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한국경제 대전망
 
지은이 : 이근 외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20년 10월




  • 전 세계가 코로나로 신음하는 가운데 한국은 경제를 봉쇄하지 않고도 아직까지 선방하고 있다. 방역 역량을 유지하며 적절한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이 2021년 한국경제 최대의 도전이 될 전망이다. 이 책은 어떻게 우리가 위험요소를 줄이고 기회와 혁신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2021 한국경제 대전망


    코로나 이후 경제와 삶의 변화

    코로나에 대응하는 비즈니스의 신풍경

    코로나가 우리 사회에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언택트’ 현상의 출현이다. 언택트는 부정 접두사 ‘언(un)’과 접촉을 의미하는 ‘콘택트(contact)’의 합성어로 생산, 소비 그리고 일상의 생활에서 비대면 방식을 선호하는 사회 경제적 현상이다. 정부 주도의 ‘사회적 거리 두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코로나로 촉발된 언택트는 우리 사회에서의 무인화, 비언어적 소통 그리고 홈코노미와 같은 새로운 트렌드를 확산시키고 있다.


    코로나 시대의 3대 뉴노멀: 무인화, 비언어 소통, 홈코노미

    삶에 파고 드는 무인화의 트렌드

    코로나로 인한 인간의 이동 제한 및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한 ‘비대면 트렌드’의 확대가 AI(인공지능), IoT(사물인터넷) 기술과 만나 우리의 삶 곳곳에 온라인과 무인화(無人化, un-manned) 트렌드를 침투시키고 있다. 특히 무인화 기술은 인간의 노동력을 최소화하며, 자동화 시스템으로 비용 절감은 물론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는 혁신의 시대를 개척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무인 편의점과 무인 할인점이다. 현재 CU, 세븐일레븐, GS25가 무인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아직은 실험적 성격이 강하지만, 향후 AI 기반의 바이오 인식, 상품 이미지 인식 스캐너, 자동 발주 시스템 등과 결합하면서 미래 ‘신(新)유통 플랫폼’으로 발전할 것이다.


    일상을 채우는 비언어적 소통과 실감 경제

    코로나가 일상화되면서 비대면화 트렌드로 인한 비언어적 소통 방식도 삶을 바꾸고 있다. 물리적 공간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대면보다 비대면으로 소통하고, 대면 위주의 업무, 교육, 지인 만남을 줄이는 대신, 사람들은 온라인 소통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던 회의나 컨퍼런스콜·진료·재판 등에도 비대면 방식이 검토되거나 실행되고 있다. 사람들이 비대면 서비스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차라리 대면 대화 과정이 없는 게 오히려 더 편하다는 최근의 설문 결과도 있다. 대면회의나 출장이 줄어들다 보니 현업에서 집중력이 증가하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SNS로도 충분히 회의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의 효율적 관리와 생산성도 올라간다는 의미다. 이는 비언어적인 상황이 오히려 언어적 소통보다 효율적이라는 코로나의 역설인 셈이다.


    홈콕, 홈쿡, 홈트로 확대되는 홈코노미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되면서 집안에서 다양한 생산 활동(재택근무)과 소비 활동이 전개되는 홈코노미가 확산되고 있다. ‘홈(home)’ 과 ‘이코노미(economy)’의 합성어인 홈코노미는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집에서 이루어지는 트렌드를 말한다. 소비의 만능키가 된 스마트폰만 있으면 무엇이든 구매하거나 즐길 수 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 스마트폰에 접속하는 순간 그 자리가 식당이 되고, 카페가 되고, 마트가 되고, 영화관이 된다. 의식주와 여가까지, 대부분의 소비 활동이 집 안에서 해결된다. 다양한 생필품 주문이 가능한 대형마트부터 신선한 식재료와 식품을 새벽배송하는 스타트업까지, 스마트폰 서비스 앱은 우리의 먹거리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식재료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조리된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일상이 됐다. 음식 배달 앱에 접속하면 도심 내에 있는 웬만한 맛집 음식을 주문할 수 있으며, 커피나 디저트도 선택할 수 있다. 영화관에 갈 필요도 없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비롯한 OTT(Over the Top) 서비스 앱에 접속해서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영상 콘텐츠 시청이 가능하다. 심지어 세탁기가 없어도 빨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세탁 서비스 앱에 접속해 서비스를 신청하고 예약 시간 전에 세탁물을 문 앞에 내놓으면 다음 날 세탁된 옷이 배달된다. 이제 집이 그야말로 가장 안전한 내 생활공간이자 소비생활의 중심이 됐고, 일터와 생활공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직주근접과 더불어 직주일체형 생활 패턴이 점차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비대면과 무인화에 최적화된 O4O

    코로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관계도 변화시켰다. 그동안 온라인(online)과 오프라인(offline)의 관계는 온라인화, 즉 오프라인이 온라인으로 전환된 O2O(offline to online)의 개념이었는데, 이제 무인화 트렌드로 오프라인을 위한 온라인, 즉 O4O(online for offline)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비대면과 무인화 측면을 강화한 롯데쇼핑의 ‘롯데ON’이 대표적이다. 백화점·마트·슈퍼·롭스·하이마트 등 롯데그룹의 전국 1만 5,000여 개 오프라인 매장을 온라인 플랫폼과 연계해, 소비자가 주문한 상품을 단 2시간 안에 배송하는 바로배송, 출근 전에 배송되는 새벽배송, 온라인에서 주문하고 인근 오프라인 매장에서 바로 찾을 수 있는 스마트픽으로 세분화해 서비스하고 있다. 기존의 온라인 플랫폼과 오프라인의 유통망을 통합하지 않고서는 제공하기 어려운 서비스다. 패션업체 ‘LF’의 오프라인 매장 LF몰 스토어는 온라인에서 주문하고, 구매 상품을 매장에서 바로 찾아가는 비대면 서비스인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70%나 증가하며 코로나 사태에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


    금융의 디지털 전환과 시장 변화

    금융 소비자의 행태 변화

    2020년 5월 정부에서는 재난기본소득과 소상공인 지원 대출 등을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모바일 간편 결제나 대출 신청 등에 익숙하지 않고, 불안하다는 이유로 모바일 앱의 사용을 꺼리던 50대 이상 금융 소비자들도 정부의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는 등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구매력이 큰 50대 이상 소비자들의 이커머스(e-commerce0 사용 경험이 충분히 쌓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오프라인 매장에 갈 수 없게 된 50대 이상 소비자들이 ‘배달의민족’, ‘마켓컬리’, ‘로켓프레시(쿠팡)’ 등 배달 앱 서비스를 사용하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졌다. 또한 금융의 디지털화로 전 세대에 걸쳐 모바일 뱅킹 사용이 증가했으며, 특히 50대 이상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 전문은행 카카오뱅크의 경우도 2020년 5월의 신규 가입 고객 중 18%가 50대 이상이었다.


    전통적인 대면 채널의 이용도는 급감하고 있다. 2019년 상반기 국내 4대 시중 은행들이 지점을 총 88개나 축소했고, 2020년 상반기에만 126개를 추가로 축소했다. 금융 당국은 일자리 축소 등을 우려하고 있지만 은행의 순이자 마진 감소와 고객의 비대면 금융 서비스에 대한 니즈로 지점 축소는 계속해서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혁신 금융을 위한 정부 정책의 변화

    민간뿐 아니라 정부도 많은 부분에서 디지털 금융 혁신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정부는 인터넷 전문은행의 도입에 이어, ‘오픈뱅킹’과 ‘마이데이터’ 정책들을 연이어 시장에 내놓았다.


    2019년 10월 30일 시범 서비스를 거쳐, 12월 18일 전면 시행된 오픈뱅킹은 하나의 금융 앱에서 다른 은행의 계좌 조회는 물론, 이체까지 하는 서비스로, 유럽연합의 PSD2(payment service directive 2) 제도의 지급지시업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한국의 경우 93%가 넘는 높은 예금 계좌 보유율과 이체 및 조회 등의 기본적인 은행 업무 인프라가 이미 금융결제원으로 집중화되어 있어 오픈뱅킹의 본보기라 일컬어지는 영국에서보다 그 파괴력이 클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실제로 2020년 6월까지 한국의 오픈뱅킹 현황을 보면, 시행 8개월 만에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성공적으로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 경제 활동 인구의 72%인 2,032만 명이 가입했으며, 등록된 계좌도 6,588만 좌에 달한다. 한국의 경우, 시범 시행 기간을 포함해 약 8개월 만에 일평균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이용이 650만 건에 달했다. 2018년 1월부터 오픈뱅킹을 시행한 영국이 일평균 650만 건까지 도달하는 데 1년 8개월의 시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빠른 확산이다.


    정부의 또 다른 디지털 혁신 금융 정책인 ‘마이데이터’는 사전 수요 조사를 통해 116개의 기업이 신청 의사를 밝혔으며, 정부는 심사를 거쳐 2021년 2월에 기존 마이데이터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 중이던 40개 기업에 라이선스를 부여할 계획이다. 마이데이터는 금융 데이터의 소유권을 고객에게 돌려준다는 철학에 기반한 것으로, 금융 기관이 아니더라도 사업자에 선정되면 고객의 금융 정보를 모든 타 금융 기관으로부터 수집해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데이터를 활용한 맞춤형 금융 상품 추천은 물론, 개인 자산관리 서비스(PB, private banking) 등이 비대면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마이데이터를 통해서 지출 관리, 자동 저축, 자산관리, 대출 비교, 보험 상품 비교 등 대부분의 금융 서비스가 하나의 플랫폼에서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계부 작성, 지출 카테고리별 예산 목표 설정 등 지출 관리는 고객이 날마다 일상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마이데이터 플랫폼의 가장 중요한 기반 서비스가 될 것이다. 고객의 잉여 자금을 파악, 자동으로 잉여 자금에 대한 최적의 저축 상품을 추천하고, 보유 금융 자산에 대해서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를 통해 최적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공해줄 것이다.


    미래 금융 산업의 구조적 변화

    그렇다면 오픈뱅킹과 마이데이터로 촉발된 거대 금융 플랫폼의 등장은 금융 산업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게 될까? 기존의 은행, 카드, 증권, 보험 등 각 업종 내에서 제조와 판매를 동시에 수행했던 모습에서 거대 플랫폼 사업자와 금융 제조사로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금융 산업은 세 가지 기업 형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 기업 형태는 거대 금융 플랫폼 기업이다. 이들은 금융 데이터에 검색, 커머스, 통신 등 이종 데이터를 결합해 고객의 전 생애 주기에 관한 모든 금융 자문을 해주는 개인 금융 자산관리자가 될 것이다. 이들의 가치 창출의 원천은 데이터이며, 다양한 고객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개인 맞춤형 혜택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고객 데이터가 집적될수록 개인화 수준이 뛰어난 상품과 서비스가 제공되며 이는 고객의 유입 증가를 가져온다. 고객의 유입 증가는 다시 더 많은 고객 데이터 축적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데이터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기업에게는 데이터 분석과 처리 역량이 가장 중요하며, 수천만의 고객에게 맞춤형 초개인화 서비스를 자동화해 제공하기 위해 AI 알고리즘과 클라우드 역량을 갖추어야만 한다.


    두 번째 형태는 금융 상품의 생산을 담당하는 금융 제조 전문 기업이다. 기존에는 금융 회사 하나가 영업, 마케팅, 상품 개발 및 후선 업무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를 담당해왔다. 그러나 금융 산업의 제조·판매 분리로 은행, 카드, 증권, 보험 각 업종에서 탁월한 전문성을 지닌 회사들만이 고객 접점 채널을 소유한 금융 플랫폼 기업들에 상품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신용카드의 상업자 표시 신용카드(PLCC)가 대표적인 예다. 주요 카드 회사들은 최근 배달의민족, 스타벅스 등의 사업자에게 전용 신용카드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영업, 마케팅, 브랜드는 사업자가 맡고, 카드 회사는 상품 제조 및 운영을 담당한다. 카드뿐 아니라 은행과 증권, 보험 등 모든 금융 분야에서 이와 같은 제조 전문 기업이 나타날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기업들은 탁월한 고객 심사 역량으로 대손 비용 등 리스크 비용을 최소화하고, 기존 오프라인 인프라 축소를 포함한 운영비용을 절감해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세 번째 형태는 금융 서비스에 필요한 백엔드(back-end) 시스템을 구축해 제공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서비스형 뱅킹(BaaS, banking as a service) 기업이다. 금융 서비스를 위해서는 전문화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고객에게 새로운 콘셉트의 참신한 대출 상품을 제공하는 핀테크 기업은 신용 평가, 대출 실행, 계좌 관리 등의 필요한 업무 시스템 전체를 새롭게 구축해야만 한다. 바로 BaaS 기업이 이와 같은 백엔드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금융 서비스에 특화된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software as a service)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데, 클라우드 환경에서 원하는 금융 서비스에 맞추어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으며, 오픈 API를 통해 손쉽게 관련 핀테크 앱 등에 서비스를 추가하거나 변경할 수도 있다. 이미 해외에는 SAP, Fidor, BBVA 등이 이와 같은 금융 시스템을 핀테크 기업들에 제공하고 있다. BaaS 기업은 금융에 특화된 효과적이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제공해야 하므로, 금융 프로세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뛰어난 시스템 아키텍처 설계 역량을 갖추어야만 한다.



    세계화 퇴조와 각국 경제

    미중 무역 갈등과 글로벌 가치사슬의 변화

    글로벌 가치사슬 디커플링의 위기

    2021년 무역 갈등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전망하기는 어렵다. 미국 대선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고, 코로나가 초래할 인명과 경제적 피해가 어떤 강도로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의약품 관련 분야에서 자급화와 글로벌 가치사슬의 분절 경향은 강화되겠지만 백신과 치료제 선점을 위한 국가 간의 경쟁과 갈등도 나타나고 있어, 이것이 얼마나 글로벌 무역 규범을 파괴하고 다자주의 체제에 손상을 가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과 우방과의 무역 갈등이 전반적으로 격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또한 미국과 중국과의 무역 갈등도 그 형태가 관세 전쟁에 국한된다면 재발하더라도 당사자들을 제외한 제3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이든은 폐기된 아시아와 유럽과의 지역 무역 협정 논의를 재개하고, 다자체제 개혁 문제에서도 동맹과의 공동 전선을 추구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대 중국 관세에 대해서도 즉각적 인하는 어려워도 지금보다 규칙을 존중하는 갈등 해소 방식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중국과의 기술 패권 전쟁은 누가 대선에서 승리하든 미국 무역 정책의 상수가 될 것이다. 화웨이 문제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기술 전쟁은 앞으로 보안 장치,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AI, 항공 우주 등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제3국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중국 기업에 해가 되는 조치를 취할 경우 중국은 보복에 나설 것이다. 즉 미중 무역 갈등은 친미 동맹과 친중 동맹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고, 글로벌 가치사슬이 친미 블록과 친중 블록으로 양분되는 양상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글로벌 가치사슬의 디커플링은 당장은 안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부 산업에서만 발생할 전망이지만, 미중의 상호 갈등과 보복이 증폭되면서 광범위한 산업 분야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현재 세계경제는 글로벌 가치사슬을 통해 중국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정보와 기술의 국경 간 이동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미국이 다수의 중국 기업에 금융 제재를 가하거나, 중국이 자국 내의 미국과 친미 국가의 기업에 강력한 보복을 가하는 극단적 상황까지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 때문에 이미 중국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 대다수는 중국에서의 탈출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한국의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대응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경제의 현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다. 글로벌 가치사슬이 양분될 경우 중국뿐 아니라 한국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한국은 중국과의 협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글로벌 가치사슬을 단기간에 일본과 아세안으로 전환해 피해를 줄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글로벌 가치사슬의 위기를 아예 자립 경제의 기회로 삼으려는 생각도 위험하다. 세계 무역이 감소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국가는 한국과 같은 제조업 통상국가다. 비록 수출 중심의 성장이 전보다 어려워진다고 해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한국은 최대한 개방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 한국도 분명히 어디에선가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는 영역을 축소하고, 선택의 시점을 최대한 늦추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유사한 상황에 있지만 글로벌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새로운 다자체제에 대한 논의에 적극 동참해 글로벌 가치사슬에 안보의 개념이 과도하게 적용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또한 무역과 투자 관련 국내 제도에서 우리도 안보의 개념을 확장하고, 안보가 시장과 충돌할 때 우리가 하는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제도를 미리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는 인권과 자유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보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

    21세기 첨단기술의 발전과 중국의 부상

    중국은 현재 구매력평가(PPP) 기준 경제 규모, 제조업 규모, 무역 규모, R&D 인력, 국제특허 출원에서 세계 1위 국가이며, 군비 지출, R&D 지출 면에서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국가다. 2000~2018년 R&D 지출, R&D 인력 등 투입 요소와 국제특허 출원 건수 등 산출 요소 데이터를 이용해 추정한 결과(도표 2-4) 중국의 기술 혁신 생산성은 이미 2014년 이후 미국을 추월했다. 이는 현재 중국이 미국보다 더 적은 수의 R&D 연구자와 더 적은 R&D 비용으로 더 많은 국제특허를 출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2013), 제조업 2025 비전 제시(2015),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 주장(2013), 한국에 대한 사드 보복(2016) 등 공격적인 대외 행보의 바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방위적 압력

    그렇기에 미국의 중국 견제 또한 무역 불균형을 둘러싼 갈등을 넘어 중국의 기술 패권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했을 때, 미국을 비롯한 WTO 가입국들은 중국이 시장경제 및 자유무역의 원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경제 개혁을 계속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그간 중국이 자유 경쟁을 기반으로 한 무역과 투자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부 주도의 중상주의 정책으로 대응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하에 트럼프 정부는 2018년 중국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를 시작으로, 2019년은 수출·수입·투자 규제를 강화했으며, 2020년에는 일부 금융 제재로까지 대중 압박을 확대했다. 특히 미국은 불법적이고 불공정하게 중국의 손에 넘어간 자국 기술이 미국의 국가안보와 이익을 침해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여긴다.


    미국의 중국 관련 수출 통제 리스트를 살펴보면 2020년 1월 미중 양국이 1단계 무역합의에 서명했음에도 미국의 ‘중국 때리기’는 멈추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2020년 5월, 7월, 8월 중국의 AI, 로봇, 사이버보안, 슈퍼컴퓨팅, 바이오, 고속철도, 반도체 및 5G 관련 기업들이 계속해서 미국의 수출 통제 리스트에 올랐다. 게다가 미국 상무부는 수출관리 규정을 2020년 5월과 8월 두 차례나 개정하면서 미국 정부의 허가 없이는 화웨이가 사실상 어떠한 종류의 반도체도 공급받지 못하도록 제재를 대폭 강화했다.


    투자와 관련해 미국은 외국인투자위험심사현대화법(FIRRMA, Foreign Investment Risk Review Modernization Act of 2018)을 제정하고, 핵심 기술, 핵심 인프라, 민감한 개인 정보와 관련한 비지배적 투자까지도 심의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직접적인 M&A 거래와 관련되지 않았음에도 국가안보를 근거로 미국이 중국 기업의 미국 내 투자 및 영업을 규제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사용자의 개인 및 금융 정보에 대한 접근을 문제 삼아 2020년 3월 베이징 스지정보기술(Shiji Information Tech)로 하여금 스테이앤터치(StayNTouch)를 매각하도록 명령한 사례, 통신망 접근을 통해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2020년 4월 차이나텔레콤의 미국 내 영업을 불허한 사례, 민감한 개인정보 수집을 이유로 2020년 8월 틱톡과 위챗에 대한 미국 내 영업 금지 행정명령을 내린 사례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대응: 새로운 대장정과 국내 순환

    이러한 미국의 제재에 중국은 팃포탯(tit-for-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 아닌 ‘신 대장정’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미중 간 무역 전쟁이 한창이던 2019년 5월 시진핑 주석은 1934년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포위된 마오쩌둥의 홍군이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딘 장시성(江西省) 위두현(于都縣)을 방문했다. 시진핑은 대장정 기념탑을 참배하며 “지금은 새로운 대장정이다. 우리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시진핑의 말과 행동은 미중 간 갈등을 바라보는 중국의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은 단기적 협상에 목매지 않고 장기적 목표에 따라 자신의 특색에 맞는 제도 정비, 산업 정책 조정, 자체 기술 개발 강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 협상의 중국 측 대표였던 류허(劉鶴) 부총리가 2020년 6월 상하이 루자주이(陸家嘴) 포럼에서 밝힌 “국내 순환을 위주로, 국제와 국내가 상호 촉진하는 쌍순환 발전이라는 새로운 구조가 형성 중”이라는 발언도 이러한 ‘신 대장정’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미중 분쟁의 격화로 인한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에 대응해 중국 내에 자체 산업 사슬(self-reliant supply chain)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 한국의 선택은?

    2020년 코로나의 확산은 미중 갈등 격화 및 기술 패권 경쟁과 관련해 세 가지 역할을 했다. 첫째, 미국 내 반중 정서를 고조시켰다. 현재 미국 내 초당적 반중 정서를 감안하면 11월 대선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중 갈등은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 국제 사회의 대중 여론도 악화시켰다. 2020년 들어 영국 등 G7 국가들이 화웨이 5G 네트워크 장비 배제를 선언하고, 중국 기업의 투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며, 홍콩에 대한 수출 통제 및 범죄인 인도조약을 파기하는 등 중국은 점점 더 고립되는 모습이다. 셋째, 코로나로 세계경제가 침체됨에 따라 미국도 대중 경제 제재를 확대하기 어려워졌다. 코로나 사태가 2021년에도 지속된다면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의 측면에서도 광범위한 제재보다는 핀셋 제재, 즉 특정 기술 및 기업에 대한 선택적 제재를 위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2021년에는 미국의 중국 및 중국 기업에 대한 금융 제재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결국 중국은 장기적 관점에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맞서기 위해서 이미 진행 중인 디지털 위안화 사용을 가속화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위안화의 국제화를 모색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다시 미국의 반응을 촉발할 수 있다. 즉 AI, 5G, 6G, 항공우주 기술에 대한 기존의 대중 견제 외에도 디지털 화폐 개발 및 유통과 관련한 블록체기술 분야에 대해서도 견제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코로나 백신 및 바이오 분야의 미중 간 기술 경쟁도 치열해질 것이다.


    안보와 경제 발전을 위해 기존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협력도 강화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중 간 갈등이 없는 국제 환경이 외교적으로나 경제 성장의 측면에서 최선이다. 그렇지만 갈등의 원인이 첨단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양국 간에 패권의 서열 정리가 끝날 때까지 갈등은 구조적으로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2021년에도 우리는 두 나라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서로 치고받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재 우리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보다도 1.5~2배 이상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다.


    2021년 한국에 당면한 문제는 기업에 이 불확실성의 불똥이 튀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다. 특히 기술 패권 경쟁과 관련한 미국의 제3자 제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대만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TSMC는 2020년 5월 15일 미국의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규제 강화로 화웨이와의 신규 거래를 중단했다. 나아가 2020년 8월 17일 미 상무부의 수출관리규정(EAR) 재개정으로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규제가 더욱 확대되면서 한국의 반도체 산업마저 화웨이와의 신규 거래가 불가능해졌다.


    한국으로서는 일단 보편적 국제 무역 질서의 기본 원칙에 입각해 미중 간 기술 패권 경쟁과 통상 분쟁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일수록 묵묵히 우리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면 할수록 중국은 첨단기술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상반기 중국의 반도체 산업 투자액은 2019년 상반기 대비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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