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지은이 : 플라톤
출판사 : 현대지성
출판일 : 2019년 11월




  • 참된 진리 앞에서 죽음도 기쁘게 받아들인 탁월한 지성인이자 정의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한 권에 담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불경죄와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는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가 행한 변론들로, 고발에 대해 자신을 변호했던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는 전문 기술자인 장인들과 정치인을 대변하는 ‘아니토스’와 직업적인 수사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리콘’,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명목상으로 내세운 청년 ‘멜레토스’가 자기를 고발하기 이전에도, 이미 자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소피스트로 오해를 받고 있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친구가 델포이 신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는 소크라테스”라는 신탁을 받은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소위 지혜롭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대화하다가, 그들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많은 미움을 사게 된 것이 진정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그러한 대화를 지켜보던 청년들이 그를 따르며 모방하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신탁에서 출발해서, 그 후로도 신의 음성을 들으며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가정도 돌보지 않은 채로 오직 진리를 찾기 위한 대화와 탐구를 계속해나갔다고 밝힌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일이나 국가의 일에 관심을 갖기 전에, 먼저 진리를 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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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 사람들이여, 나를 모함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내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그들 때문에 내가 대체 누구인지를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그 정도로 그들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한 말 중에 진실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신께서 소크라테스라는 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나를 하나의 본보기로 사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인간들아, 소크라테스처럼 자기가 지혜에 관해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가 너희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이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향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니토스의 말을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나를 무죄로 방면하든지 방면하지 않든지, 그리고 여러분이 나를 죽이겠다고 백 번이나 경고할지라도, 나는 앞에서 내가 말한 것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투옥이나 죽음이 두려워 여러분의 부당한 결정에 동조하느니 차라리 법과 정의 편에 서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의 스승도 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을 행하기 위해 사람들과 대화하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가 듣고 싶어 한다면, 청년이든 노인이든, 그의 청을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들이든 내게 똑같이 질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사람에게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게 하고, 거기에 대해 내가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해악을 입힌 일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받아야 할 형벌을 스스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고 단죄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두려워 그렇게 하겠습니까?”

    “나는 나 자신을 변론하는 말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가장 듣고 싶어 하고, 법정에 선 다른 사람들로부터 늘 들어왔던 것들, 즉 눈물을 흘리며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짓들을 해가며 그런 말들로 통사정하고 애걸복걸할 정도의 뻔뻔함과 후안무치함이 없었고,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비판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해서, 자기 삶이 올바르지 않다고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비판을 모면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고상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고상하고 쉬운 길은 여러분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직접 관심을 갖고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크리톤
    ‘크리톤’은 아테네에 중요한 종교행사가 있어서 사형 집행이 미루어지고 있다가, 이제 사형이 집행될 날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친구 크리톤에게서 탈옥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서, 거기에 관해 대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이성을 따라 정의로운 것으로 밝혀진 것을 따라 살아왔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탈옥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한다. 정의와 불의, 그리고 정의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다루고 있는 이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대중들의 생각이나 견해는 고려할 것이 되지 못하고, 오직 그 분야에 전문가이자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이 문제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이성과 논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랬을 때에 고려해야 할 것은 오직, 탈옥이 과연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을 의인화해서 법이 들려주는 말을 대변하는데, 근대에 등장한 사회계약론과 비슷한 이론이 제시된다. 즉, 자기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아테네에 살면서 그 법에 복종하기로 합의한 사람이기 때문에 탈옥해서 어디에 가더라도 법을 깨뜨린 자로 낙인 찍하게 될 것이고, 심지어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그런 자로 취급받아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불의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불의로 갚지 말고, 변함없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좋은 일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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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크리톤, 우리가 지금 이 일과 관련해서 더 나은 원칙을 갖고 있지 않다면, 다수의 사람이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취급해서 자기 힘을 과시하며 겁을 주고, 우리를 투옥하고 사형시키며 재산을 몰수하는 등 지금보다도 더한 것들로 위협하더라도, 나는 자네 말대로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야 할 걸세.”

    “자네는 이 일과 관련해서 비용을 갹출하는 것, 사람들의 평판, 자녀교육 같은 문제들을 거론했지만, 크리톤, 그런 고려는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원칙도 없이 쉽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하고 다시 목숨을 부지하게도 해주는 저 다수의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나. 반면에 우리는 이성과 원칙을 따르는 사람들이고, 이성과 원칙은 우리에게 방금 말한 것 외에 다른 것은 고려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네.”

    “다수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우리가 겪는 고초가 지금보다 더 심하든 가볍든, 불의를 행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하고 수치스러운 일인 것인가? 거기에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

    “크리톤, 법정에서 내려진 판결은 효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대로 집행될 것을 법은 요구하는데, 우리가 그 법을 어긴다면, 모든 사람, 특히 대중연설가들이 나서서 우리는 추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국가가 우리에게 불의를 행하여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지 않아 그랬다고 말해야 할까?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말을 해야 할까?”

    “그렇다면, 크리톤, 신이 우리를 이 길로 인도하니 이 길을 가세.”


    파이돈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던 날에 평소처럼 아침 일찍부터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감옥으로 몰려와서, 해가 져서 독약을 마실 때까지 ‘영혼불멸’이라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주제가 설정된 것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죽음은 재앙, 즉 화가 아니라 복이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은 영원히 축복받은 자들의 땅으로 가는 것이며, 이승에서의 철학자의 삶은 그 준비 과정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기쁜 마음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과연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불멸하는가 하는 문제가 화두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논증을 시작한다. 즉,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변화의 원리 그러니까 생멸의 원리는, 모든 대립하는 것들은 자신과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생성되어 사멸해나가면서 자신과 대립하는 것을 생성해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죽어 있는 것이 생성되고, 죽어 있는 것으로부터 살아 있는 것이 생성된다. 한 사람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면서 살아 있는 것이 되고, 영혼이 육체와 분리됨으로써 죽어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수히 반복된다.

    여기에서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학습기상설을 거론한다. 사람이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줄을 아는 것은, 그에게 아름다움에 관한 어떤 지식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지식은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이미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육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케베스는 영혼이 사람의 죽음 이후에도 과연 존재하는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며 이의를 제기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이데아론을 전개한다. 현실 세계에서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를 그 속에 지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데아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사멸될 수 없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들은 사멸하지만, 그 속에 있는 이데아는 사멸하지 않고 단지 그 사물로부터 물러날 뿐이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합성물이 아니고 단일체이고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에 파괴되거나 사멸되지 않고 단지 죽은 사람의 몸으로부터 물러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뿐이다.

    철학자는 이승에서 육체와 감각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그런 것들로부터 떠나 순수한 사유 속에서 이성적 변증과 직관을 통해 이데아들을 아는 지식인 참된 지혜를 얻는 훈련을 함으로써 자신을 정화해나간다. 이것은 사후에 그들을 위해 준비된 “축복받은 자들의 땅”, 즉 신들이 사는 곳에서 신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훈련이고, 따라서 죽는 연습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참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고, 참된 지혜는 육체의 모든 감각의 방해를 단절하고 오직 순수한 사유와 변증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이데아들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임을 밝힌다. 이것은 당시에 소피스트들이 상대주의적인 가치관 속에서 현실 경험 세계에서의 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했던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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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철학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을 탐구하며 실천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모든 사람 중에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하네. 그런 사실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몸을 극도로 혐오해 오로지 영혼만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다가, 마침 그런 기회가 찾아와 자신이 일평생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저 몸의 결박에서 놓이게 된 것일세. 그토록 오랜 세월 사모하고 열망해왔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된 것이지. 그런데 그것을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두려워하고 화를 낸다면,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겠는가?”

    “분리되는 것과 합쳐지는 것, 차갑게 되는 것과 따뜻하게 되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그런 생성 과정을 가지고 있지. 우리는 그 생성 과정을 지칭하기 위한 적절한 이름을 종종 확보하고 있지 못하네. 그렇다고 할지라도, 대립물이 상호적인 생성 과정을 거쳐 서로에게서 생성된다는 것은 실제로 모든 경우에 필연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사람이 죽었을 때, 영혼이 그러한 순수한 상태에 놓인다면, 자기 자신을 닮은 곳, 즉 눈에 보이지 않고 신적이며 죽음이 없고 지혜로운 곳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거기에 당도해서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것과 어리석고 우매한 것과 두려워하는 것과 야만적이고 사나운 욕망을 비롯해서 인간의 속성 때문에 저지르는 온갖 좋지 않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되어, 밀교에 입문해서 깨달음을 얻은 자들처럼 진정으로 남은 시간을 신들과 함께 보내지 않겠는가.”
    “만일 죽음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악인들에게 죽음은 신이 주는 깜짝 선물이 될 것이네. 하지만 이제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선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 외에 재앙을 피하거나 벗어날 다른 방법은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네.”

    “그분은 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고, 조금 후에 경련을 일으키셨지요. 그분의 얼굴을 덮고 있던 것을 치우자, 그분의 눈은 정지되어 있었지요. 크리톤이 그것을 보고서, 그분의 입을 오므려드리고 눈을 감겨 드렸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우리의 동반자,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게다가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정의로운 인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의 최후는 이러했소.”
     

    향연
    기원전 416년에 아가톤이라는 비극작가가 아테네의 비극 경연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베푼 연회에 참석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연애의 신인 ‘에로스’를 예찬하는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한 내용을 담고 있다.

    ‘향연’의 그리스어 제목인 ‘심포시온’은 “함께 모여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에로스’는 일반적으로 ‘사랑’으로 번역되지만 ‘향연’에서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신들은 참된 지혜에 대해 ‘에로스’의 감정을 갖지 않는다. 참된 지혜는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신들에게 ‘결핍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적인 측면에서, 에로스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소유하기 위해 격렬히 욕망하고 사모하며 오매불망 그리워하며 함께 있고자 하고,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아주 뜨거운 감정이다.

    이 연회에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에로스를 예찬한 사람들은 모두 에로스 신을 자신의 연애 대상 또는 예찬의 대상으로 여기고서, 에로스 신은 완전하고 온전히 아름답다는 전제하에서 예찬을 이어간다.

    파이드로스는 에로스가 우리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미덕을 행할 동기를 부여해준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에로스는 일차적으로 에로스의 감정을 품은 성인 남자와 그가 연애하는 자기 연인인 소년이나 젊은이 간의 동성애에 적용된다.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 신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한다. ‘범속의 에로스’는 성애를 중심으로 성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고, ‘천상의 에로스’는 진정한 연애 속에서 아름다운 미덕을 추구하는 사람들 속에서 활동한다. 여기에서 성애를 추구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운 미덕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연애의 타락한 형태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눈에는 용기와 절제 같은 미덕을 갖춘 소년이나 젊은이를 연애하는 동성애가 주로 성애를 중심으로 갖는 이성애보다 우월한 것이었다.

    에릭시마코스는 모든 사람 안에서는 ‘에로스 신’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것을 단지 사람들 사이의 연애로만 국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한다. 에로스는 자신에게 결핍된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문 기술들도 에로스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가 자신의 반쪽을 찾아서 완전함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남성과 여성을 둘 다 가진 남녀추니가 존재했고, 능력이 대단해서 신들에게 반기를 들려고 하자 제우스 신이 인간의 힘을 약화하기 위해 반으로 쪼개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반쪽을 찾아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이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는 한 사람의 아름다운 몸을 연애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아름다운 일과 미덕을 연애하는 것으로 발전하고, 거기에서 아름다운 그 자체, 즉 이데아를 관조하고 직관하는 경지로 올라갔을 때에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데아를 직관하기 위한 것이고, 철학의 수단은 이성에 의거한 추론과 변증이다. 따라서 철학을 하는 것, 즉 이성적인 변증을 통해 참된 것들인 이데아들에 대한 지식을 얻어 진정한 지혜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고유한 의미에서의 에로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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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하는 것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것이고, 결핍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지 한번 잘 생각해보게.”

    “나는 모든 사람이 에로스를 귀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단언하고, 나 스스로 에로스와 관련된 것들을 소중히 여겨 각별한 열심으로 훈련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네. 그리고 지금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늘 나는 에로스의 능력과 용기를 최선을 다해 예찬할 것이네.”

    “축복받은 사람이여,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네가 그것을 못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잘 살펴보게나. 육신의 눈으로 보려는 것을 멈추었을 때, 마음의 눈이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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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