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스미스의 도덕철학 강의를 구성하는 4개 주제인 ‘자연종교’, ‘윤리’, ‘법학’, ‘정치경제학’ 가운데 2번째 주제인 윤리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맥락에서 자유롭고 조화로운 경제원리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덕성’에 대한 탐구를 주제로 한다.
도덕철학 강의의 4번째 주제인 ‘정치경제학’이 최초의 체계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서로 유명한 『국부론』이다.
저자 조현수 교수는 독일 마부르크(Marburg) 대학에서 칼 맑스의 정치경제학 및 철학을 주제로 연구 활동을 전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치경제학의 선구자인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접하게 되었고,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시대적, 사상적 배경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는 작업으로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주제로 한 저술을 완성하였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한 『도덕 감정론』은 인간의 도덕감정만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며 상업사회의 도래라는 18세기 스코틀랜드 사회의 사회경제적 변화라는 역사적 발전을 감지하고 이 과정에서 초래되는 성품과 그 성품이 가지는 사회경제적인 효과에 대한 종합적인 탐구이다.
이 책은 애덤 스미스가 서술한 1차 자료와 방대한 2차 자료를 섭렵하여 작성한 본격적인 학술이론서로서, 모두 9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이 책의 서론으로서, 자유방임주의자로 오해받는 애덤 스미스의 진 면목을 밝히고자 하는 저자의 문제의식과 함게 논의의 배경을 소개한다.
2, 3장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을 저술하게 된 사회적 배경 및 사상사적 맥락을 검토한다.
4장에서 8장에 이르는 부분은 『도덕 감정론』의 논리 전개를 구성하는 개념들을 1차 자료와 다양한 2차 자료를 인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상업사회의 타락을 초래하는 ‘허영’, ‘우월함, 존경, 인정에 대한 욕구’를 극복하기 위한 미덕으로 ‘신중’이 제시되며 여러 미덕이 상호작용하면서 인간 사회를 자연발생적으로 조화롭고 자유롭게 유지하는 기제가 작동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논리전개 구조를 분석한다.
9장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이 시대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상호 영향을 미치면서 완결성을 더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자유방임주의의 옹호자로서 새롭게 호명되고 있는 애덤 스미스의 진면목을 18세기 중상주의 비판에서 논의를 전개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밝혀 보고자 한 저자의 문제의식이 제시된다.
■ 저자 조현수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독일 Marburg대학에서 정치이론, 정치사상 그리고 정치경제학 연구.
동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국민대학교 연구교수 및 초빙교수 역임.
논문으로는 「칼 폴라니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기획과 진화’: ‘자유’의 실현방식이라는 차별적 관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정치이론에 관한 소고」, 「맑스에 있어서의 언어와 정치: 언어의 이데올기성, 계급성 및 정치담론을 중심으로」, 「‘노동’과 ‘잉여가치’ 생산의 관점에서 본 Karl Marx의 ‘권력’ 개념」, 「『정치경제학비판』의 사회적 소통구조에 관한 일고찰: 범주 - 상품, 화폐, 가치 그리고 자본 - 분석을 중심으로」, 「애덤 스미스와 ‘공감’의 정치」, 「소통담론의 관점에서 본 애덤 스미스의 ‘도덕’과 ‘정치경제학’: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텍스트분석」,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나타난 스미스의 정치이론에 관한 소고」 외 다수. 저서로는 『이기적인 개인과 공감적인 도덕』, 『맑스와 자본: 휴머니스트 칼 맑스(Karl Marx)의 자본주의비판』, 외 다수의 공저. 역서로는 『현대정치이론』, 『맑스와 정의: 자유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 그리고 『정치학: 현대정치의 이론과 실천』 등이 있다.
■ 차례
1장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
2장 공감: 소통, 배려, 역지사지의 정치
3장 도덕철학
4장 선행, 정의, 그리고 신중
5장 "장기적" 자기이익과 자생적 질서
6장 관대함, 자기제어, 고결함, 그리고 자기애
7장 자기제어와 관대함의 한계
8장 선행
9장 도덕과 정치경제학a
‘보이지 않는 손’으로 널리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사상적 기초를 소개합니다. 만인의 복리 증진을 위한 ‘자연적 자유체계’를 구상한, 자본주의 경제학의 시조인 그의 사상적 근원과 만나보세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애덤 스미스는 시장경제 옹호자, 하지만 자유방임주의자는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회자되고 있는 인물 애덤 스미스, 그것은 아마도 ‘국부론’이 자본주의 사회의 유지와 발전,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화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의 ‘도덕감정론’을 대하다보면 자본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최대이윤과 창출 혹은 자본축적 및 자본증식과는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오히려 스미스는 인간 허영심의 발로인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인간의 행복이란, 부와 권력 추구에 있지 않고 마음의 평온에 있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로서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인간으로서의 그의 존재근거와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사실 스미스의 사상은 국부의 증대보다는 상업적 근대성에 관한 논의, 즉 상업사회가 가져다주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병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의 공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광범하고 탄력적인 범위의 정부활동을 이해했고, 정부의 권한과 공공정신의 기준을 개선함으로써 정부활동에 대한 더 넓은 범위의 책임을 부여했다. 즉, 그는 자유방임주의에 기반한 ‘최소 국가론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의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사물들의 진행을 방임하라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사물의 자연적 과정’에 임의적 자의적 강제적 간섭을 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의 바탕에는 인간행위의 도덕적 적정성이 놓여 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우산 판매자가 그 상황을 알고 폭리를 취한다면, 이것은 수요와 공급에 의한 가격결정이며 그래서 정당하고 공정한 가격결정인가? 스미스는 ‘불공정한 가격’이라고 답할 것이다. 스미스의 표현을 빌라면 ‘자연적 자유체계’의 ‘사물의 자연적 과정’을 위배하는 행위다.
‘국부론’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 그가 경제에 대한 국가불간섭을 주장한 가장 큰 이유는 중상주의에서 나타나는 국가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간섭과 특정한 사회계급의 이익을 위한 행위 때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중상주의는 상인과 제조업자에게만 특혜를 주는 정책을 향했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전달하고자 한 핵심적 내용은 더 큰 국부의 증대를 위한 바람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인간’에 대한 바람이었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개념은 그 바탕에 항상 도덕적 적정성을 내포한다.
상업사회의 타락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공감”과 “공정한 관찰자”: 정치질서와 사회질서의 도덕적 토대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누구나 타인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미스에 따르면, ‘탁월함에 대한 사랑’과 결부된 인간의 ‘존경’과 ‘인정’을 향한 갈망은 상업을 고무하는 열정임과 동시에 상업적 타락의 근원이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의 출발점을 ‘공감’으로 설정한다. 공감은 인류에 대한 사랑, 호의, 그리고 기꺼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마음과 공명한다. 공감을 토대로 한 개인의 판단은 그 개인에게 동기부여를 하게끔 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자율성을 주시하고 판단과 동기부여를 위한 사회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따라서 이 과정은 결국 기능주의적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스미스의 인간행동에 관한 이론은 개인과 개인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이 상호작용의 과정에서 공감은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어떤 행위에는 공감하고, 또 다른 행위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고 불쾌감을 표시한다. 그렇다면 공감하고 공감하지 않는 것에 대한 판단은 무엇을 기준으로 누가 내리는 것일까? 스미스는 인간 행위의 인정과 불인정, 그리고 적정성과 비적정성의 심판관으로서 ‘가슴 속에 있는 인간’인 ‘공정한 관찰자’를 도입한다. ‘도덕감정론’은 도덕적 판단에 대한 ‘공정한 청강생’보다는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로서 그의 행위가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정한 관찰자의 ‘인정’이 필요하다. 이 관찰자의 존재는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판단하는데 필수적이다.
물론 공정한 관찰자는 인간행위를 시인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현실적인 구경꾼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하나의 창조물이다. 사실 공정한 관찰자는 인간 그 자신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우리가 상상하는 공정한 관찰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도록 노력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상상으로 형성된 공정한 관찰자의 관점을 지향하게 된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배경에는 상업사회의 타락 또는 부패의 그림자가 있다. 그는 이 타락을 그의 도덕철학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그에게 인간 상호작용에 기반한 행위의 적정성은 상업사회의 타락을 예방하고 소통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나아가 스미스가 염원하는 정치사회는 한 개인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아니며, 역지사지로 상업적 근대성이 초래하는 상업적 개인주의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초월하여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정치공동체인 것이다. 그가 공감과 더불어 공정한 관찰자 개념을 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정치공동체의 건설에 있었다. 인간에게 하나의 정치적 이상주의가 없다면, 그 사회는 눈앞에 보이는 자신들의 허영과 이기심을 좇아 허덕이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일상일 것이다`.
공리주의, 의무론 그리고 덕윤리학
공리주의와 의무론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
‘효용’을 기반으로 인간행위나 사회제도를 평가하는 공리주의는 사람에게 쾌락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그리고 어떤 행위나 사회제도가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다고 본다. 반면 의무론은 행동의 결과보다 행동이 어떤 의무 준칙에 상응하는지에 주목한다. 의무론에서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곧 ‘의무’이다.
반면 ‘성품’에 주목하는 ‘덕윤리학’은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내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치환한다. 다시 말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도덕준칙과 효용의 극대화라는 관심에서 벗어나 성품의 함양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상업사회의 병폐의 적절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덕윤리학적 접근을 사용한다.
스미스는 상업사회의 한 중요한 병폐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덕윤리학이라는 접근법을 채택했고, 나아가 이 접근법으로 덕윤리학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종합할 가능성 혹은 심지어 필연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루소는 상업적 자유주의는 미덕과 양립할 수 없는 효용 극대화와 자기 권력의 집중 및 강화를 촉진한다고 봤다. 스미스는 이러한 결과들을 야기하는 어떤 형태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미덕에 유해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초래하는 타락과, 미덕을 촉진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개념화를 구별한다.
스미스의 전체 저작들을 놓고 종합해보면, 스미스는 자유 개념이 자유방임적 관점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는 상호작용과 상호의존 속에서’, ‘관계성’을 가지고 ‘개인의 자유를 사회조화라 목적에 이바지하는 변화와 발전’과의 조화라는 관점을 고려할 때, 개인과 사회의 조화로 발현되는 자유가 아닌가 한다. 나아가 그가 사회 불평등을 인정하면서도 부의 불공정한 배분을 인간의 도덕감정을 해치는 원인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의 ‘자연적 자유체계’가 담고 있는 의미를 감안하면, 비록 그가 시장에 초래하는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자유지상주의적 자유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행(beneficence) 정의, 그리고 신중(Prudence)
스미스는 그의 모든 저술들에서 이기심, 탐욕, 그리고 억제되지 않는 개인적 이득의 추구 등을 결코 미화하지 않았다. 그의 도덕적, 법적, 그리고 경제적 사상의 목적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기 이익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정한 제도적 틀을 고안하는 데 있다.
개인의 도덕적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의 ‘적정성’이다. 스미스의 적정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과 관련이 있으며, 공감의 심리적 과정과 공정한 관찰자 개념은 적정성의 기능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덕성스러운 사람을 ‘완전한 신중, 엄격한 정의, 적절한 선행의 준칙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물론 그는 이러한 감정들의 실천이 ‘자제’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다.
스미스는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선행과 정의라는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선행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강제될 수 있는 도덕적 감정이 아니다. 선행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며, 국가가 강요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선행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위임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 폭력을 통해 준수할 것을 강요받고 이행해야만 하는 미덕이 있다. 이 미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당사자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정의가 바로 이러한 종류의 미덕이다. 정의는 개인의 자기이익이 더 이상 확대될 수 없는 ‘제한’, 또는 ‘경계선’을 지시한다.
사회를 유지하는 힘인 스미스의 정의 개념은 그 구체적인 외연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현상들에 적용된다. 그래서 특혜와 자의적이고 강제적인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하고 명백한 자연적 자유체계’의 건설은 ‘국부론’의 주요한 정책주제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구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지금 인용하는 문장일 것이다.
“…특혜를 주거나 제한을 가하는 모든 제도가 완전히 철폐되면 분명하고 단순한 자연적 자유의 체계가 스스로 확립된다. 이 체계 밑에서 모든 사람은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완전히 자유롭게 자기 방식대로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근면, 자본을 바탕으로 다른 누구와도 완전히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다.”
이것이 스미스가 말하는 ‘자연적 자유체계’이며, 이는 곧 ‘사물의 자연적 과정’이다. 또한 스미스는 노동자의 곤경에 공감을 보인다. 그는 적어도 공정한 사회, 혹은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어느 사회라도 그 구성원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비참하다면 번영하는 행복한 사회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의 의식주를 공급하는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노동 생산물 중 자기 자신의 몫으로 그런대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어야 또한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미스는 ‘신중’을 상업사회의 타락을 교정하는 미덕으로 간주한다. 스미스는 ‘상업사회에 대한 맨드빌의 자기만족적인 수용’과 ‘루소의 열렬한 거부’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신중으로 제공한 것이다. 상업사회에서 스미스의 도덕적 계몽이 어느 정도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지는 몰라도 그의 상업사회의 타락에 대한 교정책으로 가지는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스미스의 입장은, 신중이라는 미덕으로 칭찬에 대한 애호, 존경에 대한 애호, 그리고 찬사에 대한 애호를 조정하는 것이 상업적 인간들이 접근할 수 있는 ‘행복을 획득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 또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아마도 신중을 통한 도덕적 계몽이 상업사회의 타락을 교정할 수 있는 ‘파레토 최적’이라고 간주했을지도 모르겠다.
“장기적” 자기이익(Self-interest)과 자생적 질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자기이익적 인간들이 도덕적 영역에서 평화롭게, 그리고 경제의 영역에서 생산적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하려는 상호보완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국부론’은 인정사정없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신중의 일반적인 지도 하에 상업적 미덕들을 권고하는 데서 스미스의 목적은 단지 욕구의 달성을 위해 획득물에 더 효과적인 도구들을 갖추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획득물의 물질적 장점과 이것이 초래하는 병폐 모두를 인식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 욕구를 가장 잘 추구할 수 있는 수단을 가르치기보다는 욕구 그 자체를 형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신중이라는 덕목은 ‘단기적’ 자기 이익을 ‘장기적’ 자기이익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도한다. 여기에서 신중이라는 미덕과 자기 이익 개념이 결합하는데, 이 결합의 가장 큰 목적은 신중이 인간으로 하여금 목전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장기적인 자기 이익을 추구하게끔 조절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스미스의 신중 개념은 ‘이성과 오성’, 그리고 ‘자기제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만들어진 미덕이다. 즉, 스미스의 신중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목표는 개인과 사회에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이익을 초월해 더 심오한 이익의 재발견을 초래하는 지기이익에 대한 재고를 유발하는 데 있다.
한편 스미스가 오늘날 ‘자생적 질서’ 혹은 ‘자기조정적 기제’로 해석되는, 일반인들에게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경구를 많이 사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이 경구를 단지 3번만 사용했다.
스미스가 사용한 이 경구는 자기이익적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사회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초래하는 과정과 연관된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근거로 자생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그를 해석하는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자생적 이론가들의 입장은 개인을 ‘홀로 내버려두는 것’ 그리고 오로지 개인의 자율적 행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스미스 또한 상업사회의 경제활동에서 인간의 자기이익을 강조한다. 하지만 스미스가 말하는 자기이익은 신중과 관련하여 논의한 ‘장기적’ 자기이익에 대한 배려를 감안해볼 때, ‘계몽적’ 자기이익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스미스는 사회의 전체구성원들에게 복지와 정의, 그리고 부의 공정한 배분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경제 질서는 ‘번영하고 행복한 사회’로 이끌 수 없다고 봤다. 그에게 가장 높은 덕목은 인간의 공감적 본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타인의 복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즉, 스미스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각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을 초월하여 ‘계몽적’ 자기이익을 제공하는 ‘강제없는 강제’, ‘암묵적 강제’로 작용하는 소통 기제인 것이다. 이 기제는 인간 본성에서 유라하는 도덕 감정에 기초한 ‘사물의 자연적 과정’이다. 스미스에게 이 손은 한 사회의 정의와 자유를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즉, 스미스의 입장은 ‘소극적’ 자유 혹은 신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자유주의를 초월한다 하겠다.
자기제어(self-command)와 관대함의 한계
스미스는 ‘완전한 신중, 엄격한 정의, 적절한 선행의 준칙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완전하게 도덕적인 사람’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준칙들은 잘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행동과 실천으로 어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에 이 준칙들을 위반하기도 한다. 완전한 적정성 속에서 도덕적인 존재로 행동해고자 한다면, 이를 위한 실천적 미덕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자기제어’라는 덕목이다.
스미스는 “준칙들은 아무리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자기제어’가 없다면, 각각의 준칙은 ‘자신의 책무’를 행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자기 선호의 극복을 위해 ‘자기제어’라는 미덕 또한 필수적이다. 그에게 자기제어라는 미덕은 ‘그 자체로서 위대한 미덕’이며, ‘다른 모든 미덕들이 광채를 발휘하도록 하는 근원’이다.
스미스는 상업적 타락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영웅, 정치가, 입법자의 자기제어, 고결함, 관대함이라는 정치적 위대함에 기반하여 근대성과 이 덕목들을 결합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개인들의 경제적 이익 추구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업적 타락을 전체를 위해 봉사하는 ‘정치적 위대함’속에 내포된 덕목들, 즉 관대함, 고결함으로써 교정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관대함이 초래하는 비극이 있다. 관대함의 발휘에서 나타나는 눈부심이 관대한 사람과 관대함을 지켜보는 관찰자 모두로 하여금 가치를 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대함으로서의 전환이 부자와 권력자에 의해 통속화된 관대함에서 도덕적 가치 개념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로 정당화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역설적인 결점’일 수 있다.
스미스가 관대함의 역설적인 결점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 다시 말해 관대함을 설명하는 데서 그가 지향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는 진실한 관대함과 잘못된 관대함을 구별하게끔 관찰자들을 훈련시킴으로써 그리고 진실한 관대함이 ‘가치’와 ‘응분’을 구성하는 미덕들에 입각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이 관대함의 범주를 다시 도입하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제어가 ‘정의와 선행의 명령에 따라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위험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정의와 선행의 명령에 따를 때, 위대한 미덕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미덕들의 광채를 배가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때로는 매우 다른 동기들에 의해 인도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이것들은, 비록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하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위험할 수 있다.”
스미스에게 관대함은 인간의 자연적인 심리적 성향에 의존한다. 즉 인간은 일반적으로 위대함에 대한 찬사가 강하기 때문에 선한 것보다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더 갈망하며, 위대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악함이 수반될 수 있다.
선행
관대함의 결점에 대한 스미스의 교정책은 ‘선행(beneficence)’의 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관대함에 대한 스미스의 탐구는 개인과 상업사회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문제와 탁월한 개인의 영혼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동시에 드러내 보였다. 선행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 대립적인 갈망을 조화시키고자 하며, 나아가 위대함과 선함 모두를 달성하는 길을 모색한다.
스미스는 이 문제의 필요한 교정책으로 ‘선행’을 제시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윤리적 전통에 호소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적 미덕’이다. 스미스 체계에서 기독교 미덕의 공식적인 기능은 상업적인 전통과 고전적인 전통의 미덕들을 보충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 실질적인 기능은 ‘사랑(caritus)’이라는 미덕으로 칭할 수 있는 것과 ‘돌봄(care)’이라는 미덕으로 칭할 수 있는 것 간에 가교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신의 창조물 모두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어 궁극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돌봄’은 동정, 연민, 그리고 부가적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감정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교화하고 재확립하고자 하는 윤리에 들어 있는 한 범주다.
라파엘에 따르면, “스미스의 의도는 ‘사랑’ 혹은 ‘선행’이라는 기독교적 미덕을 자기제어라는 스토아적인 미덕과 대비하는 것이었고 그것들을 미덕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에서 동등한 동반자로 설립하는 것이었다.”
스미스가 ‘사회적 열정들’과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로 칭하는 미덕으로서 ‘선행’은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협동’을 의미한다. 호의, 우정, 사랑, 조화, 사회성, 대화, 평범한 사람들의 공감과 모든 ‘유쾌한 열정들’은 일상생활에 포함된 ‘선행’을 바라보는 그의 갈망을 진술한다.
스미스에게 중요한 요소는 ‘적정한 동기’와 ‘자비로운 행위’이다. 부적정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자비로운 행위, 예를 들어 자기 이익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그 동기가 적정하지 못한 행위로 선행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선행은 ‘항상 자유로운’ 혹은 자발적인 미덕으로, 스미스에게 선행은 모든 미덕들의 근간을 이루는 미덕으로 작용한다. 자비, 관용, 우정에서 드러나는 고결한 선행은 자기선호를 극복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애를 고양하고자 하는 더 원대한 계획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한편 연민이나 동정심은 미덕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며, 신중하지 못하고 경솔한 연민이나 동정심은 그 사회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적정한 선행’을 지닌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이다. 스미스는 ‘적정한 선행’의 화신으로 ‘지혜롭고 유덕한 사람’을 언급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지혜롭고 유덕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계층이나 사회의 공적 이익을 위해 항상 자신의 사적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미스는 ‘지혜롭고 유덕한 사람’ 관념을 통해 단지 동점심이나 선행에 호의를 가진 사람과 전체의 선을 위해 자기이익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실천적 사람 간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 지혜롭고 유덕한 사람이란 결코 득의만만해서 정말로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거만한 태도로 깔보는 일이 없고, 자신의 공과는 매우 겸허하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공과는 충분히 인식하는 성품이다.
결국 지혜롭고 유덕한 사람은 왜곡된 ‘자기애’를 추월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공과와 탁월함을 인정하고, 그 자신도 대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우월한 탁월함을 갖고 있더라도 그는 자신을 대중과 동등한 자격을 지닌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닌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한 공동체에서 ‘차이와 인정의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한다. 이 실천을 통해 그는 연민을 가진 사람의 효력없는 감상주의와 관대한 사람의 오만과 무관심 모두를 극복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의 자비심은 ‘적정한’ 선행으로 표출된다.
도덕, 습관 그리고 관습
인간은 고립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생명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존속했을 때, 함께 모여 행동했다. 즉 인간은 천성적으로 사교적이고 인간본성은 사회적이다. 이러한 사교적 혹은 사회적인 특성의 발전은 ‘사회의 습관’에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습관화의 결과 생겨난 기대감의 안정은 우리와 타인의 관계를 확장한다. 이념과 관례들은 관습으로 일반화된다. 즉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관계적인 기대감과 관계들이 국민 사이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회화의 토대, 혹은 시간을 통한 습관화 그리고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한 개인의 토대다. 각 개인의 능력 부족을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보충하며, 그래서 인간은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여기서 상호의존성 관념이 발전한다.
스미스에게 개인들 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없다면, 인간은 ‘공감’이라는 도덕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 상호작용은 개인들에게 혜택을 가져다준다. 나아가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대하는 그런 눈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는 대하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대하게 만든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는 하나의 ‘거울’인데,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평가할 수 있다.
시장과 가격
시장과 가격의 기능에 관한 스미스의 관점은 곧 경제과정에 행해지는 정부의 묵인, 혹은 특정계급, 즉 상인의 이익을 위한 정부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개입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한 특정계급의 이익을 국민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경제 과정에 대한 정부 개입 반대가 곧 자유방임적 경제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미스가 경제과정에 대한 국가개입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며, 그 개입이 ‘자연적 자유체계’에서의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스미스는 독점가격에 대한 결단코 반대하며, 이런 독점가격에 대해서는 국가가 ‘자연적 자유체계’의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자연적 자유체계”와 정부의 기능
스미스가 정의를 유지하는 데서 정부 활동이 자연적 질서의 한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점, 그리고 그 활동이 ‘자연적 자유체계’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적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도 각각의 개인들이 자유, 생명, 재산, 즉 자신의 권리들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정부의 기본적 의무다.
스미스가 국가 의무로서 공공부문 활동을 언급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것으로, 자유방임주의자로서의 스미스는 아닌 것이다. 그는 도덕철학자면서 동시에 ‘사회개혁가’였다. 정부활동과 관련한 스미스의 관점을 간단히 도식화하면 이렇다. 정부활동이 사회구성원 전체의 보편적인 복지를 촉진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고 유쾌하다. 반면에 정부활동이 사회의 일반적 이익을 해친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정부개입이 그 성격상 사적 기업을 위해 지정된 분야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자유방임주의는 ‘국부론’에는 없다. 스미스는 국민의 일반교육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주장하고 지지한다. 그는 특히 분업으로 노동자가 정신적으로 황폐화되어 발생하는 사회적 병폐를 교정하기 위해 교육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정부나 정치에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을지는 몰라도 정부활동에 관한 스미스의 견해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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