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보았을 법한 이 소재로 전설이 된 만화가 있다. 바로 오다 에이치로의 ‘원피스’이다. 1997년에 시작되어 2024년 현재까지 무려 26년째 계속되고 있는 장수 시리즈, ‘드래곤볼’을 제치고 기네스북 ‘단일 저자에 의한 최다 단행본 발행 부수’ 부문을 경신한 무서운 시리즈, 만화를 넘어선 문화적 현상... ‘원피스’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그런데, 무엇이 원피스를 세대를 아울러 가장 넓은 팬덤을 지닌 만화로 만들었을까? 우정, 승리, 모험? 인생의 반을 ‘원피스’와 함께해온 ‘원피스의 오랜 팬’인 저자는 그 이유를 철학에서 찾는다. 원피스 지구의 구성, 수많은 캐릭터, 그들이 이합집산하는 방식, 온갖 기상천외한 ‘열매’들, 전설의 보물 원피스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과정을 ‘인간의 앎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알고 보면 철학적인 만화 ‘원피스’의 팬이라면, 혹은 철학적 개념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 독자라면 이 책으로 사유 대모험을 떠나보자.
■ 저자 권혁웅
저자 권혁웅은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평론),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시)으로 등단했다.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비평집 ‘미래파’, ‘입술에 묻은 이름’, 이론서 ‘시론’이 있으며, 장르를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책들(‘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몬스터 멜랑콜리아’, ‘꼬리 치는 당신’, ‘생각하는 연필’, ‘미주알고주알’, ‘외롭지 않은 말’)을 냈다. 현재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와 시론,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_ 원피스(ONE PIECE), 실재의 조각을 찾아서
원피스 세계에 관하여
우린 친구니까 - 밀짚모자 해적단과 ‘우정’
몸이 또 늘어났다! - 고무인간 루피와 ‘연장’
내겐 너희들이 모르는 어둠이 있어 - 고고학자 로빈과 ‘실재’
설마 이것이... 프러포즈? - 호킨스, 도플라밍고, 슈거, 핸콕과 ‘능동성/수동성’
저는 죽어서 뼈만 남았습니다 - 해골 브룩과 ‘엑스터시’
셋이 붙어 있었던 것뿐인가? - 삼두인간 바스카빌과 ‘변증법’
사랑해줘서 고마워 - 자연계 능력자들과 ‘아르케’
빛의 속도로 차인 적이 있나? - 자연계 능력자들과 표준모형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적 - 와포루, 빅 맘, 사카즈키, 호디와 ‘악’
오빠는 그대로면 돼 - 샬롯 브륄레와 ‘상상’
다른 이들을 구분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 Mr.2 봉쿠레, 이반코프와 ‘뉴하프’
부록
1. 인용한 책들
2. 악마의 열매
3. 고유명사 찾아보기
4. 인명 찾아보기
해적왕을 꿈꾸는 소년들의 이야기 ‘원피스’. 인생의 반을 ‘원피스’와 함께해온 오랜 팬 권혁웅 교수가 원피스 지구의 구성, 수많은 캐릭터, 그들이 이합집산하는 방식, 온갖 기상천외한 ‘열매’들, 전설의 보물 원피스를 통해 철학을 여행합니다.
원피스로 철학하기
우린 친구니까 - 밀짚모자 해적단과 ‘우정’
너, 동료로 들어와라! - 들뢰즈의 ‘리좀’과 다양체
이것이 루피가 이끄는 밀짚모자 해적단 앞에 펼쳐진 세계다. 무력, 권력, 금력을 비롯한 힘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며, 그 힘의 유무와 크기에 따라 지배/피지배, 명령자/실행자가 배분되는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조직들로 득시글득시글한 세계. 그런데 루피는 모험을 떠날 때부터 이런 조직과는 전혀 다른 동기와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해적단원을 모집할 때마다 동료가 되라고 제안하는 것부터가 다르다.
다른 해적단의 선장들은 일당을 영입할 때 모두 ‘부하’가 될 것을 강요한다. 그들은 상대에게 자신의 수하로 들어올 것을 명령하며, 상대가 말을 듣지 않거나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베어버린다. 그러나 루피는 상대의 힘을 영입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며, 상대를 자신의 아래에 두지도 않는다. 다른 자들이 ‘계약’을 통해 성립된 수직적인 위계 관계로 모였다면, 밀짚모자 해적단은 ‘약속’으로 맺어진 수평적인 동료, 친구들이다. 루피가 형을 잃고 한없는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그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준 것도 바로 이들이다.
이렇게 모인 이들에게 위계나 상하관계가 있을 리 없다. 선장의 강함이 부하를 복종하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다른 집단과 달리, 이들에게는 서로의 약점이 서로를 지켜주는 근거가 된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가 건져진 루피를 아론이 비웃자 루피는 대답한다.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혼자서는 검술도, 항해도, 요리도 못 한다는 루피의 말을 모든 동료가 듣는다. 말하자면 루피는 ‘무능’한데, 오히려 그 무능으로 단 하나의 일, 눈앞의 적을 ‘이기는 것’을 할 수 있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밀짚모자 해적단은 동료가 들어올 때마다 특별한 중심 없이 퍼져나가는 덩이줄기인 리좀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 다른 집단은 선장이나 대장의 힘에 의거한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른다는 점에서 뿌리 모델에 의거한다. 후자가 수직적이고 유한하며 하나의 중심으로 수렴된다면, 전자는 수평적이고 무한하며 다양체로 퍼져나간다. 리좀이 되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 유일한 것 곧 일자(the one)를 제거할 것. 일자란 체계나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기제, 힘, 명령권, 정본성(authority)을 말한다. 일자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자에 종속된다. 일자는 모든 것을 하나로 관통하며,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모든 것을 수렴하는 뿌리의 중심과도 같다.
제유의 지배력, 환유의 다양함
일부로 전체를 대표하는 수사법을 제유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밀짚모자 해적단 최대의 적수인 검은수염 해적단의 경우 ‘검은수염’은 선장인 마샬 D 티치의 별명으로, 그의 힘과 능력을 대표하는 제유이다. 검은수염은 티치의 신체 일부이며 이것이 티치, 나아가 이 해적단 전체를 대표한다. 반면 밀짚모자 해적단에게 ‘밀짚모자’는 루피가 쓰고 다니는 것인데, 실제로는 루피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대상과 유관한 사물로 대상을 비유하는 수사법을 환유라고 부른다. 이것은 빨간머리 샹크스가 루피에게 맡기고 간 우정의 징표다. 본래 제유에서는 전체가 그것을 대표하는 유한한 부분으로 집중되고, 환유에서는 대상이 그것과 연관된 다른 대상들로, 말하자면 유관한 다양체들로 무한하게 떠돈다. 검은수염 해적단은 ‘검은수염’으로 수렴되고 집중되는 무력 집단이다. 심지어 티치가 먹은 악마의 열매마저 어둠어둠열매이며 대표적인 공격기 이름이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블랙홀’이다. 반면 ‘밀짚모자’는 루피의 별명이지만 빌려온 것이며, 그것이 루피나 이 해적단의 능력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루피가 아무리 소중하게 여겨도 전투 중에 밀짚모자는 자주 너덜너덜해지거나 분실된다. 그것은 오히려 무능의 표식이다. 따라서 검은수염 해적단에게 ‘검은수염’은 해적단 전원을 뜻하는 숫자 n을 대표하는 n번째 숫자다. 반면 밀짚모자 해적단에게 ‘밀짚모자’는 해적단 전원인 숫자 n에서 ‘일자’가 빠졌음을 표시하는 n-1번째 숫자다. 처음부터 밀짚모자는 이 해적단에 속한 것이 아니었던 데다가, 다른 모든 구성원=다양체들이 가진 능력을 갖지 못한 무능의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밀짚모자 해적단은 이 n-1의 힘, 일자를 제거한 다양체의 힘으로 적들을 제압해나간다.
저는 죽어서 뼈만 남았습니다 - 해골 브룩과 ‘엑스터시’
몸, 모든 언어의 시작
‘몸’과 관련된 언어는 모든 언어의 출발점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추상화의 능력을 얻지 못했을 것인데, 실은 이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출발지가 구상으로서의 몸인 것이다. 몸을 지칭하는 명칭들은 모든 명사의 원형이고, 몸의 동작은 모든 동사의 기원이며, 몸의 상태는 모든 형용사의 출발지다. 브룩이 이 몸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자신이 이 몸의 대부분을 잃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는 자신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대부분 잃었던 것이다. 단 하나, 그가 제 몸을 걸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브룩이 정식으로 밀짚모자 해적단에 가입하는 장면이다. 그는 죽어서 백골뿐인 자신의 목숨을 루피 선장에게 맡기겠다고 선서한다.
여기에도 모순이 하나 있다. 자신이 걸 수 있는 최후의 패인 생명을 잃어버린 마당에 그는 무엇을 맡길 수 있다는 말일까? 이 무력감은 실제의 전투 현장에서 재현된다. 샤봉디 제도에서 폭군 바솔로뮤 쿠마에 의해 밀짚모자 일당이 하나씩 ‘제거’될 때의 일이다.
브룩은 말을 맺지 못하고 제거된다. 브룩이 대표하는 모순된 두 개의 진술, ‘나는 죽었다’와 ‘나는 뼈다’는 우리에게 사유의 모험을 요청한다. 우리의 실존과 사유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건너가야 하는 모험, ‘엑스터시’와 관련된 모험 말이다.
정신 vs 육체 - 데카르트와 흉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서양 근대철학의 가장 큰 탐구대상이었다. 육체는 물성을 가진 실체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물에 불과하다. 동물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기서 움직임마저 제거되면 그것은 시체가 된다.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 바깥의 타율적인 힘, 예컨대 신의 뜻이 원인이라면 그런 육체는 마리오네트와 같은 타율적인 인형이 된다. 육체를 움직이는 힘이 육체에 내재했을 때, 이를 정신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정신은 능동성/육체는 수동성’라는 일방통행식의 이분법이 성립한다. 아이가 장난감을 이리저리 옮기듯, 자유의지를 가진 정신이 사물로서의 육체를 조종하는 셈이다. 이런 육체는 동력기관을 내장한 자율적인 인형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사물로서의 육체를 움직이는 정신의 인형조종술, 이것이 관념론의 기획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 인형=로봇의 조종석에 정신이 앉아 있다는 선언이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이 의심이 곧 사유이며, 의심의 주체가 사유의 주체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저 사유란 것은 육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것들, 곧 지각하는 것들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지각이 판단을 낳고, 판단이 추론을 낳는다. 예컨대 ‘이것은 맛있다’에서 ‘이것은 멋있다’까지의 거리는 아주 가깝다. 둘 다 ‘몸’의 언어에서 파생되었다. 추론하는 능력이 곧 사유능력이다. 정신은 지각의 고차원적인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은 서로 다른 두 종류로 환원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인상과 관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지각들이 정신을 자극하며 사유 또는 의식에 들어오는 힘과 생동성의 정도에 있다. 최고의 힘과 생동성을 가지고 들어오는 지각에 우리는 인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으며, 감각(sensation), 정념(passion) 그리고 정서(emotion) 등이 우리의 영혼에 최초로 나타나므로, 나는 이것들을 모두 인상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킨다. 나는 관념을 사유와 추론에 있어서 인상의 희미한 심상(a faint images)이라는 뜻으로 쓴다.” - 데이비드 흄, ‘오성에 관하여’, 25쪽
유령으로 살아가기 - 칸트의 ‘통각’
관념론은 정신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경험론은 육체의 유일성을 주장한다. 둘은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육체에 앞선 정신인가, 아니면 육체가 투영한 스크린 위의 영상인가?
“‘나는 사고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표상에 수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전혀 생각될 수 없는 것이 나에게서 표상되는 셈이 될 터이니 말이다. 모든 사고에 앞서 주어질 수 있는 표상은 직관이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직관의 모든 ‘잡다’는 이 잡다가 마주치는 그 주관 안에서 ‘나는 사고한다’는 것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권, 346쪽
칸트는 이 둘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종합했다. 1.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다양한 정보들을 받아들인다. 이때 대상들은 시간, 공간 안에 주어진 것으로 표상되는데,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 즉 ‘직관’은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2. 우리는 지각에 의해 받아들여진 다양한 대상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결합하고 정돈한다. 이런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3. 이 종합이 표상이 되려면 ‘통각’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 통각이란 “~라고 생각하다”의 주체다. 지각에 들어온 다양한 대상을 종합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들에게 정확한 자리를 부여하려면, 곧 그것들을 개념으로 인증하려면 “내가 ~라고 생각해.”라는 형식을 덧붙여야 한다. 통각(apperception)이란 지각(perception)에 덧붙여진 것(ap-)이다. “비가 온다”는 문장은 “나는 비가 온다고 생각한다”의 준말이며, “참외는 노랗다”는 문장은 “나는 참외가 노랗다고 생각한다”의 준말이다. 통각을 자기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인데, 그렇다면 자기의식은 개념의 통일에 덧붙은 무의미한 강조사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식은 모든 진술에 따라붙는 필수적인, 그럼에도 아무 의미도 덧붙이지 않는 유령인 셈이다. 바로 여기에 해골 검사이자 음악가인 브룩의 진술 “전 죽어서 백골뿐인 브룩이라고 합니다”가 놓인다.
사랑해줘서 고마워 - 자연계 능력자들과 ‘아르케’
악마의 열매 가운데 자연계 열매에 관해서 살펴보자. 해군본부 대장들, 사황인 흰수염과 검은수염, 신이라 자처한 에넬 등 이 열매를 먹은 자들은 원피스 세계에서 극강의 능력을 발휘한다. 무력이 곧 권력인 원피스 세계에서 자연계 열매는 세계를 구성하는 바탕인 질료 자체를 제 맘대로 하는 능력, 곧 자연 그 자체의 근원적인 힘을 운용하는 능력이므로 최강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다.
아르케와 자연철학
자연의 근원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여기 머그잔이 있다고 하자. 이 잔을 이루는 재료인 질료는 흙이며, 이것은 손잡이가 달린 컵이라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사물은 늘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다. 이 둘이 분화되기 전의 상태, 곧 형상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원질을 아르케(arche)라고 부른다. 아르케는 만물을 이루는 근원적인 바탕이다. 세계의 창세 신화들도 세상이 무에서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세상을 이루는 근원인 아르케가 선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질료에도 독자성을 부여하는 신화의 논리에 따라 아르케는 대개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중국신화의 반고, 메소포타미아신화의 티아마트, ‘장자’에 나오는 혼돈, 스칸디나비아신화의 이미르(Ymir) 등은 태초의 거인인데, 신화는 이들이 죽고 난 후에 그 시체에서 현재의 세상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창조는 일종의 분리작용이다. 미분화된 태초의 하나를 구별하여 큰 빛인 해와 작은 빛인 달과 더 작은 빛인 별들을, 하늘과 땅을, 몸과 몸에 깃드는 것을, 사물과 식물과 동물을, 유한자와 무한자를 구별하는 능력이 창조이기 때문이다. 아르케는 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재료인 셈이다.
고대에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이들은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고 노력했다. 이런 철학을 자연철학이라 부른다. 자연철학의 저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품고 있다. 1.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요소 내지 질료에 대한 질문이다. 2. 세계를 운영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아르케에는 ‘원리, 근원’이라는 뜻도 있으므로, 이 질문은 세계 운영의 원리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3. 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는 무수한 변화를 품고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변화를 야기하는 변치 않는 것, 곧 불변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최초의 원인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이 훗날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인 작용인(causa efficiens)으로 발전한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변화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앞의 머그잔을 예로 든다면, 그 잔을 빚어낸 도공의 손길이 작용인이다. 나머지 셋은 앞에서 든 형상인(causa formalis)과 질료인(causa matealis), 그리고 목적인(causa finalis)이다. 머그잔은 음료를 마시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목적인이다. 모든 사물에 목적인과 작용인이 있다는 생각은 후에 신의 존재를 역설하는 수많은 증명의 근거가 된다. 4. 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수한 변화들은 우리에게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 현상들의 저변에 있는 불변하는 것을 본질이라고 한다면, 이 질문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5.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수한 현상들 가운데 참과 거짓을 판단해야만 한다. 아르케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은 어떤 것이 참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가를 묻는 일이 된다. 결국 만물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연과학, 역학, 인식론, 인간학, 윤리학 등이 망라된 질문이며, 아르케가 그렇듯 인간의 지적 체계가 분화되기 이전의 총체적인 삶에 대한 질문인 셈이다. 아르케를 통해서 몇몇 자연계 악마의 열매 능력자들을 살펴보자.
불 vs 마그마, 불 vs 얼음 - 누가 이겼는가?
원피스 세계에서는 같은 계열의 악마의 열매라고 해도 그 능력 사이에는 상극관계, 상하관계가 있다. 에이스가 티치에게 패한 것은 티치의 능력이 타인의 모든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능력 즉 상극관계였기 때문이며, 사카즈키에게 패한 것은 이글이글열매의 능력이 마그마그열매 능력에 미치지 못한 상하관계였기 때문이다. 일대일 대결에서 사카즈키는 맞부딪친 에이스의 주먹을 태워버린다.
본래의 특성으로 보자면 이 능력의 상하관계는 이해하기 힘들다. 용암은 지구가 생성될 때 암석들이 모이면서 내는 충돌 및 중력 에너지를 기원으로 한다. 용암은 이때의 충돌로 인해 암석들이 녹은 것으로, 지구 핵의 온도는 현재 기준으로 섭씨 6000도, 표면에 올라온 용암의 온도는 1000에서 1100도 정도이다. 게다가 계속 식고 있다. 한편 에이스가 검은수염과의 대결에서 썼던 기술 이름이 ‘염제’인데, 염제는 태양의 별칭이다. 태양은 핵융합 반응으로 열을 내며 태양 중심의 온도는 섭씨 1억 5천만 도, 표면온도는 6000도 정도로 추산된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수준이다.
물론 에이스의 저 기술이 태양열의 근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그저 불꽃의 모습에서 비롯된 비유적인 명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보고 싶다. 사카즈키의 능력은 ‘충돌’ 에너지를 내는 것인 반면, 에이스의 기술은 ‘융합’ 에너지를 내는 것이다. 사카즈키의 모토는 ‘철저한 정의’이며, 그는 ‘해적=악’ vs ‘세계정부와 해군=선’이라는 분명한 이분법에 따라서 행동한다. 정의를 집행하는 데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으며,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흰수염의 부하 거대소용돌이거미 스쿼드를 꼬드겨 흰수염을 찌르게 만든 자도 사카즈키이고, 전쟁의 승패가 분명해진 이후에도 해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자도 사카즈키이다.
야차와 같은 사카즈키의 모습은 차라리 ‘정의라는 이름을 가진 악’에 가깝다. 그의 모토는 ‘철저한 정의’지만 그것이 정의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세계에서 타자를 분리하고 거기에 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말살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는 철저함, 그것이 사카즈키의 정의다. 반면 에이스는 해적왕 골 D 로저의 아들이자, 자애로운 가족 공동체를 꿈꾸었던 흰수염 해적단의 양아들이며, 미래의 해적왕 루피와 혁명군 총참모장인 사보의 의형제다. 그는 ‘지배하지 않는 자유’를 추구하는 해적왕, 불의한 체제의 타파를 목표로 하는 혁명군, 차별 없는 공동체인 흰수염 일가의 일원이다. 에이스가 꿈꾸는 세상은 사카즈키의 이상과는 정반대였다. 사카즈키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이 무력에 의한 제압 즉 ‘충돌’이었다면 에이스의 이상을 요약하는 말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 즉 ‘융합’이었다. 그가 흰수염 해적단을 떠나 홀로 세계를 떠돈 것은 같은 동료를 살해하고 열매를 탈취한 검은수염을 잡아가기 위한 것이었으며, 정상결전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마다한 것은 사카즈키가 흰수염의 이상을 모독했기 때문이다. 사카즈키는 에이스를 죽인 후에도 외친다. “해적이라는 악을 용납하지 마라!” 반면 에이스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실체가 없는 공허한 적 - 와포루, 빅 맘, 사카즈키, 호디와 ‘악’
두 가지 선악 - 플라톤과 스피노자의 선악
‘선/악’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옳음/그름’이라는 뜻이 하나라면, ‘좋음/나쁨’이라는 뜻이 다른 하나다.
“두 경우는 매우 다른 내용을 뜻합니다. 옳음/그름은 초월적 가치 기준과 의무 개념을 함축하지만, 좋음/나쁨은 내재적 가치 기준과 행복/기쁨의 개념을 함축하기 때문이죠. 옳음/그름은 왜 초월적 가치 기준을 전제하느냐? 철수가 영희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순수하게 내재적으로만 보면 영희가 그 거짓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영희가 새로 산 옷이 철수가 보기에는 영 아닌데 그렇다고 진실을 이야기했다간 그날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겠죠. 그럴 때는 거짓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덕의 관점에서 보면 “거짓말은 그른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은 철수와 영희 사이의 내재적인 지평 바깥에 어떤 초월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해야 한다”는 의무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어요. 반면에 좋음/나쁨을 느끼는 것은 철수와 영희 당사자들이죠. 무언가에 비추어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좋은 것이고 나쁘면 나쁜 것이죠. 그리고 남과 나의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지는 것이고 나빠지면 나빠지는 것입니다.”
- 이정우, ‘개념-뿌리들’ 2권, 206-207쪽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상정된 두 가지는 ‘쾌락(hedone)에 대한 선천적인 욕망’과 ‘좋은 것에 대한 후천적인 의견(epiketos doxa)’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둘은 상극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에 부가된 것, 다른 하나를 제어하는 것이다. ‘쾌락’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이 지나치게 추구되었을 때가 나쁜 것이며, 그래서 이를 제어하는 기능을 ‘분별’ 혹은 ‘절제(sophrosyne)’라고 부른다. 식도락은 쾌락이지만 식탐은 악이며, 음주는 쾌락이지만 과도한 음주벽은 악이다. 같은 방식으로 아름다움이 주는 쾌락에 과도하게 탐닉하는 욕망이 ‘에로스’다. 선으로서의 쾌락이 과도해졌을 때 악이 된다면, 악은 바로 그 ‘과도함(excess)’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곱 가지 죄악도 여기에 해당한다.
폭군 와포루와 사황 빅 맘 - 과도한 선(쾌락)으로서의 악
최초의 악은 이처럼 좋음, 쾌락 등 선의 과도함 내지 무절제로서 출현했으며, 종교의 세례를 거치면서 초월적인 범주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원피스 세계에서 이런 악을 체현한 인물들은 대개 코믹하게 그려지거나 풍자적으로 그려진다.
와포루는 드럼왕국을 다스리던 폭군이었다. 해적이 쳐들어오자 나라를 버리고 달아났다가 해적이 가버리자 다시 왕이 되기 위해서 돌아온다. 그는 우걱우걱열매 능력자로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는 탐식의 대가다.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칼과 배를 뜯어먹더니, 자기 나라에 도착해서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는 집들을 통째로 씹어 먹는다. 그에게 ‘다스린다’는 것은 ‘먹어치운다’는 뜻이다.
마침내 그는 그 자신을 먹어치운다. 입만 남기고 제 몸을 먹었다가 다시 입으로 날씬한 몸을 토해낸다. 이 장면은 그리스 신화의 에뤼시크톤, 힌두 신화인 키르티무카를 떠올리게 한다. 허기를 못 이겨 자기 자신을 먹어치운 인물들이다. 탐식이 ‘자신마저 먹어치웠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 ‘자기의식마저 집어삼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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