《교구합록》 서문 _유응
해제 | 내 영혼의 반쪽, ‘제2의 나’를 찾아서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영인 구우편
영인 교우론
조선 지성사를 깊이 탐구해온 고전학자 정민 교수가 고전학자로서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에서 ‘성경’과 ‘이솝우화’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국경을 초월해 18세기 조선에 우정의 시대를 연, 서양 현인의 금언집을 해석해드립니다.
서양 선비, 우정을 논하다
교우론
나의 벗은 남이 아니라 나의 절반이니, 바로 제2의 나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벗 보기를 자신을 보듯 해야 한다.
[출전]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고백록(Confessiones)’ [4.6.11]에서 말했다.
“벗은 영혼의 절반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s)’ [9.4]에서 말했다.
“벗은 응당 친구를 자기처럼 보아야 한다. 대개 벗은 제2의 나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가 ‘가집(歌集)’ [1.3]에서 말했다.
“어떤 이는 자기의 벗을 내 영혼의 절반이라고 일컫는데, 그 말이 진실로 옳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가운데 그리스어 원문 중 별도의 라틴어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벗을 아낌이 자기의 몸을 아끼듯이 하니, 이 때문에 벗을 ‘제2의 나’라고 한다.”
디오게네스(Diogenes Laertios)가 엮은 라틴어본 ‘철학자들의 생애(Vitae Philosophorum)’ [7.1]에서 그리스 철학자 제논(Zeno of Citium)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가 벗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제2의 나라고 말해주었다.”
벗의 칭찬과 원수의 비방은 둘 다 믿어서는 안 된다.
[출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페틸리아누스 서간 반박(Contra litteras Petiliani)’ [3.10.11]과 ‘설교집’에서 말했다.
“너를 칭찬하는 벗을 믿는 것이 마땅치 않음은, 너를 비방하는 원수를 믿는 것이 마땅치 않음과 한가지다.
오랜 벗은 아름다운 벗이니 이를 버려서는 안 된다. 까닭 없이 새 벗으로 옛 벗을 바꾼다면 오래지 않아 바로 후회하게 된다.
[출전] 키케로가 ‘우정론’ [19.67]에서 말했다.
“여기에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진실로 사귀기에 충분한 새로 사귄 벗을 응당 오랜 벗의 위에다 두면서, 내가 길들인 기운 좋은 말을 가지고 늙은 말보다 낫다고 여기듯이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마땅히 이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집회서’ [9.10]에서 말했다.
“옛 친구를 버리지 마라. 새로 사귄 친구는 옛 친구만 못하다. 새 친구는 새 술과 같으니, 묵은 술이라야 제 맛이 난다.”
군자가 벗을 사귀기는 어렵고, 소인이 벗을 사귀기는 쉽다. 어렵게 만난 사람은 헤어지기가 어렵고, 쉽게 만난 사람은 헤어지기도 쉽다.
[출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8.3]에서 말했다.
“젊은 사람의 우정은 쾌락에서 시작된다. 젊은 나이에는 목숨을 가볍게 보고 정감에 이끌리기 때문에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다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월이 더해지면 변화하는 바가 있다. 이 때문에 쉽게 사귄 벗은 버리는 것 또한 쉽다.”
지혜로운 사람이 경박한 벗을 떼어내려고 할 때는 조금씩 거리를 두지, 빠르게 끊어버리지 않는다.
[출전] 키케로가 ‘의무론’ [1.33.120]에서 말했다.
“벗이 기뻐할 수는 있어도 믿을 수는 없는 사람일 경우,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조금씩 그와 떨어져서, 급작스럽게 관계를 끊어버리지는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왕이 황제가 되기 전에는 나라에 창고가 없었다. 무릇 재물을 얻으면 후하게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적국의 왕은 부유하고 성대하였지만, 오직 일마다 창고를 채우기에 힘쓰면서 알렉산드로스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창고는 어느 곳에 있는가?”
알렉산드로스가 말했다.
“벗의 마음속에 있소.”
[출전]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 [15.34]에서 말했다.
“어떤 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나라의 창고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왕이 벗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있다네.’”
구우편-상권
참된 벗을 얻는 일의 어려움
툴리우스(Tulius)가 말했다.
“아첨은 벗과 교유함에 있어 전염병이니, 아첨은 참된 덕을 무너뜨린다. 대개 교우의 으뜸은 돈독함에 힘써서 한결같이 정성을 쏟는 것으로 만약 한 사람에게 한결같은 마음이 없다면 참된 덕은 없어진다. 아첨하는 것은 비록 한 사람이지만 그 마음은 몹시도 많다. 그 말이 잡스럽고 그 낯빛이 잡스러우며 그 뜻이 잡스러워 사람에 따라, 때에 따라 아부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한 사람이 여러 마음을 지니 증거가 아니겠는가?”
툴리우스의 말은 아첨하는 자가 거짓으로 텅 빈 마음을 늘어놓음을 가지고 참된 벗과 더불어 서로 엮이지 않고 바로 대적하게 한 것이다. 대저 사귐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 것인데, 아첨하는 사람은 얼굴만 그렇지 마음은 그렇지 않아서, 한갓 나를 위할 줄만 안다. 그렇다면 이는 자기를 사귀는 것이니, 자기를 아끼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일 뿐이다.
카토(Cato)가 말했다.
“원수의 마음 씀이 나를 유익하게 함은 오히려 아첨하는 자보다 더하다. 저 원수가 비록 악하더라도 원수는 반드시 진실한 말로 나무라는지라, 내가 인하여 더욱 삼감을 더할 수 있다. 아첨하는 벗 같은 경우는 절대로 실제의 정리를 그 벗에게 베푸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차라리 원수가 있을망정, 아첨하는 자와는 사귀지 말아야 함을 알겠다. 대개 아첨하는 벗은 큰 해로움을 품고 있으니, 돌아보건대 내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 이 세상에 참된 교유는 드물고 아첨하는 인사는 많으니, 벗을 선택함에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좋은 벗의 유익함
서양의 기록에 말했다.
“참된 벗은 만나기가 쉽지 않으니, 투명한 옥과 같이 드문 물건이어서 이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서양의 여러 서적에는 좋은 벗을 칭찬하여 기리지 않음이 없는데, 능히 이름 붙일 수가 없어서 다만 세상 복의 지극함이나, 사람의 즐거움 중 지극함이라고 일컬어 말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참된 벗이 서로를 얻으면 조금의 성냄도 없이 영원한 달콤함이 있다. 그러므로 참된 벗은 여러 질병과 많은 고통을 덜어주는 약제로, 재앙을 복이 되게 하고, 근심을 기쁨이 되게 하며, 눈물을 마르게 해준다. 죽음도 벗에게는 죽음이 아니게 되어, 이는 두 번째 삶에 속한다. 참된 벗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 영원히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사랑 또한 삶이라고 이름 붙이니, 나의 삶이요 나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은 영원한 삶이라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참된 사랑은 한량이 없어 능히 사라질 수가 없다. 참된 사랑이란 신령의 크나큰 덕이니, 신령은 아득히 오래되어도 흩어지지 않고 참된 덕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비록 죽은 뒤에도 또한 좋은 벗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덕의 사랑(德愛)’이라고 하나, 보기가 드물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나를 벗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몸을 좋아하고, 나를 벗으로 삼는 사람은 나의 마음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벗이라는 것은 덕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 몸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디온(Dion)이 말했다.
“사람이 많은 벗을 얻음은 여러 개의 눈과 귀와 손과 발과 입과 마음을 얻는 것과 같다. 내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내 친구가 보고, 내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내 친구가 듣는다. 내 손이 감당치 못하는 것을 내 친구가 감당해주고, 내 발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내 친구가 가준다. 내 입이 이르지 못하는 것을 내 친구가 말해주고, 내 마음이 다하지 못하는 것을 내 친구가 다해준다. 그런 까닭에 천주께서 너에게 좋은 벗을 많이 내려주심은 많은 귀와 눈과 손과 발과 입과 마음을 너에게 내려준 것과 같다.”
라일리우스가 말했다.
“가난하고 천할 때 서로 얻었다가, 뜻을 얻고 나서 옛 친구를 버리는 것이 정리일까? 이는 좋은 벗이 아니다. 좋은 벗이란 복이 바뀌고 지위가 달라지더라도 자신의 사귐을 바꾸지 않는다. 대개 진실한 벗은 복을 바꿀망정 벗을 바꾸지 않으니,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벗이 되지 못하고 복된 벗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귐을 바꾸는 사람은 ‘오랜 벗(久友)’이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단지 그때그때의 벗(時友)‘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말했다.
“너는 덕을 닦기에 힘쓰라. 덕이라는 것은 참된 사귐의 바탕이니, 천하에 벗이 없는 사람은 즐거움도 없다. 참된 즐거움은 마음이 억지로 애쓰는 데서 나오지 않고, 사람이 느껴 촉발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마음이 나뉘면 즐거움이 있을 수 없다. 가령 의심스럽거나 두려워도 즐거움은 없으니, 온갖 즐거움이 모두 사랑의 위에 있기 때문이다. 참된 벗은 군대로는 얻을 수가 없고, 재물로도 얻을 수가 없으니, 사랑으로 이를 모으고, 덕으로 이를 연계시켜야 한다. 나라가 힘만 믿으면 변고가 많아지고, 이익을 탐하면 얼마 가지 않아 실패하고 만다. 사랑이라는 것은 국가를 응결시키고, 나라를 굳세게 한다. 임금이 군사와 성지(城池)의 호위와 군대와 백성의 마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있지 않으면 태연할 수가 없다. 전쟁의 도구는 자기를 지킬 수 있지만 또한 자기를 해칠 수도 있다. 참된 사람d이 이르게 되면 갑옷이 아니어도 굳세고 성이 아니어도 견고해진다.”
구우편-하권
벗의 선악은 물들기가 쉽다
덕스러운 교유의 진실함과 참된 벗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미 대략 말하였다. 여기서는 용렬한 벗을 처리하는 것과, 무리와 잘 어울리는 방법에 대해 논해볼까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료가 없을 수 없는데, 착한 사람이 아니면 악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을 노닒은 마치 벌이 꽃 사이를 노닐면서 그 가시의 고약함을 남겨두고 단 이슬만을 취하여 으뜸가는 덕의 꿀로 만드는 것과 같다.
사람이 큰 선과 큰 악의 사이에 처함은 훈도되어 익히는 바가 일정하여서 오래되면 정해진 모양이 되니, 대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로움과 해로움이 스며든다. 이 때문에 벗과 처음 교유할 때는 그것이 손해인지 이익인지 깨닫기가 어렵다가, 익숙해져서 큰 선과 큰 악에 이르면 쌓이고 포개져서 점차 분명해진다.
예전 서양의 한 선비가 말했다.
“내가 오직 자신을 힘써 덕에 나아가기만 했더니,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따르더라도 지극한 이치가 아님이 없다.”
이 말을 이끌어 익히 익히면 틀림없이 큰 힘이 생겨날 것이니, 착한 벗과 더불어 함께하면 반드시 변치 않을 아름다움을 이루게 된다. 이는 마치 풀과 나무가 물에 가깝고 아울러 태양 빛을 많이 받을 경우 그 윤기와 빛깔을 반드시 절로 얻게 되는 것과 같다. 이미 착한 벗을 얻었거든 스스로 닦는 것을 더욱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내가 능히 잘 마치지 않고는 옛것을 제거하고 새것에 나아가기가 어렵다. 아! 선을 벗어나기는 쉽고 악을 막기란 어렵구나! 지금 세상에는 이끌어주고 도와주는 이가 많이 있지만, 다만 착하지 않은 길만 아는 것이 애석하다. 그러므로 비옥한 밭에 돌피가 무성할 경우, 좋은 곡식이라도 심는 노력과 김매는 노고가 아니고서야 어찌 결실을 맺겠는가? 사람의 마음 밭에는 죄와 허물이 저절로 생겨나 덕의 아름다움 위로 덩굴져 나가는데 하물며 좋은 벗이 없기를 바라겠는가?
벗에는 네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성우(性友)이니 씨족과 같다. 하나는 습우(習友)로 거처가 같다. 하나는 근우(近友)로 사는 고장이 같다. 하나는 천우(天友)이니 나의 신령으로 사귀는 벗이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베풀어 너를 대접하거든, “오늘 무엇을 마시고 먹느냐?”고 말하지 말고, 다만 “오늘 어떤 사람과 마시고 먹느냐?”고 말해야 한다.
사귐은 증오를 품어서는 안 되고 질투하여 다투어서도 안 된다.
마음에 증오를 기른다면 반드시 질투하여 성냄이 쉬 생겨난다. 벗의 덕업이 길하고 상서로운 것과, 부귀와 광영을 보게 되면 바로 크게 시샘하여 자기가 그 위에 있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시샘하다가 이어서 분노하고 마침내는 원망하여, 친밀하던 친구가 마침내 죽을 원수가 되고 만다. 골육이나 가까운 친척이 정으로 잘 지내며 본래 도탑다가도 갑자기 혐의하고 꺼리게 되면, 그 악함을 원망함이 소원하던 자를 보는 것보다 더욱 심하다.
만들기가 어려운 물건은 한번 만들어지면 반드시 길게 오래가고, 반드시 완전하며 알차다. 어렵게 합쳐진 것은 흩어지기가 어렵고, 쉽게 합쳐진 것은 떨어지기도 쉽다.
사귐에 대해 질투하는 단서가 비록 많아도 재능과 작록과 지위가 나란하지 않음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한 아버지에게서 난 아들이라도 하루아침에 귀천과 빈부가 조금 달라지면 마침내 친애함은 생각지 않고, 차라리 자기의 지위를 내리고 자기의 작록에서 물러날지언정 내 친형제가 이를 얻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남에게 줄망정 형제에게 주지는 않는다. 오직 태어난 순서를 괴로움으로 여기고, 부모의 분별과 한 젖을 먹고 자란 분별도 없으니, 존귀의 분별을 금하기가 어렵다.
시샘하는 것은 영화롭고 부귀한 사람만이 아니라 뒷골목의 일반 백성이나, 아리로 온갖 기예에 종사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다. 다만 그가 복을 얻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보는 것에 화를 낼 뿐 아니라, 그런가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또한 성을 낸다.
벗을 사귐에 선물하는 것은 벗을 사귀는 것이 아니다
벗을 사귀면서 선물하는 것은 사랑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채우려는 것이다.
성 이시도루스(Isidorus)가 말했다.
“선물을 통해 친구가 되는 것은 정이 없는 결합이니, 반드시 그 벗에 대해 충직하지가 않다. 벗이 늘 선물을 주지 못할 경우, 바로 물러나 헤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벗의 재물과 이익, 복과 길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벗을 벗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물건을 벗 삼는 것일 뿐이다. 다만 벗이 가진 것을 내어 자기를 이롭게 하려 할 경우 집안의 재물을 다하여 그에게 주더라도 그는 오히려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혹 가진 것을 조금만 남겨두더라도 그는 또한 소원을 들어준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만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원하면서 자기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서는 빠르게 잊어버릴 것이다. 얼마나 주었는지는 살피지 않고, 다만 얼마나 받았는지만 따진다. 이미 혜택을 받고도 바로 그 혜택을 잊고, 막 선물을 받고는 바로 그 선물을 버린다. 이는 마치 못난 자식이 아버지의 사업을 이으려고 부친이 죽자 곡하고 울며 몹시 슬퍼하지만, 속으로 이득 얻을 일을 기뻐함을 감추는 것과 같다. 탐욕스러운 벗은 혜택을 입을 때는 거짓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 같은 모습을 짓는다. 다만 손으로 선물을 얻음은 마음으로 얻는 것이 아니니, 손은 이를 받고 나면 문득 잊어버리고 만다. 손은 기억력이 없기에, 손에서 선물이 없어지면 마치 뺨에 눈물이 마른 것과 같아진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대왕은 항상 그 나라의 어진 이에게 선물을 하곤 했는데, 어진 이가 선물을 가져온 사람에게 물었다.
“온 나라의 사람이 몹시 많은데, 어찌 홀로 나에게만 선물하는가?”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진 이가 말했다.
“이미 나를 어질게 여겼다면, 선물을 가지고 나를 보살펴서는 안 된다.”
알카메네스(Alcamenes)가 큰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었더니, 사람들이 선물을 해도 모두 받지 않았다. 어떤 이가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물을 받으면 나의 도리를 평소처럼 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오.”
에피알테스(Ephialtes)는 몹시 가난했지만, 외국에서 주는 것이 있으면 모두 물리쳤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너는 가난한데 외국에서 준 것을 어찌하여 물리치는가?”
그가 말했다.
“저 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은 장차 내게 정을 구하려는 것이다. 내 정을 얻지 못한다면 나는 무정한 사람이 되고 진실로 내 정을 얻는다면 틀림없이 법을 어기게 된다. 그래서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서양의 왕에게 그 나라의 법이 어떠한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마치 거미줄과 같으니, 가볍고 빈약한 것은 문득 걸려들고, 부유하고 무거운 것은 거미줄을 뚫고 땅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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