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날씨를 만든다는 착상이 철학사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던진 이 말도 안 되는 질문에서였다. 소진하듯 살아가는 매일이 당연한 삶, 남보다 빨리 정답을 얻고 싶어 조바심 내는 인생, 숫자로 매겨지는 성장에 다다르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 놓아버리는 현대인의 무기력한 초상을 직시한 철학자 서동욱은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든다.
국내 최고의 들뢰즈(Gilles Deleuze) 사상 연구자이자 시인과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타자’ 문제에 깊이 천착해온 서강대학교 철학과 서동욱 교수는 이 책에서 ‘날씨를 찾아주는 생각’을 써내려간다. 철학, 문학, 미술부터 영화, 만화, 게임까지 온갖 영역이 풍성하게 교차되는 마흔 편의 글들이 익숙한 단어의 뒷면을 들추며 흐린 일상을 깨운다.
그의 글 속에서 익숙한 개념들은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에서는 무거움을, 무거운 것에서는 가벼움을 찾아내는 각각의 글은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필요한 것들, 반복 속에서 필멸하는 삶을 마주하는 법, 평범한 일상에 보석처럼 숨겨진 위안, 우리가 예술에 위로받는 이유 등에 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모든 변화는 생각에서 시작된다’는 말의 힘을 보여주는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달라진 머릿속의 날씨도 확인하게 될 것이다.
■ 저자 서동욱
철학자이자 시인, 문학평론가. 벨기에 루뱅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5년부터 계간 《세계의 문학》 등에 시와 비평을 발표했다. 루뱅대학교와 어바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등에서 방문교수를,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방문작가를 지냈다. 한국프랑스철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계간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차이와 타자》 《들뢰즈의 철학》 《일상의 모험》 《철학연습》 《생활의 사상》 《타자철학》 《차이와 반복의 사상》 《익명의 밤》 등이 있으며, 시집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둔 날》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 《곡면의 힘》을 펴냈다. 엮은 책으로 《싸우는 인문학》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 《철학의 욕조를 떠도는 과학의 오리 인형》 《한 평생의 지식》(공편) 《스피노자의 귀환》(공편)이 있고, 시집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공편) 《별은 시를 찾아온다》(공편)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공편)도 엮었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 《프루스트와 기호들》(공역)과 레비나스의 《존재에서 존재자로》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차례
프롤로그: 날씨를 선물하는 일기예보
1부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기생충의 예술과 철학│반복, 인생과 역사와 예술의 비밀│자기기만, 영혼의 질병│서양의 본질, 우울과 여행: 바다 이야기 1│물과 바다의 철학: 바다 이야기 2│아이네아스, 보트피플의 로마 건국: 바다 이야기 3│남녀관계는 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동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희생양 없는 사회를 향하여
2부 세상을 견뎌내기 위하여
소년의 나라│바보와 천재│늑대인간│인공지능과 인공양심│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철학과 매스미디어│철학자와 계몽군주│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근대와 인간 주체의 탄생│근대 이후, 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느려질 권리│환생 이야기│쓰레기의 철학│디자인, 예술로서의 장식품│경직된 세계와 예술이 알려준 자유│인생의 빛나는 한순간│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레트로마니아 또는 수집가│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축제
에필로그: 쓰다듬는 손길
주
철학자 서동욱 교수의 신작 에세이로 오늘의 기분과 내일의 세계를 바꾸는 힘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연결될수록 고립되는 세계, 버틸수록 소진되는 일상에 철학의 위로를 전합니다.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우리는 성숙할 수 있을까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우리는 늘 해답에 대해 목말라한다. 높은 성적을 얻을 수 있는 해답,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해답, 이상형을 만날 수 있는 해답 ······ 우리는 이런 해답을 향한 편리한 최단 거리를 발견하지 못해 안달한다. 그래서 옆 사람이 만들어놓은 답을 슬쩍 가져다 써본다. 남의 공부 방법을 모방해보기도 하고, 각종 노하우를 수집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답’이라고 남들이 자랑하는 게, 내 경우엔 잘 적용되지 않는다. 도무지 왜 정답이라고 하는지조차 이해되지 않는다.
‘해답’을 주제로 한 소설이 있다. 개그를 우주적 차원의 교향시처럼 읊고, 터무니없음이 대단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인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Noel Adams의 재기 넘치는 작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다. 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는 이야기가 바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다.
아득한 옛날 우주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컴퓨터인 ‘깊은 생각’에게 사람들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컴퓨터는 750만 년 동안 연산한 뒤 답을 주면서 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답은 ‘42’. 해답은 얻었지만 도무지 왜 ‘42’가 해답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컴퓨터는 말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 생각에 문제는 여러분이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컴퓨터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위대한 질문이었어!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 룬 퀄이 으르릉거렸다. “그래요, 하지만 실제로 그게 뭘까요?” 바보들을 기꺼이 참아주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깊은 생각이 말했다. 망연자실한 침묵이 서서히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글쎄, 그냥 모든 것 ··· 모든 것 ....” 룬퀄이 자신 없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 해답의 의 미 역시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깊은 생각이 말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질문을 찾기 위해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 것을 제안하는데, 그 컴퓨터가 바로 ‘지구’이다. “저는 제 다음에 올 바로 그 컴퓨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 저 같은 것은 그것의 일개 작동 변수조차 계산할 수 없는 그 컴퓨터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된 질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설령 해답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호두알처럼 꼭 닫힌 채 우리의 이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급하다. 그래서 남이 찾은 답안을 빌려서 빨리 사용해보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성공적인 사업의 해답, 공부의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그런데 남들이 찾아낸 해답이 자기 자신에게도 꼭 맞던가? 얼마간 참고는 될지 몰라도 결코 자신을 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 가?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 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해답이란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해답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만 피어오른다.
가령 프랑스 작가 클로드 시몽(Claude Simon)은 자신의 문체에 대한 고민에 빠졌을 때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소설을 접하고서 어떻게 문체를 구사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았다. 포크너의 소설은 클로드 시몽 이전에도 읽혔고 그 이후에도 읽히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의 문제를 품고 있던 시몽에게만 해답이 되어준 것이다. 러시아 민요 또한 많은 사람의 귀에 울려 퍼졌지만, 교향곡을 작곡하며 악상에 대한 고민에 빠졌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에게만 해답이 되어 민요조의 분위기를 지닌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 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는 빈털터리가 그것을 집어 들면 그저 돌멩이, 아니면 영문 모를 ‘42’라는 숫자로만 나타난다.
소설로 돌아가보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문제이기나 한 것인가? 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는 모든 것을 노력 없이 단번에 알아내겠다는 미련한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마치 전혀 공부하지 않은 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을 궁리를 하는 것처럼. 저 질문의 정답은 확실히 ‘42’이다. 그러나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 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거대한 문제가 제대로 된 질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선, 의미심장하게도 ‘지구’라는 컴퓨터가 자신의 장구한 역사를 조금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몸소 체험해야 했다.
세상을 견뎌내기 위하여
인공지능과 인공양심
AI 시대가 도래하며 ‘판단력’의 정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AI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하는 전문적인 ‘법조인’이나 ‘의사’의 일은 판단력이 핵심인 까닭이다. AI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 도전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바로 판단력이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AI의 성공 여부도 결정되리라.
판단력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번의 판단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오판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가 형편없는 군사력을 공개하며 맥을 못 추는 러시아는 자신의 능력을 ‘오판’했다고 비웃음거리가 된다. 능력과 도덕성 모두에서 이토록 수치스럽고 더러운 군대는 인간의 역사에서 처음일 것이다.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실수는 판단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그러면 판단력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판단력을 공부해서 배우면 되지 않는가? 지식을 선생님이나 책에서 얻듯이, ‘판단력’도 선생님이나 책으로부터 배우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판단력은 지식처럼 배울 수 없는 ‘천부의 능력’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삼단논법’을 예로 들어보자. 삼단논법은 그저 단순하고 기초적인 추리 방식이 아니다. 이는 사실 인간이 세상 모든 것을 한 점도 미지의 것으로 남기지 않고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였다.
이 도구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대전제란 하나의 보편적 규칙으로서, 이런 예를 들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가 보편적 규칙이다. 소전제는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이고, 결론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다. 소전제는 소크라테스라는 구체적인 개별자를 매개념, 즉 대전제에서 규칙(죽는다)이 적용되기 위한 조건(인간)에 포섭한다. 규칙의 조건에 포섭된 것은 규칙에 따라 규정됨으로써,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결론을 얻어낸다. 이런 식으로 삼단논법은 모든 개별자를 보편적 규칙 아래 규정하는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판단력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소전제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판단인데, 경험에 주어진 하나의 인식 대상을 인간이라는 보편에 포섭하는 그 판단은 어떻게 성립하나? 하나의 개별자, 즉 소크라테스가 원숭이나 유인원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에 속한다고 어떻게 판단하나? 이런 판단을 위한 지침이나 교본은 없다. 판단력은 책을 펴고 배울 수 있는 지식 같은 것이 아니다.
이 판단은 그냥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이 담당한다. 판단력은 학습될 수 없는 것임을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진리와 방법》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판단력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훈련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오히려 일종의 감각과 같은 능력이다. 판단력은 결코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판단력의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운전이나 테니스 같은 실제적인 ‘연습’의 문제이다. 판단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다. 다소 낯선 명칭이지만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규칙 아래 포섭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가령 법조문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건이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 판정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법의 적용 문제는 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이 주어지지 않고 개별적인 것만 있을 때 이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들뢰즈는 의사의 진단을 반성적 판단력의 예로 제시한다.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찰할 때, 예를 들면 티푸스 같은 병의 개념(인식)이 주어져 있지는 않다. 의사는 이 증상을 판단하고 티푸스라는 병의 개념과 규칙을 발견한다. 그리고 티푸스라는 개념을 인식한 후 이루어지는 치료상의 결정은, 규칙이 주어졌을 때 사례에 그 규칙을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력의 예가 된다. 환자가 티푸스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치료상의 결정을 할 것인가? 일반적 개념(티푸스와 그 치료 방법)은 주어져 있으나, 환자 개인의 체질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어느 시기에 어떤 치료 방법을 적용해야 하는지는 천차만별이다. 여기서 개별 사례에 보편적 치료의 규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알파고가 이세돌과 바둑을 두면서 이미 주어진 바둑의 일반적인 규칙에 맞추어 개개 상황을 판단한 것도 규정적 판단력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면, 반성적 판단력은 의사의 진찰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에서 흥미롭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데, 이 눈치의 정체가 반성적 판단력이다. 동료나 상사의 표정을 잘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을 독해해서 ‘그는 느긋한 성격의 사람이다’ 또는 ‘그는 조급한 성격의 사람이다’ 등의 정보를 얻어낸다.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얼굴에 담긴 독특한 기색으로부터 ‘느긋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일반 개념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반면 이런 얼굴의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반성적 판단력의 자질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AI 의사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천부의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과 규정적 판단력을 AI가 습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개별적인 환자로부터 티푸스(일반 개념)라는 병의 명칭을 찾아내는 것(반성적 판단력), 그리고 티푸스(일반 개념)에 걸린 환자의 개인적인 정황에 맞추어 치료 방식 을 판단하는 것(규정적 판단력) 말이다.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단력은 우리가 다룬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용을 담고 있다. 판단력은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속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그에 따라 개별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판단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가 관철되기를 ‘요구’한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말한다.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특수한 것을 일반적 관점에서 판단할 능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을 올바르고 정당하고 건전한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안다.
즉 판단력은 단지 지식에 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민간인 살해)가 어떤 일반적인 개념(전쟁 범죄)에 속하는지 판단하는 일은 지식을 획득하는 일이다. 동시에 판단력은 ‘이런 살해는 있어선 안 된다는 요구’를 전 인류에 대해 하고 있다. 이런 요구는 세상이 지향해야 하는 도덕적 이념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례가 귀속되는 일반적 규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전쟁 범죄라는 일반적 법 조항을 통해 규정된 민간인 살해가 과연 일어나도 좋은지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판단하는 일은 지식이 아니다.
판단력의 위대함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바로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이런 판단(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의학과 법학의 핵심을 이룬다. 판단력을 습득한 AI가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거나 적용하는 지식의 획 득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가치라는 심급에 따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고 요구하는 판단력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일 것이다.
위안의 말
사랑의 말
세월은 계속 흐르니 아버지와 어머니께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드리고 싶다. 그러나 잘 되지 않는다. 그간 연습이 없었던 까닭이다. 아이에게는 태어나 요람에 누웠을 때부터 일부러라도 사랑한다라는 말을 계속 한다. 안 쓰면 잊히고 마는 외국어처럼 언젠가 말문이 막혀버릴지 모르는 까닭이다. 강아지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은 나날의 성사(聖事)로서 우리 사이에 귀중한 관계를 만든다.
성사의 의의는 시행되는 데 있지 이해되는 데 있지 않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한다와 같은 마음의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거 당연히 알 텐데 뭐하러 하나 하는 심정에서이다. 일상은 젖은 옷처럼 회색으로 처진 채 생기가 없는데, 그 일상에 한번 얹어보자니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화려해 어색하게 느껴져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말들은 생활 속에서 사용함으로써만 인공호흡으로 숨결을 얻듯 생명을 얻는다. 사랑의 말은 발화되지 않으면, 바람이 없을 때 죽는 바람개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잠잘 뿐이다.
‘법’의 말은 이와 다르다. 법전 속에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법은 사람들의 귀에 늘 자신의 법 조항을 속삭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책 속에서 뛰쳐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위법자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사랑의 말은 법전에 쓰인 것과는 다르지만 역시 ‘일종의 법’이다.
왜 그것은 법인가? ‘사과는 빨갛다’와 같은 문장은 그것을 말하는 일이 그 문장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진 않는다. 현실의 사과가 빨간색일 경우 이 사실에 의존해 저 문장은 참된 것으로 유효해진다. 그러나 어떤 말은 꼭 입으로 내뱉어야만 유효해진다. ‘사랑한다’와 같은 말, ‘맹세한다’와 같은 말이 여기 속한다. 사랑은 어디 있는가? 맹세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말 속에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을 비로소 현실로 만든다. 맹세한다는 말만이 비로소 맹세를 세상 속에 등장시킨다.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있는 현실 속의 사랑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을 창조해내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와 아이와 반려자에 대한 사랑은, 한 가정의 장롱 안에서 잠자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금덩어리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랑을 금덩어리로 믿고 보관해놓은 채 영영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나 꺼내 보려 하면, 그것은 장롱의 나프탈렌처럼 다 녹아 사라지고 흔적도 보이지 않으리라. 오로지 입 위에 올려놓을 때만 사랑은 비로소 현실이 된다. 사랑은 죽기 쉬운 생명체인 듯 끊임없이 발화를 통해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살아 있다.
예술과 세월과 그 그림자
축제
축제만큼 설레게 하는 것도 없다. 따분한 날들을 보내는 어린 학생들은 학교 축제를 기다린다. 그때만 잠시 예외적인 자유와 창의적인 생각을 폭죽처럼 터트릴 기회가 찾아온다. 대학 생활의 꽃 가운데 하나도 축제다. 억지로 만들려 하지 않아도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마음도 다른 마음에게 열린다. 축제는 공동체의 즐거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공동체만의 개성을 가시화해주는 힘이다. 거기에 더해 경제적 효과까지 창출하기에 지자체들도 경쟁적으로 축제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축제는 우리 삶의 방식이 되었다.
왜 사람들은 축제를 원하며, 공동체는 축제를 자신의 소중 한 자산으로 간직하려는 걸까? 축제의 사전적 뜻은 ‘축하하여 벌이는 큰 행사’이다. ‘제사’의 의미 또한 지닌다. 세속적 삶과 종교가 구분되지 않은 고대 세계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가 곧 축제였다. 축제는 성스럽고도 세속적인 것이다. 무엇 보다 축제에는 노래와 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다. 즉 일상의 기분을 바꾸어줄 즐거움이 있다. 이는 축제가 노동으로부터의 방면을 뜻한다는 것, 축제란 곧 ‘놀이’임을 알려준다. 하위징아(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는 종교 의례와 축제와 놀이가 서로 겹쳐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한다. “사람들이 성소에 모여드는 것은 집단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이다. 성사, 희생, 성스러운 춤, 경기, 공연, 신비 의례 등은 축제를 축하하는 행위이다.”
축제의 또 다른 얼굴이라 해도 좋을 ‘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놀이를 주체와 동떨어진 어떤 대상처럼 여길 수 없다. 놀이를 즐기려면 하나의 고립된 주체가 대상을 멀거니 바라보듯 해서는 안 되고, 놀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놀이 속에는 놀이의 고유한 법칙이 있을 뿐, 자신의 독자성을 고집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여럿이 함께 넘는 줄넘기나 강강술래 같은 놀이에는 놀이 자체의 법칙이 있지, 주체의 독자적인 의지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이런 놀이의 고유한 법칙이란 무엇인가? 바로 ‘반복 운동’이다. 가다머는 하위징아처럼 ‘놀이’의 본성을 깊이 숙고하는 사상가인데, 《진리와 방법》에서 놀이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놀이는 운동이며, 이 운동은 끝나게 될 어떤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왕복운동은 명백히 놀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따라서 이 운동을 누가 혹은 무엇이 수행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하던 어린 시절의 놀이를 떠올려보라. 예컨대 딱지치기는 최종 목적이 없으며, 반복 자체가 원리이다. 잃을 딱지가 바닥이 나는, 놀이 외적인 조건을 통해서만 이 놀이는 종결된다. 배드민턴이나 탁구 같은 놀이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특정 점수에 도달하면 놀이를 멈추도록 하는 ‘임의적인 강제’가 있을 뿐, 놀이 자체가 내적 발전을 통해 완성하는 최종 형태는 없다. 강강술래는 어떤가? 손을 잡고 원형으로 춤추는 반복의 원리만 있을 뿐 종결점도 목적지도 없다. 노름꾼들의 카드놀이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따고 일어서려 하면 분위기가 험악해지기에 도리없이 다시 앉아 끝없이 반복되는 놀이를 해야 한다. 이 놀이에 내재적인 종결점이 없는 까닭이다. 축제 또한 이런 ‘반복’의 놀이이다.
축제는 해마다 다르고 새로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축제의 시간은 우리의 통상적인 직선적 시간을 통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축제는 ‘회상’이 아니다. 우리는 석가탄신일이나 부활절 축제를 맞아 ‘어, 작년에 태어난 부처님이 어떻게 올해도 또 태어나시지?’ 또는 ‘예수님 작년에 이미 부활하셨어, 부활은 이미 옛날 일이야’라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축제는 언제나 새로운 사건으로 찾아온다. 그것이 축제의 시간, 반복의 본질이다. 반복은 이미 존재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는 반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만의 다음과 같은 말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축제는 시간의 극복이다.” 직선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며 일하고 사랑하고 좋은 추억과 나쁜 기억을 쌓고서 죽을 날을 향해 간다. 죽음 앞에 놓였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회한 속에 돌아보아 야 하는 사라진 시간뿐이다. 반면 축제는 이런 시간을 극복한다. 축제 속에서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올해 석가모니의 탄생은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소중한 사건이지, 작년 석가탄신일의 재탕이 아니다. 누구도 이 반복된 탄생을 이미 이루어진 일의 김빠진 재방송이라 하지 않고, 새로운 사건으로서 소중히 여긴다. 즉 축제 속에 들어선 인간은 탄생으로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덧없는 일직선의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자다. 매해 반복되는 벚꽃 축제의 꽃들이 새로운 꽃들이듯 말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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