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미래에 던지는 빅 퀘스천 10
 
지은이 : 이영탁 외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19년 04월




  • 지금은 ‘뉴 노멀’의 시대다. 과거 경험이 더는 미래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그리고 많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근본 변화만이 해결책이다. 《당신의 미래에 던지는 빅 퀘스천 10》은 호모데우스와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인간의 실체에 대해 묻고, 앨빈 토플러의 ‘구세주 콤플렉스’ 등을 통해 왜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한지 설파한다. ‘거대한 소수’에서 ‘작은 다수’의 세상으로 바뀌어가는 권력이동, 직접민주주의 형태에 더 가까워지는 ‘뉴 노멀의 시대’, 인구론과 기계 시대의 인간상에 대한 성찰도 놓치지 않는다.


    당신의 미래에 던지는 빅 퀘스천 10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인간의 존재와 운명에 관한 철학적 함의를 담은 대표적인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그림일 것이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보관된 그림의 제목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다. 폭 3.7미터, 높이 1.4미터에 달하는 대작인데, 고갱이 직접 붙인 제목에는 특이하게도 의문부호가 없다. 동양식으로 보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이 이 그림과 제목 속에 함축돼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 들고 괴로워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모두 담겨 있어 볼 때마다 감동을 안기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주는 의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인생이라는 학교에 입학한다. 스스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워가는 것이다. 이 학교에는 학년이나 학급이 따로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죽으면 비로소 졸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인생 학교에서 평생 인생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지금 세계 인구가 70억 명 정도라고 하지만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다가 사망한 사람의 누적 합계가 1천억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인생이 무엇이냐는 명제에 대해 나름대로 설파했지만, 정작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정답은 없다. 이것만 봐도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생로병사 과정을 경험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형태와 방식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의 마음처럼. 아마도 그런 차이 속에 인간의 실체가 녹아 있을 것이다.


    개인과 분인(分人)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론이라는 과학의 틀을 활용해 인간의 원형질은 쪼개‘이기적 유전자’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을 생명의 원형질인 유전자를 보존하고 번식시키기 위한 로봇으로 묘사했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그 유전자와 로봇은 분리가 불가능한 동일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심리적 내면은 어떤 것일까. 하나의 단일한 존재일까, 아니면 쪼개고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주제를 위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의 세계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대신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1975~)의‘분인(分人)’개념을 들여다보자. 그가 2012년에 발표한 <나란 무엇인가 - 개인에서 분인으로>는 이른바 ‘분인론’의 이론 전개와 시사점을 제시한다.


    개인과 분인의 차이는 이렇다. 우선 개인의 개념이다. 개인을 뜻하는 영어 individual의 구성은 in + dividual로, devide(나누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dividual에 부정접두사 in이 붙은 단어다. individual의 어원을 직역하면 ‘불가분’, 즉 ‘더는 나눌 수 없다’라는 의미이며, 이 말이 오늘날의 ‘개인’이라는 의미로 정착된 시기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의 접어든 후였다.


    더는 나눌 수 없는 존재로서의 개인은 인간의 육체를 떠올리면 당연한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가‘인격’으로 부르는 인간의 내면은 어떨까. 몸처럼 더는 나눌 수 없는 단일한 실체요, 개념일까? 히라노 게이치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면 회사에서 일할 때, 가족과 함께 있을 때, 오랜만에 동창생가 술 한잔할 때, 연인과 단둘이 사랑을 속삭일 때 등등, 이런 상황에서 나의 실체는 한결같이 하나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이나 장면에 따라 인간은 서로 다른 얼굴로, 마음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개인이라는 말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분인(dividual)’이라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한다. 애인과의 분인, 부모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친구와의 분인…. 이런 분인들은 반드시 동일하지 않으며, 상대와의 반복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서 형성되어가는 패턴으로서의 인격에 해당한다. 한 명의 인간은 여러 분인의 네트워크이며, 거기에 ‘진정한 나’라는 중심 같은 것은 없다. 내면의 여러 분인들이 그때그때 복합된 비율이 인격과 개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대인관계에 따라 몇 가지 분인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사람의 됨됨이(개성)는 여러 분인의 구성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분인의 구성 비율이 바뀌면 당연히 개성도 바뀐다. 개성이란 절대 유일 불변한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은 모두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산다고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을 놓고 “저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반응도 단일한 인격이나 개성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보다는 육체는 나눌 수 없을지라도 인격은 나눌 수 있다고 받아들이면 인간의 실체를 이해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왜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한가?

    미래가 중요한 이유

    인생은 그렇듯 소중하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그토록 그리던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은 지나고 나면 다시 오지 않을 과거가 될 줄 알면서도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 문제 가운데 하나가 미래를 단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라는 점이다. 과연 그런가. 미래는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미래를 생각해보려고, 가보려고, 만져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때로 몽상가나 허풍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인류 역사에서 승자로 남은 인물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미리 예상하고 준비했던 사람들이었다.


    사실 과거에는 인간의 삶에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평생 나무하고 농사짓다가 죽었다. 너나없이 못살았고 못 먹었다. 갑자기 신분이 바뀌거나 큰돈을 번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쉽게 말해 ‘어제 = 오늘 = 내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세상인가. 어제와 오늘이 명백히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오늘과 내일은 어떤가. 어제와 오늘의 차이보다 훨씬 크고 빠른 변화가 발생하고 있지 않은가.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속도는 거리와 시간을 보장하지만 안전은 담보하지 못한다. 미래 사회는 변화의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주변을 더 넓게 살피고 시야를 더 멀리 내다봐야 한다.


    성공의 역설

    구세주 콤플렉스와 유사한 맥락에서 우리가 자주 빠져드는 함정이 있다. ‘과거에 이런 방식으로 성공했으니 이번에도 통할 거야’라는 인식이다. 바로 성공의 역설(Paradox of Success) 이다. 특히 성공가도를 질주한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내가 거둔 실적과 경험이 엄연한데 더는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 성공의 역설이라는 함정이 발밑에 조용히 펼쳐진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전직 대통령 한 분이 자주 언급했던 “내가 해봐서 아는데…”같은 표현이다. 성공의 역설이 가르치는 핵심은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믿고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젠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은 더욱 다르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도 다르다. 환경이 다르고 조건도 다르다. 어제의 성공 방식이 오늘도, 내일도 유효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


    조직의 리더가 과거의 성공전략에 집착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실증적인 연구도 있다.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 피노 아우디아(Pino Audia) 교수는 기업의 리더가 과거의 성공 전략에 집착할수록 새로운 환경이나 제도 변화 이후 실패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변화가 급격할수록, 규모가 커질수록 과거 방식에 집착하다 낭패를 보게 된다는 연구 결과는 성공의 역설에 너무 쉽게, 자주 빠져드는 우리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라 하겠다.



    뉴 노멀(New Normal) 시대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금융 위기와 뉴 노멀

    ‘뉴 노멀(New Normal)’은 지난 2008년 당시 세계 최대 채권운용사 핌코(Pimco)의 최고 경영자 모하메드 엘 에리언(Mohamed A. El-Erian, 1958~)이 펴낸 <새로운 부의 탄생(When Market Collides)>에서 금융 위기 이후 새롭게 나타난 현상들을 지칭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저성장, 규제 강화, 소비 위축, 미국의 영향력 감소 등을 위기 이후에 ‘새롭게 정상이 된 현상(New Normal)’으로 지목했다.


    한국도 뉴 노멀의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경제성장률 자체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2퍼센트대로 떨어지며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성장률이 하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고용과 소비 위축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에 급격한 출산율 하락과 고령화 현상이 겹치면서 복지와 교육의 기준이나 목표까지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제 뉴 노멀은 비단 경제 분야뿐 아니라 정치, 사회, 국제관계 등에 새롭게 형성되는 현상이나 질서를 가리키는 포괄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여기에 가속화되고 있는 과학기술 혁신의 물결까지 더해지면서 미래를 바꿔나가는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래의 교육, 교육의 미래

    교육은 그동안 한국의 고도성장을 실현시킨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국제사회에서도 천연자원이 빈약한 한국이 단기간에 거둔 성과가 교육으로 키워낸 인재 덕분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훨씬 많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교육 현실과 미래의 교육을 보는 시각에는 칭찬 못지않게 비판적인 시각이 뒤섞여 있다.


    교육이 전달하는 지식의 개념은 이미 달라졌다. 그동안은 지식이 교사의 머릿속이나 교과서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 이후 인터넷과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지식의 근본 개념이 바뀌고 있다. 이제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더는 선생님의 머릿속이나 교과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 중에는 과거의 지식이 많다.


    미래의 지식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사이버공간에 존재한다. 몇 번의 클릭으로 함무라비 법전이나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읽어볼 수 있는 세상이다. 매일 새로운 지식과 정보들이 생겨나거나 실시간으로 수정되고 업데이트된다. 따라서 미래의 지식은‘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 공간에 존재하는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빨리 찾아내 제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필요한 지식을 제때 찾아내고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노하우가 바로 미래의 지식이다.


    교육과 지식의 뉴 노멀이 확산되는 세상에서 교육의 공간과 제도를 대표하는 학교와 학제도 바뀔 수밖에 없다. 평균수명이 계속 연장되고 새로운 지식 정보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세상에서 교육은 초중고와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평생교육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학습 공간은 사이버 세상으로 넘어가고 있다. 유비쿼터스(Ubiquitous) 기술에 가상현실과 인공지능 기술이 접목되면서 언제 어디서든 시공간을 넘나들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교사나 교수들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즉 교사의 역할은‘가르치는 것’에서‘지도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교사 = 스승’이라는 개념 속에 살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스승인 선생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제자들을 이끌어주는 신 같은 존재가 더는 아니다. 선생님은 교사라기보다는 가이드(Guide) 나 멘토(mentor), 도움을 주는 사람(Facilitator 또는 Helper)등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사이버공간을 통해 우수한 교육자 한 사람이 전 세계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교육 비용은 대폭 절감될 수 있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들이 사이버공간에서 무료강좌를 속속 개설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결국 대부분의 사이버 교육이 무료화되는 것은 물론 대학 자체의 대대적인 통폐합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학제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이뤄질 전망이다. 지금은 학생들 간 학력 격차가 커도 매년 한 단계씩 다음 학년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앞으로는 학생들의 선호나 소질 등을 가려 수준별 교육이 이뤄지게 될 것이다. 국어는 잘하지만 수학은 싫어해서 진도가 떨어지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경우 수학은 중학생 수준으로, 국어는 고등학교 3학년 수준을 택해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학제는 공급자 위주의 우리 교육이 수요자 위주로 전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변화이기도 하다.


    미래 전문가들은 다가올 미래에 우리 교육이 직면할 특성을 개별화 교육(personalized education), 적시 학습(just-in-time learning),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등 세 가지로 요약한다. 먼저 개별 학습이란 학생 개개인의 지적 수준과 소질, 그 사람이 배우고 싶어 하는 분야 등을 감안해 적절한 지식을 제공하는 맞춤형 교육을 의미한다. 적시 학습은 특정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제때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교육을 말한다. 평생 개인별로 필요한 학습 욕구를 사이버공간을 활용하는 e-Learning을 통해 실시간으로 만족시켜주는 학습이 바로 적시 학습이다. 이 같은 개별화 교육과 적시 학습을 교사 몇 명이 감당할 수는 없다. 수많은 학생들이 개별적인 이유로 시공간에 관계없이 던지는 질문을 어떻게 교사들이 모두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바로 집단 지성이다.


    이미 우리는 언제든 필요한 지식을 네이버 지식인이나 위키피디아 같은 집단 지성 플랫폼을 통해 입수하고 있다. 개별화 학습과 적시 교육을 집단 지성이 뒷받침하는 미래 교육이 눈앞에 다가선 것이다.



    기계에 무시당하는 인간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의 마지막 발명(Final Invention)

    지난 2014년에 제작된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어 전쟁의 흐름을 바꾼 영국 천재들의 스토리를 다른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라는 인물로,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제목은‘튜링테스트’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판별법들 뜻한다. 그는 제2 기계시대의 총아인 컴퓨터가 언제가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은 후 결국 추월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이미 70여 년 전에 내다본 인물이다.


    당시 튜링의 암호 해독팀에 수학과 통계학 전문가로 참여한 어빙 존 굿(Irving John Good, 1916~2009)은 1965년에 초지능 기계의 가능성을 다룬 글을 썼다. 다음과 같은 요지다. “초지능 기계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의 지적 능력을 훨씬 초월하는 기계로 정의한다. 기계를 만드는 능력이 인간의 능력이므로 초지능 기계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기계들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만약에 이 초지능 기계가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인간에게 말해줄 정도로 온순한 것이라면, 이 첫 번째 초지능 기계는 인간의 마지막 발명이 될 것이다.”


    굿은 인간이 만든 첫 번째 초지능 기계가 바로 인간의 마지막 발명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50여 년 전의 이 예측은 이제 점점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굿이 예견한 지능의 폭발이다. 초지능 기계는 자기보다 우월한 초지능 기계를 만들 수 있고, 이 기계는 또 자기보다 개량된 기계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반복되면 머지않아 지능의 폭발이 발생한다. 바로‘지수함수적 발전’이다. 기계가 모든 면에서 인간을 까마득하게 앞지르는 상황이 닥치는 것이다.


    이런 단계에서 인간은 더는 할 일이 없어진다. 더 이상의 발명이나 혁신이 의미가 없으며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더구나 초지능 기계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인간을 멸종시킬 무기나 질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어빙 존 굿이‘초지능 기계가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인간에게 말해줄 정도로 온순한 것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초지능 기계가 등장하다면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경고처럼 인간이 악마를 소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하고 살까

    SF(공상과학) 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스페이스 오디세이(A space Odyssey)> 시리즈의 원작자인 영국 소설가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18)는 “인간의 미래 목표는 완전한 실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음껏 놀 수 있기 위해서.”


    클라크가 말한 ‘완전한 실업’은 인간이 꿈꾸는 희망적인 미래를 담고 있다. 신이 되는 인간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은 기계가 모두 해결해준다면 더는 노동이나 발명ㆍ혁신 등을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만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쾌락이나 감동, 창의성 높은 유희에 몰두하면 된다.


    물론 반대일 가능성도 있다. 인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발명이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로 기울 경우를 말한다. 단지 일자리 문제를 떠나 인류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완전한 실업은 먼 미래의 문제이다. 그러나 급속한 기술혁신, 과학기술 발전이 인간의 일자리에 도움보다는 위협이 되고 있다는 우려는 점점 커지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2018년 펴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일자리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육체적 능력과 인지적 능력 등 두 가지 유형의 능력이 있는데, 과거에는 인간과 기계가 주로 육체적 능력 면에서 경쟁했을 뿐 인지력에서는 인간이 월등하게 앞섰던 것으로 분석한다. 그런데 이제는 기계 학습과 딥 러닝으로 무장한 AI가 이런 분야에서도 인간을 따라잡고, 일부 분야에서는 추월하기 시작했다. 우리 자식이나 손자 세대에는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인간의 행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사는가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인류가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인 것은 생각하는 인간,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이후 줄곧 지속된 화두였다. 그 가운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철학적 질문에서 다른 현인들을 밀어내고 가장 정답에 가까운 지위를 획득한 철학자가 바로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산다’고 외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다.


    그런데 19세기 이후에 이런 흐름을 뒤집는 학설이 대두됐다. 바로 찰스 다윈이 1859년에 펴낸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이후 진화론에 뿌리를 둔 진화생물학, 진화 심리학적 관점이다. 인간은 왜(Why), 또 무엇을 위해 행복을 쫓고 즐기는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행복을 심리학의 중요한 연구 과제로 부각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 서은국 연세대 교수의 <행복의 기원>(2014년)은 이런 진화 심리학적 관점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 지구상에 나타난 단세포동물에서 출발하여 기나긴 진화 과정을 거쳐 호모사피엔스에 이른 존재다. 그런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특성은‘생존과 번식’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였다.


    행복이라는 특성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간은 행복을 위해 산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명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오히려 행복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존재하고 기능한다고 본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생존하기 위해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하나의 수단이다. 최종 목적지는 생존이다.


    가령 의학과 진화 생물학은 행복감을 느낄 때 인간의 뇌에서 나타나는 특성들을 파악하고 있으며, 심리학은 무수한 실험을 통해 유전적으로 외향성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대체로 행복감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인간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행복감을 다시, 또 다시 맛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DNA를 유지하고 전파하고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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