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간
 
지은이 : 김태유 외
출판사 : 쌤앤파커스
출판일 : 2021년 04월




  • 이 책은 먼저 산업혁명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세상이 어떻게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었는지를 설명한다. 감속하던 농업사회에서 가속하는 산업사회로, 가속사회에서 더 빠르게 가속하는 지식기반사회로 접어든 지금, 세상은 아톰의 시대에서 비트의 시대로, 북극성의 시대에서 은하수의 시대로 변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어떻게 하면 글로벌 패권국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의 시간


    매판자본이 일으킨 기적

    수출주도 산업화

    100달러도 채 안 되던 우리 국민소득을 1만 달러 대로 끌어올린 한강의 기적, 그 기적의 실체는 무엇일까? 물론 수출주도 산업화라는 극약처방에는 약의 효과도 있었고 부작용도 있었다. 경제 외적 부작용은 매우 다양할뿐더러 주관적 해석의 여지도 있기에 여기서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어떤 원리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주로 살펴보려 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수입대체’ 산업화를 할 것인가? ‘수출주도’ 산업화를 할 것인가?


    이 2가지 산업화 전략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먼저 수입대체 산업화란, 농업국의 소비자가 선진국에서 수입해서 쓰던 기존 제품을 자국에서 생산하여 충당하는 산업화 전략이다. 그에 비해 수출주도 산업화는 선진국 소비자가 쓰는 신제품을 농업국 국내에서 생산하여 선진국으로 수출을 시도하는 산업화 전략이다.


    수입대체 산업화 s 수출주도 산업화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등 남미는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거대한 내수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자유무역을 받아들여 비교우위가 있는 농업 광업 등의 원자재를 수출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선진국의 낙후 기술을 도입, 대중 상품을 국산화해 국내에 공급했다. 이들 수입 대체 상품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낙후된 기술제품이기 때문에 생산기술 국산화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농업국이 산업국으로 변신할 때 손쉽게 선택하는 방법이다. 인구가 많아 내수시장이 큰 남미는 수입대체 산업으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수지타산도 맞았다.


    그러나 값싼 원자재를 수출해서 생산설비를 수입하고, 자국 내 생산이 불가능한 신제품과 사치품은 모두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대량의 외화가 유출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채는 늘어갔다. 그러자 채무상환 능력에 대한 의구심으로 외환위기가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전후 한때 미국 다음가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남미는 자유무역체제에 기반한 수입대체 산업화를 추진하다가 결국 후진국형 경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수입대체 산업화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수출할 자원이 부족해 외환(달러)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해외차관으로 생산설비를 도입한다고 해도 수입대체 산업화로는 외화를 획득할 수 없어 차관을 갚을 길이 없었다. 국내 소비시장이 작아서 남미처럼 규모의 경제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수출주도 산업화라는 극약처방을 선택했다. 첨단 기술을 들여와 선진국의 신상품을 국산화해 수출하기로 한 것이다. 자전거도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가 자동차를 제작해 수출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어찌 보면 자유주의 무역질서에 역행하는 엉뚱한 선택이었다. 비교우위도, 아니 비교열위조차도 아닌, 국내에 아예 ‘없는’ 산업을 전략적으로 ‘새로’ 만들어 수출을 감행하겠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흑백T도 못 만들면서 컬러T를 만들어 선진국에 수출하겠다는 엉뚱한 발상. 그런데 그 엉뚱함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뇌관이 되었다.


    적자수출의 경제학

    출혈수출이라는 고육책

    1차 산업혁명의 필수 기간산업이 섬유산업이다. 영국, 미국 등 모든 성공한 산업혁명은 섬유산업에서 시작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윤은커녕 생산원가로 수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섬유산업은 실을 뽑는 데서부터 완제품을 만드는 데까지 약 60% 정도가 누적된 인건비로 이루어져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한국에서 인건비 600달러, 재료비와 설비비 400달러를 투자해 원가 1,000달러의 섬유제품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국제시장에서는 1,000달러에 팔리지 않는다. 선진국이 훨씬 앞선 기술로 더 경쟁력 있는 좋은 상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가 이하인 900달러에는 수출이 가능하다. 그러면 원재료비와 설비비 400달러를 차감해도 인건비 중 500달러가 외환으로 유입된다. 비록 적자수출일지언정 수출만 할 수 있으면 외환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 외환으로 다시 생산설비와 원자재를 수입하여 산업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실업자의 노동력을 달러로 바꾸는 법

    물론 적자수출을 먼저 가능케 한 것은 봉제나 가발 같은 노동집약형 상품이다. 이는 청년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꽃 같은 젊음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날 예비 선진국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경제학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직시해보면 적자수출을 시작한 이후로 우리나라 고용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청년 실업률이 급격히 감소하고 농촌에서 만연하던 잠재실업이 자취를 감추었다.


    부유층에게 떠안긴 수출 적자

    그러나 기업의 사정은 달랐다. 국가는 출혈수출로 외환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기업은 원가 1,000달러인 상품을 900달러에 적자수출하다 보니 수출 단위당 100달러씩 손실이 났다. 결손이 계속되면 기업은 유지될 수가 없다. 그래서 기업이 적자수출로 입은 손실을 국내에서 충당해주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만약 정부가, 동일한 제품을 국내에선 1,200달러에 팔 수 있도록 해준다면 수출에서 100달러씩 손해 볼 때마다 국내에서 200달러씩 이익이 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업은 (국내, 국외에서 같은 수량을 판매했을 때) 생산원가를 모두 회수하고도 수출 단위당 100달러씩 이윤을 낼 수 있다.


    정부는 값비싼 국산품을 쓰게 하려고 선진국 제품에 고액의 관세를 부과하거나 아예 수입을 금지시켜버렸다. 그래서 당시 일제 T나 미제 자동차 등의 수입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값이 비싸도 국산제품을 쓰도록 강제한 것이었다. 그 덕에 기업은 적자수출의 손실을 국내에서 충당하면서 당분간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최저가 낙찰제

    물류비용은 제조업을 견인한다

    경제의 적자와 흑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물류비용이다. 선진국은 대부분 운하, 도로, 철도, 해운 등 유통망이 발전하기 좋은 자연조건과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악산(惡山)이 반도 전체를 뒤덮고 있는 한반도는 선발국에 비해 교통, 물류 인프라를 건설하기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고 투자 재원 또한 절대 부족했다.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의 도로는 총 2만 4,031km였다. 그나마 5,263km의 국도 가운데 포장된 도로는 746.4km에 불과했다. 원가 몇 푼 차이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는 수출경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값싼 물류 인프라 조성이 시급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공사

    경부고속도로는 330억 원에 낙찰됐지만 실제 건설비는 430억 원이 들어갔다. 문제는 1990년 말까지 유지·보수비가 건설비의 4배나 소요되었다는 점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비판이 난무했다. 최초 건설비가 430억 원인데 20년 동안 보수비가 1,527억 원 들어간 엉터리 공사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부고속도로는 기공식도 하기 전에 땜질부터 해댔다. 부실시공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았을까.


    1안: 430억 원으로 건설하고 이후 20년 동안 보수비 1,527억 원 들어가는 경우(경부고속도로 연장 430km로 가정, 건설비 1km당 1억 원으로 계산)


    2안: 일본 수준의 건설비 3,010억 원으로 건설하고, 대신 보수비 0원인 경우(일본 건설비를 한국의 최소 7배로 가정, 건설비 1km당 7억 원으로 계산)


    2안의 경우, 일본 시공비가 한국 시공비의 최소 7배가 소요된다는 가정하에 1km당 7억 원으로 계산하면, 일본식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드는 데 총 3,010억 원이 들어간다. 물론, 일본식으로 공사를 해도 당연히 보수비가 들어가겠지만, 보수비는 제로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계산해보자. 공사비 3,010억 원을 고스란히 지불한 후 20년 동안 서울에서 부산까지 430km의 고속도로를 별 탈 없이 ‘유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1안을 택했다. 최저가인 430억 원으로 무리하게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랬더니 20년간 유지 보수비가 1,527억 원 들었다. 대신 2안의 건설비 3,010억 원에서 실제 공사비 430억 원을 빼고 약 2,580억 원이 남았다. 이 2,580억 원을 이자율 10% 복리로 계산하면(그 당시에 이자율 10%는 절대로 과장된 게 아니다) 20년 후에 1조 5,837억 원으로 불어난다. 이 금액이면 1km당 33억 원짜리 고속도로 480km를 추가로 건설할 수 있다. 1km당 33억 원이라는 것은 1989년 중앙고속도로를 건설했을 때의 건설단가다. 건설비용 430억 원만 지불하고 남은 돈 2,580억 원을 잘 불리면 후에 480km의 고속도로를, 그 당시 시가로 추가 건설할 수 있다는 얘기다. 2,580억 원의 여유 자금을 이자율 10%로 20년간 계속 늘리면 비축분이 1조 5,913억 원이 된다. 그동안 유지보수비를 모두 차감하고 나서도 여유자금이 1조 5,837억 원 남는다.


    동일한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하나만 건설하고 끝낼 수도 있었지만, 우리 정부는 최저가로 건설해 같은 돈으로 3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했던 것이다. 그만큼 사회적 인프라를 싸게 더 많이 확보했다는 의미다.


    경부고속도로가 수출의 대동맥이 된 것은 그저 ‘건설’했기 때문이 아니라 ‘값싸게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차이가 수출가격경쟁의 승패를 결정한 경우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정책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3대 비밀과 3대 비책

    그런데 지금 막 도래하기 시작한 4차 산업혁명은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상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가장 앞서 있고 EU와 중국이 맹렬히 뒤따르고 있다. 이들 경제권이 가진 3가지 공통점은 첫째, 기업활동에 대한 획기적인 규제완화, 둘째 우수인력의 육성 및 확보역량 그리고 셋째 정치적 안보에 기반한 거대한 시장이라는 점이다.


    한국은 4차 산업혁명 성공을 위한 위의 3가지 조건을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처럼 기업이 자유롭게 내생적 성장을 마음껏 하기 좋은 나라도 아니고, 중국처럼 독재 이상의 전제 정권이 외생적 성장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다. 세계적인 인재가 몰려드는 미국은 물론이고 EU나 중국 같은 인력공급도 기대할 수 없다. 북핵 위기와 동북아의 정치적 불안정과 함께 왜소한 국내시장 규모는 물론이고 영어권, 유럽권, 중화권 같은 해외시장 접근 능력에서조차 떨어진다.


    한강의 기적에 3가지 비밀이 있었다면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3가지 비책이 준비되어 있다. 규제 완화를 위한 정부혁신, 인재 확보를 위한 사회혁신, 활로 개척을 위한 대외혁신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혁신 - 규제 완화

    산업혁명 시대에는 정부가 민간기업에게 특정 기간산업을 지정해서 때로는 반강제적으로 떠맡기다시피 하기도 했다. 이것이 규제 중에 가장 강력한 포지티브 규제에 해당된다. ‘이 사업을 꼭 하라’는 것이다. ‘무엇만 하면 안 된다’는 네거티브 규제보다 100배 강력한 규제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규제가 특히 많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강력한 규제를 통해 한강의 기적이라는 산업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가올 4차 산업혁명과 지식기반사회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민간기업이 각자 잘할 수 있는 사업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제를 최대한 완화해야 하는 네거티브 규제의 시대다. 다양한 분야에서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가 수없이 터져 나올 수 있도록 그런 자율적인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혁신 - 우수인재 확보

    4차 산업혁명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인재가 많이 있어야 4차 산업혁명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국가든 총인구 중 인재의 분포에는 큰 차이가 없다. 우수한 인재가 4차 산업혁명 분야로 많이 오는 나라는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실패할 것이다. 1차 산업혁명에 영국이 가장 먼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영국의 인재가 기업가, 기술자로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에서는 인재가 모두 기사(knight)가 되었다. 인재가 기업과 기술을 외면한 결과 산업혁명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농공상’이라는 봉건적 사고에서도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게다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직이나 면허증을 가진 법률가, 의사, 약사 등 직업 안정성이 높은 쪽으로 인재의 쏠림현상이 심해졌다. 첨단과학기술 분야로 진출해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해야 할 한국의 영재들이 공무원 시험 준비에 젊음을 낭비하고 또 서비스 업종에서 호구지책에 안주하고 있다.


    대외혁신 - 북극항로 선점, 러시아로 진출

    지금 우리의 대외적 상황은 어떤가? 북핵 위기, 사드 사태와 중국의 경제보복,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안보 우방국) 제외, 미중 사이에서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 등 글로벌 차원의 첨예한 갈등과 충돌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연상시킨다.


    이제 근시안적 전술적 선택지를 과감히 탈피하여 판을 바꾸는 전략적 선택지로 옮겨가야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협력도 잘 안 되고, 미국이 개입해서도 안 된다면 남은 선택은 단 하나, 러시아와의 획기적인 관계개선이다. 러시아는 한반도를 둘러싼 4강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북극항로를 장악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중일의 연횡과 한미러의 합종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열강의 중재자 혹은 캐스팅 보트(casting ote) 역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북극항로는 대한해협을 지나 베링해협과 러시아 북쪽 해안을 지나는 인류문명의 마지막 큰길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려왔다. 고대문명을 연 비단길(silk road), 상업문명을 연 향신료길(spice road), 산업문명을 연 대서양 항로(the atlantic route) 등 이들 문명사적 큰길은 모두 저 멀리 있었다. 단 한 번도 한반도를 스쳐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북극항로가 단군 이래 처음 한반도를 경유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5,000년간 이 땅을 지키고 기다려온 조상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고 앞으로 영원히 이 땅을 가꾸어 살아갈 후손에게도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북극항로를 선점하라

    북극항로, 왜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이 될까?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북극항로가 4차 산업혁명의 중심이 되는 첫째 이유는 지식산업경제는 산업경제를 확장하면서 오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이 오면 인터넷 같은 디지털 비트 인더스트리가 활성화되면서 기존의 제조업, 아톰 인더스트리를 함께 확장한다. 4차 산업혁명이 아톰 인더스트리를 비트 인더스트리가 ‘대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후 산업이 농업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산업기술에 의해 농업생산이 더 늘어나 맬서스 트랩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4차 산업혁명의 비트 인더스트리는 아톰 인더스트리의 발전과 함께 동반성장한다. 그래서 해운 물동량이 늘어나고 북극항로가 각광받게 될 것이다.


    둘째, 4차 산업혁명은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것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성숙하면 하루 3시간 일하는 사회 혹은 주 3일 근무제가 올 것이다. 그만큼 여가시간이 생긴다. 그 많은 여가를 과연 어떻게 보낼 것인가? 결국 여행, 스포츠, 취미, 오락 등의 활동으로 보낼 것이다.


    사람들의 버킷 리스트를 보면 여행이 항상 상위에 포진해 있다. 시간이 나면 사람들은 여행을 다닌다. 인류 역사의 95%는 수렵채집의 노마드 생활이었다. 그러한 유전자가 현대인에게는 여행이라는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농업사회에서 해외여행은 일생에 한 번도 힘든 특권층의 사치였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해외여행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지식산업사회에서는 주말여행이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북극항로와 주변의 아직 때 묻지 않은 동토의 이색적 풍광은 여행과 관광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세상 사람을 유혹하기에 딱 맞는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셋째, 2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있던 아디다스 신발 공장이 독일의 스마트팩토리로 옮겼다. 인도네시아에서 종업원 600명이 운동화를 1년에 50만 켤레씩 생산하던 것을, 독일에서는 종업원 10명이 1년에 50만 켤레를 소비자 개인별 맞춤으로 생산하고 있다. 이 두 생산방식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도네시아에서는 대·중·소 사이즈의 신발을 찍어서 박스에 포장해 통째로 소비지역으로 보낸다. 그러면 도매상과 소매상을 거쳐 사람들이 직접 매장에서 신발을 샀다. 그런데 지금 독일의 스마트팩토리에서는 세계 각국 주문자의 발 길이, 너비, 높이를 재서 주문받아, 개별맞춤으로 제작한다. 그리고 한 켤레, 한 켤레 포장해 개별발송한다. 물동량, 운송량의 부피가 몇 배나 증가했을 것 같은가. 정확하게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3~4배 이상은 족히 증가했을 것이다. 이는 4차 산업혁명으로 세계적인 물동량이 얼마나 증가될지를 보여주는 아주 단순한 예에 불과하다.


    넷째, 기존의 항로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물과 여객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북극항로가 개통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4차 산업혁명은 비트 인더스트리가 아톰 인더스트리를 양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물동량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화물과 여객의 폭발적 증가는 동북아에서 말라카 해협과 수에즈 운하,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기존 항로의 수용 능력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말라카 해협 대신 말레이반도를 관통하는 새 운하가 계획되는가 하면, 확장공사가 끝난 스에즈 운하에서는 도리어 대기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또 확장공사를 마친 파나마 운하 외에 추가로 니카라과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운하가 추진되고 있다.


    주고받을 것이 많은 러시아와의 관계

    그런데 러시아가 과연 한국을 북극항로 개척의 동반자로 받아들일까? 러시아는 한국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 연방에 소속된 우크라이나에서 배를 건조해왔다. 그런데 그 우크라이나가 독립해서 지금은 적국이 되었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 즈베즈다 조선소를 건설했지만, 세계적 수준의 선박 건조능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 5대 조선소 중 1, 2, 4등의 3개 조선소를 보유하고 있다. 2020년 대우조선해양은 LNG 운반선 6척(2조 274억 원 규모)을 수주했고, 삼성중공업은 LNG선 2조 8,000억 원어치를 수주한 바 있다. 러시아로서는 한국의 조선 능력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또 하나는 셰일 혁명이 일어나 미국의 셰일 가스가 전 세계로 판매되면서 러시아 동부에 있는 가스를 더 이상 수출할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러시아가 셰일 가스를 판매할 수 있는 곳은 인접한 중국, 한국, 일본뿐이다. 우리 입장에서도 러시아 천연가스(PNG) 파이프라인이 한반도를 관통해야 할 7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6자회담이 답보상태에 있는 근본원인은 세력균형 때문이다. 가스관으로 러시아가 직접 이해 당사자가 되면 한반도 안정 쪽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된다. 추가로 가스관을 일본까지 연결해 이해 당사자로 만든다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보험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가스관은 마치 강물과도 같다.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메콩강, 요르단강 등 물 분쟁에서도 승자는 상류국 또는 강대국이었다. 러시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는 가스관을 건설하게 되면 러시아 가스 공급이 중국 수요에 못 미칠 경우에는 우리 몫이 보장되지 않는다. 러시아 가스관을 하류의 일본까지 연장해야 좋은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셋째, 가스관이 일단 건설되고 나면 안정적인 가스 공급을 보장받을 수 있다. LNG 운반선은 행선지를 바꿀 수 있지만, 가스관은 거대한 투자비 때문에 소비처 변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스관의 건설로 한국이 준 산유국이 되는 셈이다.


    넷째,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한국이 200년간 쓸 수 있는 10조㎥의 가스와 석유, 전력 등 주요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모든 자원을 수입한다. 다른 한편 러시아의 주 수입 품목은 자동차·ICT 통신 기기·합성수지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품목에서 한국이 수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한·러 경제협력은 윈윈이 보장되는 최적의 궁합인 셈이다. 가스관은 경제 전반에 걸친 포괄적인 한·러 경협의 물꼬를 트는 뇌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북한은 러시아 가스관을 손상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금강산 자산동결,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어떤 도발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이해와 직결되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가스관 분쟁은 주변의 10개 독립국가연합(CIS)과 NATO 회원국들 사이에서 가능했다. 고립무원인 북한으로서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여섯째, 통일을 대비해 북한경제를 회생시키려면 우선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는데 1억 달러 이상의 가스관 통과료는 중국에 지급하고 따로 경유를 사다주는 중복부담을 자초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기체연료라서 전쟁물자로 전용할 수 없는 가스를 주는 것이 경유보다는 훨씬 안전하다.


    일곱째, 중국은 해묵은 국경분쟁, 일본은 북방 4개 섬(남쿠릴열도) 반환문제 등의 역사적 갈등 때문에 러시아와 천연가스 협상에 어려움이 있다. 비록 한국이 러시아가 선호하는 상대라 해도 현금 확보가 급한 러시아가 언제까지나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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