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지은이 : 프레데리크 그로(역: 이재형)
출판사 : 책세상
출판일 : 2014년 04월




  • 고통의 순간, 오로지 걷고 또 걸은 니체, 태양을 향해 걸었던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걸으며 사색하며 세상을 보는 통찰력과 감수성을 키우고 무한한 영감을 얻으며 독창적인 사상과 작품 세계를 형성해나간 철학자와 작가들의 이야기.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나는 왜 이렇게 잘 걷는 사람이 되었나 |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에게 걷기는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경우처럼 일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앉아 있거나 숙이고 있거나 허리를 굽히고 있던 몸을 잠시나마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최소한의 건강법이 아니다. 니체에게 걷기는 활동의 조건이다. 걷기는 몸의 이완, 혹은 몸의 동행 이상이다. 걷기는 본질적으로 몸의 요소인 것이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즐거운 학문』 §366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그것만을 토대로 하여 자기 책을 썼으며, 너무나 많은 책들이 도서관의 곰팡내를 풍긴다.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판단하는 것일까? 거기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판단한다. 너무나 많은 책에서 독서실이나 사무실의 그 답답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빛도 들어오지 않고 환기도 거의 되지 않는 방. 책장 사이로 공기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곰팡이가 피고 종이가 천천히 변질되며 잉크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곳의 공기에는 독기가 배어 있다.


    다른 책들은 신선한 공기를 내뿜는다. 외부의 청량한 공기, 높은 산에서 부는 바람,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들 정도로 얼음처럼 차가운 높은 산의 바람, 혹은 아침에 소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선 가운데 향기가 훑고 지나가는 유럽 남부의 오솔길에서 떠도는 신선한 공기. 이런 공기를 내뿜는 책들은 숨을 쉰다. 이런 책들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쓸모없는 지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다.


    오, 한 인간이 어떻게 그 사상에 도달했는가를, 그가 잉크병을 앞에 두고 뱃살을 접은 채, 종이 위로 머리를 구부리고 앉아서 그 사상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우리는 얼마나 빨리 알아채는가! 오, 우리는 또한 얼마나 빨리 이런 책을 읽어치우는가! 내기를 해도 좋다. 눌린 창자가 스스로를 폭로하며, 또한 서재의 공기와 천장, 좁은 서재가 스스로를 폭로한다. -『즐거운 학문』 §366


    그러나 다른 빛을 찾기도 한다. 도서관은 항상 너무 어둡다. 책들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쌓아놓고 겹겹이 포개놓고 나란히 놓아둔 데다가 책장이 높아서 빛이 통과할 수가 없다.


    다른 책들은 산의 날카로운 빛이나 햇빛을 받은 바다의 번득이는 빛을 반사한다. 특히 색깔을 반사한다. 도서관은 회색이고, 거기서 쓰이는 책들도 회색이다. 모든 것에 인용문과 출전, 페이지 하단의 주석, 끝도 없는 반론이 과적(過積)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손과 발, 어깨, 다리 등 글쓴이의 육체에 대해 말해야 한다. 책은 어떤 생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꼿꼿이 선 채 무릎을 구부리고, 앉고, 허리를 구부리고, 움츠린 육체가 너무나 많은 책에

    서 느껴진다. 걷는 육체는 마치 활처럼 펴진다. 햇빛을 받은 꽃처럼 넓은 공간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상체는 노출되고, 두 다리는 펴지며, 두 팔은 들어 올려진다.


    책, 인간, 음악의 가치와 관련된 우리의 첫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걸을 수 있는가? (……)”-『즐거운 학문』 §366


    마치 죄수처럼 벽 안에 갇힌 채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줄 모르는 저자들이 쓴 책은 무거운 느낌을 풍기고 소화하기도 어렵다. 이런 책들은 책상에 쌓아놓은 책들을 편집하여 쓴 것이므로 꼭 뚱뚱한 거위처럼 보인다. 인용문으로 포식하고 주석을 과식해서 몸이 무거운 것이다. 그래서 무겁고 뚱뚱하며, 느리게 권태롭게 힘들게 읽힌다. 이런 책들은 다른 책들을 가지고 만들어낸다. 문장의 행(行)들을 다른 책의 행들과 비교하고, 다른 책들이 얘기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확인하고, 정확성을 기하고, 수정한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이 되고 한 장(章)이 된다. 한 권의 책은 다른 책에 관한 수백 권 분량의 주석이 된다.


    반대로, 걸으면서 구상하는 사람은 얽매인 데가 없어 자유롭다. 그의 사유는 다른 책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확인 때문에 둔해지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사유에 의해 무거워지지도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의 사유는 어떤 움직임으로부터, 어떤 충동으로부터 생겨난다. 그의 사유에서는 육체의 유연성과 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의 사유는 육체의 에너지와 도약을 고정시켜 표현한다. 혼신(混信)도, 안개도, 장벽도, 문화와 전통의 관세(關稅)도 없이 사물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 그것은 오랫동안 연이어지는 실연(實演)이 아니라 경쾌하고 심오한 사유다. 내기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사유가 경쾌하면 경쾌할수록 사유는 더 높이 올라가고 심오해진다. 확신과 의견, 지식으로 이루어진 깊은 늪이 현기증이 날 만큼 수직으로 치솟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도서관에서 구상된 책들은 피상적이고 둔중하다. 그런 책들은 베끼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걸으면서 사유하기. 사유하면서 걷기. 길을 걷는 육체가 드넓은 공간을 응시하며 휴식을 취하듯, 글쓰기는 가벼운 휴식에 불과할 뿐이다.



    도피의 열정 | 아르튀르 랭보

    베를렌에게 그는 “바람구두를 신은 인간”이었다. 아직 몹시 어렸던 랭보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난 그저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랭보는 평생을 걸었다. 고집스럽게, 그리고 열심히. 열다섯 살에서 열일곱 살 때까지는 대도시로 가기 위해 걸었다. 문학적 희망을 가슴에 품은 그는 파르나스 시파(詩派)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절망스러울 만큼 혼자인 자기 같은 시인들을 만나고, 사랑받기 위해(자신의 시가 읽히게 하려고), 파리를 향해 걸었다. 또한 브뤼셀을 향해 걸은 것은 저널리즘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스무 살에서 스물네 살 때까지는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여러 차례 걸었다. 겨울을 보내려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여행을 준비했다. 지중해의 항구들(마르세유나 제노바)과 샤를빌 사이를 쉴 새 없이 왕복했다. 태양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부터 죽을 때까지 사막의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태양 속에서 걸었다. 아덴에서 하라르까지, 여러 차례.


    가자! 걷기, 무거운 짐, 사막, 권태, 그리고 분노.


    열다섯 살 때의 랭보. 허약한 소년, 결연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푸른 눈빛. 가출하는 날 아침, 동이 트기 시작하면 그는 어둠으로 가득 찬 집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 문을 살그머니 닫고 길을 나섰다. 작은 흰색 길이 평온하게 깨어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자, 가자!”

    걸었다. 항상 걸으며 “경쟁자가 없는 자신의 두 발로” 땅의 너비를 재어보았다.


    샤를빌에서 샤를루아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던가. 전쟁이 일어나 학교가 문을 닫은 그 몇 달 동안, 들라에와 함께 담배를 사러 몇 번이나 벨기에에 갔던가.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아무 소득 없이 파리에서 몇 번이나 돌아왔던가. 그러고 나서 몇 번이나 마르세유나 이탈리아 등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던가. 마지막으로 사막의 길(제일라에서 하라르까지의 길, 그리고 1885년의 대상(隊商))을 몇 번이나 걸었던가.


    그는 늘 매번 걸었다. “난 그저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는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이었다.

    걸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하다. 그의 가슴속에는 그 출발의 외침이, 그 격렬한 환희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자, 모자여, 외투여, 두 주먹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나가자.

    자, 길을 떠나자!

    자, 가자!


    그는 걸었다.

    떠나서 걷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하다. 분노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먼 바다가 부른다거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거나, 보물이 유혹해서 걷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도 가슴속에서 격심한 고통이 느껴져서 걷는 것이다. 여기 이곳에 있다는 고통이, 그냥 가만히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산 채로 묻힐 수는 없다는 절박함을 뱃속 깊숙한 곳에서 느낀다. 그는 하라르의 높은 산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이 사는 곳은 날씨가 나빠요. 당신들이 사는 곳은 겨울이 너무 길고 빗방울이 너무 차가워요. 하지만 우리가 사는 아비시니아에서는 그 같은 불운과 그 같은 권태, 그 같은 부동성조차도 불가능해요. 읽을 것도 없고, 말을 나눌 사람도 없고, 벌 돈도 없으니까요.”


    여기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하루 더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견딜 수가 없다”떠나야 한다. “자, 출발이다!” 태양을 향해 가는 길이라면, 더 많은 빛을 향해,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환한 빛을 향해 가는 길이라면 어떤 길이든지 좋다. 아마도 더 나은 길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서 멀어질 수는 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하다. “구멍 난 호주머니에 두 주먹을 집어넣고.” 더 이상 여기 있지 않으려면 도로를, 산책길을, 오솔길을 걸어야만 한다.


    이곳이여 안녕, 난 어디든지 가려니.


    걸어야 한다. 나는 랭보의 시를 읽으면 그가 마치 도망치듯 걷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걸으면서 느껴지는 늘 앞질러 간다는 그 심오한 즐거움, 걷고 있는데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됐다, 이제는 떠났다. 피곤하고 기진맥진하고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렸다는 데서 또다시 한없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우리의 모든 옛이야기와 그 진력나는 중얼거림은 꼭 길을 망치로 두들기는 듯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에 덮여 들리지 않는다. 녹초가 될 정도의 피로는 모든 것을 다 파묻어버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왜 걷는지 그 이유를 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걷는다. 떠나기 위해 걷는다. 만나기 위해 걷는다. 다시 떠나기 위해 걷는다.


    랭보는 1891년 11월 10일에 숨을 거두었다. 막 서른일곱 살이 된 때였다. 콩셉시옹 병원의 사망확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샤를빌 출생, 마르세유에 일시 체류.’

    일시 체류. 그는 떠나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견유주의자의 발걸음

    정말로 걷는 것처럼 걸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견유학파 철학자들뿐이다. 그들은 항상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배회하고 어슬렁거렸다. 마치 개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늘 길 위에 있었다. 항상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광장에서 저 광장으로 옮겨 다녔다.


    사람들은 걸음걸이와 생긴 모습을 보고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양쪽 어깨에는 담요와 망토, 그리고 지붕으로도 쓰이는 두꺼운 천 조각을 걸쳤으며, 별 가치 없는 물건들이 들어 있는 바랑을 허리에 찼다. 그들은 너무 많이 걸어서 신을 사 신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의 발바닥이 곧 가죽 바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들은 샌들을 신었다. 중세의 순례자들도 그들처럼 걸었지만, 탁발 교단 설교사들은 그보다 훨씬 더했다. 하지만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발하고 불안하게 만들기 위해 걸었다. 이들은 설교의 기술이 아니라 독설의 기술을 구사했다. 그들은 말을 사용하여 모욕하고 충격을 주고 공격했다.


    그들은 겉모습 외에도 언어로도 구분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고 하기보다 ‘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말은 거칠고 공격적이다. 며칠 동안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이 광장으로 가서 거기 모인 군중들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아야 한다. 광장에 모여든 군중들은 이들의 맹렬한 독설을 들으며 즐거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막연히 불안해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퍼붓는 독설의 대상이 되어 자신의 습관과 행동, 확신이 문제시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학문적인 논증이나 도덕에 관한 장광설은 아니다. 견유학파 철학자는 짖는다. 짧게, 그러나 끈질기게 낑낑대는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연이어지는 독촉이고, 종잡을 수 없이 퍼부어지는 신랄한 빈정거림이며, 터져 나오는 저주다.


    일체의 타협과 결혼, 위계(位階)의 존중, 강한 물욕, 이기주의, 남들에게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 비열함, 습관, 악덕, 탐욕 등의 관습이 야유받고 조롱당하고 진흙탕 속으로 끌려간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독설의 대상이 된다. 방랑의 상황에서부터 모든 것이 고발당하고 비난받고 웃음거리가 된다.


    견유주의 철학은 방랑의 외관을 훨씬 넘어서는 걷는 자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길고 긴 여행에 내재하며 일단 도시에 들어가면 체험의 차원에 따라 다이너마이트처럼 위험해지기도 하는 체험의 규모에 따른다.


    견유학파 철학자는 말한다. 땅이 나의 영토이므로 나는 그 어떤 대지주보다 더 부자다. 나의 소유지에는 경계가 없다. 나의 집은 다른 그 어떤 집보다 더 넓다. 아니, 내가 원하는 만큼 집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암벽마다 후미진 곳이 있고, 야산마다 움푹 파인 곳이 있다.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식량과 독주(毒酒)를 저장해놓고 있으며, 샘물도 맘껏 마신다.


    견유학파 철학자는 또한 경계라는 것도 모른다. 자기 집 어디에서나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시민이라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모든 걸 다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기본적이며 꼭 필요한, 날것 같은 외부의 세계가 한없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상으로서의, 미래의 계획으로서의, 조정하는 이념으로서의, 세계의 허구로서의, 약속으로서의 범세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집을 떠남으로써 완벽하게 실현된다. 견유학파 철학자는 그 어느 것에도 매달리지 않고,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그는 도발적인 건강과 무한정 나눌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과시한다. 그런데 그대는 어디에서 와서 이렇게 가르친단 말인가? 나는 세계시민이며, 밖에서 당신에게 말합니다.


    날 보세요. 난 집도 없고 고향도 없고 재산도 없고 시중 들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잠은 땅바닥에서 잡니다. 나는 오직 땅과 하늘, 낡은 외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고 넓은 집도 없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내게 부족한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난 슬프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습니다. 그러하니 나야말로 자유롭지 않습니까? -에픽테토스, 「견유학파 철학자의 초상」, 『담화록Diatribai』



    자유

    걷다 보면 너무 피곤해져서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너무 아름다워서 영혼이 동요하게 되며, 산꼭대기에서는 너무 도취하여 몸이 폭발한다. 걷기는 결국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그 반항적이고 근원적인 부분을 일깨운다. 우리의 욕구는 거칠어지고 일체 타협하지 않으며, 우리의 충동은 영감을 얻는다. 걷다 보면 생명의 축(軸)에 수직으로 맞서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발밑에서 솟아나는 급류에 휩쓸려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만나려고 걷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자신을 재발견하고 오래된 소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린 정체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걷다 보면 어떤 사람이 되어 하나의 이름과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싶다는 유혹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된다. 각자가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사교계 파티나 정신과 진료실에서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은 우리를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의 초상에 충실해야만 한다고 속박하는 사회적 의무가 아닐까?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어리석은 거짓이 아닐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걸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걸어가는 몸은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냥 태곳적에 시작된 생명의 흐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두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짐승, 키 큰 나무들 사이의 순수한 힘, 한 번의 외침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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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