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사심은 없다
 
지은이 : 기타 야스토시(역:양준호)
출판사 : 한국경제신문
출판일 : 2019년 04월




  • 일본 교세라의 창업자이자 명예회장이며, 전 세계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기업가, 그리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기업인이기도 한 이나모리 가즈오. 2019년 교세라 창립 60주년을 맞아 ‘경영자들의 스승’, ‘살아 있는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일생과 경영철학을 총망라해 집대성한 책이다.


    마음에 사심은 없다


    세계의 교세라를 꿈꾸다: 교세라 경영의 모든 것

    아메바 경영을 도입하다

    잘되면 칭찬하고, 안되면 질타하는 것은 리더의 기본이다. 그것을 막연한 이미지와 그때의 기분으로 해버리면 직원은 납득하지 않고, 불만이 쌓인다. 가능하다면 경영자의 목표와 방향을 알 수 있도록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수치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나모리는 회사 전체의 공통된 경영 지표 만들기에 착수했다. 직원 모두의 벡터를 맞추기 위해 이는 필수 작업이었다.


    1965년 1월부터 도입된 것이 ‘시간당 채산 제도’였다. 계산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생산액에서 경비를 제하고 이를 총 노동 시간으로 나눈다. 이 시간당 부가가치를 지표로 해 가능해진 것이 ‘아메바 경영’ 이었다. 회사를 공정별 또는 제품군별로 몇 개의 작은 조직으로 나누고, 각 조직이 하나의 중소기업인 것처럼 시간당 채산 제도에 따라 독립 채산으로 운영된다는 것이다. 자기 재량권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이익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 소집단은 회사 지시가 아닌 현장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일한다. 하나하나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 생겨나거나 합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거나 소멸한다.


    아메바의 책임자는 리더라고 불렸다. 이나모리는 높은 뜻과 투지를 가지고 사심 없이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를 ‘리더’라 불렀고, 절대로 ‘관리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것을 구별한 데는 큰 의미가 있었다. 훗날 JAL 재건 시 직원들에게 경영 기법을 가르치고 관리 교육이 아닌 지도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만드는 리더 교육을 처음 도입한 점에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아메바 리더는 이십대의 젊은이도 있고, 여자도 있다. 뛰어난 제안을 한 직원에게는 그에 걸맞는 보람 있는 지위와 인적 · 물적 자원에의 권한을 줘서 더욱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원래 교세라에는 월권 행위라든가 하극상이라는 말이 없다. 영업 사원이 자재부의 일을 정리하고, 제조 부문의 사람이 영업을 하거나 하는 것은 보통의 광경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라.” 이는 ‘교세라 철학’에도 있는 말이지만, 권한을 부여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 권한을 박탈당하고도 일을 하려는 사람이 우선된다. 그러다가 다른 아메바를 흡수해버리는 일도 있다. 상사의 승인을 받으면 아메바 간 흡수가 자유로웠다. 그것이 적대와 대립은 아니었다. 모두 교세라의 철학을 확고하게 공유하고 회사를 위한다는 대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장 취임과 교세라 회계학

    이나모리는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을 중요시하면서도 경영 목표는 단기적으로만 세웠다. “왜 단기적 계획만 세우는가 하면,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매출을 늘리다 보면 이 계획을 위한 인적 및 물적 투자가 당장 필요치 않음에도 선행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나모리 가즈오, 『직원을 움직이게 하는 7개의 열쇠』) 이나모리는 이를 ‘한 되 구매’의 원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눈앞의 시장이 급속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던 만큼 그 계획은 매우 유효하게 기능했다. 당시보다 더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는 현대에도 그것은 통용되는 개념일 것이다.


    훗날 이나모리가 제2전전을 설립했을 때도 장기 목표를 쌓아두는 일을 금지했다. 라이벌인 NTT가 초창기 웅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만큼 분석가들로부터 ‘제2전전은 비전이 없다’며 마치 통찰력이 없어 미래상을 그리지 못하는 것처럼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10년 뒤 NTT의 경우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의 격변에 의해 그 웅대한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현실이 펼쳐졌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정말 한 발 한 발 진지하게 일하다 보면 내일이 저절로 보인다. 하지만 모레는 보이지 않는다. 볼 필요도 없다. 한 걸음 나아가면 진일보할 수 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의 연장으로 미래의 일이 성사된다.”


    이나모리 혼자 사내 업무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맡겨야 할 일은 전적으로 맡겼다. 예를 들어 창업 때부터 한 번도 스스로 금고 속의 돈을 세는 일을 하지 않았다. 수표에 날인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사고가 난다. 그래서 절대로 부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도록 한 것이 ‘더블 체크’였다. 평소 도장이 들어 있는 인감 상자는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회계 책임자는 인감 상자의 열쇠는 가지고 있지만, 금고 열쇠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회계 책임자가 결제할 때 다른 직원이 금고에서 상자를 내오고, 회계 책임자가 날인하는 것을 확인해 안전을 기하는 것이다. 금고의 개폐도 혼자 할 수 없도록 금고 열쇠 소지자 및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자들을 분리했다.


    교세라는 창업 때부터 부정이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부서에 대해서 이러한 더블 체크 체제를 도입했다. 물품 구매에 대해서도 구매 희망자와 구매자와 검수자를 분리했다. 직원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부정을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주고 직원에게 묘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재무에 대해 ‘아마추어’였던 이나모리는 기존의 일본 관습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어음 사용을 그만두고 모두 현금으로 지불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대신 당연히 싸게 살 수 있다. “선금을 넣고 있으니 좀 깎아주십시오”라는 협상은 원료 조달 시에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현금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유동성이 필요하며 그야말로 유동성 도산의 위험이 늘어난다. 하지만 자금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현금’이라는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윽고 이나모리 가즈오의 생각은 ‘교세라 회계학’이라 불리게 된다. 뛰어난 경영자는 자신의 경영학을 창시하는 것이다. 이나모리 역시 그러했다. 그는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을 추구하면서도, 회계 처리 및 재무 측면에선 철저하게 보수적으로 견실하게 꾸려가고자 했다. 우선 회계 처리에 대해서는 현금의 움직임과 전표를 일대일 대응으로 처리하는 것에 집착했다. 결코 주먹구구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비용이 발생하는 부분은 가능한 빨리 처리하도록 노력했다. 구체적으로는 이연이 되는 시험 연구비, 개발비, 신주 발행비 등에 대해서도 가능한 지연 없이 즉시 비용 처리했다. 부실 자산에 대해서도 만에 하나 발생한 경우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명령했다.


    대중이 사용하는 물건을 판매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광고비로도 지출을 하지 않았다. 1997년경 이런 상호작용이 이뤄졌다고 한다. 부사장이었던 야마모토 마사히로가 중국 상하이에 출장 갔다가 공항으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늘어선 광고탑을 보고, “교세라는 중국에서 지명도가 아직 낮은데, 우리도 광고탑을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나모리에게 제안했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산서는 경영자의 의지와 실행력의 소산이며, 그 경영에 대한 고과표이기도 하다”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명언이다. 교세라 30개의 부서가 있다고 하면 30개의 손익계산서가 있다. 그 모든 부서에서 이나모리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부서별 직원의 일하는 태도와 리더 모습까지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달 회의 때 내가 말한 것을, 그때 그 녀석이 신묘하게 듣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해낸 것인가. 꽤 하잖아, 하하하” 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가령 실적보고회의에서 어떤 임원이 “나는 기술자입니다. 공학부에서 물리학밖에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식으로 변명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다: 제2전전으로의 도전

    전기통신 사업의 자유화

    앞서 이나모리가 샌디에이고 공장에서 장거리 전화를 하고 있는 직원을 야단쳤을 때, 미국 전화 요금이 일본의 9분의 1인 것에 놀랐다는 일화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전기통신 사업은 전액 정부 출자인 전신전화공사(전전공사)의 독점 사업이었다. 독점이기 때문에 이용 요금이 비싸 국민 경제에 큰 마이너스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경우 AT&T는 당초부터 민간 기업이기도 했지만, 여러 번 독점 금지법 위반 소송의 대상이 되면서 1984년 회사 자산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던 지역 통신 자회사 22개를 분리하여 장거리 통신 사업에 특화시켰다. 이런 해외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일본에서도 관영 사업의 민영화와 자유화, 분할, 독점 사업의 자유화 등의 논의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제2차 임시 행정 조사회(제2임조)에서 국철(현재의 JR), 전매공사(현재 JT)와 함께 전전공사의 민영화가 답신되었다. 이렇게 1985년 전전공사가 민간회사 NTT로 거듭나는 동시에 전기통신 사업의 자유화가 이뤄져 신규 진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민영화 후 자본금은 1조 엔. 이것은 신일 제철의 약 3배다. 연간 매출은 4조 5,000억 엔 정도로 도요타에 비견되었고, 직원 수 32만 6,000명은 일본 제일이었다. 체신성 이후 각 지방들에 쌓아온 통신 인프라는 전국 방방곡곡에 깔려 있었다. 전기통신 사업의 자유화가 통과되어도 도전하려는 회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여기서 무모하다고도 생각되는 ‘도전자’가 나타난다. 누구겠는가, 그것이 바로 이나모리 가즈오였다.


    그래도 싸워야 하는 상대가 너무 거대했다. 교세라가 아무리 급성장해왔다고 해도 연간 매출 2,200억 엔, 직원 1만 1,000명이었다. NTT는 그 20배 이상 되었다. 거상과 개미였다. 게다가 다각화의 위험을 숙지하고 있던 그는 지금까지 ‘징검다리를 치지 않는다’를 신조로 삼아왔다. 태양광 발전이나 쿠레산베루 및 바이오 세럼처럼 세라믹 사업과의 시너지는 보이지 않았다. 야시카의 경우와 같이 재건을 의뢰받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아마추어’의 강점을 주장하던 이나모리라고 해도 너무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업 성공의 열쇠는 솔직한 마음으로 시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올바른 것을 사심 없이 하려는가’가 좌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업 계획 등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맨마지막 남은 것이 자신의 동기에 이기심이 없는가였다. ‘동기가 선한가? 사심은 없는가?’ 이 말을 주문처럼 마음속으로 계속 반추했다. 이나모리는 나중에 회고하며 이 사업의 원점은 바로 이 자문자답에 있었다고 밝혔다. 반년 정도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결정했다.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

    전전 개혁 세 법안(전기통신사업법,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법, 관련정비법)의 심의가 난항을 겪어 이나모리를 안달시켰지만, 1984년 말 드디어 성립되어, 다음 해 1985년 4월 1일 시행되었다. 일본 전전공사는 일본 최대의 민간 기업 일본전신전화(NTT)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초대 사장은 그대로 신토우가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21일 제2전전은 제1종 전기통신 사업자에 등록되었다.


    NTT에 과감하게 도전해나가는 이나모리의 모습은 세상의 많은 지지를 받고, 1985년의 <동양경제> 신년 특별호가 뽑은 ‘활약한 경영자 베스트 10’의 제1위로, 2년 연속 이나모리 가즈오가 선정된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국회에서 사회당의 이노우에 잇세이 중의원이 “교세라의 IC패키지가 미국의 순항 미사일 토마호크에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무기 수출 3원칙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하고 추궁을 시작한 것이다.


    이노우에는 외교 문제 등으로 재삼에 걸쳐 국회를 심의 중단으로 몰아 ‘브레이크 남’이라는 별명을 가진 국회의 명물이었다. 바로 통산성이 조사를 시작했지만, 이것은 교세라인터내셔널(KI)이 미국에서 제너럴 다이내믹스에 판매한 IC패키지가 전용된 것이며, 제품은 표준품이었다. 교세라인터내셔널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회사이며, 여기에 일본의 무기 수출 3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미국에 대한 주권 침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교세라가 비난받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를 불편하게 느낀 이나모리가 NHK 인터뷰에서 무심코 “거짓 소문으로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말해버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금까지의 높은 평가가 거짓말인 양 언론사들도 빠짐없이 교세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창업하고도 25년, 이토록 가혹한 지탄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주간 문춘>은 ‘직원이 너덜너덜해져 그만두는 교세라 이나모리즘의 함정’ (1985년 5월 2일)이라는 특집 기사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민폐’라는 소제목을 달아 직원들이 화장실에 가는 시간까지 제한하는 가혹한 노동 환경을 교세라가 강요하고 있다고 썼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원복사의 니시카타 노사를 찾은 것은 이때의 일이다. 노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해줬다. “이나모리 씨, 재난을 당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게다가 그 재앙에서 당신이 과거에 만들어온 죄업이 사라졌어요. 찰밥을 지어 축하할 일이지요.”


    니시카타의 말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죄업의 청산’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준 것이었다. 수행을 거듭한 노사의 말에 이나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대의의 싸움인 것이다. 이대로 질 수는 없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비즈니스라는 이름의 전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회생의 기적을 일으키다: JAL 재생의 기록

    삼고초려

    ‘인생 마지막 20년’을 이러한 지적 호기심의 추구와 조용한 사색 속에서 보내기 시작한 이나모리였지만 일흔의 목소리를 듣고도 “이나모리 씨 아닙니까?”라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칠순을 맞이한 그에게 뜻밖의 일이 들어온다. 그것이 일본항공(JAL)의 회생이었다. 계기는 민주당에 의한 정권 교체였다. 2009년 9월 16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온 것이다. 새 정부에 기대하고 있던 이는 이나모리뿐만이 아니었다. 이때 국민의 기대감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지지율을 봐도 알 수 있다. 민주당 정권 첫 총리가 된 하토야마 유키오의 당초의 지지율은 무려 77%를 기록했다(<마이니치 신문> 조사). 이는 우정성 민영화를 내건 자민당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정권을 수립했을 때의 85%에 이은 두 번째로 높은 숫자다.


    이나모리가 응원해온 마에하라는 국토교통장관으로 입각해 마에하라파를 이끌고 총리 자리를 엿볼 수준까지 되었다. 이나모리는 민주당 정권의 탄생을 축하하면서도, 이 정권이 극히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정권 교체가 실현되었을 때 “내 역할은 끝났다”며,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도 다음에 찾아올 국민의 실망을 반쯤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 ‘호인’의 피가 끓어 어떻게든 지탱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민주당 정권이 처음 안고 있는 정치적 의제 중 하나가 JAL 재생이었다. 이를 담당한 국토교통 대신 마에하라는 이나모리 가즈오에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해왔다.


    결론은 나왔다. “나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접수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말로 거절했다. 마에하라의 부탁이니까 가능한 해주고 싶었지만 이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지난 뒤 또 다시 마에하라가 부탁을 해왔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다시금 고사했다. 그 뒤로도 마에하라가 다시 묻고 답하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삼고초려였다. 분명히 이나모리는 지금까지 몇 개나 되는 기업을 재건한 경험이 있었다. 야시카와 타이토도 그랬지만, 미타공업의 재건은 최고의 성공 사례였다.


    하지만 미타공업의 기업 규모는 JAL의 10분의 1이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측근들도 맹반대했다. 전문 분야가 아닐 뿐만 아니라 관공서 체질의 회사였다. 전전공사로 고생하고 있었던 신토우 총재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나모리는 받아들였다. 그가 ‘대의’를 위해 일어선 것이다. ‘이 회사를 재건하면 곤경에 빠져 있는 다른 모든 기업도 일어설 수 있다 JAL 회생은 단순히 한 기업의 구제뿐만 아니라 일본이라는 국가 전체의 구제가 된다.’


    ‘올바른 사고방식’에 의한 경영

    JAL을 회생시키자고 각오를 했던 이나모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먼저 현장을 아는 것부터 시작했다. 비행기 정비 공장이나 공항에 들러 시찰하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 100인 이상의 모든 자회사의 사장과 한 시간씩 총 100시간 이상의 인터뷰를 소화했다. 점심 식사 시간이 나지 않으면 1층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사다 베어물고 있었다. 면담을 거듭한 끝에, JAL에는 회사의 구석구석에 ‘전 국유 기업’이라는 긍지와 지금도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는 의식이 깊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경영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개 인간으로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점점 만나고 있는 동안 나를 신뢰하는 분위기가 나왔습니다.” 오히려 완고하게 이나모리의 지도를 거부하려고 했던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경영의 중추에 앉아 있던 간부들이었다.


    ‘아마추어인 이나모리 씨가 항공 업계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나모리는 업계 사정 등은 몰랐다. 그러나 회사 경영의 기본은 같다. 2010년 5월 26일부터 교세라 때와 같이 월 1회 임원을 모아 성과보고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자 곧 이 회사의 문제점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전월의 숫자를 바탕으로 논의할 수 있게 되는 데까지 두 달이 걸린 것이다. 현장은 숫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집계하는 시스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숫자도 없이 회사 경영이 이뤄질 리가 없다. 민간 기업에서 말하는 ‘경영’이 이 회사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속히 A3 사이즈의 성과보고회 회의자료가 만들어졌다. 70가지 정도의 과목이 늘어섰고 그 옆에는 월별 마스터플랜, 실적, 계획 등의 세세한 숫자가 빽빽이 기재된 것이 60~70페이지에 이르렀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사흘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회의를 계속했다. 각 본부의 계정마다 연도 계획과 월별 실적의 차이를 설명하도록 지시했다. 실적이 올라 있지 않음에도 위기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본부장에겐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네가 리더로서 만든 결과이지 않은가!”하고 분노를 폭발시켰다. “미시적인 것을 모른 채 거시적인 것을 말하지 마라”고도 했다.


    현장 비용, 그것도 세세한 요소마다 분해한 비용의 내용도 모른 채 경영을 말할 수는 없다. 회의자료의 포맷은 자주 변경되었다. “다음 달부터 이 과목의 순서를 바꿔 달라”라거나 “이 과목의 명칭을 재검토 해 달라”하고 이나모리가 매월 세세히 지시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것은 이나모리의 지시를 받아 작업하는 오오타였다. 그에게 변화의 이유를 묻자 “이 순서라면 직원이 동기부여되지 않을 것이다.”, “이 과목명이라면 직원들은 알기 어렵지 않겠는가”와 같은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JAL의 기적』)


    JAL에서 실현한 ‘전원이 일구는 경영’

    이나모리는 먼저 아메바 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 구축에 착수한다. 2010년 5월 성과보고회를 시작한 때를 같이해 40세 전후의 젊은 경영진으로 구성된 ‘조직 개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바로 차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이다. 팀 이나모리가 조언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의 양 어깨에 JAL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진지함이 달랐다. 밤낮없이 구상을 가다듬어 올려 7월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8월부터 11월까지 인사를 검토해 12월에 조직 개혁을 단행했다. 사내를 채산 부문인 ‘사업 부서’와 그것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사업지원 부서’로 분리하여, 이나모리의 주선으로 아메바 경영 전략 본부로 ‘노선총괄본부’가 설치되게 되었다. 그들이 목표로 한 것은, 간단히 말하면 ‘노선 한 편당 수지를 다음 날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 대의 비행기를 조종하는 데는 조종사, 객실 승무원, 정비사의 인건비, 항공기 임대 요금, 연료비, 공항의 전기 요금과 수도 요금 등 여러 가지 잡다한 비용이 달려 있다. 이를 분석해 시간당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곳까지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 JAL의 비용 의식의 결여는 누차에 걸쳐 주간지에 기삿거리를 제공하며 증명해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마침내 그들은 교세라 흐름 경영의 기본인 ‘매출 확대, 비용 최소화’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통근 택시는 심야와 새벽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기본적으로 파일럿도 버스 · 전철로 통근하게 되었다. 영업계의 부서에서는 접대비 및 회의 비용 등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경영 측면에서 이러한 지도를 한 시기는 짧다. 아메바 경영의 장점이 JAL에서도 발휘된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에서만 일방적으로 지시하면 사기가 떨어진다. 그러나 아메바 경영이라면 그것이 아메바의 수익 향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기는 오히려 상승한다. 실적은 최고 경영진이 추구하는 것이라는, 즉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져, 현장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비용 절감이 진행되었다. 바로 교세라류의 ‘전원 경영’이었다.


    파일럿도 비행기 운행을 할 때 연비 향상을 목표로 하려고 지혜를 짜냈다. 파일럿은 집에서 물병을 지참하게 되었다. 무게가 가벼워지면 항공기의 연비도 좋아진다. 객실 승무원은 기내에 반입하는 자신의 짐을 줄이기 위해 사무실에 계량기를 두고 하루 1인당 500g 감소 운동에 임했다. 그야말로 나사 한 개, 종이컵 한 개에 이르는 단위로 철저한 비용 의식을 공유한 결과, 연간 800억 엔의 비용 절감에 성공했다.


    기내 판매는 일단 목표 관리가 엄격하지 않았지만, 비행 한 번에 10만 엔 정도 목표를 설정해 사무실 보드에 각각의 목표 달성율을 쓰고 아메바 리더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때 회사 전체적으로 임한 것이 ‘JAL 카드’의 입회 캠페인이다. 파일럿 양성이 경영 파탄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에 지상 근무에 의존하고 있던 원래 파일럿 후보의 사원이 발안해 시작한 제도였다. 전 직종 대상으로 직원 한 사람당 세 명 획득을 할당량으로, 2010년 11월부터 다음 해의 3월 말까지 10만 명 확보를 목표로 진행했다. 사내 게시판의 아메바마다 이름을 붙여 달성한 사람은 형광펜으로 칠해나간다. 회사 전체가 하나가 되어 열심히 했다. 당황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지만, 아메바 경영의 도입도, 캠페인의 실시도 전체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측면이 더 컸다. 실시간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었고, 작은 팀으로 나뉘어 있어서 자신의 공헌도를 명확하게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적의 V자 회복

    JAL 회생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2011년 3월 영업이익은 약 1,800억 엔으로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했다. 또한 당초 이익 감소를 전망했던 2012년에도 사상 최대의 2,049억 엔의 영업이익을 내고, 최고 이익 기록을 2년 연속 경신하게 됐다. 말 그대로 V자 회복이었다. 2012년 3월 실적을 보면 매출액은 파산 전에 비해 4할 감소되었다. 운항 노선 검색 및 수익성 사업 매각 등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비 절감을 철저히 하고, 운영 비용을 반감시켰기에 최고 이익을 낼 수 있었다.


    재상장 전에 JAL의 경영 상태를 분석한 증권 분석가들은 아메바 경영의 위력에 감탄했다. 철저하게 낭비를 배제한 한편 이나모리는 JAL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그것은 도쿄-샌프란시스코 간 노선이다. JAL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운항한 국제선인 호놀룰루를 경유하는 하네다와 샌프란시스코 사이의 노선이었다. 기념비적인 이 노선은 뉴욕 항공편 등에 비해 수익성은 낮았지만 선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굳이 남겼다.


    기업의 가치는 숫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도덕과 자부심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장부 외 자산이야말로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인이 어렵게 개척한 업적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슴을 펴고 이어가라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한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