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
 
지은이 : 제이컵 골드스타인(역:장진영)
출판사 : 비즈니스북스
출판일 : 2021년 03월




  • 저자는 역사적으로 새롭게 탄생한 부의 기회 뒤에는 항상 경제를 쥐고 흔드는 돈이 있었다고 말하며, 미래의 돈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싶다면 과거부터 차근차근 짚어보면 현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어떤 것은 돈이 되고 어떤 것은 돈이 되지 않았는지, 돈이 어떻게 부의 지도를 재편했는지, 격변의 순간 어떻게 부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는지가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겨있다.


    돈의 탄생 돈의 현재 돈의 미래


    물물교환에서 돈이 탄생했을까?-돈의 기원

    돈의 발명

    1860년경 프랑스의 가수 마드모아젤 젤리는 남동생과 두 명의 가수와 함께 월드 투어에 올랐다. 그들은 화폐가 두루 쓰이지 않던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푯값을 대신해 섬사람들이 제공할 수 있는 물품이면 무엇이든 받기로 하고 콘서트를 열었다.


    콘서트는 대성공이었다. 섬의 촌장이 직접 콘서트에 왔고, 표는 무려 816장이나 팔렸다. 그녀는 이모에게 보낸 편지에 푯값으로 받은 물품들에 대해서도 썼다. “이게 제가 섬사람들에게 푯값으로 받은 물품들이에요. 돼지 3마리, 칠면조 23마리, 암탉 44마리, 코코넛 5,000통, 파인애플 1,200통, 바나나 120다발, 호박 120통, 오렌지 1,500개.” “근데 이모, 어떻게 여기서 이 물품들을 되팔아서 현금으로 바꾸겠어요. 내일 인금 섬에서 투기꾼이 이 섬으로 들어와서 현금을 지불하고 이 물품들을 사기로 했어요.”


    1864년에 마드모아젤 젤리가 쓴 편지는 화폐의 역사에 관한 프랑스 서적의 각주로 인용했다.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제번스는 이 각주가 마음에 쏙 든 나머지 10년 뒤에 쓴 저서 <화폐와 교환 메커니즘>에서 그녀의 편지로 서문을 열었다. 제번스는 마드모아젤 젤리의 경험에서 ‘물물교환은 형편없다’ 는 교훈을 얻었다.


    제번스는 물물교환은 ‘욕망의 상호 일치’가 이뤄져야 성사되기 때문에 골치 아프다고 했다. 제번스는 인류가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강하고 희귀한 무언가로 가치를 표시하기로 합의하면서 물물교환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인류는 화폐를 발명해 물물교환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100년 전에 이와 동일한 주장을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천 년 전에 이와 유사한 이견을 제시했다.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은 명쾌하고 강력하며 직관적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화폐가 탄생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대체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사냥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채집해 식량을 조달했고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약간의 거래가 이뤄졌지만, 그것은 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철저한 기준에 따라 행해지는 공식적인 의식의 일부였다. 화폐가 물물교환에서 시작됐다는 주장과 달리 이러한 공식적인 의식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과거 많은 문화권에는 어느 집안의 자제 혹은 규수와 결혼하고 싶거나 누군가의 배우자를 죽였다면, 그 대가로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줘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게다가 무엇을 줘야 하는지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대체로 소를 지불해야 했고, 조가비를 줘야 하는 지역도 있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인 바누아투에서는 특히 엄니가 큰 돼지만 제물로 바쳤다.


    결혼을 위해 조가비가 필요하고 종교 의식을 위해 엄니가 긴 돼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중 일부는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조가비나 엄니가 긴 돼지를 미리 확보해 뒀다. 이것들을 찾는 사람들이 곧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가비나 엄니가 긴 돼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이 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폐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화폐에 근접한 ‘초기 화폐’였다.


    바누아투에는 엄니가 긴 돼지를 대여해 주는 정교한 거래망이 형성됐고, 이자는 돼지 엄니의 성장 속도를 기준으로 책정됐다. 이렇듯 화폐는 단순히 가치를 환산하고 편리하게 보관하기 위해 고안된 교환 수단이 아니다. 화폐는 피와 욕망으로 묶인 사회 구조의 핵심 요소다. 그러니 사람들이 돈에 환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을 돈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자본주의의 탄생

    은행원이 된 금세공업자들

    17세기 영국 화폐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주화가 발명된 이후로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이용해 주화에서 금속 부스러기를 얻어 내려 애썼다. 금이나 은 부스러기를 조금이라도 얻어 내려고 주화의 가장자리를 깎거나 포대에 넣고 마구 흔들었다. 구매자와 판매자는 항상 주화가 원래의 값어치를 하는지 아니면 은 함량이 충분치 않아서 원래의 값어치를 못하는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계약서에는 금액뿐만 아니라 지불 주화의 전체 무게까지 명시해야 했다. 역사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주화는 화폐보다 귀금속에 가까워졌다.


    금세공업자들이 얼떨결에 이 문제의 해결사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본의 아니게 화폐와 관련해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를 안겨 주게 된다. 부자들은 가끔 금세공업자들에게 금과 은을 맡겼다. 이 과정에서 금세공업자들은 수백 년 전에 쓰촨성 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과 은을 맡긴 사람들에게 일종의 예탁 증서를 줬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팔 때 이 증서를 돈처럼 사용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17세기 금세공업자들과 현대의 은행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금세공업자들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세공업자들에게 금이나 은을 실제로 맡기지 않아도 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자와 함께 언제까지 갚겠다는 약속만 하면, 금세공업자들은 실제로 금이나 은을 맡기지 않은 사람에게도 증서를 발행해줬다. 사람들은 그 증서로 런던 거리에서 물건을 샀다. 그러자 갑자기 런던에 통화량이 증가했다. 금세공업자들이 난데없이 지폐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국의 화폐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고 있었다.


    한편 오늘날 은행에서 하는 일은 400년 전 영국의 금세공업자들이 했던 일과 거의 유사하다.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예탁하면 은행은 예탁금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준다. 대출자들은 이렇게 빌린 돈을 다른 은행에 맡길 수도 있다. 그러면 대출자들이 은행에 맡긴 그 돈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대출된다. 이런 시스템은 ‘부분지급 준비금 제도’라고 불린다. 이런 시스템으로 인해 전 세계 통화량은 늘어난다.


    금세공업자들은 영국의 금융업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동시에 통화량 부족 문제를 해소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만약 증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동시에 금을 찾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일이 벌어지면 금세공업자뿐만 아니라 자신이 맡긴 금을 되찾아 가려는 사람들도 망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거래 은행에서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는 현상을 ‘뱅크런’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뱅크런이 발생하면 은행권과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망한다.


    돈을 돈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신뢰’다. 자신이 가진 지폐나 주화로 내일이나 다음 날 그리고 내년에 무언가를 구입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지폐와 주화는 화폐로서 가치를 지닌다. 영국인은 정부를 신뢰하려고 했지만 정부가 주조한 주화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눈을 돌려 금세공업자들에게 의지했지만, 금세공업자들도 그들을 실망시켰다. 영국인이 화폐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대상을 발견하기까지는 한 세대가 더 지나야 했다.



    그 무엇도 화폐의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 세상-금본위제도의 폐지

    금에 대한 환상

    금본위제도는 화폐로서의 그에 대한 환상에 관한 이야기다. 자연적이고 객관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화폐, 인간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운 화폐, 그리고 정부의 개입이 없는 화폐를 꿈꾸던 사람들이 금을 화폐로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과 금본위제도와의 러브스토리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우선 데이비드 흄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그는 모든 것에 회의적인 18세기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탐구했고, 그의 초기 이론은 금본위제도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흄이 활동했던 시대에 국가들은 화폐와 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국가가 부유해지려면 금을 가능한 한 많이 축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역 흑자를 내면 많은 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쉽게 말해서 수입하는 것보다 더 많이 수출하는 것이 부를 쌓는 좋은 방법이었다. 이를 위해서 국가는 수입을 제한하거나(수입 쿼터제) 수입품에 더 많은 세금(관세)을 부과해야 한다고 믿었다. 일부 현재 정치인들이 무역에 대해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


    하지만 흄은 이런 주장들이 모두 틀렸다고 했다. 흄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고 실험을 했다. 하룻밤 사이에 영국이 보유한 금과 은의 5분의 4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가정하자.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금화와 은화가 귀해졌기 때문에 금과 은의 가치가 이전보다 네 배 뛴다. 이전에 은화 네 닢으로 밀 1부셰을 샀거나 일주일치 일당을 지급했다면, 이제는 은화 한 닢이면 충분하다.


    영국에서 그리 큰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영국의 물품들이 갑자기 엄청 저렴해졌다고 느낀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영국으로부터 서둘러 밀을 수입한다. 대량의 밀이 해외로 수출되면서 영국에서 은화가 쌓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상황도 일어날 수 있다. 영국에서 금과 은의 양이 갑자기 네 배 증가하면 물가가 상승할 것이다. 그러면 영국 소비자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좀 더 저렴한 물품을 앞다퉈 사들인다. 결과적으로 금화와 은화가 영국 밖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어떤 상황이든지 물가와 무역은 자동적으로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를 두고 흄은 ‘자연의 보통 섭리’라 불렀다. 또한 한 국가가 은과 금을 쌓아 두려는 시도는 바다의 어느 쪽을 다른 쪽보다 높이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어디로 흐르든지 바닷물은 수평을 이룬다.” 국가는 금을 쌓아 두려고 하지 말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흄은 덧붙였다.


    1776년 스미스는 <국부론>을 발표했다. 현대 경제학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의 책은 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보였다. 스미스는 국가는 “금과 은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관세를 높여 부를 추적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무엇이든지 재화나 서비스를 가장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사람들에게서 구입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이롭다.”라고 덧붙였다.  


    금본위제도에 대한 반론

    영국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국이었고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다. 많은 국가들이 오랫동안 주화를 주조할 때 들어가는 금과 은의 적정한 비율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하나둘 은을 포기했다. 1800년대 후반이 되자, 모든 주요 경제국들이 사실상 금본위제를 채택했다.


    많은 국가에서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경제적 문제가 대부분 해소되기 시작했다. 동일한 비율로 모든 국가의 통화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었고, 각 통화의 상대적 가치는 동일했다. 그 덕분에 국제 무역이 더 용이해졌다. 본질적으로 국제 금본위제도의 채택은 단일 국제 통화의 등장과 같았다. 증기선, 철도 그리고 전신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과 함께 금본위제도가 거대한 세계화 물결을 일으켰다. 스미스와 흄의 꿈이 실현됐다.


    전 세계 국가들이 점차 국제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자 19세기 후반의 세계 경제가 세계의 금 공급량보다 더 빨리 성장했다. 사람들의 소비도 가용한 금의 양보다 더 빨리 증가했다. 그 결과, 금에 대한 수요는 증가했고 금값은 치솟았다. 금본위제도에서 금이 비싸지면 물가는 하락한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물가와 동일한 수준으로 하락하기 때문에 소비 규모는 이전과 변함이 없다.


    1873년, 미국이 금은본위제도에서 금본위제도로 갈아타자 물가는 20년 동안 계속 하락했다. 당시 농민은 주로 빚을 내서 농토를 확보했다. 그들은 금본위제도와 뒤이은 물가 하락으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졌다.


    1900년에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금본위법에 서명했다. 금본위법은 한 세대 동안 모두가 당연하게 여겼던 사실, 즉 미국이 금본위제도 국가임을 공식화했다. 매킨리가 또다시 브라이언을 상대로 재선에 출마했을 때, 금전 위에 서 있는 매킨리와 바로 옆에 상업과 문명이란 글이 적혀 있는 선거 포스터가 등장했다. 윌리엄 매킨리, 즉 금본위제도가 다시 승리했다.


    화폐착각 위에 세워진 시스템

    어빙 피셔는 예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였다. 1896년 대선 때 피셔는 젊은 교수였다. 그 역시 거의 모든 미국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도 금본위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니는 도덕적 분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피셔는 좀 더 지적이고 엄격한 이유에서 금본위제도를 지지했다.


    브라이언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에 피셔는 <가치 상승과 이자>를 발표했다. 그는 물가가 오를 것으로 기대될 때 사람들은 보상 심리에서 더 높은 이자를 붙여 타인에게 돈을 빌려준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사람들이 물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때 이자는 하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금본위제도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은 실제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피셔의 주장이다. 자신들이 갚아야 할 부채에 대해서 부평을 늘어놓는 모든 농민은 물가가 하락하는 대신 상승한다면 더 많은 이자를 내게 된다. 결국 은이 돈이든 아니든 그들이 부채를 상환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감당해야만 하는 노동의 양은 변함없다.


    피셔는 달러의 가치가 변하면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집착적으로 매달렸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과 같은 경제 이론을 활용해 자신의 회사 종업원들의 임금을 계산했다. 물가가 오를 때 임금을 올렸고, 물가가 내릴 때 임금을 내렸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종업원들의 임금 수준은 변함없었다. 임금 인상은 별도로 처리했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피셔는 이러한 사고의 오류를 주제로 <화폐 착각>을 썼다. 우리는 오늘날의 1달러가 1년 전의 1달러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착각이다. 연봉이 1퍼센트 삭감되고 물가가 2퍼센트 하락한다면, 사실상 소득 수준이 오른 것이다. 1퍼센트 삭감된 급여로 이전 급여보다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피셔에게는 해결책이 분명했다. 그는 화폐를 다시 정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달러를 정량의 금 대신 1달러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의 정량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같은 양의 빵, 버터, 소고기, 베이컨, 콩, 설탕, 옷, 연료 등 생필품을 살 수 있는 1달러를 원한다.” 라고 썼다. 그의 생각은 기발했고 오늘날 통화량이 조정되는 방식에 아주 근접했다.


    피셔는 훌륭한 경제학자이지만 주식 시장을 완전히 잘못 평가한 경제학자로도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화폐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옳았다. 1929년 주식 시장의 붕괴는 분명 굉장히 나쁜 조짐이었다. 하지만 대공황을 일으키기에 주식 시장의 붕괴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전 세계 경제를 깊은 수렁에 빠뜨린 장본인은 금본위제도와 심각한 불안정성이었다.


    공평하게 말하면 세계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것은 금본위제도만은 아니었다. 화폐를 쥐락펴락하고 금본위제도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강력한 기구들에도 책임이 있었다. 그 기구는 바로 중앙은행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국의 연방준비은행이었다.



    유로화부터 비트코인까지 현재진행형인 돈의 변신-새로운 화폐의 탄생

    과격한 꿈을 꾸는 전자화폐

    화폐는 멋진 기술이다. 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지폐 몇 장을 건네주면 그는 내 품에 물건 한 아름을 안겨 준다. 그는 나에 대해서 무엇도 알 필요가 없다. 나 역시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와 내가 주고받은 화폐 자체가 기록이기 때문이다. 모든 돈이 지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예금 계좌에 있는 돈은 은행의 디지털 원장에 적힌 내 이름 옆에 찍혀 있는 숫자에 불과하다.


    1980년대 초반 컴퓨터는 저렴해졌고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컴퓨터 과학자 데이비드 차움은 그동안 추적할 수 없었던 익명의 현금이 추적 가능한 원장 화폐로 대거 이동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미국 컴퓨터학회가 발행하는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서류 사회의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서류 사회에서는 컴퓨터로 개인의 일상적인 소비 활동 데이터를 수집해 개인의 생활방식, 습관, 행적 등 개인적인 정보를 추론해 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컴퓨터화로 인해 우리의 기본적인 자유 중 일부가 위협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그는 버클리대학교에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땄고 비밀스런 코드를 공부하는 암호화와 보안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였다. 기술직으로 몇 년간 일을 한 뒤에 그는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것은 디지털 세상에서 소통하고 신분을 증명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그 시스템 덕분에 전자상거래가 완전히 새롭게 바뀐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개발한 것은 바로 전자화폐였다.


    기술의 발전이 탄생시킨 화폐

    1989년, 데이비드 차움은 학계를 벗어나 사생활을 보호하는 기술을 개발해 떼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우선 지난 10년간 학계에 몸담으면서 따낸 특허들을 가지고 디지캐시를 설립했다. 그가 개발한 전자화폐는 금융거래를 지원하면서 은밀한 감시로부터 세부적인 거래 내역을 보호하는 암호화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


    차움은 은행이 전자화폐를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을 모르는 상태에서 전자화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 냈다. 이것이 기발한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전자화폐로 물건을 살 수 있지만 금융 거래의 일거수일투족을 디지털 원장에 기록하는 빅브라더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전자화폐는 디지털 익명 화폐였다.


    몇 년 후, 갑자기 모든 사람이 전자화폐가 차세대 혁신 기술이라고 꼽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와이어드> 매거진은 “e-머니가 정말 등장할까? 예상대로다. 경화는 수천 년 동안 유용하게 쓰였지만 이제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나 다름없다.”란 글이 실렸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가 디지캐시를 윈도우에 통합시키기 위해 차움에게 수백만 달러를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차움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씨티은행에서 그에게 손을 뻗고 수년 동안 자체적으로 전자통화 시스템을 개발했다. 연방 정부는 비밀리에 수년 동안 씨티은행이 개발한 전자화폐를 시험했다. 이제 기술은 마련됐다. 대형 금융 기관이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이제 디지캐시에 남은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자화폐를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사생활 보호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으레 하는 대답과 달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생활 보호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음을 몸소 보여줬다. 사람들은 온라인 쇼핑을 시작했지만 굳이 귀찮게 전자화폐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람들은 신용카드를 애용했다. 신용카드는 추적이 가능하고 완전한 비밀도 아니고 수수료가 붙는다. 물론 엄청 편리하긴 하다.


    디지캐시는 1997년 파산했다. 기업들이 개발한 전자화폐는 실패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의 프로그래머 단체에서는 차움의 아이디어를 훨씬 더 과격한 비전의 핵심 아이디어로 삼았다. 그들은 단지 현금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현금보다 더 좋은 전자화폐를 상상했다. 현금의 익명성을 보장하지만 무겁게 여기저기 들고 다녀야 하는 지폐와 주화가 지니는 제약 요인이 전혀 없는 해로운 종류의 전자화폐를 꿈꿨다. 그들은 전자화폐가 국경없는 자유주의자들의 천국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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