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주차

BOOK SUMMARY
 인문 

그림값 미술사

저자 이동섭 (지은이)
출판 몽스북
출간 2024.09
그림값의 비밀을 통해 서양 미술사의 흐름의 파헤치다
도서요약 보기



그림값 미술사


미술사적 가치

다빈치를 무너뜨린 근대 미술의 아버지 chr(124)_pipe 에두아르 마네

루브르의 스타가 모나리자의 다빈치라면, 오르세 미술관의 스타는 누구일까? 인상주의 미술관이니 모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흐와 르누아르? 아름다운 발레리나 그림의 드가? 전문가들에게 묻는다면 대답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1883)일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화가인 마네는 자화상을 딱 두 점만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인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 2010년 경매에 나왔다. 오르세에서 욕심낼 만한 이 작품은 얼마에 팔렸을까? 가격을 예상하려면 전문가들이 오르세의 스타로 마네를 꼽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림도 달라져야 한다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마네로부터 근대 미술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지금 시대의 인터넷과 스마트폰처럼, 마네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기차와 전보, 전기와 전화 등이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런 시대에 왕립미술학교에서 가르친 정답의 그림이자 주류의 그림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이며, 잘 팔리는 그림은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1823~1889)의 비너스의 탄생(Naissance de Venus)이었다.


이 작품은 세련된 색감과 우아한 묘사가 돋보이는 신고전주의의 명작이다. 1863년 프랑스 국가미술대전(살롱)의 우승작으로,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사서 침실 벽에 걸었다.


비너스의 탄생이 살롱에서 우승하던 그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낙선했다. 낙선 화가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황제는 낙선전을 열어줬다. 낙선전의 스타는 단연 마네였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니 당연히 떨어지지' 하면서 비웃었다. 당시엔 잘 그린 그림의 기준이 신고전주의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의 서양 미술사에서는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린 1863년을 근대 회화가 탄생한 해로 기록한다.


스캔들로 스타는 탄생한다

마네의 업적은 르네상스에 확립되어 이어져 오던 고전 미술의 양식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이다. 크게 세 가지를 부정했다.


우선 원근법을 부정했다. 르네상스 이후로 원근법은 그림 속 이야기를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였다. 하지만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에서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다. 원근법에 따르면 후경의 여자를 훨씬 작게 그렸어야 하지만, 마네는 보이는 대로 그렸다. 즉 우리가 저 장면을 실제로 보고 있다고 가정하면, 각각의 인물에 집중해서 보게 되니까 크기는 비슷하다고 느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원근법은 고정된 한 위치를 가정하고, 거기에서 대상을 소실점 안으로 크기를 인위적으로 조절해서 배열하기 때문에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네는 두 번째로 그림의 연극성을 부정한 셈이다. 그림을 보는 관람객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림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원근법과 연 극성을 지키지 않은 마네의 그림이 우리에겐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마네의 혁신성이 체감된다.


자연스럽게 그가 부정한 세 번째 요소와 연결되는데, 마네는 그림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전통을 부정했다. 19세기 후반에 사진기가 나오기 전까지, 유럽에서 그림은 신화와 역사, 성경 등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독점적인 수단이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시대였으니 글보다 그림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훨씬 유리했다.


그래서 서양 미술의 아름다움은 이야기를 얼마나 실감나게 표현하느냐는 '재현미'였다. 하지만 마네는 그림을 이야기에서 해방시켰고, 그림의 아름다움을 재현미가 아닌 '조형미'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림에서 주제가 필요 없어지니 그림의 내용보다 색, 구도, 붓질 등이 중요해졌다. 마네가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 즉 마네에게 그림은 자유로운 필치, 색채의 조화, 안료의 질감 등이었다. 그래서 마네는 후경의 나뭇잎들도 붓질 몇 번으로 슥슥 마무리 지었고, 살롱의 심사위원들은 미완성작이라며 낙선시켰다. 바로 저 낙서하듯 그리다 만 듯한 붓질에서 인상주의는 시작되었다. 기존 그림에 익숙한 이들이 마네의 그림은 색깔 놀이라며 비아냥대자, 마네는 그것이야말로 그림이라고 응했다. 격렬한 비난과 열렬한 찬사가 동시에 터졌고, 스캔들은 마네를 스타로 만들었다.


한마디로 마네는 다빈치가 세운 고전의 성을 무너뜨린 혁명가였다. 지금의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력으로 비교하자면 다빈치보다는 마네가 월등히 크다. 그렇다면 그림값도 다빈치를 능가할까?


다빈치를 무너뜨린 마네니까

풀밭 위의 점심이 경매에 나온다면 다빈치의 작품 값과 비교해 볼 만할까? 다빈치가 가진 르네상스의 상징성 때문에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지만 경매 시장에 기록될 만한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릴 것은 분명하다. 다빈치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프랑스가 모나리자를 팔지 않듯이, 마네의 작품들도 시장에 나올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마네의 작품은 희귀하고 미술사적 가치도 대단하다. 특히 위대한 화가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세속의 특징상 마네의 자화상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1997년에 1,800만 달러(약 234억 원)에 팔렸던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은 2010년에는 얼마에 낙찰됐을까? 13년 만에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무려 3,327만 9,800달러(약 430억 원)를 기록했다. 경매에 다시 나온다면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될 것이 분명하다.


인상파 작품의 가격이 오르면 마네의 그림도 반드시 오른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상파 작품을 가진 컬렉터는 컬렉션의 완성도를 위해서 마네 작품을 소유할 수 있다면 거액을 투자할 의향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마네와 모네, 누구 작품이 더 비쌀까

역사의 평가는 두 번에 걸쳐 내려진다. 동시대에 한 번, 사후에 한 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처럼 생전과 사후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엇갈리는 경우도 많다. 살아서는 작품성과 대중성의 명예를 누렸으나 죽어서는 완전히 잊힌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소니에(Jean-Louis-Ernest Meissonie, 1815~ 1891)라는 화가가 있다. 그가 캔버스를 구매하면 전 유럽에서 백지 수표가 날아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뒤처진 작품의 가치는 퇴색되었고 화가는 잊혔다. 그와 동시대의 마네는 메소니에를 몹시 부러워했으나, 지금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명예와 지위를 누리고 있다. 후배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아무도 메소니에를 따르지 않았으나, 마네가 터놓은 조형미의 길은 대부분의 화가들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마네 홀로 걸었던 길이, 여러 후배들이 걸으면서 대로가 된 셈이다. 특히 클로드 모네(Claude Monetㅡ1840~ 1926)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네가 없었다면 분명 마네의 이름도 역사에서 흐릿해졌을 테다. 그렇다면 마네와 모네 중 누구의 작품이 더 비쌀까?



컬렉터의 특별한 취향

이 그림과 함께 묻어달라chr(124)_pipe 빈센트 반 고흐

스타는 선망의 대상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 1853~1890)다. 전 세계에 걸쳐 고흐에 관한 전시회는 항상 흥행에 성공하고, 그의 그림들은 복제화 판매 순위에서 일등을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는 미술 시장에서도 단연 톱스타다. 빛이 진하면 그림자도 짙다는 말처럼, 고흐의 그림도 때로 수난을 당했다.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한 <가셰 박사의 초상>이 특히 그렇다.


쌍둥이 초상화

1890년 5월에 고흐는 남프랑스 생레미 드 프로방스(Saint-Remy de Provence)의 정신 요양소를 떠나 파리에 왔다. 동생 테오의 가족 및 친구들과 즐거운 며칠을 보낸 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에 정착했다. 고흐의 보호자이자 후원자였던 테오가 형이 또다시 발작을 일으킬까 걱정돼 정신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인 가셰 박사가 있는 그곳에 거처를 잡아줬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흐는 가셰를 몸과 마음이 닮은 형제로 느꼈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은 가셰 박사가 할 수 있는 한 다 해준다며 마음에 들어 했다. 테오의 우려와 달리 건강을 되찾은 고흐는 새로운 고장에 잘 적응했다. 이 무렵에 완성한 초상화가 <가셰 박사의 초상(Portrait du docteur Gachet)>이다.


고갱에게 쓴 편지에서 직접 밝혔다시피, 고흐는 이 초상화를 통해 '비탄에 빠진 우리 시대의 표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박사를 모델로 고흐는 두 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두 점 모두 테이블에 비스듬히 턱 을 괸 박사를 담았는데, 배경의 색과 붓질, 코트와 단추의 색깔, 테이블 위의 책 등이 다르다. 특히 두 번째 버전에서는 박사의 눈빛과 표정은 물론이고 첫 번째 초상화에서 유리컵에 담겨 있던 디기탈리스(강심제 추출 약초)를 직접 손에 쥐고 있어 더 비탄스럽게 다가온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이 초상화 두 점의 운명은 고흐가 죽으면서 극명하게 달라졌다. 두 번째 버전은 가셰 박사에게 선물로 줬고, 고흐와도 직접적인 친분이 있던 박사의 두 자녀가 보관하다가 1949년에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이후 1952년에 파리의 주 드폼(Jeu de Paume) 미술관에서 전시됐고, 1986년부터 지금까지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다. 문제는 첫 번째 버전이다.


15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897년 고흐의 여동생이 300프랑에 폴 카시레(Paul Cassirer)에게 팔면서 가족의 품을 떠난 초상화는 케슬러(Kessler), 외젠 드루에(Eugène Druet)를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립미술관(Städtische Galerie)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이곳에서 1933년까지 전시되다가 한동안 미술관의 비공개 장소에 보관됐는데, 1937년에 독일 나치가 퇴폐 미술이라는 빌미로 압수하면서 나치의 정치인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다. 괴링은 곧바로 미술상인 프란츠 코닝(Franz Koenigs)에게 팔았고, 코닝은 또 다른 미술상인 지그프리트 크라마르스키(Siegfried Kramarsky)에게 넘겼다. 크라마르스키는 초상화를 뉴욕으로 가져갔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전시하기도 했었다.


1990년 5월에 크라마르스키의 유족들이 그림을 경매에 내놓자 일본 제지업자이자 대부호인 료에이 사이토(Ryoei Saito)가 구매했다. 험난한 과정을 거친 스토리에 슈퍼스타 고흐의 인기를 반영한 결과인 양 가셰 박사의 초상은 8,250만 달러(약 1,070억 원)로 당시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여기서 이 작품의 수난이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진짜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불태워서 나와 함께 묻어달라

일본 제지업자 사이토는 같은 경매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대표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도 7,810만 달러(약 1,010억 원)에 샀다. 르누아르도 이 그림을 두 점 그렸는데, 첫 번째 버전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고, 경매에 나온 것은 두 번째 버전이었다. 오르세 소장 작품보다 약간 크기가 작고, 나머지는 거의 같다. 인상주의 스타 화가의 작품 두 점을 손에 쥔 료에이 사이토는 충격적인 발언을 한다.


"내가 죽으면 두 작품도 불태워서 그 재를 나와 함께 묻을 계획이다.


억만장자 일본인의 깜짝 발언에 전 세계의 미술 관계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이런 컬렉터는 없었다. 그는 미술 애호가인가, 예술 파괴자인가? 사이토가 언제 죽을지는 몰라도, 최소 1억 6,000만 달러(약 2,000억 원)의 예술품을 부장품으로 치르는 역대급 장례식이 될 판이었다. 아무리 자기 돈으로 산 그림이라도, 예술 작품은 인류 모두의 문화유산이니 그런 식으로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사이토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1991년 5월 14일에 사이토는 "중국에는 진시황의 점토 병마와 명 13능이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고흐와 르누아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시 말해 단지 그 작품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소원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라며 불태워 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포기한다고 한 발 물러섰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구매한 작품을 더 유명하게 만드려는 탐욕스런 거짓말로 의심하면서도 사람들은 안심했다. 하지만 사이토가 부정부패 혐의로 교도소에 갈 때까지는 도쿄의 밀폐 보관실에 <가셰 박사의 초상>이 있었으나, 그가 죽은 1996년 이후로 지금까지 작품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한 가설은 크게 셋이다. 사이토가 은행에 그림을 담보로 잡혔는데, 돈을 갚지 못하자 은행이 뉴욕에 거주하는 미국인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그전에 르누아르 작품을 처분했기에 가장 그럴듯한 설이다. 하지만 그 구매자에 관한 일체의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그럴 수 있지만, 작품 판매액이 사이토가 구매한 금액의 1/8인 1,100만 달러 정도 혹은 1/2 수준인 4,400만 달러였다는 부분은 납득하기 무척 어렵다.


아무리 일본 경제가 폭락했던 시기이고, 미술 시장이 다소 위축됐던 때라고 해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술 시장의 슈퍼스타 고흐가 죽기 직전에 그렸고, 야수주의와 표현주의를 예고하는 작품이라는 미술사적 가치가 분명했다. 무엇보다 15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는 왕좌를 지켰던 이력 등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싸게 팔아도 원래 구매가 정도는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인 구매자로 알려진 사람이 사실은 미국인이 아니고 사이토의 가족일 가능성도 제기됐다.


두 번째 가설은 그림을 담보로 잡았던 일본 은행의 금고에 여전히 있을 것이란 추측이다. 은행 측에서는 긍정도 부인도 안 하고 있는 상태로 알려져 설득력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진다. 마지막이 최악의 가설이다. 사이토의 유언에 따라 가족이 불태운 다음에 그 재를 사이토의 관에 넣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사이토가 교도소에 있을 때 모작을 완성했고, 그것을 불태웠으며 진품은 가족 중 누군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란 영화 같은 설도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고흐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디 온전히 잘 보관되어 있다가 언젠가 세상에 다시 나오길 바란다. 비로소 그때 1996년 이후의 행방이 정확히 밝혀질 것이다.



투자의 법칙

미술 시장에도 작전 세력이 있다chr(124)_pipe 파블로 피카소

미술사를 몰라도 이름은 아는 화가, 눈코입을 삐뚤어지게 그려서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그림을 그린 화가,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15년 동안 보유하고 있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의 기록을 깨트린 화가는, 스페인 출신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다.


1억 달러의 벽을 깬 최초의 화가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를 꼽으라면, 기준이 무엇이든 피카소는 3위 안에는 들 것이다. 그의 작품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지녔고, 20세기의 예술가로서는 최초로 미술 분야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당연히 피카소에 관한 소식은 신문의 예술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소개될 정도였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고향인 바르셀로나와 주요 활동지였던 파리와 남프랑스에 있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피카소는 예술가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린 셈이다.


피카소가 그 정도는 아니다

피카소의 작품은 크게 청색 시기, 분홍(장미) 시기, 입체파 시기, 신고전 시기, 후기로 분류된다. 피카소 하면 떠오르는 게르니카 등은 입체파 시기의 작품이고, 입체파는 곧 피카소로 여겨진다. 입체주의의 관점은 단순하다. 물체의 모습은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지만 본질은 그대로라는 입장이다. 이를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서양 미술의 기본인 원근법과 명암법 등을 배제했다.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대상을 여러 방향에서 본 모습을 합쳐서 한 화면에 재구성했다. 이때 본질은 영원히 변치 않으니, 그에 걸맞게 선과 면 같은 기하학적 요소를 적극 이용했다.


입체주의 시작을 알린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피카소가 사람의 눈은 정면, 코는 측면에서 본 모습을 기하학적으로 처리한 이유였다.


입체주의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고, 캔버스에서만 존재하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화가는 현실의 세상을 캔버스에 닮게 그리는 기술자가 아니라, 세상을 캔버스에서 새로운 형상으로 구축하는 창조주가 되었다. 세잔을 계승한 획기적인 생각과 표현 방식은 이후의 현대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런 피카소여도 그의 모든 작품이 중요하고 비싼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파이프를 든 소년은 청색 시기와 분홍 시기의 접점에 위치한 작품으로 피카소의 대표작은 아니었다. 게다가 2004년 경매에 나오기 전의 개인 상거래에서 2,500만 달러(약 325억 원)에도 팔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억 달러를 넘긴 낙찰가를 둘러싼 의문이 제기됐다. 1950년에 3만 달러(약 3,900만 원)였던, 직전에는 팔리지 않던 그림이 어떻게 단 7분 만의 경매로 1억 달러를 넘길 수 있었을까?


구매자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과연 누구이기에 뉴욕의 유명 화상인 래리 가고시안을 꺾고 그 작품을 차지했을까? 여기서 이 그림을 둘러싼 미술 시장 관계자들의 상상은 하나로 모아진다.


내부 거래 혹은 고도의 마케팅?

만약 피카소 작품을 많이 가진 두 집단에서 일종의 내부 거래를 했다면? 누군가 피카소에게 1억 달러를 넘긴 최초의 타이틀을 갖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 가격에 샀다면? '미술 작품 판매가 사상 최초로 1억 달러를 넘긴 화가, 피카소' 등의 수식어가 붙는 순간, 전 세계 방송과 인쇄 매체에서 피카소 관련 뉴스를 계속 내보낼 것이고, 파이프를 든 소년에 견줄 만한 피카소의 유명 작품들은 1억 달러 언저리에서 가격대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 채가 비싸게 팔리는 순간 그 매매가가 기준이 되는 한국의 아파트 거래처럼, 미술 시장도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낙찰 직후에 제기된 내부 거래 의혹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피카소니까 가능하다

우선 피카소의 가치다. 피카소는 생전에 이미 미술사에서 자리를 차지한 거장이자 대중 스타였다. 그래서 1억 달러의 벽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현대 화가로 꼽혀왔다. 두 번째는 작품의 가치다. 파이프를 든 소년의 양식은 피카소의 청색 시기와 분홍 시기를 연결한다. 아비뇽의 처녀들을 통해 입체주의로 스타일을 파격적으로 바꾸기 직전의 작품이라는 측면에서도 소장 가치가 적지 않다. 세 번째는 작품의 소장자인 존 헤이 휘트니(John Hay Whitney )부부의 명성이다. 존 헤이 휘트니는 1958년부터 1966년까지 신문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의 발행인이자, 1941년에는 뉴욕 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의 회장이 되었던 미국 문화예술계의 거물이었다. 미국의 명문가 휘트니 가문은 미술과 특별히 인연이 깊다.


고모 거트루트 밴더빌트 휘트니(Gertrude Vanderbilt Whitney)는 뉴욕의 현대미술을 전문으로 다루는 휘트니미술관의 설립자다. 그리고 이 작품을 소장했던 존 헤이 휘트니 부부는 마네와 쿠르베, 고흐와 고갱, 세잔과 툴루즈 로트레크, 드가와 피카소 등 근대 미술의 주요 화가들의 컬렉션을 알차게 구축했던 수준 높은 컬렉터였다. 그들이 1950년에 3만 달러[2004년 가치로 환산하면 22만 9,000달러(약 3억 원)]에 구매한 이 작품은 부부가 죽은 후 휘트니재단 소유가 되었다가 2004년에 재단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매에 나왔다.


경매가 이뤄진 소더비는 구매자를 밝히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파스타 회사인 바릴라(Barilla) 그룹의 귀도 바릴라(Guido Barilla, 1958~)회장이라는 설이 흘러나왔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또 다른 가능성은 2000년대 초반 미술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했던 제3세계 거부들이다. 어쩌면 러시아와 아시아의 신흥 억만장자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 피카소에게 거액을 쏟아부었을 수도 있다. 또한 언젠가 오를 것이 분명한 피카소인 만큼, 남들보다 먼저 과감하게 투자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입증하기 어려운 설들이 미술 시장에 꾸준히 등장하는 데는 나름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미술 시장의 키 플레이어=화상

미술 시장에서 그림 판매로 가장 이익을 볼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미술 시장을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자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아트 딜러, 화상이다. 그림은 화가가 그리나, 그림 시장은 화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최소한 네 명이 필요하다. 예술가(생산자), 컬렉터(소비자), 경매사(판매 유통자), 그리고 저들을 매개하는 화상이다.


화상은 작품 판매 대리인으로서 시장에 참여하는 각 분야의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도 인맥을 단단하게 구축해야 한다. 그림 판매에 도움 이 된다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림 창작부터 판매에 이르는 거의 모든 과정에 화상이 개입하고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화상이 미술 시장을 주도하는 키 플레이어인 셈이다. 인상파와 입체파 같은 양식사는 화가의 역사이나, 미술 시장의 역사는 화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이유다.


피카소의 국제적 성공에도 두 화상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두 명의 화상이 만든 국제 스타, 피카소

두 명의 화상은 19세기 미술을 전문적으로 다룬 폴 로젠버그(Paul Rosenberg, 1881 ~ 1959)와 근대 이전의 작품을 주로 취급한 조르주 빌덴슈타인(Georges Wildenstein, 1892~1963)이었다. 우선 이들은 피카소를 17~19세기 프랑스 미술과 근대 미술을 연결하는 화가로 미술사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각자 화랑을 운영하면서도 재정 문제에는 적극 협력했고, 사회적 인맥 등을 적절히 이용하여 피카소가 미술 시장의 슈퍼스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피카소 작품의 시장을 로젠버그는 유럽, 빌덴슈타인은 미국으로 나누어 가졌다. 따라서 화가로서 피카소의 전성기는 <아비뇽의 처녀들>로 시작됐다면, 미술 시장의 스타로 발돋움한 해는 1918년이었다.


피카소가 이전의 화상을 떠나 로젠버그와 빌덴슈타인과 계약을 맺은 해이기 때문이다. 피카소 없는 로젠버그와 빌덴슈타인은 존재했겠지만,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위상의 피카소는 없었을 것으로 미술 시장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이런 이유로 피카소 그림으로 막대한 이익을 차지할 ‘21세기의 로젠버그와 빌덴슈타인’을 의심한 것이다. 실제로 그 거래 이후로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들은 대부분 1억 달러 안팎에서 거래됐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비즈

부의 이전 확장판

저자 이장원, 이성호, 박재영 (지은이), 안수남 (감수)
출판 체인지업
출간 2024.04
비트코인, 금, 주식, 부동산보다 더 확실하고 안전한 ‘세테크’ 명강의
자기계발

나의 가치를 높이는 우아한 대화법

저자 김지윤 (지은이)
출판 천그루숲
출간 2024.10
똑똑하고 매력 있게 상대를 사로잡는 말하기 스킬
철학

에머슨의 자기 신뢰

저자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은이), 황선영 (옮긴이)
출판 메이트북스
출간 2023.08
자기를 온전히 믿고 사랑하라
TRENDS & BRIEFINGS
글로벌 트렌드

생성형 AI: 현대 직장에서 비전과 현실의 균형 맞추기

생성형 AI의 급성장 속에서 대형 언어 모델(LLM)의 실제 직무 활용에 대한 기대와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조직들은 LLM 통합 시 지식 수집...
미디어 브리핑스

[MBA] 생성형 AI가 제품 개발에 미치는 영향

기업 혁신 그룹들이 점점 더 생성형 AI를 활용하여 아이디어 발상과 창의성 향상, 시장 및 고객 인사이트 확보, 복잡한 시스템에 사용하기 쉬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