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 허스토리
 
지은이 : 이디스 카이퍼(역:조민호)
출판사 : 서울경제신문사
출판일 : 2023년 05월




  • 남성 중심의 경제학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의 교육, 생산, 분배, 소비, 정책 제안 활동 등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되찾고, 차별과 배제로 기울어진 경제학을 바로 세워 봅니다.


    이코노믹 허스토리


    정치경제학의 등장

    오이코노미아, 가계관리에 관한 탐구

    경제와 관련한 여성들의 초기 저작 대부분은 역사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자 아스파시아(Aspasia, 기원전 470~기원전 400)가 쓴 구절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만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가 여성과 젠더에 관해 상당히 광범위한 글을 남겼다. 기원전 362년경 크세노폰이 쓴 ‘오이코노미코스(Oikonomikos)’에서 여성은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묘사되며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 자주 언급된다. 소크라테스는 남성이 가정을 꾸리고, 아내와 일을 분담하고, 젊은 아내를 현명한 주부가 되도록 훈련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집안에 좋은 주부가 있는 것이 가계의 부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끊임없이 다투던 강한 아내(Xanthippe)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지적이 날카롭고 유머러스하다. ‘오이코노미코스’는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이 저작을 다루고 있는 경제사상사 교과서 중 대부분에서는 노동 분업만 강조할 뿐 본래의 분업, 즉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젠더 분업은 언급하지 않는다.


    후대의 경제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여성은 단지 불완전한 남성이었으며, 그의 이분법적 논리에 따르면 뜨겁고 적극적인 남성과 달리 여성은 차갑고 수동적인 존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를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하나는 먹을 음식과 입을 옷, 쉴 집을 제공해 가족 구성원의 생계를 유지할 목적의 재산 관리다. 그는 이를 ‘자연 경제’ 또는 ‘오이코노미아’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이자가 발생하는 대출을 비롯해 가계 밖에서 이뤄지는 거래나 교역이다. 그는 이를 ‘비자연 경제’ 또는 ‘크레마티스티케(chrematistike)’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경제는 억제돼야 마땅하지만 유지되고 있는, 결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필요악이었다.


    중세 시대에도 학식 있는 많은 여성이 수도원에 기거하며 철학적·종교적 문헌을 남겼다. 예를 들면 베네치아의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san, 1364~1430)은 다양한 장르로 많은 글을 썼고 서유럽에서 여성 문제를 모국어로 표현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모든 여성이 교육을 받아야 하며, 여러 분야와 여러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미덕과 관심,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신교와 신흥 상인 및 중개인 계층이 부상하자 가정에 있는 여성은 이념적으로 더 길들여졌고 주부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하는 ‘남성의 성(城)’으로 인식됐다.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의 귀족 여성들은 정치 문제에 발언할 권리를 어느 정도 갖고 있었으나, 특히 18세기 영국에서는 귀족 여성들조차 공적 영역에서 제외됐다. 가정 경제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정치와 교역, 산업적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의 영역이 됐으며, 가정은 여성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이전까지는 가계부 관리를 주로 맡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여성이 가계 운영 지식을 발전시키고 축적해 가계부를 작성하고 보관했다.


    서유럽에서 가계관리가 점점 더 여성의 독점적인 역할로 변화함에 따라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의 젠더 구분 또한 정치철학의 논지로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초기 사상가들의 전통적 견해를 따라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같은 근대 철학자조차 ‘남성’에 초점을 맞췄으며 시민은 전적으로 남성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루소의 생각은 이후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책 ‘국부론’에 생활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 대한 젠더 역할을 적용했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조용하면서도 결정적인 변화를 보였다. 그는 관점을 180도 바꿔 가계에서 등을 돌리고 자율적인 남성 개인을 무대 중심에 세웠다. 그는 그저 자신이 쓴 저작에서 가계와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묵묵히 경제 역사를 바꿨다. 애덤 스미스는 그때까지 ‘가정경제’ 또는 ‘가계관리’라는 의미로 부른 ‘오이코노미’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해 공적 영역의 생산성과 부를 다루는 ‘이코노미’와 분리했다. 그가 살아생전 출간한 두 권의 책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시장 법칙 맥락으로 가계를 대표하는 개인은 다름 아닌 ‘남성’이다. 다시 말해 그가 지칭하는 경제 행위 주체로서의 개인은 모두 ‘남성’을 일컫는다.


    가정과 여성이 정치경제에서 배제되자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가계관리에 관한 문헌 대부분을 여성들이 쓰게 됐다. 가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의 전통적 초점이 유지되면서 이 경제 연구 분야는 경제학계 외부로 이끌렸다. 19세기 말까지 이 연구 중 일부는 ‘가정경제학(home economics)’으로 불리게 된 경제학 하위 분야로서 여성 학자들이 수행했다. 가정경제학은 미국에서 여성 학자가 경제학부 내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분야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더 많은 여성이 경제학을 포함해 다양한 학문 분야에 진출하자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측정과 개념화 작업을 통해 ‘가사 노동’, ‘가계 생산’, ‘무임금 노동’, ‘돌봄 노동’의 가치와 역할을 이론화했다. 그들은 무임금 가계 생산에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무임금 가계 생산의 역할과 젠더화한 특성 및 자본주의에서의 기능에 관한 가사 노동 노쟁을 초래하게 된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했다.


    낸시 폴브레는 경제 모델, 특히 순환 흐름 모델에 가정에서의 무급 돌봄 노동을 포함하지 않은 신고전주의 주류 경제학 이론을 비판했다. 그녀는 가정이 생산 및 소비의 엄연한 주체인데도 가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경제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낸시 폴브레에 따르면 가정은 재화와 서비스 생산에 더해 노동자를 생산하지만, 이 생산에는 금액이 책정되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미래의 노동자인 자녀를 양육하는 것 외에도 노동자 생산은 긍정적 ‘외부 효과(externality)’를 생성한다. 그렇기에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의 관심사에서 밀려났던 가정경제가 다시 중심 무대로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과 주체성 그리고 재산권

    고대의 크세노폰이 전문화를 가능케 한 첫 번째 분업으로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역할 분배를 자세히 논의했다면 체사레 베카리아와 안-로베르-자크 튀르고, 애덤 스미스는 부의 생산자인 남성의 경험에서 출발했다. 이 초기 정치경제학자들은 여성이 없는 학문적 환경 안에서 경제 개념과 이론 및 원칙을 수립하고 심화했다. 여성의 부재는 그저 우연이 아니라 경제학이라는 학문 기관 설계의 근본적 부분이었다.


    유럽 전역의 대학들은 로마 가톨릭 수도원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옥스퍼드대학교는 주로 남성들이 성직자가 되도록 교육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경우 학생들이 캠퍼스 내에 거주하려면 독신 상태를 유지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했다. 옥스퍼스대학교는 20세기까지 여성의 교내 접근을 금지했다. 프랑스의 살롱 문화와 유사하고 프랑스와 영국의 오래된 학술 모임을 모델로 한 경제 토론에 관심 있는 남성들은 스위스에서 ‘레이코노미스트(les économists, 경제학자들)’나 프랑스에서 ‘레필로조프(les philosophes, 철학자들)’ 같은 학회를 만들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도 ‘클럽(club)’이라는 이름을 단 모임들이 생겼다. 글래스고와 에든버러의 작고 붐비는 거주 구역 외부에 들어선 사교 공간에는 남성들로 가득했다. 이런 모임은 종류도 다양했고 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도 엄격했다.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클럽들도 있었는데, ‘뒤죽박죽클럽(Hodge Podge Club)’, ‘돌발클럽(Accidental Club)’, ‘비프스테이크클럽(Beefsteak Club)’같은 곳들이었다. 하지만 남성들의 사교 모임이기에 “여성은 허용하지 않습니다.”가 규칙 중 하나였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 살았던 애덤 스미스는 여성 참여를 불허한 ‘포커클럽(Poker Club)’같은 모임의 회원이었고 설립에도 관여했다. 입법가들, 학자들, 상인들 사이의 그 어떤 정치경제적 논의에도 여성들은 없었다. 여성의 경제 행위나 경제적 이해관계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그것이 경제 분야에 한계를 가져온다는 생각 또한 누구도 하지 않았다.


    재산권: 경제 제도로서의 결혼

    1700년대에 재산권이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남성의 독점적 권리로 규정되면서 여성 및 식민지 원주민은 자본이나 토지 같은 자산의 통제권을 상실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결혼법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법은 인구 문제와 직접 관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대부분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계약이었으며, 자산과 소득 같은 경제적 안정성을 결정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비교할 때 잉글랜드는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 과거에는 인정됐던 기혼 여성의 재산권이 가장 극단적으로 상실된 곳이었다.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여성은 거의 모든 법적 권리를 잃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결혼은 마음의 문제일 수 있지만, 당시 귀족과 부유한 가문 사람들에게 결혼은 언제나 재산을 대가로 가족이 되는 교환의 문제였다. 대부분 가문에게 자녀의 결혼은 사회적·정치적 인맥의 확대 및 강화이자 전쟁을 방지하는 현명한 대안이었다. 이 시대 여성 경제 저술가들은 결혼법과 그것의 경제적·물리적 영향 등 결혼이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이는 결혼을 그저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한 남성 경제학자들과 극명히 대조된다. 더욱이 남성 경제학자들은 결혼이 가계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 자녀 사이, 세대 사이의 자원 분배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결혼을 경제적 제도보다는 사회적 제도로 여겼다.


    결혼은 당사자 가운데 한 사람의 법적 주체성을 포기하기로 합의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일반적인 계약과는 다른 법적 계약이었다. 따라서 이 계약은 법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잉글랜드 철학자 해리엇 테일러 밀(Harriet Taylor Mill, 1807~1858)은 1851년 논문 ‘여성의 참정권’에서 결혼의 법률적 근거를 제기했다. 이 논문은 처음에 그녀의 남편 존 스튜어트 밀 이름으로 발표됐으나 이후 해리엇 테일러 밀 자신이 쓴 것으로 기록됐다.


    해리엇 테일러 밀이 1850년 10월 23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열린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연설을 토대로 쓴 ‘여성의 참정권’은 존 스튜어트 밀이 내용을 보강해 그녀 사후 11년 뒤인 1869년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한 성별이 다른 성별에 종속된다는 법률적 원칙 자체가 잘못이며 인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임을 역설하고 있다. 해리엇 테일러 밀과 존 스튜어트 밀은 이 종속 원칙을 완전한 평등 원칙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73년 펴낸 ‘자서전’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종속’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정치경제학 분야 교과서로 널리 읽힌 ‘정치경제의 원리(1848)를 비롯해 자신이 쓴 저서 대다수가 아내 해리엇 테일러 밀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영국에서는 기혼 여성의 권리가 다소 향상됐다. 바버라 리 스미스 보디촌(Barbara Leigh Smith Bodichon, 1827~1891)과 ‘랭엄플레이스그룹(Langham Place Group)’이 1857년 기혼 여성의 재산권 확보 법안을 제출하고자 투쟁했고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870년까지 의회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이 법안은 기혼 여성이 남편의 승인 없이도 “자신의 의지 또는 기타 적법한 방식으로 재산을 취득하고 보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담고 있었다.


    결혼법과 기혼 여성 재산권에 대한 이 같은 변화는 기술 발전과 더불어 여성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열어줬다. 그렇지만 20세기가 될 때까지 기혼 여성에게는 여전히 독립적으로 계약을 체결할 권리가 없었다. 남편의 공동 서명이 있어야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계약 책임이 전적으로 여성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1953년 독일 1957년 네덜란드, 1958년 벨기에, 1965년 프랑스에서 여성의 법적·계약적 지위를 제한하는 법률이 개정되는 동안에도 미국은 2006년까지 의회에서 ‘기혼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미 미국 대다수 주 정부가 기혼 여성이 서명한 계약을 인정하고 있었다.


    반면 가정은 여전히 법률적으로 사적 영역이었고,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결혼 생활 속에서의 폭력과 강간은 20세기까지 사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한편으로 경제학에서는 남성을 가장으로 하는 소득 가구 개념이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1960년대 초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 증가는 놀랍고 이례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부와 여성의 관계: 자본, 돈, 금융

    여성에게 강요된 돈을 대하는 태도

    1700년대와 1800년대 여성들은 자본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새로운 부르주아 도덕의 개념에서는 하층 여성들만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을 하기 때문에 중상류층 여성이 돈을 다루는 것을 ‘여성답지 않고’ 저속한 행위로 치부했다. 가계 생계를 위한 가내 수공업이 산업화 과정에서 대규모 작업장과 공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자산의 금전적 가치가 점점 더 중요해졌고, 중산층 여성들은 자산과 재정에 대해 이중적 관점, 즉 돈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성이 다룰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유지하도록 세뇌당했다.


    마리아 에지워스와 아버지 리처드 로벨 에지워스가 함께 쓴 ‘현실적 교육’의 한 장인 ‘검약과 경제(Prudence and Economy)’는 가정에서의 경제적 행동을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은 독자인 부모들에게 다양한 이유를 들어 아들보다 딸을 더 주의 깊게 가르쳐야 한다고 독려했다. 이들이 보기에 “경제는 여성에게 더 본질적인 가정의 미덕”이었다.


    에지워스 부녀에 따르면 가정의 맥락에서 경제는 검약, 경험, 재화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술, 낭비 최소화 같은 요소로 구성된 것이었다. 자녀에게 돈의 소중함을 가르치려는 부모의 노력은 아이들 스스로 하는 용돈 관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은 가계부를 관리하는 데 익숙해야 하며 모든 필수품과 사치품의 가격을 알아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물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 ‘정확한 자산 현황 파악’, ‘내 것에 대한 집착보다 우선하는 타인의 재산권 존중’ 같은 태도 강요는 젊은 여성이 부모의 집을 떠나 다른 남성의 아내가 됐을 때 똑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돈을 대하는 이중적 잣대는 여성은 타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존재일 뿐, 스스로 자본을 운용하거나 소득을 끌어내는 존재는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동시에 결국은 자기 것이 아닌 돈을 아껴 쓰는 것이 여성과 소녀들의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여성을 돈에서 떨어뜨리고 노동력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도록 사상적으로 지원하는 일련의 규범과 가치는 19세기 후반까지 일반적인 개념이었다. 사실상 오늘날에도 대다수 젊은 이성애자 여성들의 경우 배우자가 될지 모를 남성과 일, 시간, 수입 분리 등을 논의하는 일은 연인 사이의 로맨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여성의 삶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이 부분을 미리 논의해 합의를 이뤄놓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를 거부하는 남성과는 장기적 관계를 맺지 않는 게 좋다. 자본과 돈의 통제권을 경시하고 낭만적으로만 접근하는 결혼 생활은 여성에게 대부분 불리하게 작용하며 크나큰 상처를 입힌다.


    분배

    젠더와 인종별 임금 격차 설명

    20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서구, 특히 미국은 소득 불평등 심화를 혹독히 경험했다. 젠더별 임금 격차는 감소했으나 백인 위주였다. 유색 인종은 여전히 인종별 임금 격차가 30~50퍼센트 수준을 유지했고 흑인의 경우 그 차이가 더 두드러졌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게 노동은 재화와 서비스 생산에 사용하는 상품으로 정의됐다. 이는 모든 노동이 본질에서 같으며 노동이라는 상품이 포함하는 인적 자본 수준, 즉 교육이나 기술이나 경험에서만 차이가 있음을 의미했다. 과거 정치경제학자들의 추론대로 노동자에게 생계 기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밀려났고, 이 새로운 사고의 틀에서는 노동자가 한계생산성에 따라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됐다.


    기나긴 역사적·경제적 억압과 배제에 근거를 둔 노동 임금의 젠더별·인종별 격차에 대한 분석은 이제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해됐으며, 이들의 임금 격차는 생산성과 노동 수요 사이의 차이로 축소됐다. 낮은 임금은 낮은 생산성 또는 제공되는 재화 및 서비스의 낮은 가치를 의미한다는 스미스 웹과 프랜시스 Y. 에지워스의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 인과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여성 경제저술가들의 견해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정확히 이 지점을 지적했다. 여성과 유색인종이 장기간에 걸쳐 고임금 일자리에서 배제됐고, 임금·무임금 농업과 가사 노동, 그리고 육아, 청소, 간호(간병), 교육 등 노동을 화폐화·시장화한 분야에서 여성의 대표성이 과도하게 부각했다는 사실은, 합리화된 모성 숭배나 직업 훈련 기회 부족 같은 다른 차별 요인과 더불어 젠더별·인종별 임금 격차의 주된 원인으로 드러났다.


    젠더별 임금 격차에 대한 설명은 이제 노동자의 ‘인적 자본’에 집중했다. 노동자의 인적 자본은 주로 교육을 통해 향상했다. 그래서 교육은 훗날 더 높은 소득이 보상해줄 투자로 여겨졌다. 나아가 경제학자들은 교육 및 훈련에 따른 기술과 노동 기간에 따른 경험 즉, 숙련도 수준을 기반으로 한 인적 자본 개념을 대입해 여성과 남성 사이 그리고 인종·민족 사이의 임금 격차를 설명했다.


    신고전주의 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활동하는 경제학자들은 자녀 수와 직접 육아 여부 등의 변수를 끌어들여 젠더별 임금 격차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는 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7~12퍼센트의 젠더별 임금 격차는 ‘차별’이라는 꼬리표 아래 사회학 연구로 밀려나 그 자세한 연구가 사회학자들에게 맡겨졌다. 최근에는 젠더별·인종별 임금 격차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기업의 구별 짓기 문화, 차별적 정책, 여성 노동 지원 부족, 이중 노동 시장 등 정책적·제도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하고 있다. 일터를 둘러싼 규범과 규정을 접한 많은 여성 경제 저술가와 경제학자 및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 특히 유색인종 경제학자들은 젠더별·인종별·계급별 임금이 권력 메커니즘, 착취, 차별, 직업 분리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앞으로의 경제학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여성 경제 저술가들과 경제학자들은 현실이라는 무대 한복판에서 소녀와 여성, 활동가와 대중을 위해 글을 썼다. 반면 정치경제학자들은 주로 입법자, 정부, 기업가, 그리고 다른 경제학자들을 위해 썼다. 이는 여성과 남성 경제학자 모두의 언어, 개념,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전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국가 권력자들은 남성 중심적 시각의 한계에서 비롯된 경제학의 일방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의 관점을 취하면 경제 발전의 다른 역사, 남성 중심 경제적 사고방식의 문제점, 경제학에서 간과한 여러 측면을 파악할 수 있다. 여성이 경제에서 배제된 역사는 수 세기는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에, 여성의 삶을 크게 좌우하고 정치경제학과 이후 경제학에서 여성을 배제하게 된 요인으로 여성 경제 저술가들이 젠더 문제를 지적한 것은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제도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남성과 여성이 다루는 주제 역시 그 차이가 크게 줄었으나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반쪽짜리 경제학의 좁은 터널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최근 유색인종 여성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자라는 직업을 선택할 때 직면하는 어려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자 그룹은 국제페미니스트경제학협회와 전미경제학회 회원들에게 여전히 현장에서 자행되는 젠더차별과 인종차별을 인지하고 이에 대응하는 정책을 촉구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다양성이 객관성을 더 높이고 ‘터널 시야(tunnel vision)’가 객관적 지식 생산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면 경제학자들의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기득권 사회의 경제적 이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류 경제학의 뿌리 깊은 지배력은 그 자체로 더 광범위한 이론적 변화를 막는 보루를 형성해왔다. 경제학계 변화에 별 관심이 없거나 엮이기 싫은 경제학자들은 뉴이코노믹씽킹(New Economic Thinking)이나 리씽킹이코노믹스(Rethinking Economics)와 같은 연구 기관을 학계 외부에 조직했다.


    지구 온난화, 전염병, 권위주의 경향, 대규모 이민 등 현재의 위기 앞에 경제학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경제 시스템의 신속하고 근본적인 변화, 즉 주류 경제학이 다루기에 준비가 부족한 변화를 예상하고 해결할 필요성이 있음을 뜻한다. 물론 주류 경제학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광범위한 주제에 적용하고 관련 연구를 흡수하면서 덩치를 계속 키우는 ‘다원적 경제학 접근법(pluralist approach to economics)’을 확대하면서 기존 경로를 유지하려 들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쁘지 않다. 여성과 유색인종 문제와 관련해 젠더 및 가족 경제학 분야에서 하는 것처럼 임금 격차, 실업, 차별 등의 문제를 신고적주의적 연구로 끌어오면 된다.


    그래도 더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젠더, 인종, 계급, 지위 및 자연과의 관계가 경제와 경제사상 발전에 공헌한 역사를 명확히 직시하고 경제와 지속 가능한 개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장려할 때 이를 포함하는 것이다. 모든 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원의 공급, 구성, 효율적 사용을 다루는 방식을 설명할 때 이와 같은 경제 개념, 이론, 내용, 역할로는 우리의 관점을 제한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 순간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신들의 분야는 물론 그 이상을 발판으로 경제 분야 연구와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특히 젠더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 성 소수자 문제, 글로벌 불평등, 지속 가능 개발 등 세계를 구성하는 것과 관련 있는 모든 사회운동과 지식의 흐름 및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듯 지치지 않는 열정과 의지가 케케묵은 문제와 전례가 없던 문제에 대한 더 나은 해답을 찾고 이를 사실과 과학적 분석, 그리고 건전한 토론의 장으로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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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