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이후의 경제철학
 
지은이 : 홍기빈 (지은이)
출판사 : EBS BOOKS
출판일 : 2023년 08월




  • 경제생활이 우리를 허무와 고독과 불안으로 밀어 넣도록 짜여져 있다면, 해야 할 일은 그러한 경제생활의 조직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입니다. 전환의 시대, 나와 사회와 자연이 함께하기 위한 경제학자 홍기빈의 경제학 에세이입니다.


    위기 이후의 경제 철학


    위기

    우리는 풍요롭지 않다

    계속 성장하고 계속 소비할 수 있을까

    지금 다가오는 위협은 기후위기만이 아니다. 생물종 다양성 감소, 해양 생태계 위기, 주요 자원의 고갈 등 지구적 산업문명이 자연과 생태계의 한계를 침범해 넘어서는 있는 증후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위기들은 산업문명의 지속가능성은 물론, 인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생명 영역 전체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경고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경고의 목소리에 이어 많은 해법의 제안과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정작 이 생태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지금 우리 경제생활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는 대부분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연 20세기와 같이 계속 성장하고, 계속 소비를 늘려갈 수 있을까? 80억을 넘어선 세계 인구가 모두 산업 국가의 중산층과 같은 소비 수준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경제 성장을 이루겠다는 위험한 꿈은 과연 그대로 두어도 좋은 것일까?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경제성장은 지금 전 세계 인류의 마음과 의식 속에 하나의 세속 종교와 같이 절대적인 목표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20세기 후반 이후의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현상이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경제학의 주된 관심사는 성장이 아닌 ‘균형’이었으며, 대부분 사람들의 경제생활은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살아간다는 전통적인 윤리를 규범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70년간 큰 변화가 일어났다. 2차 산업혁명으로 ‘대량소비·대량생산’이라는 틀이 자리 잡았으며,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 국가 목표로 떠올랐고, 이를 ‘정밀하게 계측’하는 성장 회계가 발전했다. 또 노동과 자본의 고질적인 계급 갈등에 대한 치료책도 경제 성장과 소비 팽창으로 주어졌으며, 특히 20세기 끝 무렵에는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 사이의 불평등에 대한 해결책으로도 경제성장이 주어졌다. 그리하여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무한의 소비 팽창은 이제 으뜸가는 미덕이 되었고, 이를 가능케 하는 나라 전체 아니 세계 전체에서 무한의 경제성장은 절대적인 ‘공공선’이 되어버렸다.


    1960년대에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Kenneth Boulding)은 지구가 복률의 성장을 견뎌낼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 ‘우주선’에 타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게오르게스쿠-뢰겐(Nicholas Georgescu-Roegen)은 ‘엔트로피 법칙’, 즉 열역학 제2법칙에 근거하여 영구적인 경제성장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지만 기후위기로 온 지구가 박살이 나는 것을 똑똑히 보고 몸소 겪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모든 나라들은 올해에도, 또 내년 후년, 그 이후에도 영원한 경제성장을 꿈꾼다. 세계은행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선진국들, 나아가 세계 경제 전체가 2퍼센트 혹은 심지어 3~4퍼센트의 영구적인 경제성장을 이상적이라고 보며, 이를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째서일까? 앞에서 말했듯이 20세기의 인류가 발견한 모든 종류의 인간적 괴로움과 사회 갈등의 만병통치약은 ‘소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할 모든 개인의 구매력 확보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언론인이 뽑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최악의 다섯 가지 소비 현상”이라는 기사가 생각난다. 우리가 얼마나 소비에 중독이 되어 별의별 쓸데없는 것들을 다 사고팔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그중 하나는 ‘이동식 수박 냉장고’였다. 수박이 들어가는 공간이 마련된 플라스틱 손끌개인데, 거기에 무선으로 작동할 수 있는 냉장 장치와 그것을 구동시킬 배터리까지 장착한 물건이다. 어디서든 시원하게 수박을 즐기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는 개인이든 사회든 삶의 모든 문제를 소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우리의 오랜 고질병이 얼마나 심한지를 잘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나는 기후학자도 생태학자도 아니지만 생태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이러한 한없는 소비의 팽창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한의 경제성장이라는 신화에 있다고 확신한다. 지금 우리를 덮치고 있는 기후 위기에 대한 대책으로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전환, 나아가 탄소 포집 기술 등의 해법이 나오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투자 및 재투자로 지구적 경제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좋은 일이며, 잘되어야 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해법만으로 ‘2050년의 탄소 순배출량 0’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제아무리 비약적인 기술 혁신이 이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80억 세계 인구가 지금까지처럼 소비의 팽창과 경제성장을 원하는 한 모두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1970년 MIT의 시스템 과학자들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의 핵심적 조언이기도 하다. 우리가 소비와 경제성장, 나아가 우리의 경제활동의 틀이 조직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않는 한, 이러한 기술적 해법이 위기를 늦추거나 조금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욕망

    욕망에 질서를 부여한다

    ‘욕망의 포트폴리오’

    이해하기에 어려운 내용일 리는 없다. 그리고 누구나 진지하게 노력만 한다면 분명 실행해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돈벌이 경제학과 ‘무한소비/무한 욕망’의 경제적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는 우리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의문 혹은 반감이 생길 수 있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냥 적당히 대충 남들과 비슷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경제생활은 단순히 무한 소비와 그것이 초래하는 허무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내 욕망에 스스로 설정한 질서를 부여한다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 소비 활동이 나를 허무의 감정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 욕망을 충족하려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더 땀을 흘릴수록 내 삶이 더욱 충만해지는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나와 우리의 욕망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궁극적인 귀착점은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특정한 욕망에 대해 추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추구한다면 그 정도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욕망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여 취사선택하고 그 크기를 결정하는 것을 욕망의 선택, 즉 ‘욕망의 포트폴리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를 생각해보겠다. 강대국의 왕자로 태어나 결국 거대한 제국을 구축해 절대 권력자가 된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고 질서를 부여했을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온 바를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던 이였다. 그가 페르시아의 수도에 입성했을 때, 아름다운 궁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알렉산더에게 인사를 올린다. 혈기 방장한 청년의 나이였지만 그는 ‘페르시아 여인들은 너무 아름다워 눈만 아프게 하는구나’라는 알쏭달쏭한 이유로 소가 닭 보듯 하다가 그녀들을 모두 궁에서 내보낸다. 옆 나라의 여왕이 알렉산더에게 온갖 산해진미와 최고의 재주를 가진 요리사까지 종종 선물로 보내곤 했지만 그 또한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요리사를 물리친다. 주변에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나의 스승 레오니다스가 내게 가장 좋은 요리사를 붙여주었네. 밤새 군사 훈련을 하여 식욕을 돋우면 아침이 맛있지. 하지만 아침을 조금만 먹어두면 하루 종일 저녁밥을 기다리게 되니 그 또한 맛있게 먹게 되지.’ 소문과 달리 술에 취하는 법이 없었고, 미소년을 즐겨보라는 말에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언뜻 보면 그냥 별난 금욕주의자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의 욕망 절제의 다른 면은 ‘미덕’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땅끝까지’ 정복하여 세계를 통일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거슬리는 꿈이지만, 그에게는 경계선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픈 나름의 이유와 이상이 있었다고 하니, 이것이 그의 ‘좋은 삶’이었던 셈이다. 그는 이후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고 에게해를 건너 인더스강을 넘어 인도까지 끝없이 진군하는 병영 생활을 계속한다. 그런데 만약 그가 보통의 왕과 귀족처럼 편안한 생활과 각종 쾌락에 빠졌다면 어땠을까? 그러한 미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절차를 그대로 따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추측한다. 자신의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조달해가면서 거기에 필요한 욕망은 남겨두거나 혹은 크게 키워나가고, 그렇지 않은 욕망은 크게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렸던 것으로 보이니까.


    여기에서 이 장의 앞부분에서 말했던 ‘정신적 욕망’의 특징을 상기해보자. 정신에서 나오는 욕망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전혀 없을 수도 또 무한할 수도 있다. 이는 태생적인 천성에서도 나오겠지만, 본인이 어떤 욕망을 선택하여 어떻게 자신을 길들이는가에 보다 크게 달려 있다. 처음에는 별로 끌리지 않는 종류의 것들도 스스로의 ‘좋은 삶’에 비추어 의미를 부여하고 몸과 마음을 쏟다보면 어느새 그것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절실한 욕망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반면 아무리 내 몸과 마음을 온통 지배할 정도로 절실한 욕망도 거꾸로 초연해지고 아예 잊어버릴 수 있다. 이를 ‘욕망의 포트폴리오’라고 부르고자 한다.


    한 가지만 더. 이를 왜곡된 의미의 ‘금욕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욕망을 억누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그것을 추구할 수 없는 삶은 불행한 삶이다. 욕망의 포트폴리오는 그런 삶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에 스스로 질서를 부여하고 자신의 영혼에 꼭 맞도록 재단해놓은 옷이다.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다.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로 행복해 할 줄 알았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다. 나는 알렉산더의 안회도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세련된, 가장 게걸스런 쾌락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활동

    ‘피어나는 삶’으로서의 경제활동

    에우다이모니아

    ‘좋은 삶’의 내용과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구구하게 많은 논의와 주장이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던 어휘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nomia)였다. 이 말은 번역하기가 어려워 서양에서도 그리스 어휘 그대로 사용한다. 영어에서는 그 의미를 최대한 알기 쉽게 집약하여 ’피어나는 삶(flourishing life)‘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말에 어떤 고대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기에 번역이 어려운지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이 말을 어원으로 분석하면 ‘다이몬(daimon)이 활성화(eu-)된 상태’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 다이몬은 나중에 영어에서 악마 혹은 도깨비를 뜻하는 ‘데몬(demon)’의 어원이 되었지만, 이는 유대인들의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다가 이루어진 어휘 선택의 결과일 뿐 본래 그리스어 다이몬은 그런 부정적인 뜻 없이 단지 ‘신령’을 의미하는 말이다. 올림푸스에 있는 위대한 신들은 아니지만, 특히 인간에게는 ‘수호령(修好靈)’의 역할을 한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상황과 선택의 갈림길이 찾아왔을 때 우리를 ‘분별력’있게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보인다. 바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수호령인 다이몬이 활성화된, 혹은 분별력이 좋은 상태가 바로 에우다이모니아이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 말은 그저 ‘분별 있는 삶’이라는 그저 그런 의미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이성에 따르는 아레테(arete) 넘치는 활동’이라고 해석하여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제시한다. 다이몬은 그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나침반처럼 유대해야 하거나 북극성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들어와서 우리 삶의 ‘아레테’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한다. 아레테란 보통 ‘미덕’으로 번역될 때가 많지만, 그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움’, 즉 어떤 존재로서의 특징과 성격을 탁월하게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군인의 ‘아레테’는 용기가 될 것이다. 미술가의 ‘아레테’는 미적 감각의 탁월성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잠재되어 있는 여러 욕구와 능력이 모두 충만하게 터져 나와서 가지가지의 아레테를 충분히 떨치는 활동’이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은 활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에우다이모니아, 우리의 모든 욕구와 능력이 충만하게 피어나는 삶은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생각해볼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등산, 사우나, 장거리 달리기 등을 할까? 오늘날 심리학의 한 분야인 ‘행복 연구(Happiness Studies)’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설명하는 접근법으로서 ‘쾌락주의 접근(hedonist approach)’과 ‘에우다이모니아 접근(eudaimonic approach)’가 있다고 한다. 단순히 행복을 쾌락의 증대라고 본다면 등산, 사우나, 장거리 달리기 등의 활동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등산이 얼마나 힘든가. 잠깐잠깐 산바람이 불어오고 절경이 펼쳐지는 상쾌함은 있지만, 산에서 내려와 막걸리 한잔 마시는 즐거움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등산은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는 고통의 연속이다. 사우나와 장거리 달리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고통 속에서 시원하다고 느끼는 일종의 ‘쾌락’을 발견한다고는 하지만, 순진한 아이들 중에서 이 세 가지를 그렇게 즐기는 아이를 나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에우다이모니아 접근’에서는 쉽게 설명이 된다. 사람은 자기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 이런저런 욕구와 이런저런 능력을 끄집어내고 싶어하는 본원적인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런 활동에서 행복을 느끼며, 설령 그 활동이 일정한 고통을 초래한다고 해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오히려 행복의 일부분으로 환영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요컨대 사람의 행복은 쾌락의 개념처럼 멈추어 있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더 충만한 삶을 찾아나가는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말은 번역이 용이치 않다. ‘내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수호령이 만족할 수 있도록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가능성을 끄집어내고 단련하는 활동으로서의 좋은 삶’, 이걸 어떻게 하나의 단어로 집약할 수 있을까. 나는 앞에서 말한 ‘피어나는 삶’이라는 영어 번역이 그나마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보잘것없는 돌조각처럼 생긴 씨앗이 땅에 떨어지지만, 거기에서 줄기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마침내 아름다움 꽃이 활짝 피어난다. 이 피어나는 활동, 이것이 에우다이모니아다.



    관계

    21세기의 ‘협동’ 경제 조직들

    연대 경제

    ‘연대 경제(solidarity economy)’는 이제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지고 실천되고 있는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 가치 창출’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이지만, 연대 경제는 ‘시장도 국가도 풀어주지 못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풀뿌리 시민들이 직접 연대하여 만든 조직과 그 활동’에 더욱 방점이 있다. 요컨대 풀뿌리 시민들의 연대와 협동이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21세기 자본주의의 여러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야말로 영리기업도 국가 및 공공기관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필요가 무수히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이러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필요를 갈급하게 느끼는 사람들 스스로가 힘을 합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협동이 이러한 경제활동 영역에서 핵심적인 조직 원리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연대의 폭은 그 ‘필요자들’에만 국한될 이유가 없다.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연대하고자 하는 크고 작은 여러 단위와 기관들, 즉 중앙 및 지자체 정부, 기업, 비영리 단체, 학교, 종교 기관 등, 그 뜻에 동참하고 협동한다면 당연히 연대 경제의 일원이 된다.


    그 무수한 예가 있지만, 2010년대 중반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된 도시를 되살리는 도시 재생 모델로서 이름을 떨쳤던 ‘프레스턴 모델’이 처음 실험되고 나타났던 미국 클리블랜드시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자. 한때 활발한 산업도시였던 클리블랜드는 20세기 말에 나타난 탈공업화(deindustrialization)의 결과로 공장과 기업이 다른 도시로 빠져나가고 중산층 또한 교외로 주거를 옮기면서 도심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리는 ‘도심 공동화’를 겪게 된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예전부터 있었던 큰 대학과 병원 걸물들만 남았을 뿐, 그 일정한 반경 안은 글자 그대로 거의 ‘초토화’되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버려진 건물들은 창문이 깨져 있고, 빈터가 되어버린 사방의 주차장에는 어른 무릎까지 잡초가 자란 상태였다. 여기서 남아서 사는 주민들 또한 일자리와 생계의 곤란은 물론 안전의 위협에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상태였다.


    주민들은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지혜를 짜낸다. 그 빈터의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큰 원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이들은 세탁 협동조합을 구성하여 세탁 작업의 숙련을 쌓는다. 그다음에는 병원 관계자와 면담을 신청하여 병원에서 매일 대량으로 쏟아지기 마련인 각종 세탁물의 처리 사업을 자신들이 맡고 싶다고 말한다. 이 병원은 그때까지 프랑스의 다국적 기업에게 이 작업을 맞기고 있었지만 마을 주민들의 뜻에 공감하여 입찰에 응해보도록 권한다. 이들의 협동조합은 작업의 질을 개선하는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 지리적으로 바로 인접한 자신들 조직이 멀리 떨어진 다른 대기업보다 병원과의 의사소통도 훨씬 원활할 것임을 강조하며 결국 입찰 경쟁에서 승리하여 일을 따낸다.


    그리고 이 초토화된 허허벌판 지역에도 생기가 돌고 돈이 돌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돈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던 이 지역에 대형 병원의 세탁 관련 예산이라는 큰 돈이 협동조합원인 마을 사람들의 임금 소득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마을에 돈이 돌기 시작하면서 작은 가게들과 골목 경제가 살아나게 된다. 용기를 얻은 이들은 이제 태양광 설치 협동조합을 새로 출범시켜 또 다른 사업을 시작한다.


    절망적인 도시의 절망적인 지역에서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경제적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경쟁’이었을까? 그 상황에서 따로따로 찢어져서 경쟁을 해봐야 얻을 것이 있었을까? 이들이 선택한 것은 협동‘이라는 방법이었다. 이것이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열띠게 시도되고 실험되고 있는 연대 경제의 좋은 예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고독에서 벗어나려면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모였을 때는 함께 일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리고 그 일이 모두가 함께 원하고 꿈꾸는 공동의 목표를 위한 일일 때 더욱 효과적이다. 일하느라 바빠서 서로 말할 틈도 없다고 해도, 고독해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경제활동 본연의 모습이다. 고독을 낳는 원천이기는커녕 어떤 종류의 고독이라도 풀어주고 덜어주는 최상의 치료책은 바로 ‘함께 도우며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 할수록 사람을 더욱 고립시키고 고독으로 몰고 가게 되어 있는 오늘날의 경제생활의 틀은 결코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도 아니며 지속 가능한 것도 아니다. 협동을 원리로 삼는 경제활동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고독은 줄어들거나 아예 소멸한다. ‘네트워크 자본주의’니 ‘인적 자본’이니 하는 생긴 지 몇 십 년도 채 되지 않은 개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내려온 인류의 지혜이다.



    미래가 힘이다

    위기 이후의 세상이 온다

    이 책의 서두에서 우리는 ‘위기 이후의 경제철학’을 이야기했다. 위기는 이미 시작되었고 갈수록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생태 위기와 전 지구적인 사회적 불평등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영혼을 잠식하고 허무, 고독, 불안의 늪으로 몰아넣어 이러한 총체적 위기와 파국이 다가오는 것을 고스란히 눈을 뜨고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지구상의 가장 한심한 동물’로 전락하는 지금의 상황은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있을 수는 없다. 지금의 지구적 산업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한’ 틀이 아니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그 근간이 되는 경제생활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세속 종교를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오염되고 더럽혀진 인간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파악하여 그것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철학과 새로운 경제생활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과거에 대한 동경도 아니고 비현실적인 백일몽도 아니다. 지금 ‘목이 부러질 정도의 속도로’ 벌어지고 있는 산업과 기술의 변화를 보자. 그리고 거기에서 매일 매 순간 열리고 있는 새로운 경제 생활의 가능성을 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의 말처럼, ‘18세기 유럽인들의 미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현재의 경제학과 경제적 인간의 이론 틀을 무슨 만고불변의 초월적 진리처럼 떠받들면서, 그것으로 AI와 블록체인이 나타난 21세기의 산업과 경제생활을 설명하고 또 조직하겠다는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잠꼬대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블록체인은 탈중심화된 산업 조직과 협업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교육의 불평등과 경직성을 획기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다. 사실상 거의 모두가 디지털 계좌를 보유하게 된 지금, 현금 창출 능력을 남용하여 무제한으로 위험한 투기를 일삼는 현재의 은행 시스템은 갈수록 뒤떨어진 제도로 변하고 있다. 플랫폼과 블록체인을 활용한 새로운 경제 조직의 출현은 주식회사라는 17세기의 유산을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위기만 오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 위기 이후의 세상은 재앙과 파국으로 기결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중화학 공업의 대두라는 동일한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에 임하여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는 파시즘이라는 악몽같은 사회를 만들었지만,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효율성과 자유를 모범적으로 실현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틀을 만들었다. 위기 이후의 세상은 비참과 악몽으로 점철된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더 많은 효율성과 자유, 더 많은 인간성과 사람이 강물처럼 넘치는, 인류가 몇 천 년을 꿈꾸어온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 산업과 기술의 변화로 다가오는 미래는 우리의 물질적 생활만을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정서, 우리의 관계, 우리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바라보고 만들어가는 태도 전체를 바꾸어버린다. 지금 산업과 기술의 변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이 거센 바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헛되이 노를 저어 그 흐름과 싸우거나 넋을 놓고 바람과 파도에 배를 내맡기는 것이 아니다. 돛을 올리고 돛폭 가득 바람을 받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몰아가야 한다.


    이러한 미래로의 바람과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 개인의 경제생활에 있어서도, 또 집단적·사회적 경제 정책 및 제도의 틀을 설계함에 있어서도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생각과 행동과 생활 방식을 조금씩이라도 가급적 더 많이 더 빠르게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항해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세한 해도(海圖)가 작성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대안적 경제학의 이론과 사상, 더 구체적인 대안적 정책과 제도, 더 구체적인 대안적 생활 방식과 정서 및 감수성이 나타날 것이다.


    이 책은 ‘위기 이후의 경제 철학’에 대한 작은 이야기에 불과하며, 그러한 작업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위기를 낳은 사고방식으로는 절대로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 길고 지난한 작업의 시작은 지난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해왔던 경제적 인간 세속 종교를 내버리는 것에 있다고 확신한다. 이를 버릴 용기를 낸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의 뺨에 와닿는 변화의 바람이 느껴질 것이며,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푸른 섬이 어렴풋이라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위기 이후의 세상이 온다. 우리가 우리를 바꿀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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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