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심리 | ||||
지은이 : 귀스타브 르 봉 (지은이), 강주헌 (옮긴이) | ||||
출판사 : 현대지성 | ||||
출판일 : 2021년 08월 |
■ 책 소개
‘군중’이란 일반적으로 한자리에 모인 개개인의 집단을 의미하는데, 그 집단은 각각의 국적이나 직업, 성별과 상관없고 그들을 모이도록 한 우연한 계기와도 무관하다. 심리학적으로 ‘군중’이란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특정 상황에서 형성되는 개인의 무리는 그 무리를 구성하는 개개인과 무척 다른 특성을 드러낸다.
의식을 지닌 개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집단화되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한다.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매우 뚜렷한 특징을 보이는 집단정신이 형성된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했으므로 이런 집단을 ‘조직된 군중’ 혹은 ‘심리적 군중’이라고 부르겠다. 이런 군중은 단일체를 형성하고 ‘군중의 정신을 단일화하는 심리 법칙’을 따른다.
각자가 지닌 의식의 개성이 사라지고 감정과 생각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는 현상은 한창 조직되고 있는 군중의 초기 특징이지만, 같은 장소에 수많은 개인이 동시에 모였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니다. 외따로 떨어진 수천 명도 특정한 순간에 어떤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면 심리적 군중의 특성을 띨 수 있다.
예컨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라, 그럴 때 단순한 계기만 있어도 그들의 행동은 즉시 군중 특유의 특성을 띤다. 대여섯 명으로 군중이 형성되는가 하면, 수백 명이 우연히 모여도 군중을 형성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한편 평소에는 눈에 띄는 무리를 형성하지 않는 국민도 특정 영향을 받으면 군중으로 돌변할 수 있다. 심리적 군중은 일단 형성되면 일시적이지만 결정적인 힘을 지닌 일반적 특성을 얻는다.
군중은 독립된 개인보다 항상 지적으로 열등하다. 그러나 감정이나 감정이 야기하는 행동으로 볼 때,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군중은 독립된 개인보다 우등할 수도 있고 열등할 수도 있다. 군중이 어떤 암시를 받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군중을 범죄의 관점으로만 연구한 작가들은 이 점을 전혀 몰랐다.
군중이 때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영웅처럼 행하는경우도 그에 못지않다. 신앙이나 승리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것도 군중이었고, 영광과 명예에 열광한 것도 군중이었으며, 십자군 원정 때 이교도로부터 신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혹은 1793년 조국 프랑스를 지키고자 식량이나 무기 없이 싸운 것도 군중이었다.
군중이 중립적이라 가정하더라도 거의 언제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암시를 받으면 쉽게 넘어간다. 첫 암시가 돌발적으로 또렷이 주어지면 군중 모두의 뇌에 즉시 전염되어 심기고, 곧바로 방향까지 결정된다.
암시를 받은 모든 존재에게서 확인할 수 있듯이 두뇌에 이식된 생각은 행동으로 옮아가려는 경향을 띤다. 왕궁에 불을 지르는 행동이든, 자기희생이 따르는 행동이든 군중은 똑같이 여긴다. 모든 것이 자극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독립된 개인의 경우처럼 암시된 행동과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게 막는 이성적 판단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프리깃함 벨풀호는 함께 항해하다가 폭풍우 때문에 흩어진 순양함 르베르소호를 찾느라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 무렵, 갑자기 감시병이 파손된 구명정을 발견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감시병이 가리키는 쪽을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쳐다보았다. 그들은 분명 구명정을 밧줄로 연결해서 만든 뗏목을 보았다. 뗏목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조난 신호 깃발이 펄럭였다. 하지만 그것은 집단환각에 불과했다.
이 사례는 앞에서 설명한 집단환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한쪽에는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군중이 있고, 반대편에는 감시병이 표류하는 구명정을 가리키며 제시한 암시가 있다. 그 암시는 장교와 병사 등 모든 목격자에게 전염된다.
추론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렇듯 군중의 상상력도 무척 활발하고 격정적이며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 혹은 사고가 군중의 머릿속에 환기한 이미지는 현실만큼이나 생생하다. 군중은 잠자는 사람과 비슷하다.
잠자는 동안에는 이성의 활동이 잠시 정지되어 강렬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나타날 수 있지만 잠자는 동안에도 그가 깊이 생각하거나 이성적으로 추론할 능력이 없으므로 사실 같지 않은 일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사실 같지 않은 일’이 군중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군중의 의견은 과거 어느 때보다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것 같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과거의 신념이 점점 더 영향력을 상실하다 보니 옛날만큼 일시적 의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이에 따라 방향을 제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신념이 약회되면 과거도, 미래도 없는 개별 의견이 무수히 생겨난다. 둘째, 군중의 힘은 점점 더 커지는 반면 그 힘을 억제하는 수단은 점점 줄어들어 군중 가운데서 보이던 사상의 유동성이 아무런 제약 없이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최근 여론 매체가 급속히 증가해서 군중 앞에 상반된 의견들을 끊임없이 내놓기 때문이다. 각각의 의견이 야기하는 암시는 다른 암시 때문에 곧바로 소멸된다. 그 결과 어떤 의견도 확산되지 못하고 금세 사그라지는 운명을 맞이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의견이 충분히 퍼져나가 일반화되기 전에 소멸한다.
군중은 법적으로 범죄자일 수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 일반적인 이유는 강력한 암시에 있다. 바스티유 감옥의 지휘관 드 로네가 살해당한 일을 정형적인 예로 인용할 수 있다 바스티유가 점령된 후 지휘관은 흥분한 군중에 에워싸여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목매달아 죽이자, 목을 베자, 말꼬리에 매달자는 주장이 빗발쳤다. 그는 몸부림치며 저항하다가 실수로 누군가를 발로 찼다.
발길질을 당한 사람이 그의 목을 베자고 제안하고 군중은 이에 환호했다. 그는 실직한 요리사였고 바스티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려고 그것에 간 구경꾼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는 전체 의견이 그랬기 때문에 그 행위를 애국이라 판단했고, 자기 손으로 이 괴물을 죽이면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결국 드 로네의 목을 자르는데 성공했다.
제한적으로든 보편적으로든, 공화국과 군주국 어느 체제에서 실시되든,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어느 국가에서 실시되든 군중의 투표는 엇비슷하다. 군중 투표에서 해당 민족의 무의식적인 열망과 욕구가 드러난다. 나라마다 당선자들의 평균은 그 민족의 평균적인 정신 구조를 나타낸다. 세대가 바뀌어도 이 같은 사실은 거의 변함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민족이란 근본 개념을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민족의 중요성에서 파생되는 개념, 즉 제도와 통치 방식이 국민의 삶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개념도 다시 확인한다. 한 국가의 국민은 자기가 속한 민족의 고유한 정신에 큰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 조상 대대로 내려오며 쌓인 잔재들의 합이 곧 민족정신이므로 그 잔재들이 국민을 이끌고 간다. 민족 그리고 일상에서 매일 해야 하는 일, 이런 것들이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는 불가사의한 지배자들이다.
의회는 익명성을 띠지 않는 이질적 군중의 표본이다. 시대와 국가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의회 자체의 특성은 매우 유사하다. 민족의 영향으로 그 특성이 옅어지거나 과장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미국 등 전혀 다른 국가의 의회는 토론과 표결 방식이 상당히 비슷하며 자국 정부에 똑같은 어려움을 안겨준다. 게다가 의회제도는 문명화된 모든 민족이 꿈꾸는 이상이다.
의회제도에는 심리학적으로는 틀렸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생각, 즉 어떤 문제에 대해 다수가 소수보다 더 현명하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하지만 의회에서도 군중의 일반적인 특성 등 자극에 쉽게 흥분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성향, 피암시성, 과장된 감정, 지도자의 지배적 역할 등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의회는 일정한 순간에만 군중이 된다. 의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은 많은 경우 본래의 독자성을 유지한다, 그래서 의회는 고도로 전문적인 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 법을 만드는 실제 주역은 조용한 사무실에 앉아 법안을 준비한 전문가들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해, 표결된 법은 개인의 작품이지 의회의 작품이 아니다.
당연히 이런 법이 가장 훌륭하다. 그런데 바람직하지 않은 일련의 수정이 거듭되면서 법안이 집단의 작품으로 변질되면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군중의 작품은 언제 어디서나 독립된 개인의 작품보다 열등하다. 혼란스럽거나 미숙한 대책들로부터 의회를 구해내는 것은 전문가들이다. 따라서 전문가는 일시적인 지도자다. 의회는 전문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문가는 의회에 영향을 미친다.
민족은 줄기차게 투쟁을 되풀이하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겪으면서 어떤 이상을 획득한 뒤에야 야만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이다. 로마 숭배든, 아테네의 힘이든, 알라의 승리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형성 과정에 있는 민족의 모든 구성원에게 감정과 생각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한 것을 이상으로 제시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단계에서 고유한 제도와 신념, 예술을 지닌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
민족은 꿈과 이상을 추구하며, 문명에 찬란함과 활력과 위대함을 부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차근차근 갖추어갈 것이다. 물론 민족은 어떤 시기에 이르면 다시 군중이 되겠지만, 그때 군중이 가진 변덕스러운 특성의 이면에는 견고한 기반, 즉 민족의 영혼이 있기에 동요하는 폭을 좁히고 우연을 억제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창조를 끝낸 뒤 파괴를 시작한다.
과거부터 지녀온 이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민족은 결국 거유한 정신 구조마저 완전히 잃는다. 이때 민족은 무수히 많은 독립된 개인이 되고, 원래 상태였던 군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그 민족은 일관성도 없고 내일도 없고, 그야말로 덧없는 특성을 띤다. 문명은 이제 더는 안정되지 않고 모든 것이 우연에 맡겨진다. 평민이 지배하고 야만의 시대가 시작된다.
문명은 오랜 과거가 만들어낸 외형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여전히 눈부시게 보일 수 있지만, 더는 떠받쳐주는 게 없어서 폭우가 몰아치면 곧바로 무너져버릴 낡은 건물에 불과하다. 어떠한 꿈을 추구하며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의 단계에 올라섰다가 그 꿈이 힘을 잃자마자 쇠락하고 무너져 내리는 현상, 이런 것이야말로 민족의 흥망성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