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1513년에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교황 특사로 석방되어 산탄드레아 시골 농장에 칩거했다. 으스름한 저녁노을이 토스카나 언덕을 붉게 물들이면, 집으로 돌아와 관복으로 갈아입었다. 황제와 교황을 알현할 때 입었던 옷이다. 그는 황제와 교황 대신,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옛 위인들을 만나 상상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역사의 순리를 묻고, 권력의 속성에 대해 질문했다. 그리고 펜을 들었다. 지난 세월 펼쳐왔던 숨 막히는 정치와 외교의 현장을 떠올리며, 그때 얻었던 통찰력을 고전의 가르침과 비교하는 글을 썼다. 이렇게 ‘군주론’이 탄생했다.
저자가 겪었던 인생 역정의 비슷한 장면을 오늘날 우리가 보는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 또는 리더의 모습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더불어 끊임없이 경쟁하고 성장하며 자본을 축적하고 확장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무역 전쟁과 외교 전쟁을 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생존이 곧 선’이되었던 16세기 이탈리아의 모습과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 21세기에 500년 전에 집필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저자는 개인의 역량을 강화해 운명을 극복하라고 말한다. 뛰어난 리더가 출현해 난세를 극복하고 풍전등화의 조국을 반석위에 올려 놓기를 바랬으며, 개개인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시대에 휩쓸리거나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길 기원했다. 나를 제대로 다스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이끌 수 있다는 관점에서 ‘군주론’은 자기계발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도적인 삶을 사는 개인과 국가만이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이 책에 깃들어 있다.
■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쇠락한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인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마키아벨리는 1498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를 담당하는 제2 서기국 서기장을 역임했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10인 위원회의 서기장도 겸했다. 1512년 스페인의 침공으로 피렌체 공화정이 몰락함과 동시에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하게 되면서 마키아벨리는 공직을 박탈당했다. 1513년에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란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교황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는 다시 공직 생활을 하기 위해 메디치 가문의 새로운 군주를 알현하여 ‘군주론(Il Principe)’을 헌정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끝내 외면당하고 만다. 그 후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 ‘전술론’, ‘피렌체사’ 등 저술 활동에 힘쓰면서 공직복귀에 애썼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27년 6월 21일에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역자 최현주
역자 최현주는 신예 르네상스 연구자이다. 연세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고, 베네치아 출신의 천재 화가 티치아노의 생애와 작품을 주제로 학위 논문을 썼다. ‘강희제 통치기의 예수회 중국 선교와 전례 논쟁(연세대학교 출판부, 2021년)’의 번역자로 17~18세기의 유럽과 중국의 종교 문화 교류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현재 영국의 런던 대학교에 소속된 코톨드(Courtauld) 미술 대학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를 전공하고 있다.
■ 차례
처음으로
이 책을 손에 쥔 독자에게
‘군주론’의 판본과 번역에 대하여
헌정사: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님께 바치는 글
1장 군주국의 종류와 이를 획득하는 방법에 대하여
2장 세습 군주국에 대하여
3장 혼합 군주국에 대하여
4장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 다리우스의 후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까닭에 대하여
5장 정복당하기 전 자국의 법률에 따라 살아온 도시나 군주국을 통치하는 방법에 대하여
6장 자신만의 무력과 역량으로 획득한 새로운 군주국의 통치에 대하여
7장 타인의 힘이나 행운을 통해 획득하게 된 새로운 군주국의 통치에 대하여
8장 악행으로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들에 대하여
9장 시민 군주국에 대하여
10장 각 군주국의 힘을 평가하는 방법에 대하여
11장 교회 군주국에 대하여
12장 여러 종류의 군대와 용병 부대에 대하여
13장 지원군, 혼합군 그리고 자국군에 대하여
14장 군주는 전쟁의 기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15장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받게 되는 일들에 대하여
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17장 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군주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18장 군주가 약속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19장 경멸과 미움을 받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20장 성채를 건축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은 군주에게 유용한가, 아니면 해로운가?
21장 군주는 존경받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22장 군주의 신하에 대하여
23장 아첨꾼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24장 왜 이탈리아 군주들은 자신의 왕국을 잃게 되었나
25장 인간사에서 행운의 여신이 차지하는 비중과 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하여
26장 이탈리아에서 야만인들을 몰아내고 자유를 회복해달라는 권고의 말씀
교황청이 금서로 지정했지만, 루소가 ‘공화주의자의 교과서’로 칭송했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간이 하고 있는 일을 숨김없이 밝혀낸 마키아벨리에게 큰 신세를 졌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군주론을 통해 세상을 현명하게 사는 혜안과 만나보세요!
군주론
군주국의 종류와 이를 획득하는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거나 다스렸던 모든 국가와 영지는 예로부터 공화국 아니면 군주국의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군주국은 통치자(signore)의 혈통이 오랫동안 대를 이어 군주를 이어가는 세습 군주국과 신흥 군주국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신흥 군주국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가 다스렸던 밀라노처럼 완전히 새롭게 세워진 경우가 있고, 스페인 왕에게 정복당한 나폴리 왕국처럼 세습 군주국의 군주에게 정복당하면서 그 일부로 더해진 경우가 있다.
이렇게 획득된 영지의 사람들은 군주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데 익숙하거나, 반대로 자유롭게 사는 데 익숙할 수도 있다. 이런 영지는 다른 사람의 군대를 동원하거나 자신의 군대를 활용해 획득하는데, 이때 운(fortuna) 또는 탁월함(virtu)이 작용한다.
세습 군주국에 대하여
공화국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이미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나는 오직 군주국에 관한 것으로 논의를 한정하고, 앞서 이야기한 주제들의 실마리를 짜 맞추면서 이런 군주국들이 어떻게 통치되고 유지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나는 군주의 혈통에게 지배받는 데 익숙한 세습 군주국을 유지하는 것이 신흥 군주국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세습 군주국의 경우 왕가의 선조들이 확립한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때만 상황을 보아가며 대처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습 군주가 보통 정도의 노력(industria)을 기울이기만 해도, 유별나게 강력한 어떤 힘이 그를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행여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찬탈자가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통치권을 되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페라라의 공작이 이런 예를 보여준다. 그가 1484년 베네치아의 공격과 1510년 율리우스 교황의 공격을 모두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문이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다스려왔기 때문이지 그 외 특별한 이유는 없다.
세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신민들의 심기를 자극할 이유도, 또 그럴 필요도 거의 없다. 따라서 세습 군주는 신민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이들은 유별나게 악한 행동을 해서 신민들의 미움(odio)만 받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호감을 얻게 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세습 군주의 통치가 지속되면, 정치적 변혁(innovazioni)을 불러일으켰던 원인과 개혁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져 간다. 변화는 언제나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가능성의 주춧돌(addentellato)을 마련하게 된다.
혼합 군주국에 대하여
그러나 신흥 군주국에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먼저 완전히 새롭게 세워진 군주국이 아니라 다른 군주국의 부속 일원이 된 경우, 즉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기존 군주국에 합쳐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혼란(variazioni)이 초래된다. 이 혼란은 새로운 군주국이라면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에 그 원인이 있다. 즉 사람들은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면 통치자를 기꺼이 바꿔버리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통치자를 향해 무기를 집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는 자연스럽고도 일반적인 또 다른 필연성(necessita), 즉 새로운 군주(principe nuovo)는 정복 과정에서 자신이 다스리게 될 사람들에게 군대를 동원하거나 갖가지 고난을 주며 그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기인한다. 점령 과정에서 해를 입은 모든 사람은 당신의 적이 된다. 그리고 당신을 군주로 만들어준 사람들마저 친구로 둘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리 선심을 쓴다고 해도 그들을 만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독한 약을 쓸 수도 없다. 군주가 아무리 강한 군대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어떤 지역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지역 사람들의 호의가 필요한 까닭에 새로운 군주는 그들에게 빚을 진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국가가 정복당해 정복자가 오랫동안 통치해왔던 국가에 병합되는 경우, 그 국가들은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둘 중 하나라고 말하겠다. 만약 전자라면 새로운 정복지를 다루기에 매우 수월하다. 특히 그곳이 자유롭게 사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경우에는 본래 그곳을 통치했던 군주들의 혈통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군주의 소유권을 확립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오래된 삶의 방식이 유지되고 풍습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조용히 살아간다. 오랜 기간 프랑스와 함께하고 있는 브르타뉴, 부르고뉴, 가스코뉴, 노르망디 사람들의 행동에서 보이는 바와 같다. 이들은 비록 언어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풍습이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를 쉽게 용인할 수 있었다. 이런 지역을 정복한 자는 누구든지 이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의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그 지역을 통치해온 오랜 군주의 혈통을 멸절해야 한다. 둘째, 그곳의 법과 조세 제도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정복지는 매우 단기간 내에 옛 군주국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언어, 풍습, 제도가 서로 다른 지역의 국가를 점령했을 때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 점령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도 매우 좋아야 하고, 많은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최선의 방책이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복자가 그곳에 직접 거주하러 가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더욱 확실하고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이다. 튀르크 사람들이 그리스에서 행한 것이 바로 이 방법이었다. 튀르크 사람들이 그 지역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조치를 취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리스로 이주하지 않았더라면 통치를 지속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장에 있으면 혼란이 시작되는 것을 즉각 깨닫고 곧바로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지만, 현장에 없으면 문제가 커지고 이미 손을 쓸 방법이 없을 때 문제의 전모를 알게 된다. 또한 이 방법은 관리들이 그 지역을 수탈하지 못하게 하며 의지할 수 있는 군주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신민(sudditi)들이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좋은 신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군주를 사랑할 이유를 더해주고, 다른 뜻을 품은 자들에게는 군주를 두려워할 이유를 더해준다. 군주가 거주하며 통치하는 곳을 침략하고자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더욱 망설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가 자신이 정복한 곳에 거주한다면 정복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작은 일이다.
여러 종류의 군대와 용병 부대에 대하여
나는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군대는 자국 군대, 용병, 지원군, 그리고 혼합군 중 하나라고 말하겠다. 용병과 지원군은 쓸모가 없고 위험하다. 용병에 의지해 자신의 국가를 지키려 한다면, 절대로 안정을 누리거나 안전할 수 없다. 그들은 분열되어 있고, 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훈련되지 않았고, 신의를 지키지 않으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 앞에서는 대담하게 행동하는 반면 적들 앞에 서면 겁쟁이로 돌변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용병에 의존한다면 오로지 패배가 지연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용병은 늘 공격을 지연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평화 시에는 용병에게 약탈당하고, 전쟁 시에는 적에게 약탈당한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용병의 대가로 받는 봉급 때문이다. 그들은 군주에 대한 사랑이나 대의를 위한 숭고한 가치를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 적은 봉급을 받기 위해 그들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 리가 없다. 그들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면 흔쾌히 당신의 군인이 되고자 하나, 전쟁이 다가오면 그들은 미리 도망치거나 전쟁터를 떠나버린다. 현 시국에서 볼 때 이 문제에 대해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논의에 대해 손에 무기를 들기만 하면 그가 용병이든 아니든 다 같은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나는 군대란 군주 혹은 공화국이 직접 운용해야만 한다고 대답하겠다. 군주는 자신이 직접 나가 스스로 사령관직을 수행해야 한다. 공화국은 자신의 시민을 군인으로 훈련시켜 전쟁터에 내보내야 하는데, 만약 전쟁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을 내보낸 것으로 밝혀지면 그를 다른 시민으로 교체해야 한다. 만약 성공할 것 같은 사람이라면 그가 법을 지키게 함으로써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나는 오직 군주와 공화국의 자체 군대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용병은 손해만 끼칠 뿐이라는 것을 실무를 통해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자국의 시민 군대로 무장한 공화국이 외부의 군대로 무장한 공화국보다 한 개인에게 복속당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원군, 혼합군 그리고 자국군에 대하여
지원군(arme aussiliarie)은 또 다른 쓸모없는 군대로, 당신이 한 강력한 인물에게 당신을 돕고 방어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지원을 요청한 군대를 뜻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최근에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페라라 원정에서 용병을 사용했을 때 벌어진 참담한 결과를 목격하고, 지원군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윽고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과 협의하여, 페르난도 왕이 지원군으로 교황을 돕기로 했다. 이런 지원군은 군대 자체로는 훌륭할 수도 있고 유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요청한 사람에게는 거의 언제나 해를 가한다. 패배한 경우에는 당신이 원했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승리한 경우에는 당신이 그들의 감옥에 남게 되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에는 이에 대한 예시가 가득하지만, 나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페라라를 갖기 위해 외국인의 손아귀에 자신을 밀어 넣었던 최근의 사례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이것보다 더 무분별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율리우스 2세는 예기치 못한 다른 일이 벌어진 덕분에 자신이 취한 나쁜 선택의 열매를 거두지 않게 되었다. 그의 지원군이 라벤나에서 패했을 때, 마침 스위스가 궐기하여 승자를 몰아낸 것이다. 이것은 교황자신과 모든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적군이 도망가버렸기 때문에 교황은 그들의 죄수가 될 필요가 없었고, 다른 스위스 군대를 통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교황은 지원군에게 죄수가 될 필요도 없었다.
완전히 비무장 상태였던 피렌체인들은 피사를 정복하기 위해 1만 명의 프랑스인지원군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피렌체인들은 그동안 견뎌냈던 어떤 고역보다도 더한 위험을 감내해야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주변국들을 제압하기 위해 1만 명의 터키인을 그리스로 보냈는데, 터키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가 이교도에게 지배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승리를 바라지 않는 자는 이렇게 지원군을 사용하면 된다. 지원군은 용병보다 훨씬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지원군은 완벽한 몰락을 불러온다. 지원군은 전원이 단합되어 있고, 전원이 지원군의 지휘관인 타인에게 복종할 것을 결심한 자들이다. 반면 용병군은 한 몸이 아니고 당신에게 고용되어 돈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경우에 당신을 해하려고 한다면 더 많은 시간과 기회를 필요로 한다. 당신이 용병대장으로 세웠을 제3자는 용병군 사이에서 당신에게 대항할 만한 권위를 그토록 빨리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용병군의 위험은 나태함 때문에 발생하고, 지원군의 위험은 탁월함 때문에 초래된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언제나 이런 군대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군대에 의지한다. 그리고 외국의 군대로 거두는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의 군대로 싸워 이기기보다 차라리 자신의 군대로 싸워 패배하기를 원한다.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받게 되는 일들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실제로 본 적도, 알려진 바도 없는 공화국과 군주국에 대하여 상상해왔다. 그러나 어떻게 사느냐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따라서 실제로 행해지는 것을 버리고, 행해져야만 하는 당위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보전하기에 앞서 파멸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면에서 선함을 업으로 삼으려는 자는 선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패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스스로 권력을 유지하고 싶다면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essere non buono)을 배우고, 필요에 따라 이를 활용하거나 또 활용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에 대해 논하자면,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군주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이런 다음에 제시된 자질들 덕에 주목받게 된다. 군주가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받거나 비난받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누구는 관대하고(liberale), 누구는 인색하다는(misero) 평을 듣는다. 나는 지금 여기서 ‘인색하다’라는 토스카나 방언을 사용했다. 탐욕스럽다(avaro)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우리 말에서 ‘강도질을 하여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자’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위 문장에서 인색하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지나치게 아끼는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누구는 기부자로 누구는 약탈자로 평가받고, 누구는 잔인하고 누구는 인정이 많다고, 누구는 신의를 저버리고 누구는 신의가 두텁다고, 누구는 여성스럽고 무기력한데 누구는 맹렬하고 기백 있다고, 누구는 인간적이고 누구는 건방지다고, 누구는 음탕하고 누구는 정숙하다고,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교활하다고, 누구는 완강하고 누구는 순하다고, 누구는 진중하고 누구는 가볍다고, 누구는 독실하고 누구는 믿음이 없다는 등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만약 위에 언급된 자질들 가운데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자질을 한 명의 군주가 모두 갖고 있다면, 이는 매우 칭송받아 마땅한 일임을 모두가 인정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자질을 갖추거나 그 전부를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군주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이 이러한 악덕을 가졌다는 악명을 얻지 않고 이를 피해 갈 수 있는지 잘 파악해야 한다. 악명은 군주가 국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국가를 빼앗지는 않을 만큼의 악명에 대해서도 대비해두어야 한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망설임 없이 그 일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악덕 없이는 국가를 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 악덕을 시행함에 따른 악명이 높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개의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사를 곰곰이 따져보면 어떤 것은 덕으로 보이는데 이를 추구한 자는 패망하고, 어떤 것은 악으로 보이는데 이를 추구한 자는 안정을 얻고 그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앞에서 제일 먼저 언급한 자질부터 논의를 시작하자면, 나는 관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일단 말하겠다. 그러나 당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관대함은 오히려 당신에게 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덕스럽고 또 올바른 방식으로 관대함을 사용한다면, 사람들은 이런 가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당신은 오히려 관대함과는 반대되는 악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관대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유지하고 싶다면 그 모든 호화로움을 생략하지 말아야 하기에, 군주는 자신의 소유를 전부 그런 일에 소진하게 될 것이다. 결국 관대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유지하려면 일반 시민에게 막대한 부담을 지우게 될 것이고, 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안달이 나서 무엇이든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신민들이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고, 그가 점점 더 가난해질수록 존중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관대함 탓에 군주는 다수와 등지게 되는데, 반면 얻는 것은 거의 없다. 이렇게 되면 어떤 불편함이 조금만 생겨도 군주는 불편해지고, 어떤 위험이 나타나기만 해도 초기에 위태로워지고 만다. 그리고 이 점을 깨닫고 그 상태에서 발을 빼려고 하면, 그 즉시 군주는 인색하다는 악명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알려진 방식을 통해서는 군주가 스스로 해를 입지 않으면서 관대함의 덕스러움(virtu del liberale)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따라서 분별력 있는 사람은 인색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인색한 사람이라고 평가받은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색하게 굴었기 때문에 그의 수입은 충분할 것이고, 일반 시민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아도 그에게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로부터 자기 나라를 지키고 본인의 사업을 실행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수탈하지 않은 자들에게 관대함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들의 수는 무한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인가 하사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인색함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들의 수는 매우 적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군대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군주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자라고 응대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겠다. 군주는 자신의 것을 사용하거나, 자기 신민의 것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소유를 사용하게 된다. 첫 번째 경우라면, 그는 아껴야만 한다. 다른 경우라면, 그는 관대함의 끝장을 보아야 한다. 특히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가 노획, 약탈, 탈취로 군대를 유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처분하는 자에게 관대함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것이나 당신 신민의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면 키루스, 카이사르, 알렉산드로스처럼 큰손을 가진 기증자가 될 수도 있다. 타인의 것을 사용하는 것은 명예를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것은 오직 당신 것을 사용할 때의 일이다. 실로 관대함처럼 자기 소모적인 것도 없다. 관대함을 행하는 동안 당신은 관대함을 베풀 수 있는 재량(faculta)을 소실하게 된다. 결국 빈곤에 처해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빈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탐욕을 부리고 그 결과 신민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
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군주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앞서 언급한 다른 자질들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자면, 나는 모든 군주는 잔인하다고 평가받지 않고 자비롭다고 평가받기를 염원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군주는 그 자비를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로마냐 지방을 화합시키고, 통일하고, 평정하고, 그들을 충성되게 한 것은 그의 잔인함이었다. 피렌체는 잔인한 도시로 알려지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 위성도시였던 피스토이아가 파괴되도록 내버려 둔 전례가 있다. 심사숙고해보면 그런 결정을 내린 피렌체의 일반 시민들보다 오히려 체사레 보르자가 훨씬 더 자비로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민의 단합과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군주는 잔인하다는 악명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군주가 너무 인자한 태도를 보이면 방종을 허락하여 살인과 강도가 발생하도록 방치하게 된다. 따라서 아주 조금이지만 잔혹함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자비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너무 인자한 태도를 보이면 대중 전체에게 피해가 돌아가고, 군주가 잔혹함의 예시로 처형을 시행하는 것은 단지 특정 인물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는 무엇인가를 신뢰하고 행동에 옮길 때는 속도를 늦추며 신중을 기해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스스로 겁에 질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신중함과 인간미를 갖고 중용을 지키며 일을 진행해야 한다. 과도한 확신에 차서 무모하게 일하는 것을 삼가고, 또한 과도한 소심함으로 스스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사랑받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가 혹은 그 반대인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사람들은 이것도 원하고 또 저것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둘을 합치기는 어렵기 때문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인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고(ingrati), 변덕스러우며(volubili), 앞과 뒤가 다르고(simulatori), 위선적이며(dissimulatori), 위험은 피해 가고(fuggitori de’ periculi),이득이 되는 일에는 극성(cupidi del guadagno)을 부린다. 그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잘해주는 동안에는 당신의 소유다. 그들은 당신에게 피와 재산, 목숨과 자식까지 바친다. 내가 앞서 말한 것처럼, 군주에게 그것이 필요가 없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필요할 때, 그들은 반기를 든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진심으로 믿고, 다른 준비를 해두지 않은 군주는 몰락하게 된다. 정신의 위대함이나 고귀함이 아닌, 대가를 주고 획득한 우정은 당신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적절할 때 사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사랑받는 존재로 만든 사람을 공격할 때,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든 사람을 공격할 때보다 덜 망설이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의무의 사슬로 유지되는데, 저열한(tristi) 본성을 가진 인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본인의 유익을 위하여 이를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되는데, 이는 절대로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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