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정리되는 그리스철학 이야기
 
지은이 : 이한규
출판사 : 좋은날들
출판일 : 2014년 06월




  • 철학의 탄생부터 헬레니즘 철학까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철학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1000년 이상 지속된 그리스 철학자들의 지적 모험을 가득 담았습니다.


    단숨에 정리되는 그리스철학 이야기

    철학의 탄생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그리스철학은 왜 일찍부터 발전했을까?
    그리스철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하여 고대 로마에까지 계승된 철학을 말하는데, 탈레스가 활동했던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가 폐쇄된 6세기 초까지 대략 천여 년에 걸쳐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서양 인문학의 뿌리이자 서양인들의 정신적 고향입니다. 서양의 문화와 예술, 사상, 과학은 모두 고대 그리스철학이라는 뿌리에서 자라나 무성한 가지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서양 인문학의 근원과 그들의 정신을 이해하려면 고대 그리스철학을 비켜갈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황허처럼 고대 문명의 직접적인 발생지도 아니었던 그리스에서 최초의 철학이 뿌리를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고대 그리스철학이 처음 생겨나고 눈부신 발전을 이룬 데에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어떤 조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의 자연이 시각의 문화를 만들다
    먼저, 그리스의 자연환경이 철학에 미친 환경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긴 산맥들이 땅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작고 폐쇄적인 무수한 계곡과 고원들, 그리고 바다와 접해 있는 반도에는 수많은 만과 정박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와 함께 에게 해에 퍼져 있는 섬들에는 땅과 바다의 대립적인 요소들이 오랜 세월 그곳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리스인은 아름다운 빛의 세례를 받으며 온화하고 따사로운 기후를 누렸지요.

    변화가 많은 지형과 맑고 투명한 날씨는 그리스인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는데 바로 ‘시각의 문화’입니다. 시각의 문화란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말합니다.

    그리스인에게 아름다움이란 입체적인 형식과 균형 잡힌 선들, 그리고 조화로운 모습을 가진 것을 의미하지요. 그들이 조각과 건축에서 독보적이며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문화 때문입니다.

    시각의 문화는 예술의 영역에서만 돋보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철학과 과학이 왜 고대 그리스에서 발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아침에 동트기 직전 어둠이 세상을 감싸고 있을 때, 사물들은 불투명해 그 모습을 잘 볼 수 없습니다. 이윽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서 희미했던 사물들은 모습을 드러내어 명확한 자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스인에게 ‘진리’란 이렇듯 어둠에 숨어 있던 희미함이 빛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았거나 불분명한 것들을 밝혀내려는 기질이 강했습니다. 그 같은 성향이 궁금증을 해결해 내고야 마는 탐구 정신을 낳았고, 과학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도시국가의 개방적인 토론 문화
    고대 그리스인이 철학이라는 학문을 발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정치적인 자유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학문이 발전하기 어렵지요.

    학문은 그 어떤 권위로부터도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경우에만 발전하는 법입니다. 현대의 학문이 발전한 나라들은 모두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다수 시민들은 아고라에 모여 장도 보고 그날 있었던 이야기도 나누곤 했습니다. 여론이라는 게 이곳에서 생겨났지요. 그들은 아고라에 모여 정치를 논하고, 토론을 즐겼습니다.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말이지요.

    아마 밥보다 토론을 더 좋아하는 민족은 그리스인 말고는 그 유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방적인 토론 문화가 철학을 탄생시킨 요인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밀레토스학파, 철학의 씨를 뿌리다
    밀레토스는 기원전 1000년 경, 크레타 섬과 그리스 본토, 그리고 그리스 연합군에 함락된 트로이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도시입니다. 밀레토스는 바다에 접해 있으면서도 강을 통해 내륙으로 갈 수 있어 중계무역과 해운업이 발달했습니다.

    당연히 밀레토스는 수많은 상인들이 드나드는 국제 무역도시가 되었습니다. 원래 무역도시는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학문이 교류하게 되지요. 오늘날 런던이나 뉴욕처럼 밀레토스도 새로운 문화와 학문이 자유롭게 유통되었습니다.

    밀레토스 사람들은 부가 쌓이면서 종교적인 신비주의보다는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건축술, 자연과학, 천문학 그리고 항해술에 대한 연구가 자연스럽게 발전했습니다. 이 지역의 높은 과학 수준은 당시의 건축물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밀레토스를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만든 것은 그들의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탈레스가 ‘최초의 철학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계의 근원(아르케)에 대한 물음에 합리적인 대답을 제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학 지식으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물론 그의 말은 철학적으로 이해해 보면 전혀 우스갯소리는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탈레스의 학설이 잘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설명을 부연해 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철학은 단순히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엄격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탈레스의 주장은 그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상상의 산물은 어떤 논리적 근거를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지만, 철학의 산물은 논리를 통해 증명이 가능한 그 무엇이어야 합니다. 탈레스는 당시 이집트와 중동 지역에서 발달한 과학 지식과 그리스인들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물’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탈레스는,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 속에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을 거라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은 도대체 뭘까요?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자연의 여러 개별적인 현상들을 관찰하였을 것이고, 물은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요소라는 답을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그에게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었을 테지요. 


    그리스철학의 황금기가 펼쳐지다
    소크라테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소피스트란 몸을 파는 남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돈 때문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판다. 사람을 속이기 위해 말을 하고, 벌이를 위해 글을 쓴다. 어떤 사람에게도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테네의 유명한 장군인 크세노폰이 한 말입니다. 플라톤도 더하면 더했지, 크세노폰의 평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소피스트를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나 지식을 파는 행상인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퍼트린 말 때문이지요. 

    물론 소피스트들에게 행해진 비난과 경멸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소피스트들은 서양인들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폄하하는 것은 서양 철학사에 대한 플라톤의 영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소피스트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을 알려면 당시의 시대 상황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자신이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하였습니다. 그의 통치하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최고로 발전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토지 귀족들은 점차 쇠퇴해 가고 신흥 중산층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외되었던 ‘다중(데모스, demos)’이 정치적 발언권을 획득했습니다. 민주주의(demokratia)란 바로 ‘다중(demos)’이 ‘권력(kratos)’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수의 시민이 주인인 셈이지요. 시민은 누구나 도시국가 안에서 공동의 문제와 관한 발언권과 결정권을 공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또 그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결국, 민주주의 체제에서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한 가지뿐임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과 행동을 보여 그들이 나를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설득력을 갖추려면 우선 한 가지 능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웅변술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문제를 놓고 시민들과 공개적으로 토론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따르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하지요.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말솜씨를 발휘해 상대방을 스스로 내 견해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웅변술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배워서 익혀야 합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새로운 방식의 교육이 필요로 했습니다. 공동 결정에 참여해 내 의사를 관철시킬 훌륭한 말솜씨를 교육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시대의 요구에 맞는 새로운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그 이론을 실생활에 적용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소피스트(지혜를 가르치는 사람)라 불리는 교사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면서 젊은이들을 모아 교육에 관한 강연을 통해 대중 연설의 요령을 가르쳤습니다. 이들 소피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 무대는 단연 아테네였습니다.

    그들은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계몽주의자였습니다. 신 중심의 전통적 세계관, 관습에 입각한 사고방식과 사회적 제약에 대해 맨 처음 도전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신지식인들이었지요. 그런 이유로 그리스의 젊은 세대들은 소피스트에게 열광했습니다. 그리스 젊은이들은 웅변술을 배워 정치가로서 성공하고자 하였고, 그들이 가르친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델포이 신탁을 통해 무지를 깨닫다
    그리스인에게 델포이는 국가적 성지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거나 혹은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델포이 신탁에 의존했습니다. 델포이의 신탁은, 신탁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최고의 판관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를 자주 사용했고 또한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이 경구는 델포이 신전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씌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경구에 따라 자신을 알려고 했고, 그러한 노력이 그를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만 델포이의 신탁에 충실하라고 권한 게 아니라, 본인 자신도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이 성지의 충고가 자신이 갈 길을 알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지요.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에 들러 아폴론의 신탁을 청했습니다. 그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 신탁을 청하자, 예언자 퓌티아는 그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신탁을 전해 들은 소크라테스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아무런 지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탁을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왜냐하면 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당시 사회에서 신성모독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큰 죄였습니다. 카이레폰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에게 장난을 쳤을 리는 없었지요.

    신탁은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내려지는 것이기에,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숨은 의미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이름난 사람들, 이를테면 소문난 정치가, 시인 그리고 장인을 찾아가 대화를 나눠 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해본 결과, 그들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중의 무지’를 겪고 있음을 소크라테스는 간파한 것이지요. 즉,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보다 더 나쁜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들보다 더 지혜로웠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지혜에 속하는 지혜로움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를 소유한다는 것은 신들의 소관이며, 오직 신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지요.

    이처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가 내려 준 신탁은 정당하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크라테스는 사진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지식을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것입니다.


    그리스철학의 황혼, 헬레니즘 철학
    회의주의, 네 믿음을 의심하라
    무심한 철학자, 피론
    회의주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심’을 품습니다. 그렇다고 판단을 중지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판단을 중지하는 것은 의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지요. 사실, 철학은 의심을 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의심했고,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했습니다. ‘회의’를 통해 철학자들은 깨달음과 진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회의’를 철학의 모토로 삼았던 최초의 철학자가 피론입니다.

    피론이 가르친 철학의 핵심은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그것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물의 진실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으므로 사물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라는 것이지요. 피론에게 있어 판단, 즉 어떤 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고 하는 것은 혼란만 더할 뿐입니다.

    한편으로 본질과 동떨어진 채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쟁이 점점 거세지게 되지요. 그는 ‘판단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포게)’를 통해 ‘흐트러짐 없는 평온한 마음의 상태(아타락시아)’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그 밑바탕에 ‘의심’이 있는 것입니다. 피론은 한마디로 말해, 무심한 상태를 유지하는 삶을 바랐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무심한 철학자, 피론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가치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추한 것, 본질적으로 좋고 나쁜 것, 본질적으로 옳고 그른 것, 본질적으로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철 같은 건강을 유지하는 것과 심한 병을 앓는 것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무심한 그의 행동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아주 많습니다. 스승인 아낙사르코스와 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스승이 진흙구덩이에 빠졌을 때에도, 피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던 말을 계속 했다고 합니다. 잠시 후, 진흙으로 뒤범벅이 된 스승이 쫓아와 제자의 초연함을 칭찬했다고 하지요.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이상이나 인간, 진리 중 어느 것에도 신뢰를 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좌우명은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고, 피론의 제자 티몬이 말했듯이 “나는 사물의 원인에 대해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원인을 묻는 일 자체에도 관심이 없다.”는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회의주의, 진리에 이르는 도구가 되다
    피론의 제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티몬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듯이 피론 역시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티몬은 스승인 피론의 가르침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그가 쓴 글 중에서 『실로이』라는 책은 유명한 철학자들을 등장시켜 회의주의자 입장에서 그들 모두를 비판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아카데메이아의 학장이었던 아르케실라오스와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아테네의 아고라를 걷고 있떤 아르케실라오스에게 티몬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요. 이곳은 우리 자유인이 있는 곳인데.”

    “그럼 티몬, 당신은 왜 이곳에 와 있습니까?”

    “그대들이(플라톤주의자) 모두 나란히 있는 걸 보며 웃어 주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그리스 철학사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이즈음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주의자의 우두머리 중 한 사람이 회의주의 철학의 우두머리가 된 일입니다. 티몬이 사라진 후 회의주의를 이끈 사람은 아르케실라오스입니다. 앞의 에피소드에서 티몬에게 조롱을 받았던 장본인이지요.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서 피론의 회의의 세계로 넘어온 것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비해 아르케실라오스가 말하길, 우리는 그것조차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을 때, 그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의 내용을 모르는 것이지요. 다만 아르케실라오스는 피론이나 티몬과는 달리 진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의 회의주의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동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즉, 철학자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동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는 플라톤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회의주의를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근대 철학의 문을 활짝 연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을 ‘회의’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감각을, 심지어는 수학 명제까지도 의심하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지요.

    그러고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합니다. 그의 의심과 회의는 참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지요. 그 같은 철학적 방법론은 아마도 아르케실라오스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길 바랍니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 나의 생각은 진리이고 너의 생각은 아니다, 이런 독단적인 사고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발견됩니다. 우리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도 바로 독단론자들의 그릇된 신념이 큰 몫을 차지하지요.

    일례로 최근의 서방 시계와 아랍 세계 간 갈등은 독단이 만들어 낸 대결입니다. 지금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전쟁은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합니다. 그 같은 갈등과 대립은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양편 진영의 독단론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내 생각은 언제든 오류를 범할 수 있지요. 내가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하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니까요. 그걸 인정할 수 있다면, 이제는 대립이 아니라 대화가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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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