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저자 제프 멀건 (지은이), 조민호 (옮긴이)
출판 매일경제신문사
출간 2024.03
바이러스 실험부터 탄소 배출, 가상화폐, AI까지 과학과 정치의 능력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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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권력을 만났을 때


과학은 어떻게 권력과 만나는가

불안한 상호 의존

과학과 정치 모두 오랜 뿌리를 갖고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각기 독특한 형태를 띤다. 과학은 학계, 실험실, 실험 방법론, 동료 심사 등을 포함하며, 정치는 국가, 정당, 의회, 정책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두 분야 모두 경쟁과 협력의 혼합으로 지식과 행동을 촉진하고 언어에 크게 의존한다. 과학과 정치 둘 다 생각과 행동을 연결할 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구조를 활용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중요한지 관찰해 해석하고 실행한다.


그렇지만 양쪽이 생각하는 방식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정치는 끝없이 유연하다. ‘정치적 진실’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 매우 짧은 시간 지평 내에서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가다. 반면 과학은 어떤 방법은 허용되고 어떤 방법은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해 완고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독단적이다. 다만 정론이 없는 독단이라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다. 과학은 이단과 거짓을 뿌리 뽑기 위해 쉴 새 없이 경계를 감시한다. 때로는 장기적 관점을 취하기도 하고 깊이 분석하기도 하지만 직선적이기도 하다.


과학의 사고방식은 그 본질에서 회의적이고 냉담하다. 사실 이 부분이 과학의 커다란 장점이다. 어떤 주장에 맞닥뜨리더라도 우리에게 그것이 사실인지 계속해서 질문하고 자극하고 의심하도록 요구한다. 과학적 담론이 신화나 설화와 구별되는 대목이다. 과학은 우리가 모든 종류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는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 우리의 삶에 뿌리를 둔 집단적 필요와 욕구를 대변하고 전달하고 반영하는 동시에 우리를 이해하고 안심시키고자 애쓴다. 과학은 경고하고 독려할 수는 있어도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려주지 않는다. 정치는 진단과 처방을 안내해주지만, 그 진단과 처방에 필요한 사실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다.


양쪽 모두 불완전하긴 매한가지다. 과학은 매우 다른 논리와 방식을 띤 공학과 손잡고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AI가 과학과 공학이 서로 얽혀서 발전하는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무엇이 중요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판단하려면 윤리적, 정치적, 실용적인 여러 추론과 결합해야 한다. 과학만으로는 스포츠에서 젠더(gender) 구분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원자력이 기후 변화의 좋은 대안인지 알 수 없다. 과학이 그 중심에 있지만, 바람직하게 실행하려면 서로 연관된 다른 유형의 지식과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정치 역시 다양한 지식의 도움을 받아 그 자체의 결함과 맹점을 인식해나가야 한다. 풍자로만 그쳐서는 곤란하다. 유연함이라는 정치의 장점은 사실과 일관성 그리고 실용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병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를 위한 정치는 대중에 제대로 봉사할 수 없다. 정치는 반드시 올바른 지식과 실천을 통해서만 작동해야 한다.


과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권력과 연결되는가

과학의 정치적 특성

과학의 정치적 특성과 과학이 지원하는 기술에 관한 깊이 있는 문헌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우선순위를 통해 무엇을 개발하고 무엇을 이용할지가 결정된다. 중세 시대의 공성 무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용한 치클론B(Zyklon B) 독가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프랑스와 영국의 공공 자금으로 개발한 콩코드(Concorde) 초음속 여객기 등이 모두 그랬다. 정치는 백인 판사의 판례에 따라 보호관찰 처분을 내리는 AI 알고리듬이나, 1970년대 초까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분류한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심리 치료 안내서 ‘DSM 편람’과 같은 도구에도 포함된다. 원자력 같은 몇몇 기술은 중앙 집중화와 보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며, 태양열 전지판 같은 다른 기술은 그 반대다. 지구 표면에 태양광이 직접 닿지 않도록 황산염을 성층권에 뿌려서 지구 온난화를 늦추겠다는 대규모 지구공학 프로젝트의 결정은 잠재적으로 복잡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보상과 위험의 불균등한 분배도 피할 수 없다.


과학기술의 지향 방향 또한 권력 분포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가난한 국가는 신생아 건강 관리 측면에서 호흡기 감염 및 영양 결핍 문제 해결이 당면 과제다. 그렇지만 이들 국가에서는 여력이 되지 않아 손을 쓰지 못하고, 다른 선진국들에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이미 해결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 건강 관련 연구의 약 40%는 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암은 저소득 및 중하위 소득 국가에서는 질병 부담의 5%만을 차지할 뿐이다.


과학은 정치와 제휴도 할 수 있지만, 정치에 무지할 수도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불의’를 인식론적으로 다룬 연구에 따르면 ‘무지’는 일부 집단의 이익과 가치에 무관심함으로써 다른 집단에 유리한 터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과학도 확실히 이런 경향을 보이곤 했다. 힘없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처지에 무지해 권력의 도구로 이용됐고, 이는 이들의 관점과 가치 및 요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무지 연구(ignorance studies)’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개방성과 투명성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기에 개방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과학도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대체로 언론의 자유와 비교적 동떨어진 곳에서 발전해왔다. 민주주의 국가라도 지정학적 경쟁이 더욱 심화하면서 과학 연구 또한 더 비밀스러워졌다. 과학 연구의 많은 부분이 보안을 이유로 항상 조심스럽게 보호받아온 역사도 이를 반영한다. 비밀주의와 책임 결핍은 종종 더 위험하고 거침없는 아이디어를 허용하기도 했다. 일테면 미국 정보 기관들은 비밀 계획을 위해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고용했는데, 도시 하나를 삼킬 수 있는 인공 쓰나미를 비롯해 로봇 고양이, 달을 대상으로 한 핵무기 실험, 미국국가안보국(NSA)의 대규모 산업 감시 체계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통제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도출해야 할 결론은 모든 과학과 모든 정치 사이에는 강력한 친화성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것이 ‘설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회든 과학이 관심 있어 하는 것과 일치하도록 제도와 예산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를 설계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현실은 과학이 마음먹은 방향에 발맞춰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면 설계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관건은 설계를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다.



과학이 권력의 정당성을 만들어주는가_ 진실과 논리의 문제

충돌하는 논리

정치인 대다수는 과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일이 더 쉬워지고 혼란과 혼돈도 예방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증거와 과학을 따르면 선택과 결정 역시 한결 간편해진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일 때가 많다. 어떤 주제를 더 깊게 파고들면 그와 관련한 접점, 모서리, 빈틈 등이 보이게 된다.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친다고 생각해보자. ‘무작위 대조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RCT)’으로 학생들의 성적을 관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식은 평균을 내는 데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일정 범위를 초과하는 값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올바르게 세분화하지 않으면 평균은 큰 의미가 없다. 스트레스만 심해질 수 있다. 편의상 도움이 되는 방식일 뿐 이해를 돕지는 못한다. 무지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여정은 지식을 확장하는 가장 건전한 여정이지만 불안정한 과정이기도 하다.


과학의 논리

자연 세계를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대상으로 보는 과학의 관점은 기초 연구, 근본 원리 발견, 원리 적용 같은 구분을 정당화했다. 대부분 과학자는 철학에서 ‘자연주의(naturalism)’라고 부르는 것을 믿는다. 존재하거나 발생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보편적 자연법칙의 적용을 받으며, 얼마든지 탐구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과학의 임무는 설령 불완전하더라도 자연을 최대한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신념이다. 그리고 이 과업은 종교, 신화, 기대, 환상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물론 우주 팽창과 대폭발 연구로 ‘빅뱅(big bang)’ 이론에 이바지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조르주 르메르트(Georges Lemaitre)처럼 약간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은 실재에 대한 설명보다는 설명에 대한 설명, 즉 층층이 보이는 모든 것들에 관한 이론, 세상과 사물을 보는 방법, 주목하거나 주목할 필요 없는 것들의 선택, 경계와 분류에 관한 결정, 잘못된 인식과 부분적 예외의 구별 등을 설명한다. 대상을 직접 보는 게 아닌 장치, 수학, 실험적 조사, 모형화, 범주화, 유형화, 통계화 등으로 확률과 규칙을 찾는다. 관찰 대상도 제한돼 있으며, 철학의 오랜 전통처럼 관찰 이면에 있는 실재를 묘사하기보다 가설이나 이론에 관찰을 끼워 맞추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과학의 논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세계, 달리 말해 논리적이고 설명 가능하며 표현할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새로운 지식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지식에 이바지하는 개방성과 발견 그리고 비판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다른 목표도 중요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이런 믿음은 과학자가 거짓된 결과를 선보이거나 엄격하지 못한 방법론으로 연구할 때 과학계가 이를 감시하고 조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과학의 논리에서 이 같은 자체 규제는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과학 연구를 중단시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정치의 논리

우리가 살필 두 번째 논리는 정치의 논리다. 나는 이 논리를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인 “공동체를 위한 좋은 삶을 무엇으로 달성할 것인가?”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무엇’에 대한 정치적 관점은 비교적 쉽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각각의 주제는 문제 아니면 기회다. 정책은 일종의 ‘통화(currency)’다. 대중의 관심에 따라 우선순위가 무한히 바뀌는 통화이며, 우선순위로 지명된 주제에 맞게 진단과 처방의 통화 종류가 결정된다.

우선순위로 지명할 주제에는 실용주의 철학으로 잘 알려진 존 듀이(John Dewey)가 ‘대중과 그 문제(The Public and its Problems)’에서 언급한 과학도 포함된다. 1980년대 에이즈(AIDS)의 심각성을 널리 알린 캠페인, GMO 반대 캠페인, 원자력 발전 반대 캠페인이나 새로운 항암제를 홍보하기 위한 캠페인 등이 모두 대중의 관심에 따라 지명된 과학적 주제를 정치의 논리로 정책화한 사례다.


하지만 정치는 어쨌거나 통치할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뿐 과학이 그 사람들에게 직접적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대중적 관심사, 동기, 특성 등을 고려하는 정치는 그 본질이 이미 과학 이전에 형성된 것이므로, 과학은 세상을 차갑고 객관적이고 고정적인 대상으로 보는 데 반해 정치는 뜨겁고 주관적이고 유동적인 대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다시 말해 정치가 보는 세상은 사람과 주제의 조합이다. 이 조합이 대중의 관심을 다루고, 주제를 지명하고, 경쟁자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문제를 식별하고, 수사적 기교를 동원해 설명하고, 설득하고, 논쟁하고, 무시하는 등의 온갖 정치적 활동을 유도하면서 복잡하디 복잡한 정치의 논리를 이끌어낸다. 사실과 증거는 주로 정치적 수사를 위한 무기로 쓰이며, 실제 정치는 설명하고, 논쟁하고, 비난하고, 압살하는 ‘말의 잔치’에 가깝다.


말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다 보니 정치인은 “자신이 실행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곤 한다. 그렇게 정치는 때때로 국가와 관료들에게 능력 밖의 부담을 주면서 실망과 환멸의 순환을 시작하게 만든다. 말의 과잉은 정치가 경쟁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런 방식 속에서 과학도 말에 반영된다. 여기에서 경제 성장이 자본주의 시장 경쟁의 결과물이고, 과학 진보가 과학계 명성 경쟁의 결과물이듯, “민주주의적 방법론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물로서 입법과 행정을 산출한다”는 ‘정치의 논리’가 도출된다.


관료주의의 논리

다음은 관료주의의 논리다. 이 논리는 지도자의 통치를 뒷받침하는 정부 관료의 일상적 리듬에서 발견된다.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관, 관리자, 사무관, 공무원 등이 모두 관료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 제국에서는 곡물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관료였다. 영국 제국에서는 식민지에 파견한 지방관들이 관료였고, 같은 시대 중국도 지역을 다스리는 태수가 관료였다. 관료는 중앙 정부의 지시 사항을 성실히 수행하고, 정치적 요구와 국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에 대처해야 했다.


관료주의의 도덕 세계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는 것들’을 질서 있게 만드는 곳이다. 관료주의는 관료가 없는 세상을 무질서하고, 갈등이 넘쳐나고, 비효율적이고, 불행하고, 변덕과 핍박이 난무하는 시공간으로 바라본다. 예전에 중국 정부 관료들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자신들이 봉사하는 대중을 일컬어 제멋대로인 무정부 상태에서 불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무척 놀랐었다. 중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유교적 순응이 몸에 배어 있다고 희화해온 서구의 고정관념과는 무척 다른 이야기였다.


관료주의적 관점은 과학을 자연스럽게 아군으로 여기곤 한다. 과학 역시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엄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과학은 계획하거나 조종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관료주의와 심심치 않게 마찰을 일으킨다. 사실 지식과 같이 유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대상을 어떻게 관리하고 체계화할지가 관료주의가 봉착한 가장 큰 딜레마다. 어떻게 하면 금송아지를 살찌우면서 병들거나 죽게 하지 않을지의 문제다. 어떤 과학기술사회학자들은 “한참 성장하고 있는 분야라도 산업 기업과 연계된 과업 중심 연구소나 기득권을 가진 정부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곳들은 기껏해야 보수적인 개선을 이룰 뿐”이라고 지적했다. 설령 좋은 의도라도 관료주의가 창의성을 저해한 수많은 사례가 있다. 올바른 과학 정책을 모색할 때 노자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일과 같다.”


한눈을 팔아 너무 오래 두면 다 타서 못 먹게 되고, 너무 이리저리 자주 뒤집다 보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교차하고 충돌하는 논리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논리는 서로 어떻게 교차하고 충돌할까?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약간의 오해와 왜곡이 그 모든 것의 요인이다.


경제학자들은 가격과 보상으로 이뤄진 세상을 본다. 법률가들에게 세상은 준법과 범죄로 구성돼 있다. 미디어가 보는 세상은 온통 이야기다. 이와 같은 자기지시적 논리는 저마다 우리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 ‘비즈니스를 위한 비즈니스’를 제시한다. 정치는 과학을 사명, 신화, 서사, 영광으로 바꿔서 이해한다. 관료주의는 과학을 법, 규칙, 계획, 점검으로 변환한다. 반면 과학은 정치와 관료의 정부를 증거, 실험, 사실에 기반한 이상적 체계로 그린다.


세 가지 논리는 상호 교차한다. 가장 중요한 교차적 요소는 ‘위험’이다. 각각의 논리는 위험에 관한 자신만의 용어가 있지만, 그것이 위험을 지칭한다는 사실은 쉽게 공유된다. 정치는 대중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므로 홍수나 지진 같은 위험을 예측하고 대비할 때 과학의 조언이 필요하다. 관료주의는 정치와 과학의 안내에 따라 보건과 안전을 위한 규칙과 대비책 그리고 지원 수단 등을 확립한다. ‘기회’를 놓고도 서로의 논리가 교차한다. 깨끗한 식수를 확보하거나 오염을 예방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등의 새로운 방법 또한 정치, 과학, 관료주의가 더불어 생각과 선택을 공유할 기회로 작용한다. 이 밖에 전쟁이나 경제 성장도 교차적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각각의 논리는 서사를 공유하고도 서로 충돌할 수 있다. 정치적 서사는 과학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산을 제공해준다. 그와 같은 서사에는 경제 발전, 냉전, 우주 경쟁, 사회 문제 해결, 대중 보건, 탄소 제로, 그리고 최근에는 지속가능 발전목표(SDGS) 등이 있다. 이 서사로 임무를 설정하며, 해당 임무가 매력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정치인들은 난해하고 복잡하며 예측할 수 없는 과학의 논리를 훨씬 단순한 정치의 논리로 바꾼다. 비록 구현이 어렵고 지금까지의 서사를 넘어서는 더 많은 임무가 새롭게 시작되지만 말이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유연함이다. 정치는 유연함이 미덕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유연함이 정치의 진보를 가로막는다. 그때그때 발맞춰 유연하게 움직일 뿐 지식을 축적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세대가 바뀜에 따라 새로운 정치적 규칙을 계속 만들어낸다. ‘정치’라는 용어만 함께 쓸 뿐 정치학을 공부하는 정치인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공부하는 정치인이라도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정치학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과학이 그 특유의 완고함과 독단을 유지하는 대가는 유연함 부족과 의사소통 및 공감 능력 결여다.



국경 있는 세계의 국경 없는 과학_ 균형의 문제

글로벌 과학기술을 통제하는 방법

어떤 유형의 글로벌 민주주의 체제는 고사하고 어떤 유형의 글로벌 거버넌스도 아직은 과학기술에 책임을 묻거나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유엔이 창설되기 10년 전에는 글로벌 거버넌스를 수립한다는 발상 자체가 암울했었다. 당시의 현실주의는 비관주의를 의미했다. 하지만 역사는 비선형적으로 움직이기에 현실주의도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바뀐다. 역사는 곡선과 굴곡을 이루면서 흐르고, 좋든 나쁘든 우리 모두 역사의 흐름을 타게 된다. 그러므로 흐름을 역행하려고 애쓰기보다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쪽이 합리적이다. 제대로 올라타려면 미리 대비하는 게 좋다. 10년 동안 불가능했던 일이 다음 10년에는 불가피해질 수도 있다.


세계 정부라는 아이디어

그렇다면 어떤 유형의 세계 정부, 국제 기구가 이 같은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을까? 유형을 말한 까닭은 형태가 있어야 기능할 수 있고 기관을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라 가능한 과업의 범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에 집중하는 나라는 복지에 초점을 맞추는 나라와 다르게 보인다. 글로벌 거버넌스도 마찬가지다. 유형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기존 기관들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흐름’을 활성화하는 첫 번째 유형이 있다. 유엔의 전신은 빈 회의(Congress of Wien)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전유럽에서 벌어졌던 전쟁을 수습하고 무역 질서를 재확립하는 등 유럽이라는 큰 강이 어떻게 흘러야 하는지 설계했다. 이후에는 우편과 전신 체계에 적용할 원칙을 확립했다. 현재는 유엔의 산하 기관이지만 본래 국제전기통신연합(ITU)는 1865년에 다른 어떤 국제 기구보다 앞서 설립됐다. 상품이나 메시지가 더 쉽게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이들의 과업은 곡물이나 철강 무역, 그리고 훗날 금융 거래, 이동 통신, 항공 운송, 보안, 바코드, HTML 등 ‘흐름’과 관련한 글로벌 거버넌스 기본 체계를 수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유형은 ‘전쟁’을 관리하기 위한 과업을 추진한다. 국가 간 전쟁을 금지하고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원칙을 통해 국가가 자국민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 LN)과 유엔으로 이어지는 국제 기구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지원’이다. 기근을 예방하거나 개발을 촉진하거나 난민을 돕기 위한 유형이다. WHO(세계보건기구), FAO(식량농업기구),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IMO(국제해사기구), IWO(국제워크캠프기구), UNHCR(유엔난민기구)과 같은 국제 기구들이 수행하는 과업이다. 과학기술은 병력 이동을 감시하는 인공위성에서부터 데이터 전송 표준 설정과 범유행 전염병에 대한 조치에 이르기까지 국제 기구가 원활히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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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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