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지은이 : 최인철
출판사 : 21세기북스
출판일 : 2016년 08월




  • 이 책은 우리의 착각과 오류, 오만과 편견, 실수와 오해가 ‘프레임’에 의해 생겨남을 증명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다.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창조하는 지혜와 겸손을 장착하는 것. 우리가 프레임을 배워야 할 이유다. ‘프레임’의 궁극적 목표는 자신의 틀을 깨고 지혜로운 시각과 성찰로 새롭게 거듭나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나가는 데 있다. 


    프레임


    프레임에 관한 프레임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 프레임

    프레임에 관한 가장 흔한 정의는 창문이나 액자의 틀 혹은 안경테다. 모두 ‘보는(seeing)’ 것과 관련이 있다. 프레임은 뚜렷한 경계 없이 펼쳐진 대상들 중에서 특정 장면이나 대상을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골라내는 기능을 한다.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 중 어느 곳을 찍을지 고민하는 사람이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사각 프레임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대보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동일한 풍경을 보고도 사람들마다 찍어낸 사진이 다른 이유는 그들이 사용한 프레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리학에서도 기준틀(혹은 준거 체계)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 역시 세상을 관찰하는 데 사용되는 특정한 관점을 의미한다. 정확히는 어떤 물체의 위치와 운동을 표현하는 좌표(X축과 Y축)를 뜻한다.


    프레임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향한 마인드셋, 세상에 대한 은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프레임의 범주에 포함되는 말이다.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이끄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의 역할도 한다.



    나를 바꾸는 프레임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프레임

    “지혜의 핵심은 올바른 질문을 할 줄 아는 것이다”(존 사이먼)


    과거 한 공중파에서 방송된 <눈을 떠요>라는 프로그램은 당시 국민들에게 장기기증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그 프로그램에서 제공됐던 안구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조달된다는 점에 대한 부끄러움과 아쉬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련 통계를 보면 미국의 경우도 장기기증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만큼 많지 못하다. 미국에서도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제때 장기를 기증받지 못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 무려 4만 5,000명에 달했다.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태도와 실천 사이에 괴리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1993년에 실시한 미국 갤럽의 조사를 보면 85%의 미국인들이 장기기증 자체에는 동의했지만, 실제로 장기기증에 서약한 사람은 28%에 불과했다.


    한편 유럽의 국가들을 보면 장기기증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마다 장기이식에 필요한 의료 시설이나 경제 수준, 교육 수준, 종교 등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같은 유럽 내에서도 장기기증 비율에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포르투갈, 스웨덴의 장기기증 비율은 덴마크, 네덜란드, 영국, 독일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다. 장기기증 서약률에서 이 두 그룹의 국가들 사이에 거의 60%이상의 차이가 난다. 여러 상황을 감안해도 이 정도의 차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해답은 의외로 단순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장기기증 비율이 높은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모든 국민이 자동적으로 장기기증자가 된다.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 한해 장기기증을 원치 않는다는 절차를 밟으면 기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기증 비율이 낮은 나라에서는 본인이 원할 때만 절차를 거쳐 장기기증자가 된다. 즉, 기증 비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장기기증자가 되지만, 기증 비율이 낮은 나라에서는 본인이 원할 때만 절차를 거쳐 장기기증자가 된다. 즉, 기증 비율이 높은 나라에서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장기기증자가 되지만, 기증 비율이 낮은 나라에서는 특별한 행동을 취해야만 장기기증자가 된다. 똑같은 선택을 놓고 프레임만 바꾼 것이다.


    이 두 가지 정책을 각각 ‘탈퇴하기’와 ‘가입하기’라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장기기증에 대한 강렬한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면, 선택의 문제가 어떻게 프레임되어 있든 상관없이 장기기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같은 원리로 장기기증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프레임에 상관없이 장기기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정책은 사람들에게 아주 다른 프레임을 유도함으로써 실제 행동에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자동적으로 장기기증자가 되도록 제도화되어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장기기증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처음부터 장기기증이 자동적으로 선택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기증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프레임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장기기증을 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기증자가 되기 때문에 장기기증을 하는 일이 전혀 번거롭지 않다. 그러나 장기기증을 하고 싶지 않은 경우에는 번거로운 서류 절차를 밟아야 한다.


    반면 본인이 원할 때만 기증자가 되는 나라의 경우, 국민들은 ‘장기기증을 꼭 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장기기증을 하지 않는 것이 자동적으로 선택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장기기증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으로 인식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장기기증을 할 의사가 없다면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런데 반대로 장기기증자가 되려면 일련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기증할 마음만 있다면 절차가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귀찮아서 죽기도 싫다는 게 인간의 심리 아니던가?


    장기기증에 대해 가입하기 정책을 취하는 나라에서는 아무리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캠페인과 교육을 실시해도 효과가 크지 않다. 그러나 탈퇴하기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에서는 장기기증 캠페인과 교육을 많이 실시하지 않아도 월등히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을 한다.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프레임 하나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자기 프레임, 세상의 중심은 나

    자기중심성

    미국 코넬 대학교의 스턴버그 교수는 어리석음의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중심성’을 꼽는다.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아주 재치 있게 보여주는 실험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수행되었다.


    이 실험은 대학생 두 명을 한 조로 묶고 한 명에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게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상대방이 손가락으로 연주한 노래 제목을 알아맞히게 하는 실험이었다. 이때 손가락을 두드려 연주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곡명을 알려줄 수 없고 입으로 흥얼거릴 수도 없다. 오히려 손가락 연주만으로 노랫가락을 표현하게 했다. 노랫가락 연주가 끝나면 청중격인 참여자는 연주자가 연주한 노래 제목을 추측해서 적고,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한 노래 제목을 청중인 상대방이 알아맞힐 확률을 추측해서 적게 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곡을 반복해서 테스트했다.


    연주자의 기대치와 청중의 정확도는 얼마나 맞아떨어질까? 자료를 분석한 결과, 연주자들은 청중이 자신의 손가락 연주를 듣고 노래 제목을 알아맞힐 확률이 최소한 50%는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청중이 제목을 맞힌 비율은 2.5%에 불과했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결과가 아닌가? 연주자의 손가락 연주가 잘못된 것일까?


    이제 스스로 이 실험을 재연해보자. 자신이 연주자가 되어 ‘오 필승 코리아’를 손가락으로 연주해보라. 눈을 지그시 감으면 당신이 연주하게 될 가락이 귓가에 들려올 것이다. 드럼 소리도 들리고, 스타카토로 강조해야 할 부분에서 짧게 끊어 치는 손가락의 느낌도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 부분에서는 강하게 끊어 치고, 그다음 ‘필승 코리~’까지는 조금 부드럽게 두드리고, 다시 ‘~아’ 부분에서 강하게 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어깨도 들썩거리고, 어느새 양손으로 가락을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정말로 환상적인 연주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박자, 멜로디, 감정, 어느 것 하나도 손색이 없는 완벽한 연주였다.


    그렇다면 이제 입장을 바꿔 청중이 되어보자. 무슨 노랫가락인지 모른 채로 상대방이 손가락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노래 제목을 알아맞혀야 한다. 가사도 그 어떤 허밍도 들을 수 없다. 드럼 소리나 키보드 멜로디도 들리지 않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소리만 들릴 뿐이다. 그 어떤 멜로디나 연주의 감흥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의 귀에는 그저 ‘탁탁’ 책상 치는 소리만 들린다. 그런데도 연주자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경험했던 그 환상적인 연주가 다른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자기라는 프레임에 갇힌 우리는 우리의 의사 전달이 항상 정확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달한 말과 메모,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은 우리 자신의 프레임 속에서만 자명할 뿐, 다른 사람의 프레임에서 보면 애매하기 일쑤다. 이러한 의사불통으로 인해 생겨나는 오해와 갈등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의 무감각과 무능력, 배려 없음을 탓한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선행 학습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어린아이가 알기엔 벅차고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면서 왜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냐고 구박하기 일쑤다. 그 개념들이 어른들에게나 간단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이다. 남녀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몇 시간째 토라져 있는 여자친구에게 위로는커녕 “장난친 거 가지고 왜 그리 속 좁게 구냐?”며 되레 화를 내는 남자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만 장난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모른다.


    우리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지!”라며 상대방을 추궁하지만, 실상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인가 상황인가, 인간 행동을 보는 새로운 프레임

    흰 연기의 비극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흥미로운 연구 하나가 진행되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설문지를 작성하는 동안, 실험자는 용무를 보기 위해 실험실을 떠났다. 참가자들이 설문지를 작성하는 도중에 실험실 구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였다(물론 이는 설정이었다). 대낮에 대학 실험실에서 정체불명의 연기가 솟아오르는 일은 흔치 않다. 분명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사는 ‘참아자들이 얼마나 빨리 이 상황을 실험자에게 알려서 조치를 취하게 하는지’였다. 사람이 많다는 것이 위급 상황에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정말로 떨어뜨리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이 실험에서는 설문지를 함께 작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를 달리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어떤 사람은 다른 두 명의 사람과 함께 설문지를 작성하였다.


    가설과 일치하게, 사람이 늘어날수록 참가자가 실험자에게 위험을 알리는 행동은 감소하였다. 혼자 있을 때는 75%의 사람들이 실험자에게 그 상황을 보고하였지만 다른 두 명의 참가자가 있을 경우에는 겨우 38%만이 실험자에게 보고하였다. 심지어 연기 때문에 앞이 안 보이고 눈물이 날 지경이 되도록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낮에 명문 대학 실험실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그냥 있는 걸로 봐서 별일 아니겠지’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실험실에서 가끔 일어날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보다’라고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안심하였다. 그들의 준법정신이 약해서도 아니고, 안전의식이 약해서도 아니다. 바로 상황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위급 상황에 함께 있다는 점, 바로 그 상황적 변수가 사람들을 위기 상황에서 주저하게 만든다.


    인간의 행동이 본성이 아니라 상황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 2003년 2월 18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2003년 2월 18일. 그날 아침 나는 학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체육관 TV에서 긴급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구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속보였다. 처음에는 평범한 화재려니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화재는 끔찍한 재앙으로 변해갔다. 결국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입은 대참사가 되고 말았다. 온 국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한 것은 단순히 사망자의 규모만은 아니었다. 사망자들이 남긴 애절하고 간절한 음성 통화와 문자메시지들이 전국민을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다. 저자를 더 슬프게 만들었던 것은 당시 지하철 내부의 모습을 담은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을 보면 객차 안에 이미 연기가 자욱하게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빨리 객차에서 나왔더라면 희생자의 수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이 사진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앞에서 소개한 컬럼비아 대학교 실험 장면과 너무나 유사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객차 안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면 사람들은 객차에 차오르는 연기를 보고 즉시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별일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내심 불안하고 이상했겠지만 가만히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안심했을 것이다. 객차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보면서 ‘지하철 안에서 이런 일이 가끔 있나 보다’ ‘나서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똑같이 했기 때문에 그 즉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안전 매뉴얼 마련, 승무원의 윤리의식, 화재 예방 체계 마련 등과 같은 다양한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으면 우리가 위험 의식이 저하된다는 심리적 기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황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었더라면 조금이라도 피해가 줄지 않았을까? 이 생각 때문에 대구 지하철 참사만 생각하면 아직도 안타깝다.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위험 인식이 줄어든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안전행동을 의도적으로 더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상황 프레임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현재 프레임, 과거와 미래가 왜곡되는 이유

    예측하기 힘든 내일의 감정

    우리가 현 시점에서 내리는 선택과 판단은 미래에 누리게 될 것들에 관한 것이다. 가령 금요일 저녁에 무슨 영화를 볼 것인지를 수요일에 결정해서 예약하고, 여름휴가를 어디로 갈 것인지를 봄에 정해서 미리 예약한다. 미래의 평생 직업을 어린 시절에 예측해서 정하고, 심지어는 죽은 후에 장례를 어떻게 치를지도 죽기 전에 결정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의 질은 미래 감정에 대해 우리가 현재 내리는 예측의 정확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분야의 연구들은 미래 감정에 대한 우리의 예측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거듭 보여준다.


    점심에 된장찌개를 먹은 사람이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음 날 점심 메뉴를 미리 정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된장찌개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내일 점심 때 또다시 된장찌개를 먹겠다고 결정할 확률은 생각보다 낮다. 왜냐하면 내일도 된장찌개를 먹으면 ‘지겨울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생의 묘미인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스파게티나 비빔밥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그다음날도 된장찌개를 먹을 때 만족감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내일 점심을 먹기까지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두 끼를 더 먹어야 하므로, 점심에 된장찌개를 또 먹어도 같은 음식을 연이어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큰 만족감을 안겨주는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일까? 바로 현 시점에서는 미래의 시간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미래의 24시간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때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24시간이 수축 현상을 일으켜서 아주 짧게 느껴진다. 미래의 24시간 동안 벌어지게 될 많은 일들이 배제된 채 상상하기 때문에, 오늘 점심과 내일 점심이 바로 연이어서 이뤄지는 두 번의 식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음식을 연달아 두 번 먹는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게 될 미래의 24시간 동안에 최소한 식사를 두 번이나 더 하게 되고, 중간에 간식도 먹을 것이며, 술을 마실 수도 있다. 회의도 할 것이며,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그 외에 많은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현재의 예측 속에서 경험하는 미래의 시간에서는 그런 세부 사항들이 생략된 채 현재와 미래가 바로 연달아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진다.


    지금 당장 냉장고를 열어보라. 사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로운 소스나 재료가 눈에 띌 것이다. 주말에 일주일치 장을 한꺼번에 보는 가정일수록 사용하지 않은 재료들이 더 많이 쌓여 있을 것이다. 일주일 식단을 미리 짜기 때문에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같은 것만 계속 먹을 순 없다’는 생각에, 색다른 음식 재료를 사들인다. 그러나 막상 식사 시간이 되면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들 위주로 식단을 준비하게 된다. 결국 야심차게 사들였던 이색적인 소스나 재료는 냉장고 속에서 고스란히 잠든다.


    미래에 무엇을 할지 선택해야 할 때는 가장 좋아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 편이 이것저거 다양하게 섞어놓은 종합선물세트를 골랐을 때보다 실제 만족도가 더 크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변화 프레임, 경제적 선택을 좌우하는 힘

    소유 효과

    리처드 테일러 교수는 코넬 대학교 재직 당시, 코넬 대학교의 로고가 새겨진 기념 머그잔을 경제학 시간에 일부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전체 학생들 중에 무작위로 뽑아서 컵을 나눠주었기 때문에, 컵을 받은 학생들이 특별히 욕심이 많다거나 머그잔을 특별히 아끼는 학생이라고 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런 후에 테일러 교수는 일종의 경매시장을 열고, 컵을 받은 학생들에게 최소한 어느 정도 가격이면 그 머그잔을 다른 학생에게 팔 용의가 있는지를 적게 했다. 반대로 컵을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 가격이면 그 컵을 살 용의가 있는지를 적게 했다.


    이 실험에서 테일러 교수가 얻은 결과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컵을 소유하고 있던 학생들이 적어낸 판매가의 평균치는 5.25달러였지만, 컵을 사려는 학생들이 적어낸 구입가의 평균치는 2.75달러에 불과했다. 똑같은 컵이었는데 왜 팔려는 학생은 사려는 학생들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적어냈을까? 돈을 주고 구입한 컵이 아니므로 본전을 찾으려는 심리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바로 프레임 때문이었다. 컵을 소유했던 학생들은 컵을 파는 상황을 손실 상황으로 프레임했고, 컵을 사고자 했던 학생들은 컵을 새로 얻는 이득 상황으로 프레임했던 것이다. 판매자 학생들에게 그 컵은 ‘내 컵’이었지만 구매자 학생들에게 그 컵은 그냥 ‘컵’일 뿐이었다. 손실의 고통은 이득의 기쁨보다 강하기 때문에 컵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해 구매자보다 높은 가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판매하려는 가격과 구매하려는 가격의 차이를 ‘소유 효과’라고 한다. 일단 무엇이든 내 소유가 되고 나면 그것의 심리적 가치는 상승하게 된다. 그래서 쓰지 않고 방치하던 물건도 남이 달라면 주기가 아까워진다. 중고 물건을 놓고 소유자와 구매자 사이에 가격 갈등이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내 것’의 프레임으로 보는 사람과 아직은 내 것이 아닌 중립적인 프레임으로 보는 사람이 느끼는 물건의 심리적 가치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고 판매자를 탐욕스럽다거나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일단 그 물건을 구입하고 나면 우리도 그들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고 물건을 사려는 구매자가 턱없이 낮은 가격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탐욕과 안목을 탓하기 전에, 누구나 그 물건을 소유하기 전에는 그 구매자와 같은 프레임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혐오 시설의 건립을 놓고 해당 지역 주민들과 정부 또는 기업 사이에 보상액을 둘러싸고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프레임의 차이 때문이다. 해당 주민들에게 ‘토지’는 그냥 토지가 아니라 ‘내 토지’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건강의 위협도 일반적인 위협이 아니라, 직접적인 ‘내 건강’의 위협이고 ‘내 생태계’의 위협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 주민들이나 정책 입안자들의 눈에는 그냥 ‘토지’이고 그냥 ‘생태계’이며 그냥 ‘건강’인 것이다. 따라서 해당 주민들의 보상 요구를 단순한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세워 비난만 하는 것은 프레임이 차이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경솔한 행동일 수 있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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