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인생 수업
 
지은이 : 강현규,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출판사 : 메이트북스
출판일 : 2023년 11월




  • 쇼펜하우어의 행복과 인생의 본질, 인간관계의 본질, 그리고 학문과 독서와 독자적 사고의 본질 등에 대한 직설적인 조언을 담은 인생 지침서. 현명하고 솔직한 직언으로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지친 자신을 되돌아보며 삶을 온전히 살아갈 힘을 드립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수업


    행복론 _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하여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세 가지 인생 자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 생활의 자산을 세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외적인 것, 영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3이라는 숫자만을 가져와,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세 가지 기본 인생 자산에 기인한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범주는 ‘인간을 이루는 것’이다.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와 그 함양이 포함된다. 두 번째 범주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세 번째 범주는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즉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즉 남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의 견해를 말하는 그것은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누어진다.


    우리 개개인은 오직 자신의 의식 안에서만 살아간다

    개개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각각의 관점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어서 생각의 차이에 따른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세상은 빈곤하고 진부하고 하찮은 곳이거나 혹은 풍요롭고 재미있으며 또 값진 곳이기도 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일어난 어떤 흥미진진한 사건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그러한 사건들에 중요성을 부여한 사람들의 이해력과 그들이 가진 표현력을 부러워해야만 하는 것이다. 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재기가 넘치는 머리는 그것을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게 표현할 것이지만, 반면에 아둔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머리는 그것을 그저 일상 세계에서 일어난 하나의 진부한 장면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다혈질인 사람에게는 그저 하나의 흥미로운 갈등 정도인 것이 우울한 성격의 사람에게는 슬픈 일로, 그리고 무덤덤한 사람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일로 여겨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각각의 현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물이 필수 불가결하고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진 것처럼 온전한 현실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다. 절반의 객관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주관이 다르거나, 아니면 정반대의 경우라면 현재의 현실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절반의 객관이 가장 아름답고도 훌륭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주관이 너무 답답하고 힘들다면 그저 끔찍한 현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더라도 촬영 당일의 날씨가 엉망진창이거나, 성능이 나쁜 카메라 렌즈로 촬영하는 것과 같다.


    이를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개개인은 마치 자신의 피부 같은 스스로의 의식 속에 들어가 있고, 오직 그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 그를 도울 방법은 별로 없는 것이다.


    행복의 가장 첫 번째 가치는 우리 그 자체인 인격이다

    우리 인생의 행복에 가장 우선적이면서도 본질적인 것은 바로 우리 그 자체인 인격이다. 인격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되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첫 번째 자산인 인격은 다른 두 가지 범주의 자산과는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에 묶여 있지도 않고,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도 없다.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반대로 다른 두 가지 범주의 가치는 그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통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인간이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은 훨씬 적다. 오직 전지전능한 시간만이 여기에서 자신의 권리를 휘두르고, 어떠한 육체적·정신적 장점도 결국 점차 시간에 굴복하게 된다. 하지만 도덕적 성격만은 시간의 힘에서 벗어난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두 가지 범주의 자산은 시간이 직접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범주의 자산보다는 유리할 것이다. 또 다른 장점은 다른 두 가지 범주의 자산은 객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있고, 적어도 어느 누구라도 그것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주관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하여

    소유에 대한 만족감은 상대적인 양에 달려 있다

    소유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인 욕구의 적절한 한계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소유에 대한 만족감은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단지 상대적인 비율, 각자가 원하는 만큼과 그 소유물의 관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대상 소유물만 별개로 판단하는 것은 분모가 없는 분자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얼마만큼의 재산을 소유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소유한 것이 별로 없어도 만족감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보다 100배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하나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낀다.


    영원한 고통도 없고, 영원한 기쁨도 없다

    큰 재산이나 유복을 잃고 난 뒤 처음으로 만나는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우리의 기분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이 우리의 소유물을 줄이고 나면, 우리 스스로 원하는 수준을 크게 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라면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은 느끼지 않게 된다. 상처가 아문 것이다.


    반대로 행복한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우리의 요구를 억누르던 압축기가 밀려 올라가 우리의 욕구는 팽창되고, 바로 거기에 기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역시 이 과정이 완전히 끝나면 기쁨도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팽창된 요구에 익숙해져 이미 달성한 소유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하여

    타인의 의견 속에서 살지 말고 자신의 의견 속에서 살자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건강이 가장 중요하며, 건강 다음으로는 우리를 유지해주는 수단, 즉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명예, 부귀, 지위, 명성에 큰 가치를 부여하긴 하지만, 이러한 필수적인 것들과 경쟁할 수도, 대체할 수도 없다. 오히려 본질적인 자산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러한 것들은 미련 없이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의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타인의 의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통찰을 얻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행복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건강, 기질, 능력, 소득, 아내와 자녀, 친구, 사는 집 등으로 정해지는 자신의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상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는 것보다 이러한 진리를 아는 것이 우리의 행복에 100배는 더 중요하다.


    그와 반대의 망상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명예가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와 안녕은 가치가 없으며, 우리에 대한 다른 이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명예, 즉 우리에 대한 타인의 생각이 종종 반드시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실이 근거로 삼는 과장된 말로 간주될 수 있다.


    명성 그 자체가 아니라 명성을 얻는 것이 가치 있다

    명성은 원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나머지 사람도 그와 같은 명성을 가지게 된다면 그 명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절대적 가치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유지함으로써 어떤 사람을 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위대한 마음과 위대한 두뇌의 가치와 행복은 분명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명성 그 자체가 아니라 명성을 얻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것은 사물의 실체이지만 명성은 사물의 우연한 성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명성은 그것을 얻은 사람의 외부적인 요소로 작용하며, 그것을 통해 그는 자신에 대한 높은 평가를 확인한다. 따라서 빛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몸에서 반사되지 않으면 그 실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모든 탁월함도 명성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그 자신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확실한 증거는 되지 않는다. 공적이 없는 명성이 있고, 명성이 없는 공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몇몇은 유명하고 다른 이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는 레싱의 말은 어쩌면 너무 깔끔한 표현일 것이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한 인간의 가치와 무가치가 결정된다면 그 존재는 아주 비참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오히려 그 자체를 위해 살고 존재한다. 그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하여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음을 깨닫는 인생 후반기

    인생 전반부의 성격이 행복이 충족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이라면, 인생 후반부의 성격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모든 행복은 공상과도 같지만 고통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면 인생 후반부의 시기에는 즐거움보다는 단지 고통이 없는 안정적인 상태를 추구한다.


    젊은 시절에는 인간 세계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인간 세계를 탈출한 느낌을 받는다. 첫 번째의 불쾌한 느낌은 인간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이고, 두 번째의 유쾌한 느낌은 인간 세계를 잘 알게 되어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후반기에는 음악 악절의 후반부와 마찬가지로 힘들게 애쓰는 일은 줄어들고 인생 전반부에 비해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서 어떤 큰 행복과 즐거움을 찾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깨닫고 이제는 그러한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안정적이고 그런대로 견딜 수 있는 현재를 즐기며, 심지어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는다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그 다음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을 제공한다. 이 주석은 본문의 도덕성 및 모든 미묘한 표현과 함께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가르친다.


    인생의 끝이 다가온 무렵은 가면을 벗어버린 가장무도회의 끝 무렵과 같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나온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마침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이 드러나고, 행동들이 결실을 맺고, 업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으며 모든 망상이 무너진다. 거기에는 그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한 일은 인생의 마지막에 다가가서야, 그제야 세상과 타인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실체, 자신의 목표와 목적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을 더 낮은 위치로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고, 때로는 더 높은 위치로 보아야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세상의 천박함에 대해 충분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자신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생론 _ 온전한 삶을 위한 아포리즘

    죽음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죽음으로 전환하는 순간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일상적인 주변 환경에 있는 많은 사람 중에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아무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어느 한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묻는다면 가장 적절하고 가장 올바른 대답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당신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시작이라는 처음이 존재하는 영혼들은 그 끝이 없어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대답에는 두 종류의 존재가 있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무(無)도 두 종류가 있을지 모른다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죽은 뒤에 당신이 무엇이 되든 간에 – 설사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하더라도 – 당신의 개인적인 존재가 유기체의 존재처럼 자연스럽고 적절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죽음으로 전환하는 순간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존보다 비생존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생각, 우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만큼이나 당연히 우리를 슬프게 할 수 없다. 이 존재는 본질적으로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의 종말을 손실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아마도 그의 이해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가장 간단하고 경험적인 것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물질과 일시적으로 그것을 소유하는 형이상학적인 힘의 차이를 그에게 명확하게 보여주면 그를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이집트인이 저승의 신인 오르쿠스를 아멘테스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아멘테스는 플루타르코스(<이시스와 오시리스에 대하여> 29장)에 따르면 “빼앗는 자이자 주는 자”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나오는 것이 동일한 근원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받은 대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은 이 대출의 하루 이자가 될 것이다.


    생존의 허망함에 대하여

    현실에서는 하찮은 현재라도 가장 중요했던 과거보다 우월하다

    한 번 존재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바로 다음 순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 된다.


    그렇기에 아무리 현실에서는 하찮은 현재라도 가장 중요했던 과거보다는 더 우월한 것이며,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유와 무의 관계와도 같다. 수천 년 동안이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여기에 존재하고, 잠시 뒤 똑같이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놀랍게도 존재하는 것이다.


    가슴은 그것이 결코 옳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지성이 낮은 사람조차도 이런 종류의 고찰에서는 시간의 관념성을 어렴풋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공간의 관념성과 아울러 모든 진정한 형이상학에 이르는 열쇠이다. 그것을 통해 자연과는 전혀 다른 사물의 질서를 위한 공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칸트가 그토록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

    우리 인생의 장면은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도 같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야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갈망하던 것을 얻게 되면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우리는 항상 더 나은 것을 기대하고, 동시에 과거에 지나간 것을 후회하는 심정으로 그리워한다. 반면에 현재는 당분간 일시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뿐, 목표를 향한 길 이외의 다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한평생 일시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즐겁게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보내버린 것이 바로 기대에 차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워할 것이다. 그래서 보통 인간의 삶의 행적은 희망에 속아서 죽음을 두 팔로 껴안고 춤을 추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는 무슨 수를 써서도 만족하지 않아 그것이 만족될 때마다 새로운 욕망을 낳기 때문에 개개인의 욕구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은 채 무한대로 간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의지란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속해 있는 세계의 주인이므로 따라서 부분이 아니라 무한한 전체에 대해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세계의 주인인 이 의지조차도 개체의 개별적인 현상 속에서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해 대부분 그저 개체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 개체는 깊은 고통에 빠진다.


    인생의 본질을 들려주는 비유와 우화

    모든 사물을 밝고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푸른 자두나무 위에 맺힌 영롱한 이슬처럼 자연은 모든 사물에 ‘아름다움’이라는 허식을 발랐다. 화가들과 시인들은 이것을 벗겨내고 쌓아올려 우리가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 우리는 현실 생활에 들어가기도 전에 그 허례허식을 탐욕스럽게 들이킨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현실 생활로 돌아가면 이제 자연이 부여한 그 아름다움이라는 허례허식이 벗겨진 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그 허례허식을 완전하게 사용해버렸고, 우리는 그것을 이미 미리 즐겼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지금은 모든 것이 대체로 불친절하고 무미건조하게 생각되고 종종 역겨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도록 그 허례허식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수많은 아름다움을 모아서 한꺼번에 그림이나 시의 형태로 즐기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을 밝고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미적 기쁨과 삶의 매력을 미리 즐기지 못한 자연인만이 이따금씩 사물을 그렇게 밝고 즐거운 빛으로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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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