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지은이 : 한상원 (지은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3년 11월




  • 니체는 서구 정신이 천착해온 과정을 전복하고 해체하고자, 생애 내내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형이상학 및 신학과 대결해 왔습니다. 그의 철학 내용을 내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 적용해봄으로써 나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봅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의 차라투스트라, 니체

    니체는 어떤 사상가였는가?

    니체가 생애 내내 다루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정신이 천착해온 과정을 전복하고 해체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그리스의 예술 정신을 파헤친 『비극의 탄생』 에서 그의 철학적 주저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말년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문제의식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니체는 서양 철학의 정수라고 불리는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서구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경험적 존재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실체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플라톤의 이데아,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신 개념에서 보듯, 이러한 실체의 형이상학은 현존, 곧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나의 삶을 불완전한 것, 유한한 것, 상대적인 것으로 가치평가하고, 이에 비해 완전한 것, 무한한 것, 절대적인 것을 신이나 실체에 귀속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한 형이상학은 매우 쉽게 기독교의 신 개념과 접목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형이상학과 신학은 모두 이처럼 현존을 부정하는 관점이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의 현재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처럼 니체는 기독교의 전승 이래 내려오는 선과 악, 본질과 현상, 실체와 속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체계에 반대하면서,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철학을 제시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이러한 니체의 철학적 관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서구 기독교 전통이 라이벌로 생각해서 투쟁해왔던 또 다른 사조인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Zoroaster)는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영어식 표기법이다―를 화자로 빌려온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리스도를 대신해 자신의 복음을 전파하고 군중들에게 삶의 새로운 가치를 천명하는 새로운 예언자이며, 이런 의미에서는 '안티크리스트'라고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군중들에게 복음을 설파하는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니체의 서술 방식과 차라투스트라가 겪는 고뇌 등은 많은 부분 기독교의 복음서 형식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경 복음서가 다루는 그리스도의 사상에 대한 패러디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니체의 철학은 그리스도교에 대적했던 동방의 예언가 차라투스트라를 모델로 차용하여, 형이상학과 기독교 신학이 부정했던 우리의 현존을 긍정하고, 기존에 부정된 새로운 가치들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니체를 '근대의 차라투스트라'라고 명명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은 이러한 설명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로아스터교' 같은 이른바 '이단' 사상과 '안티크리스트'와 같은 표현들이 불러일으키는 신성 모독의 감정들이 내면에서 양가적인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곱씹어보는 과정이 반드시 기존에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철학은 그러한 '모 아니면 도'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철학함이란, 특정 사상가의 철학 내용을 내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 적용해봄으로써 나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독교냐 아니냐'라는 양자택일의 물음이 아니라, '나의 삶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방향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우리가 니체를 수용하는 더 바람직한 길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우리의 니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자로서 우리에게 지금 자신의 현재 모습을 긍정하라고 말한다. 현존의 긍정, 운명애 같은 개념들은 니체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사상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도 치열한 경쟁 때문에 자꾸만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콤플렉스로 인한 낮은 자존감 때문에 자꾸만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쉽게 상처받는 수많은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 니체가 설파하는 그러한 ‘긍정 바이러스’가 우리 삶에 널리 퍼짐으로써 우리 삶이 얼마나 더 풍요로울지 상상해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나 자신의 현존을 긍정한다는 것은 결코 지금 나의 모든 모습에 대해 인정하고 용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니체는 유독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경멸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고, 자신을 경멸하는 자야말로 위버멘쉬가 될 자격이 있다는 이러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디오니소스적 긍정'과 현존의 긍정을 말하는 또 다른 니체의 모습과 대립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율적인 자기 극복은 곧 자신에 대한 혐오와 낮은 자존감으로 연결되지만, 스스로 자신의 현재 모습을 극복하기로 마음먹는 사람의 건강한 자기 경멸은 위대한 창조적 도전 정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건강한 경멸의 결과로 나타난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바로 이러한 우리 자신을 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참된 자기 긍정이 자기 극복에서 비롯한다는 그의 사상은 이 '긍정'이 때로 보수적인 체념이나 순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한 반비판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니체의 사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눈을 돌려볼 차례다. 우리는 오늘날 신이 경멸받는 시대에, 오히려 신을 대체하는 새로운 우상에 빠져 살아갔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새로운 우상이란 돈, 권력 또는 허울뿐이고 맹목적인 탐욕을 낳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자기 극복의 삶, 창조적

    인 삶이 아니라 우상에 눈이 멀어 나와 주변 사람을 모두 슬프게 만드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나만의 세계에 빠져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 OTT의 세계로 도피해 살아가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해 '건강한 자기 경멸'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여겨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격한 멜랑콜리 속에서 고통받으며 사는 것은 아닌가? 많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우리를 그러한 존재로, 니체의 용어대로라면 잘 길들여진 가축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강요된 낙타의 삶을 떨치고 사자가 되어보자.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고, 나에게 허위적인 삶과 헛된 욕망을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한 사회 제도에 대해 분노의 함성을 지르는 포효하는 사자가 되어보자. 그런 저항하는 삶, 노예이길 거부하는 삶 속에서 비로소 어린아이의 순수 긍정을 통해 위버멘쉬를 향해 이행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구체적인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보도록 하자. 그리고 타자와 연대하면서 보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

    우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

    1부 맨 앞에 나오는 「차라투스트라의 서문」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계기에 따라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른 살이 되던 해 수양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간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겠다(하산하겠다)고 다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본문 구절을 함께 읽어보자. 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선물을 베풀고 나눠주고 싶다. 인간들 중에 현명한 자들이 다시 한번 그들의 어리석음에 기뻐하고, 가난한 자들이 다시 한번 그들의 부유함에 기뻐할 때까지. 이를 위해 나는 심연으로 올라가야 한다. 마치 그대가 저녁에 하는 것처럼, 바다 뒤로 가라앉아서는 지하세계에 빛을 밝혀주듯이, 그대 풍요로운 별자리여!


    사람들은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을 숭배한다. 그러나 국가의 신민이 되느니, 전사가 되어 영예롭게 투쟁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강조점이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국가를 넘어선 세계의 유토피아적 전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국가가 중단되는 곳, 나의 형제들이여, 그곳을 보라! 무지개가, 그리고 위버멘쉬를 향한 다리가 보이지 않는가?


    이처럼 인민을 국민으로 조직화해내고 복종시키는 근대 국민국가를 비판한 데 이어 니체의 화자 차라투스트라는 또 다른 근대의 결정적인 사회 제도인 시장을 공격한다. '시장의 파리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설교 내용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제목처럼 시장에 모인 군중과 상인들을 파리들로 부르며 그들에게 경멸적인 비난을 가한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서 멀리 떨어질 때,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의 소문에 의해 만들어지는 풍문에 무관심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시장이라는 근대적 체제의 사회 제도들을 우리가 거부하거나 반대할 수 있을까? 니체는 국가와 시장의 철폐를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와 시장이 지배하는 현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왜소화되는가를 고발한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도망쳐라, 나의 벗이여, 너의 고독으로.(68쪽)


    어째서 고독인가? 고독은 우리를 새로운 창조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연설이 이뤄진 얼룩소라는 도시를 떠나려고 한다. 그런데 이제 많은 젊은이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며 그의 곁을 지키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홀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에게 태양을 휘감는 뱀이 황금 손잡이에 새겨진 지팡이를 선물했다. 이를 보고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금이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금이 비범하고, 쓸모없고 광채 속에서 부드럽게 빛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최고의 덕도 이와 마찬가지다. 최고의 덕 역시 비범하고 쓸모가 없으며, 광채 속에서 부드럽게 빛난다. 그러한 덕, 즉 즉각적인 유용함을 위해 타오르듯 빛나는 것은 최고의 덕이 될 수 없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오랫동안 빛나는 것이 오히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덕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리는 한낮의 태양을 거쳐야만 아침에서 저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위대한 정오'를 기다리는 일, 그 뜨거운 한낮을 거쳐 나의 존재를 위버멘쉬를 향해 초극하는 자세로 가꿔내는 일, 그것이 차라투스트라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르침이다. 결국 우리는 몰락하는 존재이지만, 이 몰락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밧줄을 건너 반대편의 위버멘쉬에 도달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 주소는 그러한 이행과 가능성의 순간들이다. 이처럼 차라투스트라는 1부 전반을 걸쳐 위버멘쉬를 향한 이행과 가능성의 삶으로서 현재를 긍정하라고 강조한다.


    낡은 도덕과 새로운 도덕

    2부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서구 사회를 수천 년간 지배했던 기존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이렇게 예리한 칼날을 가지고 서구 전통 사상에 도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을 나약하고 병든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제시하는 새로운 도덕은 인간을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나는 새로운 길을 간다고 자신에게 말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그가 처음 가는 곳은 행복의 섬이라는 곳이다. 이 섬에서 그는 세계의 창조를 통한 행복을 설파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세계라고 부른 것, 그것은 우선 창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세계는 이미 창조된 것이 아닌가? 실제로 기독교에서는 신의 말씀을 통해 6일에 걸쳐 천지창조가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창조라는 능동적 행위는 이미 신에 의해 이뤄졌으며, 세계는 신의 법칙에 의해 고정되어 있고, 우리는 그 주어진 세계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의 창조성, 인간 자신의 능동성은 발휘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을 부정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세계를 창조해야 함을 주장한다. 너희의 이성, 너희의 형상, 너희의 의지, 너희의 사랑은 너희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세계를 자기 자신의 창조적 행위가 실현될 수 있는 공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차라투스트라는 “너희 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사제들에 관하여 자신의 비난을 집중한다. “이 사제는 딱하구나. 그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어째서 딱한가? 그들이 ‘구세주’라 부르는 자가 그들을 얽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아, 누군가 그들을 그들의 구원자로부터 구원하였으면!” 그들의 잘못된 종교로 인해 사제들은 죄인이 되고, 벌을 청해야 하며,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부정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고통을 주는 자를 신으로 모시고픈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는 “내가 구세주를 믿게 하려면 그들은 나에게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어야 할 것이다” 하고 말한다. 즉 더욱더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신으로 불려 마땅하지, 우리에게 죄짓게 하고 벌을 주고 고통을 주는 존재는 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신의 자격을 갖는가? 애초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들의 구원자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위버멘쉬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위버멘쉬가 되었는가? 아직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위버멘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멈추지 말고 위버멘쉬를 향해 도약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자신들을 덕 있는 자라고 믿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이 사람들은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자신들의 품성을 스스로 찬양하지만, 실은 이들이 여전히 어떤 대가를 바라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지상에서 행한 덕에 대한 대가로 천국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가 혹은 처벌의 논리로 도덕성을 규정하는 것이 니체의 전통 도덕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머니가 아이에 대한 사랑의 대가를 바라지 않듯이, 도덕에서도 대가의 논리가 사라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대가의 논리란 결국 공포에 의해 선을 수행하는 것이며, 비유하자면 “채찍 아래에서 일으키는 경련”인 것이다. 그것은 참된 도덕이 아니다. 또 스스로 비참해지는 것도 도덕이 아니고 이기심을 억제하고 이타적으로 행위하는 것도 참된 도덕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덕이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마치 엄마의 성품이 자라나는 아이 안에 반영되어 있듯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 속에 자신의 자아가 포함되어 있는 행위가 덕 있는 행위라고 말한다. 즉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나를 희생하고 버리고 부정하면서 선을 찾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행위 속에 나의 의지가 드러날 때 그것이 덕 있는 삶이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2부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존재의 고양과 이를 통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연민이나 평등, 내세의 구원 같은 낡은 도덕을 넘어서는 새로운 도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부 마지막 부분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설교를 중단하고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에게는 역시 자기만의 가장 고요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울러 차라투스트라는 본인이 위버멘쉬를 설파했지만, 위버멘쉬는 도래하지 않았고, 본인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갔지만,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고 슬퍼한다. 그는 소리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속삭임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뇌에 찬 분열적 자기 대화를 이어가다가 자기 내면의 분노를 조절하고, 아이의 긍정을 되찾기 위해 고독을 되찾을 것을 자신에게 주문한다. 밤에 그는 홀로 길을 떠나고, 2부는 막을 내린다.


    새로운 서판을 위하여

    3부에서 니체가 전달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낡은 덕이 새겨진 서판을 깨부수고 새로운 서판을 써내려가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덕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덕을 제시한다. “도둑질하기 어려울 때는 훔쳐야만 한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하라. 그러나 우선은 의지할 수 있는 자가 되어라”, “너희의 이웃을 항상 사랑하라. 그러나 우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라.” 이러한 계율들은 ‘도둑질하지 마라’, ‘이웃을 사랑하라’ 등과 같은 기존의 기독교적 도덕률에 대한 패러디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세 가지 금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악’으로 규정하고 기존의 사고방식에 의해 저주받은 것들이다. 세 가지 금기는 육체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금지된 덕목 하나하나를 곰곰이 뜯어보면서 그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먼저 쾌락은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는 자들이 가장 저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쾌락은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죄 없고 자유로운 것이며, 대지의 정원에서 누리는 행복이자, 현재의 충만함에 대해 미래가 갖는 모든 고마움을 뜻한다. 따라서 쾌락은 더 높은 행복과 최상의 희망을 위한 커다란 비유적인 행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지배욕이란 가혹한 자를 처단하는 채찍이며, 모든 부패하고 쓸모없는 것, 공허한 것들을 무너뜨리는 지진이다. 지배욕은 인간을 유혹하면서 행복을 향해 열정적으로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결코 병적인 욕구가 아니다. 이기심도 마찬가지다. 이기심이란 건강한 신체에서 비롯하여 주변 사물이 거울이 되어 비춰주는 강한 영혼에서 나오는 건강하고 건전한 자기애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 복된 이기심을 대하는 것이 그동안 덕으로 불려왔던 것이다. 이제 이 모든 이기심을 학대하는 것이 그동안 덕으로 불려왔던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가치들의 전복이 일어나, 금지되어왔던 악덕이 새로운 덕으로 불리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러한 전복이 이뤄질 순간, ‘위대한 정오’는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며, 곧 도래할 것이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예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중력이라는 힘에 사로잡혀 항상 무거움을 느끼며 살아갈 뿐, 가볍고 명랑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삶의 긍정을 위한 덕목 중 하나가 '가벼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시대의 인간들은 마치 타조와 같아서, 말보다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머리를 땅속 에 처박고 있을 뿐이다. 삶이 무겁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력이라는 악령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무게로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가벼워지고자 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마치 새와 같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친다. 그것은 건강하게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낡은 서판은 부서져 있다. 이미 낡아버려서 우리의 삶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이 서판은 누군가에 의해 부서져버렸다. 그 옆에는 절반쯤 새로 쓴 서판이 있다. 이 새로운 서판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와 우리의 과제로 제시된 것이다.


    새로운 삶을 향하여

    책의 4부에는 차라투스트라가 전달해주는 새로운 사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4부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히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산속에서 수행하던 차라투스트라의 여러 벗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각각은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가능성과 함께 커다란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좌충우돌의 에피소드들이 4부를 구성하고 있다.


    4부에서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미 백발을 한 노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의 표정을 하고 있다. 그의 곁을 지키는 뱀과 독수리는 그에게 그가 자신의 행복을 기다리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은 전부터 행복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과제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동물들에게 그가 산 위로 가서 꿀을 헌납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막상 산 위에 도달하자 동물들을 돌려보내고 혼자가 되어 실컷 웃는다. 사실 꿀 헌납은 구실이었을 뿐, 그는 더 높이 올라가 홀로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람들을 향해 내려가지(몰락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의 가르침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차라투스트라의 말 속에는 상승(고양됨)과 하강(몰락)의 모티브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은 산꼭대기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겠다고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비유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산에는 물고기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차용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침이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일어나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흩어지지 않고 아직도 동굴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어느 순간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고 이어 사자가 포효를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을 일종의 신호이자 조짐으로 해석한다. 사자는 동굴을 향해 돌격했고,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도망쳐 사라져버린 것이다. 잠시 놀라 기억상실에 빠졌다가 다시 차라투스트라는 어제 늙은 예언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그 예언자는 차라투스트라에게 그에게 여전히 ‘마지막 죄’가 남아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마지막 죄란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 결국 답을 알아냈다. 그것은 더 높은 자들에 대한 연민이었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그러한 연민조차 끝내버리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나는 나의 작품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제 그의 때가 도래했다. 보라! 사자가 왔다. 나의 아이들이 가까이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성숙했고, 나의 시간이 도래했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이제 위로 올라라, 위로 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이렇게 말한 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동굴을 떠났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결국 니체가 하려는 주장은, 위대한 정오를 향해 존재를 고양시키려는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지, 특정한 현자나 사상가, 철학자의 위대한 주장에 현혹되어 그러한 사상과 철학을 숭배하는 순간 그것이 새로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삶의 철학자, 생철학자로서 니체는 이론과 사상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무기로 삼아 실행에 옮겨야 할 인간의 새로운 삶을 노래하고 싶어했던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끝없이 좌절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면서도 그 좌절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자기 극복의 요소를 발견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불굴의 의지와 구도자적 모습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그를 닮아가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결국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위버멘쉬의 삶을 살아가고 그것에 도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니체는 우리에게 좌절에 빠져 허우적대지 말고 위대한 자기애와 위대한 자기경멸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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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