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네 명의 윤리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가 지은 ‘공리주의’는 공리주의에 관한 결정적 저서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공리주의가 끼친 영향은 매우 광범위하다. 20세기 들어서까지 많은 철학자가 공리주의 이론을 다양한 형태로 수정 발전시켰으며, 특히 법학, 정치학, 경제학에 공리주의의 영향력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행위의 선악을 쾌락의 기준으로 정하는 공리의 원리는 입법이나 정치 등 모든 사회적 행위를 규율한다. 개인적 공리의 추구가 반드시 사회적 공리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법은 사회적 공리를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행위를 규율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공리의 실현을 위해서는 위정자의 부당한 이익을 배제해야 한다. 여기서 민주주의적 의회제도가 필요해진다. 그렇기에 19세기 초반 벤담과 밀 등은 보통/비밀선거에 의한 의회개혁운동에 나섰고, 1832년의 제1차 선거제도 개정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개정으로 귀족과 극소수 부자만 가지고 있던 참정권이 산업 자본가와 중산층에게도 주어졌다.
이처럼 공리주의는 ‘다수결의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와, 사유재산 보호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분배와 평등을 강조하는 복지 사상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경제학에서 한계효용설의 성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저자의 영어는 대단히 어렵고, 이해하기가 난해하다. 적어도 세 번 이상 읽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렇기에 역자는 이 난해한 텍스트를 최대한 읽기 쉽게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역자의 꼼꼼한 해제와 작품해설을 더한 이 책은 저자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손쉬운 입문서로서, 저자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한층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발판으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고 생각함으로써 독자들은 사회의 옳고 그름, 그리고 행복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존 스튜어트 밀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그는 1806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였던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에게 극도로 엄격한 영재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밀은 3살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워서 8살에 헤로도토스와 플라톤의 저작들을 원어로 읽었고, 8살부터는 라틴어를 배워서 오비디우스 등이 쓴 라틴어 고전도 읽었다. 12살부터는 스콜라 철학의 논리학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원어로 읽었다. 13살 때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저작을 통해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4살 때는 프랑스에서 1년을 지내면서 몽펠리에 대학에서 화학, 논리학, 고등수학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17세 때인 1823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입사하여 아버지의 조수로 일했으며, 그 후 1858년까지 재직하며 연구와 저술 활동을 병행했다.
20살 무렵 밀은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부딪힌다. 신경쇠약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작품을 읽고 다시 재기했다. 이때부터 밀의 사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공리주의적 이성 제일주의의 문제점을 깨달았고, 사색과 분석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감수성이 능동적 능력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판하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제한적인 정부 개입을 옹호하는 경제학 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밀은 행동하는 사상가였다. 그는 사상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1865년부터 1868년까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학장으로 재임했고, 같은 기간 동안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866년, 그는 하원의원으로서 헌정사상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고, 보통 선거권의 도입 같은 선거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또한 노동조합과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한 사회개혁과 아일랜드의 부담 경감 등도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 ‘논리학 체계’(1843), ‘정치경제학 원리’(1848), ‘자유론’(1859), ‘대의정부론’(1861), ‘공리주의’(1863), ‘자서전’(1873) 등이 있다.
■ 역자 이종인
역자 이종인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대학교 전문 번역가 양성 과정 겸임 교수를 역임했다. 지금까지 250여 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특히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많이 번역했다. 번역 입문 강의서 ‘번역은 글쓰기다’, ‘살면서 마주한 고전’ 등을 집필했으며, 옮긴 책으로는 ‘유한계급론’(소스타인 베블런), ‘진보와 빈곤’, ‘리비우스 로마사 1, 2’, ‘로마제국 쇠망사’, ‘고대 로마사’, ‘숨결이 바람 될 때’, ‘변신 이야기’, ‘작가는 왜 쓰는가’, ‘호모 루덴스’,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중세의 가을’, ‘마인드 헌터’ 등이 있다. 최근에는 인문, 경제 분야의 고전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번역에 힘쓰고 있다.
■ 차례
제1장 총론
제2장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제3장 공리의 원리의 궁극적 제재에 대하여
제4장 공리의 원리는 어떤 증명을 내놓을 수 있는가?
제5장 정의와 공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존 스튜어트 밀의 연보
해제-이종인
작품 해설-이종인
밀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손쉬운 입문서로서, 밀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한층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한 발판으로서, 밀의 주장을 살펴보고 생각함으로써, 사회의 옳고 그름, 행복에 대한 자신만의 입장을 정립해보세요.
공리주의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쾌락과 행복: 공리주의의 기본 전제
도덕의 밑바탕으로 ‘공리’ 혹은 ‘최대 행복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상인 공리주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옳은 행동이 되며, 만약 불행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른 행동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반면에 불행은 쾌락 없음과 고통을 의미한다. 공리주의의 도덕적 기준에 대하여 명쾌한 그림을 제시하려면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보충 설명들은 이 공리주의라는 도덕 이론의 바탕이 되는 삶의 이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 삶의 이론은 이러하다. 즉, 고통 없음과 쾌락은 삶의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들이다. 다른 철학의 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에서도 바람직한 것은 아주 많은데, 모든 바람직한 것들은 그것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바람직하고, 또 고통 없음과 쾌락을 약속하는 수단이기에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이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독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인생의 목적을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리주의가 더욱 못마땅하게 보인다. 그들이 표현하는 바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이라고 못 박으면서 그보다 더 낫고 더 고상한 욕망이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공리주의가 아주 천박하고 저속한 사상이라고 매도한다. 그것은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사상이고, 철학의 아주 초창기 시절에 에피쿠로스를 추종하던 자들의 생각과 같다고 비난한다. 현대에 들어와 공리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의 반대자들로부터 그와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돼지의 쾌락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적 욕구보다 훨씬 고상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일단 그런 기능들을 인식하게 되면, 그런 기능들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 상태를 결코 행복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공리주의의 원리로부터 그런 사상 체계를 도출해낸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이 전혀 흠결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사상 체계가 온전하게 되려면 거기에다 스토아학파의 요소와 기독교의 요소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정신적 쾌락, 정서와 상상의 쾌락, 도덕 감정의 쾌락 등은 감각적 쾌락보다는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에피쿠로스의 인생 이론은 그런 쾌락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아, 공리주의 저술가들은 신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더 우위에 놓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정신적 쾌락이 신체적 쾌락보다 더 항구적이고, 더 안전하고, 비용도 덜 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적 쾌락은 그 본질적 특성보다는 상황적 특성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점들에서 공리주의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증명했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들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주장을 아주 일관되게 고수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주장인가 하면, 어떤 종류의 쾌락들은 다른 쾌락들에 비해 더 바람직하고 더 가치 있다는 사실과, 공리의 원리 즉 공리주의가 서로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측정할 때 그 양과 그 질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쾌락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오로지 수량에만 의존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 전체의 행복
내가 지금껏 쾌락의 문제를 말해온 것은, 이 문제가 ‘공리’ 혹은 ‘행복’이라는 아주 정당한 개념의 필수적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또 이 공리 혹은 행복이 인간 행동의 으뜸 원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리주의적 기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행위자 자신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이기 때문이다.
어떤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가 그런 성품 덕분에 늘 행복하다는 말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성품이 다른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그 결과로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온 세상이 혜택을 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고상한 성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킬 때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한다. 물론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고상한 성품으로부터 혜택을 얻는데, 정작 그 개인은 행복에 관한 한, 자신의 성품이 가져오는 혜택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들면서 공리주의를 반박하는 일은 그런 반박을 피상적인 것으로 만들 뿐이다.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반론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의 원리에 반대하는 또 다른 부류의 반대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행복은 인생과 인간 행위의 합리적 목표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획득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반드시 행복한 인생을 살고야 말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가?”
공리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행복은 광적인 황홀함의 삶이 아니다. 몇 안 되는 일시적인 고통과 다수의 다양한 쾌락들로 이루어진 인생에서, 긍정이 부정을 압도하고, 전체 삶의 밑바탕으로서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들, 바로 그런 순간들을 가리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차분한 삶은, 운이 좋아 그것을 얻은 사람들에겐 언제나 행복한 인생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삶을 많은 사람들이 누리고 있다. 그들의 평생을 통틀어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비참한 교육과 비참한 사회 제도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타인의 행복과 예수의 황금률
한편 공리주의자들은 스토아학파나 초월주의자들만큼이나 그들 자신에게도 자기헌신의 도덕을 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공리주의 도덕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남들의 선을 위해 자기의 최고선을 희생시키는 능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행복의 총량을 높여주거나 높여줄 가능성이 없는 희생은 낭비라고 생각한다. 공리주의가 칭송하는 유일한 자기희생은 남들의 행복에 기여하거나 그런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수단에 기여할 때뿐이다. 그 행복은 인류 전체의 행복일 수도 있고, 인류의 집단적 이해관계가 부과하는 범위 내에 있는 개인들의 행복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되풀이하여 말한다.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부당하게도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 인간 행위의 옳음을 증명하는 공리주의의 기준인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행복이라는 사실이다. 공리주의는 어떤 행위자가 그 자신의 행복과 남들의 행복 사이에서, 공평무사하고 자비로운 구경꾼처럼 공정하게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황금률에서 온전한 공리주의 윤리의 정수를 발견한다.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나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이 공리주의 윤리의 완벽한 이상이다. 이러한 이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수단으로, 공리주의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사회의 법률과 제도는 모든 개인의 행복, 혹은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해관계를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와 최대한 일치시키도록 해야 한다.
둘째, 인간의 성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교육과 여론은, 그 막강한 힘을 사용하여 각 개인의 마음속에 개인의 행복과 사회 전체의 공동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굳건한 생각을 심어놓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하다. 각 개인의 행복은 보편적 행복이 요구하는 바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온갖 행동 양식의 구체적 실천과 일치해야 한다.
정의와 공리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모든 사변적 탐구의 시대를 통틀어, 공리 혹은 행복이 옳음과 그름의 기준이라는 사상에 가장 강력한 장애물 중 하나는 정의라는 개념이었다. 정의라는 용어가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정서와 명백한 인식은 너무나 빠르고 확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와 거의 본능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정의가 사물들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말했으며, 정의가 자연계 내에서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좀 더 부연하면, 정의는 그 모든 종류의 편의와 뚜렷하게 구분되고, 사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의와 편의는 서로 정반대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리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의와 편의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둘이 서로 분리된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5가지 기준
첫째, 어떤 사람에게서 그의 개인적 자유, 재산, 기타 법률에 의해 그의 소유로 인정되는 것을 빼앗아가는 행위는 불의한 일로 간주된다. 여기서 우리는 정의와 불의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 있는 아주 명백한 경우를 발견한다. 즉 어떤 사람의 법적 권리를 존중하는 것은 정의이고, 반대로 침해하는 것은 불의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여러 예외 조항들을 인정하는데, 이런 예외는 정의와 불의의 관념이 별도의 형태를 취하면서 구체화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예를 들어, 어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은 그 권리를 몰수당했기 때문에 그런 박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곧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둘째, 그가 박탈당한 법적 권리는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권리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서, 그에게 이런 권리를 부여하는 법률은 악법일 수도 있다. 사정이 그렇다면 혹은 그렇다고 생각된다면 어느 쪽이든 우리의 논의에는 마찬가지지만, 그 법률을 위반한 것이 정의인지 혹은 불의인지 의견이 엇갈릴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의견들 가운데서도 다음 사실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즉, 불의한 법률이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법은 정의의 궁극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어떤 법은 어떤 사람에게는 혜택을 주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피해를 부과하는데, 그런 피해야말로 정의가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법률이 불의하다고 간주되는 것은, 법률의 위반이 불의가 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불의란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 그 권리는 법적 권리가 될 수 없으므로 소위 도덕적 권리라는 다른 명칭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불의의 두 번째 사례는 어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권리를 박탈하거나 유보하는 경우이다.
셋째, 각 개인이 자신의 공로에 따라 좋고 나쁜 결과를 얻는 것은 정의롭고, 그가 그럴 만한 공로가 없는데 이익을 본다든지 반대로 손해를 보는 것은 불의라고 널리 간주된다. 이것이 일반 대중이 불의라고 하면 마음속에 품게 되는 개념 중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형태의 것이다. 정의든 불의든 공로라는 개념이 개재되므로, 여기서 공로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각 개인은 옳은 일을 하면 이익 또는 선을 받을 자격이 있고, 나쁜 일을 하면 피해 또는 악을 보게 되는 것으로 널리 이해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그 개인이 어떤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해주었으면 선을 받을 자격이나 공로가 있고, 악한 일을 해주었으면 악을 받게 된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정의가 달성된 사례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고려사항을 반영하려다 정의의 요구가 묵살된 것으로 간주된다.
넷째,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불의라고 여겨진다. 가령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약속을 위반한다거나, 자기 자신의 의식 있는 자발적 행동으로 남들에게 일으켜 놓은 기대감을 꺼뜨리는 것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미 앞에서 말한 정의의 다른 의무사항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의무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신의를 지켜야 하는 측에 다른 더 강력한 의무사항이 생겼다든지, 또 상대방이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해제시켜주는 방식으로 행동하여 상대방에게 돌아가야 하는 혜택이 몰수될 때가 그러하다.
다섯째, 편파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널리 생각된다. 가령 어떤 혜택이나 우대를 해주어야 할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을 대신에 갑에게 더 많은 혜택이나 우대를 주는 경우다. 그러나 공정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무사항으로 간주되지는 않고 어떤 다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혜택이나 우대는 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혜택이나 우대가 비난받는 경우는 일반적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의무를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족이나 친구에게 낯선 사람들에 비해 더 좋은 혜택을 주거나 우대를 해주지 않는다면 그는 칭찬이 아니라 비난을 받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갑 대신에 을을 친구, 친지, 동료로 선택한다고 해서 불의한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당하지도 않는다.
정의, 공리, 자유
정의감의 본질과 근원에 대하여 우리가 설명해온 바는 정의와 편의를 뚜렷하게 구분한다. 나는 행위의 결과로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을 경멸하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명확하게 그 둘을 구분한다. 또 나는 공리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정의의 허구적 기준을 거부하지만, 공리에 바탕을 둔 정의는 모든 도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또 가장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정의는 어떤 도덕적 규칙들에 붙이는 이름이다. 그 규칙들은 인간의 복지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이고, 그래서 그 어떤 생활 지침보다도 절대적인 의무가 된다. 정의의 핵심을 구성하고, 각 개인 내부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는 권리의 개념은 이런 강한 구속력을 지닌 의무를 가리키며 그 의무의 실천을 의미한다.
인류가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금지하는 도덕 규칙은 인간사의 특정 분야를 관리하는 방식을 규정한 그 어떤 중요한 원리보다 인간의 복지에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에는 남의 자유를 그릇되이 침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칙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도덕 규칙은 나름 특성을 갖고 있는데 인류의 사회적 감정 전반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라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서 평화가 유지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도덕 규칙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만약 도덕 규칙의 준수가 예외이고 불복종이 원칙이라고 한다면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가상의 적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늘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이 도덕 규칙이 인류가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또 강력하게 권유해야 할 원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게 조언하고 권유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서로에게 자선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인류에게 틀림없이 이익이 되지만 그 이익은 강도가 훨씬 떨어진다. 개인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의 혜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남들이 자신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필요는 언제나 느끼고 있다.
따라서 모든 개인이 남들로부터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거나 간접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자유가 침해당하지 않게 보호해주는 도덕은, 각 개인이 마음속에 깊이 명심하고 또 말과 행동으로 확립하고 단속하는 데 강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그런 도덕이다. 각 개인이 이런 도덕을 준수할 때 비로소 그 개인은 인류의 이웃으로 적절히 존재하는 능력을 검증받고 또 인정받는다. 그러니까 그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이 도덕에 의하여 그가 방해가 되는 인물인지 아닌지를 검증받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의무사항을 일차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도덕들이다.
공리는 정의의 기준
현재 세상에서 통용되고 또 정의의 집행과 관련하여 자주 참조되는 정의의 격언들은, 우리가 지금껏 말해온 정의의 원리들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 자발적으로 행한 일이나 자발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
- 사람을 법정에서 심리하지 아니하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불의하다.
- 징벌은 범죄의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
사법적 미덕의 으뜸 가치인 공정함은 정의의 의무이기도 한데, 위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이유인 ‘권리를 가진 자를 보상’ 하는 것 때문에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또한 정의의 다른 의무사항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평등함과 공정함이 여러 인간의 의무들 중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되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평등함과 공정함은 일반인이나 지식인을 막론하고 정의의 원칙이라고 하면 반드시 포함하는 사항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 둘은 이미 서술한 원리들로부터 추론된 것이다. 각자의 공과에 따라 선은 선으로 보상하고, 악은 악으로 억압하는 것은 의무의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 물론 이보다 더 높은 의무가 공평한 대우를 금지할 때는 예외가 되겠지만, 우리에게 잘 대해준 사람에게 역시 잘 대해주어야 하며, 사회 역시 사회를 위해 잘한 사람들을 잘 대해줌으로써 보답해야 한다. 이것이 최고 수준의 추상적인 사회 정의와 분배 정의이다. 이런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 제도들과 덕성스러운 시민들의 노력이 함께 경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 정의와 분배 정의라는 이 위대한 도덕적 의무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기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의는 도덕의 제1원리에서 직접 흘러나온 것이고, 2차적이거나 파생적인 원리들에서 가져온 논리적 추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는 공리 혹은 최대 행복 원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각 개인의 행복은 정도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다소 유연성이 있는데, 이 행복과 관련하여, 갑의 행복이 을의 행복과 정확히 똑같은 것이 아니라면, 이 정의의 원리는 공허한 단어들의 배열에 불과하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을 설정하였으므로, 벤담의 격언 “모든 사람이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가 공리의 원리를 보충 설명해주는 원리로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도덕가와 입법가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행복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 권리에는 모든 행복의 수단도 함께 요구할 권리가 포함된다. 단, 생활의 불가피한 상황이나 모든 개인의 이익이 포함된 일반 이익을 위해 이 원리에 제약을 가해야 할 경우에는 예외가 인정된다. 하지만 그런 제한은 아주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 다른 정의의 원리가 그러하듯이, 행복과 행복의 수단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원리는 결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회적 편의라는 개념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신축성이 있다. 그러나 일단 적용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그것은 정의의 명령으로 간주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는데, 일부 공인된 사회적 편의에 의해 제한이 불가피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
따라서 편의라고, 편리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모든 사회적 불평등들은 그저 불편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의의 특성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런 독재를 어떻게 지금껏 견디어왔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편의라는 잘못된 개념 때문에 어쩌면 다른 불평등들도 용인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 불평등을 시정하려 들면 그들이 지금껏 용인해온 그것이 아주 흉측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들이 마침내 이건 안 되겠다고 비난하고 나섰던 다른 불평등만큼이나 흉측하게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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