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지은이 : 강지은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3년 04월




  • 칸트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강지은 교수가 칸트 철학에 대해 누구나 궁금할 것 같은 내용을 위주로 정리하여, 칸트의 문제의식 속으로 함께 들어갑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천체와 물리를 알았던 철학자, 칸트

    인간 이성의 운명이 비판철학으로 이끌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초판 머리말은 인간 이성의 운명에 대한 탄식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본성 그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칸트는 인간 이성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았기에 그 본성상 어쩔 수 없이 물을 수밖에 없고 대답할 수조차 없는 문제들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한 것이었을까. 생각하면 이런 가혹한 운명이 또 있을까. 타고나기를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매달려야 하다니.


    인간 이성의 본성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이 본질적으로 갖는 물음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생명이란, 죽음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우주는 영원한가?’ 등. 이런 물음이 진정한 철학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철학자 각자가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대답할 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형이상학적’ 물음을 철학에서 제외한다면 철학의 의미는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물음들은 인간이 철학을 시작하면서부터 철학의 중심 주제였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성의 운명은 바로 이런 질문의 한가운데서 있으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순수이성비판’을 시작한 칸트의 의도는 무엇일까? 사실 철학에서 물어왔고 답하기 어려운 모든 문제를 칸트가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칸트는 이성의 운명이 처한 이 어려운 지경에 대해 자신의 저작에서 한번 대답해 보겠다는 의지의 포문을 열고 있다.


    칸트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제약을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무제약자를 찾는 것이 이성의 사변적 본성이라고 본다. 운동, 변화, 경험의 궁극적 토대를 만들면서도 모든 경험의 저편에 놓여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인간의 이성이고 이것을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형이상학 안에서는 지금까지 경험의 한계를 넘어 실증할 수 없는 영역에서까지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는 논란이 벌어져왔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험은 실증될 수 있지만 경험을 넘어서 있는 영역은 실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운명에 따라 가능한 모든 경험적 사용을 넘어서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암흑과 모순에 빠진다. 이 암흑과 모순 속에서 형이상학은 원칙적으로 끝없는 투쟁의 싸움터가 된다.


    칸트는 이성주의 형이상학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등이 근대 이성주의 형이상학을 형성했지만 특히 칸트는 당시 강단을 지배하던 볼프 학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들을 칸트가 독단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성비판을 선행하지 않고 특정한 근본적 가정, 예를 들어 “신은 현존한다. 세계는 시초가 있다. 영혼은 불멸한다” 등을 인간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독단주의자들의 법칙 수립은 옛날 야만성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고 서로 간의 내란으로 인해 점차 완전한 무정부 상태로 퇴락했다고 진단한다.


    게다가 근대 경험주의가 ‘진리란 없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는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회의주의는 더욱 형이상학의 위기를 부추겼다. 칸트는 회의론이 “전체 형이상학을 가볍게 처리해버리는” 방식이라거나 “가능한 한 어디어도 인식의 신뢰성과 확실성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모든 인식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기교적이고 학문적인 무지의 원칙”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회의주의 철학자 흄을 접한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의 싸움터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발견한다.


    물론 칸트가 흄의 ‘인간지성론(1690)’을 읽고 독단적 형이상학의 비판에 크게 감동을 받기는 했으나 흄의 경험론적이고 회의론적인 결론에까지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칸트는 이제 형이상학이 현재 상황에서 실제로 벗어날 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하여 법정을 설립한다. 순수이성의 가능성을 불편부당하게 검토하고 합법적 주장을 확실하게 하고 근거 없는 월권은 거부하는 재판으로 전쟁을 대신한다. 그러한 검토, 구분, 정당화를 근원적인 의미에서 비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판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 경험에서 독립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인식에 대해 비판 작업을 해야 한다. 칸트의 ‘비판’은 형이상학 일반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범위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원리로부터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성 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본성상 탐구하고자 하는 무제약자 혹은 신 혹은 완전성에 대한 탐구 열망 때문에 벌어진 형이상학의 싸움터를 정리하고자 법정을 세우고 비판을 시작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근대 과학이 물질적으로 인간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면 형이상학, 즉 철학을 통해 인간다움의 완전성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 칸트의 기획이었을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읽기

    칸트가 초월철학자인 이유

    초월적이란?

    우리는 칸트의 철학을 ‘비판철학’ 또는 ‘초월철학’이라고 부른다. 먼저 칸트 철학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서 칸트의 개념들에 접근해야 칸트라는 산에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칸트는 모든 경험 이전에 놓인 경험의 조건들을 ‘초월적(transzendental)’이라고 부른다. 초월의 개념은 칸트를 통해 크게 알려졌지만 이미 중세기의 철학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중세의 철학은 초월자를 ‘transcendentia’라고 했는데, 유와 종의 구분 한계를 넘어서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제한 없이 타당한, 존재의 최종 근거 규정으로 이해한다. 즉 존재자를 생각할 때 언제나 미리 전제하는 것이 바로 초월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이데아(idea), 중세철학의 공통존재자(ens), 하이데거의 조재(Sein) 등은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들이다.


    초월철학으로 해명하고 싶었던 것

    칸트가 초월철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태는 무엇일까. 표상과 대상이 각각 주관적 표상과 객관적 대상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면 여기서 해명되어야 할 관계란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의 관계이다. 칸트가 이 둘의 관계를 묻는 것은 이전 철학과 선을 긋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칸트 이전까지 표상은 대상만큼의 가치가 있지 않았다. 오직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대상을 경험을 통해서 인식할 것인가 합리적으로 인식할 것인가가 문제였지, 표상은 가상, 즉 진리와 관계없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칸트에게 와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인식하는 주관이 세상을 구성하게 되었듯, 이제 대상 자체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표상과 대상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주관이 객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전통적인 방식에서 사고와 대상의 일치 즉, 대응은 오래된 진리 규정이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를 진리 대응설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대상과 주관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이 그것을 판정해준다. 누군가 ‘이 사과는 빨갛다’라고 했을 때, 그가 가리킨 사과가 감각적 경험에 의해 빨간 것으로 확인되는 한 그의 말은 참된 판단 즉 진리가 되며, 거기에 아무도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주관이 갖는 표상과 객관 대상이 일치한다는 것, 주관이 대상에 대해 참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태도에서는 약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사과는 빨갛다’고 했을 때, ‘이 사과’는 사과라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사과의 표상이기 때문에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판단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다시 돌아와서, 대상과 인식의 일치라는 판단은 일상적 태도에서 전혀 문제가 없지만 타인의 마음을 판단할 때는 어려움이 생긴다. 타인의 마음에 공감을 잘하는 사람일지라도 상대방이 포커페이스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이 기뻐할 때나, 슬퍼할 때, 혹은 우울해할 때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보디랭귀지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것도 역시 인간이라는 공통 분모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신을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인간 안에 신과 같은 신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고 선한 인간만이 선한 인간을 알아본다. 여기에서 우리가 전제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알아본다’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이 사과는 빨갛다’는 판단은 이러한 원리에 비추어본다면 문제가 생긴다. 나와 사과는 서로 다르다. 주관인 나는 인간이고 객관인 사과는 과일이다. 나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사과를 내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사과에 대해 내가 갖는 표상이 사과와 일치한다고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대해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주관과 객관의 관계의 근거에 대한 물음은, 표상과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형이상학적 차원의 물음이 된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는 주관과 객관의 관계의 근거가 된다. 플라톤은 “‘보는’ 감각과 ‘보이는’ 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은 종류의 것에 의해, 즉 서로를 연결해주는 다른 어떤 멍에들보다도 더 귀한 멍에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하면서 “태양”이 그것임을 말한다. 태양 빛이 없으면 시력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대상은 보여지지 않는다. ‘봄’은 주관의 ‘봄’이고 ‘보임’은 객관의 ‘보임’이다. 시각과 보이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면서도 그것들에 힘을 주는 것이 태양이다.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봄’과 ‘보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태양’인 것처럼 인식 주관에게 인식 능력을 부여하고 인식 객관에게 진리를 부여하는 것이 ‘선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주관이 객관을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을까

    인식의 둘째 단계: 지성의 능력과 한계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할 때, 즉각적으로 보자마자 알 수는 없다. 신적 직관을 가지고 있다면 대상의 본질을 추론 없이 꿰뚫어보겠지만 그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능력이다. 물론 간혹 신적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영매들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줄줄 이야기하는 걸 보지만 그건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 아니겠는가.


    인식이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어야 한다. 칸트는 주관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을 ‘사물 자체’라고 불렀다. 또한 이 사물 자체는 알 수가 없고 자신에게 비춰지는 ‘현상’만을 알 뿐이라고 하였다.


    주관은 외적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정보를 수용해야 하고, 그 후에 그 정보를 통해서 대상이 무엇인지 사고한다. 외적 대상이 익숙한 것이라면 거의 동시적으로 이러한 정보 파악이 일어날 것이나 처음 보는 것이라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는 전자를 ‘감성’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지성이라고 부른다. 감성은 “우리의 마음이 어떤 방식에 의해 촉발되는 한에서 표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수용성”이고 지성은 “표상을 스스로 산출하는 능력, 즉 인식의 자발성”을 말한다. 직관은 대상에 의해 촉발되는 방식만을 갖기 때문에 감성적이다. 하지만 “감성적 직관이 대상을 사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그런데 칸트는 이 성질들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칸트가 경험론과 합리론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칸트 철학이 초월철학인 이유는 대상에 대한 인식의 가능 근거를 묻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성의 조건에 시간과 공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이 있었다면, 지성의 조건에는 범주라는 선험적 개념 형식들이 있다. 범주는 이후 ‘분석학’부분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칸트에게 감성을 다루는 ‘감성학’과 지성을 다루는 ‘논리학’은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감성은 지성으로 환원될 수 없고, 지성도 감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앞서 밝힌 것처럼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철학자이다. 감성을 지성으로 환원했을 때 독단적인 합리론이 등장했고, 지성을 감성으로 환원했을 때 회의주의적 경험론이 등장했던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성과 감성 각각의 영역을 역할에 맞게 두면서 인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 칸트의 초월철학이다.


    인간이 아는 것을 넘어서, 희망하는 것으로 가기

    인간 이성의 자연스러운 변증성의 궁극 의도

    순수 이성의 이념들은 결코 그 자체로 변증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념들은 전체성과 통일성을 확보하려는 우리 이성의 자연 본성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념은 근원적인 착각과 환영을 지니지 않는다. 순수 이성의 이념들이 최소한의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면 그것의 연역이 전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칸트는 이 일이 “순수 이성의 비판적 과업의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칸트는 “최고 예지자 개념은 순수한 이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것이 곧바로 대상과 관계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이성 통일의 조건들에 따라 대상을 정돈하는 도식에 있다. 세계의 사물들은 최고 예지자라는 도식을 통해 그것들의 현존을 갖는 것처럼 고찰된다. 또한 최고 예지자라는 도식하에서 경험 일반의 대상들의 성질과 연결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이런 이념이 없다면 경험적 인식은 지성의 사용에만 제한되었을 것이다. 이념은 우리 인식을 경험이 줄 수 있는 대상들 너머까지 확장하는 구성적 원리들이 아니라, 잡다한 경험적 인식 일반의 체계적 통일을 하는 규제적 원리들이다. 바로 여기에서 초월적 연역이 성립한다.


    이제 우리는 영혼론적 이념과 우주론적 이념, 그리고 신학적 이념에 따라 그런 이념적 대상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칸트는 우주론적 이념은 예외라고 밝힌다. 왜냐하면 우주론적 이념의 경우 그것을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이면 이율배반에 빠지기 때문에 그런 대상을 생각할 수 없다. 영혼론적 이념과 신학적 이념에는 모순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객관적 실재성을 주장하려 하지만, 그 객관적 실재성을 긍정하려는 자들이나 부정하려는 자들이나 가능성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실재성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고 규제적 원리라는 도식의 실재성으로 타당해야 하며 오직 현실적인 사물의 유비로서만 받아들여져야 한다.


    칸트는 실재성, 실체, 인과성, 현존의 필연성이라는 개념은 대상에 대한 경험적 인식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들은 감성 세계 바깥에서는 적용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개념들을 세계 바깥에 두기 때문에 이런 개념을 통해서는 아무런 규정적 의미를 파악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개념들은 감성 세계 바깥에서 감성 세계의 체계적 통일이라는 용도를 가질 수 있다.


    순수 이성은 사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다루며, 다른 일을 가질 수 없다. 순수 이성에게는 경험 개념의 통일을 위한 대상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 인식들, 즉 이성 개념의 통일이 주어지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체계적 통일만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경험적인 지성사용에 줄 수 있는 체계적 연관성은 지성사용을 촉진하고 동시에 지성사용의 올바름을 보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성은 규제적 원리로서 지성이 알지 못하는 새 길을 개방함으로써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무한하게 촉진하고 확립한다.


    칸트는 오직 이성 개념들이 근거를 두고 있는 최고의 형식적 통일은 사물들의 합목적적 통일이며, 이성의 사변적 관심은 이성의 의도로부터 유래된 것처럼 보도록 만든다고 한다. 그러한 원리는 곧 경험에 적용된 우리의 이성에게 목적론적 법칙들에 따라 세계의 사물들을 연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들을 체계적인 통일에 이르도록 하는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성의 규제적 사용이라는 점에서 사물들의 자연 본성이 아닌 이성의 자연 본성에 관련된 질문들에 대해서는 분명히 답할 수가 있다. 첫째로, ‘과연 세계 질서 및 보편적 법칙들에 따르는, 이 세계와 구별되는 어떤 것이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당연하다’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현상들의 총합일 뿐이므로 순수 지성에 의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존재자는 실체인가, 최대 실재성인가, 필연적인가 등등’이라고 묻는다면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체라는 범주는 오직 경험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셋째로, ‘과연 우리는 이 존재자를 경험 대상들과의 유추를 통해 생각해도 되는가?’하고 묻는다면 ‘물론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단 그것이 단지 이념에서의 대상으로서 그런 것이지 실재 대상으로서는 아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유일하고 지혜롭고 전능한 세계 창시자를 상정할 수 있는가?’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전혀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하다’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인식을 가능한 경험의 분야를 넘어 확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


    이제 ‘세계가 신적 의지로부터 세계를 의도적으로, 즉 합목적적으로 정돈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은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저 통일을 지각하는 곳에서는, 신은 지혜롭게도 그것이 그렇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자연이 그것을 지혜롭게 정돈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완전히 똑같은 것이다.


    칸트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능력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또한 신, 우주, 영혼의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그 가능성의 한계는 또 어디까지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한 철학자이다. 인간이 원하는 도덕적인 세계, 인간이 희망하는 합목적적인 세계, 미적 아름다움의 세계는 다음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철학의 이정표

    세 번째 이정표

    인간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흄

    유럽 대륙에서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합리론의 기초를 마련했다면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회의하는 삶을 통해 경험론 철학을 완결 지은 것으로 평가되고는 한다. 흄은 1711년 4월 26일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법률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4년 전(1707)에 스코틀랜드는 연합법의 공포를 통해 잉글랜드와 함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형성했다. 비록 법과 은행, 교육과 종교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의회는 폐쇄되어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흡수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흄을 비판적 경험론자라고 부른다. 종래의 인식론에 대한 철저한 비판 정신으로 비판철학을 처음 시작한 철학자는 칸트보다는 오히려 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흄은 루소 및 백과전서파의 철학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한때 에든버러대학 법대의 도서관 사서로 일했고 후에는 외무성 차관도 지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한 시절 그는 여섯 권으로 된 ‘영국사’를 저술했다.


    흄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검증에 의해서 경험론을 구성하려고 했으므로 그의 경험론은 비판적 경험론이 되었다. 또한 흄은 경험적 앎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드러나는지를 밝힘으로써 현대 실증주의 및 심리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흄은 앎이 성립하는 과정을 인간의 마음을 분석함으로써 설명해나간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로크나 버클리의 경험론 전통에 따라 우리들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오고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있는 본유관렴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또 지식을 지각이라고 부르며, 지각은 인상 또는 관념에서 성립한다고 말한다.


    흄에게 인상과 관념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상은 직접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받아들인 것이고, 관념은 인상이 약화된 것이다. 꽃향기를 맡을 때 우리는 후각에 맴도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 좋음에 취한다. 그런 다음 꽃향기라는 관념을 갖는다. 인상에는 보고 듣는 감각적 느낌의 인상과 사랑과 미움 등 정서나 감정의 생생한 인상이 있다. 앞의 것은 외적 지각이고 뒤의 것은 내적 지각이다.


    인상은 우리들의 상상력에 의해 약화됨으로써 관념이 되고 그것은 다시 인상으로 돌아간다. 흄은 우리가 가지는 표상, 즉 좁은 의미의 관념, 회상, 생각 등을 모두 관념이라고 부른다. 관념들은 연상 법칙에 의해서 결합된다. 연상 법칙에는 유사성, 근접성, 인과성이 있다. 흄의 연상 법칙은 또한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본유관념을 배격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경험적 관습에서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흄은 로크와 비슷한 생각으로, 인상이 단순한 요소로 분해되면 복합인상이고 분해되지 않으면 단순인상이라고 본다. 또한 단순한 요소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은 복합관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단순관념이라고 본다.


    경험론의 전통에 따라서 흄은 실체, 존재, 인과율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관념에서 생긴 것이므로 어떠한 객관성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도 그것이 객관적이라는 보증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인간 지식의 기원을 탐구하는 인식론적 논의에서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방대한 분량에 다가서기가 살짝 주저되는 고전이다. 하지만 칸트는 흄의 비판적 경험론을 통해 독단적 합리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으니 인간 인식에 대한 비판적 탐구에서 큰 봉우리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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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