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지은이 : 김주일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2년 12월




  • ‘국가’를 ‘정의’의 자리에 단단히 위치시켜 논의합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의 원전들을 연구하고 번역해 온 서양 고대철학 연구자인 김주일의 해설과 함께 정의에 이르는 길 찾기를 떠나보세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 국가에 오르다

    나라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가지 말을 다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라틴어로는 ‘Homo sit naturaliter animal socialis’, 즉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다. ‘socialis’는 현재 ‘사회적’이라는 뜻의 영어 ‘social’의 어원이 되는 말이라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 본래 그리스어는 ‘ho anthropos physei politikon zoon’, 즉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되어 있다. ‘정치적(politikon)’이라는 말이 ‘사회적(socialis)’이란 말로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로만 봐도 ‘정치적=사회적’일 것 같지는 않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긴 논의를 피하기 위해 본래 이 말이 각기 그리스와 로마에서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를 알아보자.


    ‘폴리티콘’은 ‘폴리스’를 형용사형으로 만든 것이니 어근을 밝혀 적으면 ‘폴리스의’, ‘폴리스적인’이 된다. 그리고 ‘소키알리스’는 ‘소키에타스’를 형용사형으로 만든 것이라서 역시 ‘소키에타스의’, ‘소키아타스적인’이 된다. 그럼 이 말들의 어근이 되는 ‘폴리스’와 ‘소키에타스’는 각기 무슨 뜻이었을까? 폴리스는 그리스 문화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낯익은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체제인데 ‘도시국가’라고도 번역한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한 가지 방식은 ‘폴리스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라고 풀어서 번역하는 것이다. 다음 세네카의 번역은 같은 방식으로 ‘소키에타스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소키에타스’가 본래 무슨 뜻이었는가이다. ‘societas’의 어원은 ‘socius’에서 왔다고 하는데, ‘소키우스’는 ‘동료’, ‘친구’, ‘동맹’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세네카의 말은 ‘동료 또는 친구와 집단을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 중 하나가 된다. 물론 ‘동료’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평등한 관계라는 특징을 더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생존을 목적으로 모여 사는 동물이 인간이 된다. 라틴어에서 ‘소키에타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맺은 동맹이나 결사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기에 기원을 둔 영어의 ‘society’를 비롯한 서구어들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같은 사교 클럽부터 시작해서 동아리 모임, 조직폭력배 같은 범죄 단체, 정당, 국가 등 다양한 집단을 포괄한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폴리스는 근대 국가와는 많이 다른 정치체제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자. 그렇다면 국가 또는 나라와 사회는 같은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를 읽기 전에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그것의 세네카 번역을 비교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둘은 다르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런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사회에 해당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도 100년 전에는 사회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번역으로 ‘사회’라는 말이 먼저 들어왔고, 그 다음에 사회가 생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구락부 같은 것이 소규모의 사회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가 아니라 페르시아 같은 대제국과 폴리스를 비교했다. 그리고 그런 제국에서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공동체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덕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런 제국에서는 자신의 덕을 발휘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란다.

    사실 플라톤의 ‘국가’에는 이런 비교마저도 없다. ‘국가’의 원제는 ‘폴리테이아(Politeia)’, 즉 폴리스의 정치체제라는 말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어떤 정치체제에서 사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민주정에 사는 사람은 민주적이고, 독재정에 사는 사람은 독재적이란다. 독재에 시달리는 심성 여린 민중이 아니라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은 독재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그 사람 자체도 독재적이란 것이다. 그만큼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상호적이고 분리불가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국가를 일종의 사회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인 듯하다. 사회가 비슷한 목적의식을 공유하는 자발적 개인들의 결사체이듯이 국가도 개인들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임의 단체로 보는 생각일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는지, 또 그래도 되는지가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를 살펴보면서 해볼 만한 생각이고, 굳이 우리가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책을 오늘날 다시 읽어볼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 읽기

    국가로 가는 길

    소크라테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정의를 논하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담는 방식을 액자 방식이라 하는데,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들은 이런 식의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어 화자인 소크라테스가 액자 안 대화 상황에서 가졌던 속마음을 액자 밖 화자에게 밝히는 등 여러 방식으로 활용된다. 이야기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외항 페이라이에우스를 방문해서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페이라이에우스에 거주하는 트라케 사람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벤디스 여신을 기리는 축제를 벌여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트라케는 그리스 북쪽, 현재의 불가리아와 지역적으로 겹치는 곳인데, 트라케 사람들은 무역을 위해서, 또는 자국 내 탄광이 많아 트라케의 경험 많은 광산 기술자들이 아테네의 라우리온 은광에서 일하기 위해 아테네에 거류외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달과 사냥의 여신 벤디스 여신에게 기도도 드리고 축제 행렬도 구경한 후에, 소크라테스와 그를 모시고 온 글라우콘 등의 일행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테네로 발걸음을 돌리던 참이었다. 멀리서 일행을 알아본 폴레마르코스가 점잖게 하인을 먼저 보내 일행을 멈춰 세워 기다리게 하고, 잠시 후 나타나 인사를 한다. 그런데 정작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를 만나 우격다짐으로라도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셔가겠다고 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놓아주게 설득할 길은 없겠냐고 묻지만 폴레마르코스는 아예 설득의 말을 듣지 않겠노라고 한다. 이렇게 어색한 환대의 분위기 속에서 저녁에 마상 횃불 경주가 있다는 말이 나오면서 저녁 때까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일행은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향한다.


    소크라테스, 노년의 케팔로스와 정의에 대해 대화하다

    이제 시작이다.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그렇듯 여기서도 소크라테스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한마디씩 툭툭 던져서 서서히 토론 분위기로 이끌어간다. 이에 대해 케팔로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일화를 예로 들어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가 아닌 어느 작은 폴리스에 태어났으면 그가 유명해지지 못했겠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테네에 산다고 유명해지지는 않듯이 성품이 괜찮은 사람도 가난해서는 가난을 견디기 힘들 것이지만 성품이 괜찮지 않고서는 돈이 많더라도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힘들 것’이라며 점잖게 한발 물러선다(330a). 하지만 상대가 점잖게 나온다고 호락호락 물러설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케팔로스에게 물어 그의 재산이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보다 상당히 더 불어났다는 대답을 받아낸다. 그러면서 케팔로스가 돈에 대한 애착이 적어 보이는 것이 물려받은 재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고 질문의 이유를 덧붙인다. 그러면서도 소크라테스는 다시 케팔로스에게 돈이 많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케팔로스는 저세상에 가까워진 나이에는 생전에 부정의한 짓을 해서 저승에서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게 되는데, 돈이 있으면 누구를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빚을 진 채 죽지 않아도 되니 좋다고 말한다. 점잖게 나이 든 사업가의 도덕성을 잘 보여준 말이었다.


    정의에 대한 케팔로스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반박하다

    이제 이 책의 주제인 정의가 부정의를 통해 나왔다. 노년이 되면 생전에 부정의한 짓을 했을까 걱정된다는 말을 놓치지 않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케팔로스의 말을 ‘정의가 진실성이고 누군가에게 받았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고 요약한 소크라테스는 친구가 제정신일 때 맡긴 무기를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와서 돌려달라고 할 때 돌려줘야 하느냐는 것’이다(331c).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돌려주지 말아야 하며, 진실을 다 말해서도 안 되고, 돌려주거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하다고들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덧붙인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점잖고 경건하게 나이 든, 손님맞이를 좋아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케팔로스의 온유한 대답을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질 일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철학이고 소크라테스다. 안락한 삶에 맞장구쳐주는 게 아니라 진짜 튼튼한 토대 위에 있는지 흔들어보고 확인하는 것이 철학이고 소크라테스다. 케팔로스의 좋은 말들은 상황에 의존해 있고 수동적이다. 적당히 물려받은 재산을 적당히 불려서 그 돈으로 노년의 안락함을 사고, 사후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그것은 노년의 체념이 섞인 수동적인 도덕이고 개인적인 윤리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온 삶을 던져 이뤄낸 영혼의 균형이 아니고, 그래서 상황이 바뀌면 경험의 지혜는 바닥을 드러내고 개인의 삶은 사회의 격변에 휩쓸려 비극을 맞을 수 있다.


    폴레마르코스, 아버지의 논의를 이어받다

    폴레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상속자답게 케팔로스의 마지막 대답을 자신의 유산으로 받는다. 그래서 논의는 케팔로스가 정의에 대해 갖고 있는 ‘정의는 진실성이고 누군가에게 받았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대응해 재해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폴레마르코스는 ‘각자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것’으로 정의를 규정한다. 그리고 ‘각자’를 친구와 적으로 구별해 친구에게는 좋은 것을, 적에게는 나쁜 것을 빚졌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케팔로스가 막연하게 ‘누군가에게 받았던 것’이라고 해서 처했던 곤경으로부터 아버지의 논의를 구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이분법이 적용된다. 구별은 구별이 적용되는 대상의 특성에 따라 적절할 수도 있고 부적절할 수도 있다. 피아를 식별하는 것이 정의에는 적절한 것일까?


    이러한 폴레마르코스의 대응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우선 ‘빚진 것’이라는 애매한 말을 ‘합당한 것’이라는 말로 바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을 정의로 규정한다. 그리고 의술이 몸에게 약과 먹고 마시는 것을 주고 요리술이 맛을 주는 기술이라면 정의는 누구에게 무엇을 주는 기술인지를 묻는다. 정의라는 덕목이 기술인지를 따지지도 않고 대뜸 이렇게 물었는데도 폴레마르코스는 ‘친구들에게는 이로움을, 적에게는 해로움을 주는 기술’이라고 얼른 대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의술이 병이나 건강과 관련해서, 키잡이가 바람의 위험과 관련해서 그렇듯이 정의는 무슨 일과 관련해서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하는 기술인지를 묻고, 다시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을 벌이는 행위와 동맹을 맺는 행위에서’라고 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정의가 쓸모없는 것인지를 묻고, 다시 폴레마르코스는 평화시에는 계약과 같은 협력 관계와 관련해서 쓸모 있다고 답한다. 역시 소크라테스는 건축, 악기 연주 등에는 각기 그것을 잘하는 사람이 좋은 협력자일 텐데, 정의로운 사람은 무엇과 관련해서 좋은 협력자인지를 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돈에 대해 협력할 때라고 답하지만, 돈을 사용할 때는 돈의 사용 용도와 관련해서 유능한 사람이, 즉 사용 용도에 맞는 전문가가 좋은 협력자일 테니, 정의로운 사람은 돈을 사용하지 않고 맡겨둘 때나 좋은 협력자가 된다.


    ‘정의(dikaiosyne)’라는 추상명사가 도출된 ‘정의롭다(dikaios)’는 본래 ‘신과 인간들과 관련된 사회적 규칙 또는 의무를 준수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처음에 폴레마르코스는 자기 이름답게 전쟁만을 염두에 두고 ‘정의롭다’란 말을 썼을 것이다. 그래서 적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친구들을 지켜야 하는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는, 친구에게는 좋고 적에게는 악몽인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는 전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여기서 정의라는 덕과 다른 기술의 차이점이 하나 나타난다.


    기술은 어떤 영역과 쓸모에 한정되어 있지만 덕은 인간 삶의 전반에 관여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논의 없이 ‘덕이 기술’임을 전제하고 묻는 질문에 무심코 폴레마르코스가 영역과 쓸모에 맞춰 답하다 보니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그 사회적 규칙이 옳은지, 그리고 왜 옳은지를 묻는다. 사회적 규칙은 그때그때 그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 사회의 상황이 바뀌지 않고 지속되는 한 그 규칙은 유용하다. 그러나 사회가 변해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는 세상이 오면 이 규칙은 더는 유용하지 않아 사람들은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거친 바다를 표류하거나, 새로운 규칙을 세워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찾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규칙이다.


    폴레마르코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다

    이쯤에서 지금까지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 사이에서 진행된 정의의 규정에 대한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처음에 폴레마르코스는 ‘각자에게 빚진 것을 갚는 것’이라고 했고, 이것을 소크라테스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수정했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이 규정 자체보다는 이 규정을 구성하는 용어들에 대한 폴레마르코스의 이해를 따져 물어 수정하게 했다. 첫째, ‘각자’를 ‘친구와 적’으로 구별하는 폴레마르코스에게 정의가 전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일깨웠다. 둘째, 정의는 친구에게 합당한 무엇을 주느냐는 문제와 관련해서 막연하게 이익이라고 생각한 폴레마르코스로 하여금 정의가 주는 고유의 합당한 것은 여타의 기술이 주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게 했다. 셋째,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기준을 ‘나에게, 또는 내가 보기에 좋은 또는 나쁜’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또는 나쁜’으로 바꾸게 했다. 이것은 ‘정의’가 갖는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성격 때문에 ‘친구와 적’의 구별이 ‘정의’에 대한 규정 요소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이었다.


    트라쉬마코스, 강자의 세계관을 들고 논의에 난입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국가’ 1권은 따로 ‘트라쉬마코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그 정도로 ‘국가’ 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와 벌인 논쟁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플라톤은 그의 등장부터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게 묘사했다. 트라쉬마코스는 두 사람의 논의를 끊고 난입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제지하는 바람에 못하고 있다가, 소크라테스가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에 마치 야수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먹잇감을 덮치며 찢어발길 듯이 달려들었다는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는 두 사람이 점잖게 양보나 하고 있다며 소크라테스는 남이 대답하면 그걸 다시 캐묻는 식으로 쉽게 논박이나 하고 박수나 받으려고 들지 말고 직접 대답하라고 다그친다. 정의로운 것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든가, 이로운 것이라든가, 유익한 것이라든가, 득이 되는 것이라든가, 이익이 되는 것” 등의 시시껄렁한 소리를 하지 말고 분명하고 엄밀하게 말하라고 요구한다.


    질문만 해대지 말고 대답을 하되, 분명하고 엄밀하게 말하라고 했지만,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논의에 끼어들었다. 주로 아테네 사람이 아닌 외지인들인 소피스트들은 당시 번성하던 아테네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바람을 타고 아테네에 들어와 명문가의 자제들에게 민주주의파 정치가의 무기인 연설술을 가르쳐주고 큰돈을 벌었던 일군의 직업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명성을 쌓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논변 솜씨를 선보이는 연설 또는 강연(epideixis)을 한자락씩 하곤 했는데, 이제 트라쉬마코스가 선보일 정의에 관한 이야기도 트라쉬마코스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쏠려 있는 대중, 특히 명문가 자제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쏠리게 할 한 방 말이다.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답을 요구하는 척하다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사람들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하는 듯 정의에 대한 자신의 답을 말한다. “난 정의로운 것은 강자의 이익 말고 다른 어떤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338c) 그런데 호기롭게 밝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응이 뜨악하다. ‘강자(ho kreitton)’가 누구냐는 게 소크라테스의 첫 반응이기 때문이다. 힘이 센 사람이 강자라면 운동선수에게 고기가 이롭다고 해서 일반인에게도 이롭다는 소리는 아닐 거 아니냐며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서 김을 뺀다. 소크라테스가 능청스럽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의 모호함을 꼬집어서 그렇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은 그 시대의 트렌드였다.


    이렇게 폭주하는 시대의 기세를 잠시 누르기라도 하려는 듯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그의 주장이 모호하니 명확히 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비웃는다. 그는 강자는 통치하는 쪽을 말하며 각 정치체제에서 통치 권력은 법을 제정할 때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제정하고 그것을 정의라고 공포하니 정의는 강자의 것이라고 말한다(338e).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이익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강자의 이익인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겠다고 한다. 트라쉬마코스는 여전히 이분법의 관점에서 정의의 이익을 취하는 자와 빼앗기는 자를 나누고 있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남 좋은 일이라며 반박한다

    사실 트라쉬마코스의 이 주장은 앞선 그의 주장과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어조와 태도다. 이전에는 같은 주장이라도 각 정치체제에서 통치권을 갖는 자들이 법을 제정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식의 그나마 이론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트라쉬마코스는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의와 부정의는 정반대의 현실에 처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어느 경우에든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자보다 갖는 것이 적어서 계약에서든 세금에서든 배당에서든 더 내고 덜 받는다.


    정의로운 자는 관직에 있을 때도 이득이 없고 사사로운 이익을 돌봐주지 않아 친척들에게 원망을 사지만, 부정의한 자는 그와 반대라고 한다. 부정의에 대한 그의 이런 찬양은 참주정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의 독재정인 참주정은 완벽한 부정의를 행하여 남의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 때문에, 참주는 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라 오히려 행복하고 복된 자라고 불린다. 부정의를 비난하는 자들은 사실 부정의한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당하는 것이 두려워 비난하는 것이라,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 완벽한 부정의의 구현자인 참주는 행복하고 복된 자라 불린다는 것이다.


    앞선 논의에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가진 기술이 남 좋은 일을 해주는 정의의 기술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자, 트라쉬마코스는 이것을 뒤집어 자신의 이익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부정의를 통치자의 기술로 둔갑시킨 것이다. 물론 통치자들은 정의가 남 좋은 것이라 위장해 피통치자들을 속이고, 다 당신들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이 정한 법을 지키게 하고 위법한 자는 부정의한 자라고 하여 처벌한다. 반면에 피통치자는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에 뒤따르는 처벌을 면할 길이 없어서 위정자가 정의라고 하는 것들을 마지못해 지키고, 반대로 부정의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 위정자와 같이 부정의를 비난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한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을 다시 반박한다

    이런 트라쉬마코스를 붙들어 앉힌 소크라테스는 엄밀한 의미의 양치기는 양을 치는 기술의 대상인 양에게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을 유일한 관심사로 삼는데, 트라쉬마코스가 자꾸 말을 바꾸어 양치기를 돈벌이하는 사람 취급했다는 점을 환기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환기를 통해 양치기처럼 모든 통치는 통치를 받는 쪽에게 가장 좋은 것을 살핀다는 것이 이미 동의되었음을 확인하고, 진정한 의미의 통치자들이 통치를 자발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트라쉬마코스에게 묻는다. 당연히 트라쉬마코스는 통치자들은 통치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원한다고 답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들이 보수를 요구한다는 점을 들어 그들이 통치하기를 자발적으로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통치를 받는 쪽이 통치를 통해 이로움을 보기 때문에 통치할 사람들이 보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양치기의 예와 마찬가지로 트라쉬마코스는 통치하는 사람을 통치술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한정해서 보지 않고, 희로애락을 갖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봤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생겼다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양치기도 통치자도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양을 치고 통치를 해서 돈을 벌어 자신도 살고 가족도 부양해야겠지만, 그건 몸을 갖고 여러 관계를 맺고 사는 구체적인 사람의 맥락에서 그런 것이다. 양치기가 양치기인 한, 통치자가 통치자인 한, 자신들의 기술을 통해서 그들이 하는 일은 양과 피통치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통찰이다.


    엄밀한 개념 규정을 통해 이런 방향 설정을 하지 않으면 현실은 윤리적 의식을 갖추지 않고 이익만 탐하는 비전문가들의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만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통치술이나 양치기 기술을 돈을 버는 보수 획득술과 혼동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뱃일을 하면서 건강해졌다고 해서 그의 기술을 의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 트라쉬마코스가 동의했던 엄밀한 정의에 입각한 구별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통치의 보수는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의 통치를 받지 않는 것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의 보수에 대한 말을 맺으면서 “통치하기로 수락할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 돈이든 명예든 보상이 주어져야 하고, 통치할 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벌이라는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 같다”(347a)고 말한다. 이때에 지금껏 두 사람의 토론을 듣고 있던 글라우콘이 끼어들어 ‘돈과 명예’라는 보상은 알겠는데, 벌은 웬 벌이고 그게 또 왜 보상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가장 훌륭한 사람들(hoi beltistoi)이 받는 보상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사실 가장 고상한 사람들(hoi epieikestatoi)이 통치를 맡는 이유는 바로 이 벌로서의 보상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명예욕이나 재물욕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들로 받는 보상에는 관심이 없다. 또 “강제당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원해서 다스림에 나서는 게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다스림을 거부할 경우 주어지는 가장 큰 벌인 자기보다 못한 자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347c)으로 그들을 강제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벌이 두려워 통치에 나설 때에도 “그 일을 맡길 더 나은 이들이나 대등한 이들을 찾을 수가 없어서 피치 못한 일로 보고서 그 일에 나서”기 때문에 “만일 훌륭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가 있다면, 현재 사람들이 통치하려고 다투듯이 거기서는 통치하지 않으려고 다툴 것 같다”며 “진실로 참다운 통치자란 본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살피지 않고 다스림을 받는 이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살핀다는 점이”(347d) 이런 나라를 보면 분명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자신은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검토할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보기에 이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부정의한 자의 삶이 정의로운 자의 삶보다 낫다’는 트라쉬마코스의 발언이라며 글라우콘에게 어느 쪽의 삶이 더 낫다고 보는지 묻고 정의로운 자의 삶이 더 유익하다는 대답을 받는다. 트라쉬마코스의 말을 듣고도 설득되지 않은 글라우콘에게 반대로 트라쉬마코스를 설득할 방도를 물은 소크라테스는 서로 합의해가며 고찰함으로써 그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의 말에 대한 동의를 글라우콘으로부터 받아내고 논의를 재개한다.


    이 장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플라톤이 왜 글라우콘이 이 지점에서 논의에 개입하게 했는가 하는 점이다. 또 하나는 글라우콘이 제기한 바로 그 문제, 즉 왜 벌이 보수가 되냐는 것이다. 우선 글라우콘의 개입은 플라톤이 낯선 주장을 하면서 그 주장을 환기하기 위해서 개입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벌이 보수인지에 대한 설명을 바로 하기보다는 글라우콘의 개입을 통해 독자들의 이목을 끈 다음에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건 곧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는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일 텐데,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1권 이후 2권부터 다루게 되는 논의가 바로 “훌륭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 즉 이상국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라우콘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 이 역할을 맡은 이유는 2권에서 새롭게 논의를 재개한 것이 바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이 두 형제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1권을 먼저 쓰고 나서 나중에 2권 이후를 썼다는 설이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플라톤은 나중에 쓴 2권 이후를 1권과 연결하는 지점을 여기에 만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자신의 형들인 이 두 인물들을 통해서 앞으로 새롭고 거대한 논의가 전개된다는 암시를 이 장면으로 하고, 1권과 나머지 권들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려 한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보면 이렇게 함으로써 1권은 2권부터 나머지 권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건축물의 입구가 된다.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보수의 역설이다. 본문에는 이 역설이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데, 앞뒤 맥락을 보고 추정을 해보자. 보수(misthos)는 그 자체로 어떤 일을 한 대가로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은 대가를 치른다’고 하듯이 ‘보수’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misthos’에는 우리말 ‘대가’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보수로서 금전과 명예 외에 ‘벌’을 언급할 때 이 ‘벌’은 금전과 명예와 다른 맥락을 갖는다. 훌륭한 사람들은 금전과 명예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지만, 2권 이후의 이상국가에서 통치자는 시민들의 보수로 생계를 유지한다. 금전과 명예는 통치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지만, 벌은 위협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통치하지 않으면 더 못난 사람들의 통치를 자신이 받아야 하는 벌이 있기 때문에 통치한다. 그래서 통치하지 않는 대신에 그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 벌을 받지 않기 위해 통치하는 것이라서 그 벌은 실현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통치를 맡음으로써 더 못난 자들의 통치를 받지 않게 되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은 벌은 역으로 보상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2권 이후의 논의를 보면 이상국가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철학자들은 철학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통치하려고 들지 않는데, 이들은 바로 여기서 언급한 그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통치를 맡게 된다. 이상국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상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역설이 여기서 이미 암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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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