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옳을 순 없어도 항상 이길 수는 있습니다
 
지은이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은이), 권기대 (옮긴이)
출판사 : 베가북스
출판일 : 2023년 12월




  • 논쟁에서 이기고, 방어하고, 승리하는 법칙을 소개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비수를 준비하고 청중을 현혹하는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논쟁의 본질을 낱낱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옳을 순 없어도 항상 이길 수는 있습니다


    모든 토론술의 튼튼한 기반 : 논쟁의 본질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논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파해야 한다. 즉 실제로 논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얘기다.


    상대방이 나에게 하나의 논제(These)를 제시했다고 하자. 혹은 내가 상대방에게 논제를 제시해도 마찬가지다. 논제를 반박하는 데는 두 가지 화법(Modus)과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우선 두 가지 화법이란,

    a. 그 논제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ad rem) 화법과

    b. 논쟁의 상대방(사람)에 초점을 맞추는(ad hominem) 화법, 혹은 상대방이 시인(인정)한 사실에 바탕을 두는(ex concessis) 화법을 말한다.


    첫 번째 화법은 상대방이 내세우는 명제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 즉,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 화법은 그의 명제가 앞서 그가 주장했거나 시인한 내용과 맞지 않는다는 점, 즉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가 보여주는 것이다. 이 화법은 상대적인 입증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 두 가지 방식이란, 직접적인 반박과 간접적인 반박을 가리킨다.

    직접적인 반박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근거를 공격하는 것이고, 간접적인 반박은 상대방의 주장이 가져올 결과를 공격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직접적인 반박은 상대방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간접적인 반박은 상대방의 주장이 ‘옳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a. 직접적인 반박의 경우 두 가지를 할 수 있다. 우선 상대방이 주장하는 근거가 틀렸음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내세우는 대전제라든지 소전제를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면 상대방이 주장하는 근거는 인정해주되 그러한 근거의 결과로는 상대방의 주장이 도출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이 경우는 상대방의 추론과정을 문제 삼는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논리적인 귀결 혹은 결론에 이르는 방식을 공격하는 셈이다.


    b. 간접적인 반박의 경우 간접반증과 단순반증 가운데 하나를 이용한다.

    1) 간접반증: 상대방의 명제를 일단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무엇이든 이미 옳다고 인정된 명제와 관련해서 상대방이 내세운 명제를 전제로 삼아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시도 끝에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의 결론이 사물의 이치와1 모순되거나 자신의 다른 주장들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명백하게 잘못된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므로 논제 자체에 초점을 맞추든 논쟁의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추든 그 결론은 모두 거짓이 된다.


    2) 단순반증: 상대방이 주장한 개념에 포함된 여러 내용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직접 입증함으로써 상대방 주장의 보편적인 명제를 반박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개별적 입증을 통해 상대방의 명제는 타당하지 않고, 따라서 그 자체로 상대의 주장이 틀림없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논쟁의 기본 골격이요, 뼈대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접하는 내용은 논쟁에 관한 ‘골骨해부학’이라고나 할까. 근본적으로 모든 논쟁이 바로 이 뼈대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옳을’ 수 있는 38가지 논쟁의 법칙 ▶공격하라

    상대가 발끈하면 바로 거기가 약점 !

    상대방이 어떤 논리를 펼쳐나가다가 느닷없이 성질을 부리거나

    화를 내면, 나는 바로 그 논거를 물고 늘어져 끈질기게 파고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보더라도 상대방의 화를 돋우는 것이 나

    한테 유리할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방 생각의 흐름 가운데 약점을

    건드렸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겉으로 드러

    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주장에 유리한 비유를 재빨리 찾아내라

    근본적으로 이 기술은 흔히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라고 불리는 순환논법을 정교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즉, 먼저 한 사람이 밝히고자 하는 바를 일단 말로 표현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상대방의 순전히 분석적인 판단을 통해서 그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의 신변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 혹은 ‘보호해주기’라고 부르는 것을 상대방은 ‘감금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런저런 사물에 붙여주는 명칭을 통해서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누군가를 ‘성직자’라고 부르는데, 상대방은 그를 ‘목사 나부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논쟁의 기술 가운데 이 기술이 가장 흔히 사용된다. 거의 본능적이라고나 할까.


    종교적인 열정 → 광적인 신앙심

    잠깐의 실수, 여자에 대한 남자의 정중한 관심 → 간통

    부적절한 말 → 음담패설

    재정적 혼란 → 파산

    영향력과 연고를 활용해서 → 뇌물과 정실情實을 이용해서

    진심에서 우러난 고마움 → 넉넉한 대가


    상대의 논거를 뒤집어버려라

    ‘상대방의 논거를 뒤집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아주 멋진 트릭이다. 말하자면 상대방이 자신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논거를 역으로 이용해 도리어 그를 공격하는 데 써먹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그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그 점을 참작해주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하면, 나는 이걸 뒤집어서 이렇게 공격하는 것이다. “아니죠, 아직 어린아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한층 더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의 나쁜 버릇이 더욱 심해지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상반되는 두 명제로 상대를 조종하라

    내가 제시하는 명제를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면 그것과 정반대되는 명제를 함께 내놓고 그에게 선택하도록 맡긴다. 특히, 나는 이때 이 반대되는 명제를 아주 날카롭고 큰 소리로 강조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보다는 훨씬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나의 명제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무릇 인간은 아버지가 말하는 것이라면 모두 다 복종해야 한다’는 명제를 상대방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안이 무엇이든 간에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까, 아니면 순종하지 말아야 합니까?”


    혹은 이런저런 일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자주, 빈번하게’라는말이 나왔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이 ‘자주’라는 말을 ‘몇몇 경우’로 이해해야 할지 ‘많은 경우’로 이해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많은 경우’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회색을 검은색 옆에다 갖다놓으면 ‘희다’라고 말하는 반면, 흰색 옆에다 갖다 놓으면 ‘검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위에 호소하라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것에 호소하여 주장을 펼치는 기술. 이런저런 논거를 대는 대신에 상대방의 지식수준에 맞추어 내가 가진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세네카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누구나 판단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믿으려는 경향이 있다.”(《행복한 삶에 관하여De vita beata》 제1부, 제4장) 그러므로 내가 상대방이 존경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면, 논쟁에서 승리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상대방의 지식이나 능력이 부족하면 부족할수록, 그만큼 나는 상대에게 더 많은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의 지식과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 최고의 수준이라면, 그는 기껏해야 나에게 아주 약간의 권위를 부여하거나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기껏해야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분야의 학문이나 예술, 비즈니스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해당하는 정도의 권위만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자못 신뢰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할 것이다.


    이에 반해서 보통사람들은 어떤 분야인가에 상관없이 ‘전문가들’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 보통사람들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일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수입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분야를 근본부터 철저히 아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자신의 분야를 철저히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 남을 가르칠 시간 따위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보통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은 엄청난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만약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이슈에 어울릴만한 권위가 없다면, 겉으로 보기에나마 그럴듯하게 권위가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전문가들이 다른 맥락이나 다른 관계에서 언급했던 내용이라도 인용해야 할 것이다.


    특히 상대방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의 권위를 이용하면 가장 효과가 탁월하다. 예컨대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된 의미 없는 미사여구에 대해서 나름의 존경심을 느끼는 법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권위를 왜곡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날조할 수도 있으며, 혹은 완전히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권위를 휘두를 수도 있다. 대개 상대방이 항상 책을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책을 본다고 해도 어떻게 활용하는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편견’ 역시 권위로서 사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0권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수가 옳다고 말하면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견해라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그 견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득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그것을 자신의 견해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떤 실례를 들어주면 그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양이 어디로 향하든지 무조건 따라가는 양 떼와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죽기보다도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의견에 보편성이 있다고 해서 그토록 엄청난 무게를 지닐 수 있다니, 참으로 희한하지 않은가! 그런 견해를 덜렁 받아들인다는 것은 철두철미 판단이 결핍되어 있다는 뜻이며, 단순히 몇 가지의 사례에만 의존해 남의 견해를 따른다는 뜻이라는 걸, 자신의 경험으로 잘 알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스스로 신념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론》 제9권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별의별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자기 의견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머릿속에 허튼 생각들이 너무 많아서, 그쪽을 잘 건드린다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항상 옳을’ 수 있는 38가지 논쟁의 법칙 ▶방어하라

    궤변에는 궤변으로 맞서라

    상대방이 순전히 겉으로만 그럴싸한 궤변에 가까운 논거를 펼치고 있다는 걸 누가 봐도 빤히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나는 그의 어정쩡한 논리와 피상적인 면을 파헤침으로써 상대방의 주장을 무력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겉으로는 그럴싸하고 궤변에 가까운 반대 논증으로 상대방을 물리치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는 게 아니라,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논쟁 내용이 아니라 논쟁 상대방인 나를 겨냥해 논쟁을 펼친다면, 나 역시 상대방에 대하여, 혹은 그가 시인했던 것에 근거를 두고 덤벼들어 그의 힘을 빼놓으면 충분하다. 대개 어떤 사안이 옳은지 그른지를 놓고 장시간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대방에 관한 이야기로 공격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르고 간단하다. 그런 공격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형편없는 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상대방이 설명하는 근거에 대해서 내가 아무런 반론도 제시할 수 없을 땐 어떻게 할까? 이럴 땐 묘하게 세련된 반어법(反語法)을 이용해, 내 능력이 모자라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당신이 말한 내용은 빈약한 저의 이해력을 훌쩍 넘어서는군요. 당신의 말이 정말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그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네요.”


    이런 식으로 말함으로써 나는 청중에게 상대방이 한 말이 허튼소리라는 인상을 은근히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되고, 항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할 무렵, 케케묵은 절충주의 학파의 많은 교수도 바로 이런 식으로 대응했다. “우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걸로 칸트의 이론을 물리쳤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를 따르는 새로운 학파의 추종자들이 그 케케묵은 교수들은 정말로 칸트를 이해하지 못했을 따름이므로 그 핑계가 틀린 말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자, 교수들은 참담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안을 보편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서 버티라

    상대방이 자기가 제시한 주장의 특정한 논점에 관해 무엇이든 이의를 제기해보라고 나한테 분명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딱히 이의를 제기할 거리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땐 그 사안을 아주 보편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것을 물고 늘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물리학적 가설을 왜 믿을 수 없는지 설명해야 하는 경우에는, 우선 인간이 지닌 지식이라는 것의 허위성에 관해 늘어놓은 다음, 온갖 예를 들어가면서 그 허위성을 밝혀내면 되는 것이다.


    자동차 급발진은 지금까지 의혹만 잔뜩 있을 뿐이지, 기계적 결함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기계 결함이라는 증거라도 갖고 있나요


    사람이 만든 기계는 복잡할수록 오작동이라는 오류가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자동차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완전무결한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상대가 무리한 주장을 하도록 자극하라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고 싸움을 걸면 상대방은 자극받아 자신의 주장을 과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처럼 반박을 통해 상대방을 자극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혹은 적절한 한도 안에서는) 진실인 주장을 상대방이 진실의 한계 너머까지 과도하게 펼치게끔 유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해놓고 내가 상대방의 지나친 과장을 반박하면, 마치 상대방의 원래 명제까지도 반박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거꾸로 나 역시 상대방의 반박에 자극받아 내가 제시한 명제를 과장한다든지 확대하는 쪽으로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 역시 기회만 있으면 내가 펼친 주장을 내 의도보다 더 확대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방이 그런 수법을 쓴다면 곧바로 제동을 걸어야 하며, 내가 주장하는 범위의 경계선 안쪽으로 그를 다시 데려다 놓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말한 것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의 뜻으로 말하진 않았어요!”



    ‘내가 항상 옳을’ 수 있는 38가지 논쟁의 법칙 ▶승리하라

    ‘나무’를 반박함으로써 ‘숲’ 자체를 물리치라

    이것은 가장 중요한 논쟁의 기술 가운데 하나다. 논쟁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 상대방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가 자신의 말을 뒷받침할 증거를 잘못 선택하는 경우에는 매우 손쉽게 상대방의 증거를 반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상대방의 잘못된 증거를 반박하면서, 상대방이 내놓은 사안 자체까지도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따지는 대신에 누구의 추론인지를 따지는 ‘대인논법(對人論法)’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상대방이나 이해관계 있는 주위 사람들이 올바른 증거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내가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론적인 증거를 제시한다면, 이는 얼마든지 반박당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형편없는 변호사들이 유리한 소송에서조차 패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변호사들은 자기가 맡은 소송에 적용할 적절한 법 조항조차 생각해내지 못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항으로 변호하려 들기 때문이다.


    내 결론을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게 하라

    결론을 내리려고 하더라도, 내 결론을 상대방이 예측하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 오히려 대화를 이끌어가는 도중에 상대방이 정신이 혼란스러워 내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전제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씩 개별적으로 시인하게끔 하라.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은 온갖 술책을 시도할 것이다.


    행여나 상대방이 내가 펼치는 전제를 시인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면, 그 전제에 관한 또 다른 전제들을 제시하라. 말하자면 도출된 결론을 다시 다른 명제의 전제로 이용하는 소위 ‘전(前)삼단논법’을 써먹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 개의 전제에 대해서, 순서에 구애받지 말고 하나씩, 상대방의 시인(동의)을 받아내라. 아울러 나에게 필요한 시인을 다 얻어낼 때까지 상대방에게는 반드시 나의 게임을 꼭꼭 숨겨야 한다. 그러니까 논의 중인 사안을 먼 데서부터 이끌어가라는 얘기다. 이 규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 제8권 제1장에 나오는 것이다. 굳이 예를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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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