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5월 1주차

BOOK SUMMARY
 인문 

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

저자 일본박학클럽(역: 서수지)
출판 사람과나무사이
출간 2023.02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의 통찰을 통해 세계사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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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가 재미있어지는 39가지 길 이야기

무역과 식민지를 발판으로 고대 지중해 세계를 평정한 페니키아인의 길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고 최초의 문명을 이룩했다. 기원전 5000년 무렵 오리엔트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문명 태동과 발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문자’를 꼽을 수 있다. 이집트 문명의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쐐기문자가 그런 예다.

페니키아인은 상형문자와 쐐기문자 등 당대의 여러 문자를 융합하고 간략화해 알파벳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어떤 문자도 아닌 페니키아인이 창안한 알파벳이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을까? 그들이 이룩한 ’지중해 무역‘과 ’식민 정책‘을 살펴보며 위 질문의 답을 찾아가 보자.

페니키아인은 어떻게 고대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나
페니키아인은 어떤 민족이었을까? 오늘날의 레바논인 고대 시리아·팔레스타인 연안 지역에는 대략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다. 그 민족에서 파생한 일파가 오늘날 우리가 ‘페니키아인’이라고 부르는 민족이다.

그들은 이 지역에 풍부한 레바논 삼나무, 사이프러스 등의 목재와 향유 자원 같은 특산물을 수출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더불어 항해술까지 뛰어났던 페니키아인은 최고급 목재, 자줏빛 염료를 포함한 특산물을 먼 지역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연안에 시돈, 티레 등으로 대표되는 무역 거점도시를 세웠으며 무역망 확대에 따라 새로운 도시국가를 늘려 나갔다. 이렇듯 페니키아인은 무역과 식민지를 발판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했다.

고대 세계 최고의 명장 한니발을 배출한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이 세운 식민 도시국가였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망을 확장하고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오늘날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연안은 지중해 동안에 속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지중해를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페니키아인이 조금씩 진출하며 새롭게 발을 내디딘 지역에 자신들만의 ‘무역 거점’을 세우고, 그곳으로부터 네트워크를 다지며 천천히 세력권을 넓히는 방식을 활용한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남안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들이 오늘날의 튀니지에 건설한 도시국가는 고대 로마에 맞선 용맹한 한니발 장군을 배출한 카르타고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기원전 813년에 건설되어 지중해 무역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번영을 구가했다. 지중해 각지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인의 세력권은 지중해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까지 확장되었다.

페니키아인이 알파벳의 원형문자를 만든 이유는
페니키아인은 어떻게 알파벳의 원형 문자를 만들어냈을까? 시나이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애초 ‘원시 시나이 문자’라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닮은 그림문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세기 전반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지역민은 원시 시나이 문자를 발달시킨 ‘원시 가나안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기원전 14세기 중반 전후로 북시리아의 우가리트에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 쐐기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후 페니키아인은 쐐기문자와 원시 가나안 문자를 개량해 선문자로 다듬은 다음 22개 자음을 기호로 표시하는, 알파벳의 원형이 되는 표음문자를 발명했다.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페니키아인은 왜 그때까지 오리엔트 각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표의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표의문자가 무역용어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

즉, 실용성을 극대화해야 하는 무역 현장에서 좀 더 효과적이고 간편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한 별도의 문자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페니키아인의 알파벳은 그들이 지중해 서쪽으로 세력권을 확장해감에 따라 급속하게 펴져 나갔다. 지중해 섬을 거쳐 그리스로 전파된 페니키아인의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리스 문자가 로마로 전해져 로마 문자로 변형되었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무역로를 개척하는 동시에 알파벳을 전파하는 ‘문명의 길’을 탄생시켰다. 고대에 페니키아인이 활발한 지중해 무역활동을 통해 알파벳이라는 획기적인 문자를 개발하고 확산시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세계사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지식혁명의 불길을 전 세계로 확산시킨 제지법 전파의 길
300년 가까운 혼란기를 잠재우고 중국 통일이라는 위엄을 달성한 수나라는 제2대 황제 양제의 강압적이고 무모한 통치가 빌미가 되어 단명하고 말았다. 수나라의 뒤를 이어 중국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당나라다.

당나라는 제2대 황제 태종 이세민 치세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나라가 영토를 계속 확장하며 나아간 결과 실크로드 세력권이 서쪽으로 더욱 전진하면서 마침내 당나라와 이슬람 세력이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는 7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리고 중국과 이슬람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이 왔다. 이를 계기로 세계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새로운 ‘문화의 길’이 탄생하게 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당이 패배함으로써 중국 고유 기술인 제지법이 이슬람권과 유럽에 전파되어 세계사를 바꾸다
아바스왕조 군대는 사로잡은 당나라군을 사마르칸트로 끌고 갔다. 이렇게 끌려간 당나라 포로 가운데 제지공이 끼어 있었는데, 이 이름 없는 장인이 세계사의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아바스왕조는 곧바로 제지 기술을 받아들이고는 사마르칸트에 제지 공장을 세웠다. 이는 757년의 일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1세기 무렵 후한 시대 관리 채륜이 개량해 완성한 품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이후 오래도록 중국이 독점하고 있었다. 제지법을 발명하지 못한 이슬람권과 서양에서는 기록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양피지를 이용했다.

그러데 양피지는 물로 닦아내거나 표면을 깎아내면 글자가 지워져 문장을 의도적으로 고치거나 누락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종이에는 잉크가 스며들기 때문에 일단 쓴 글자를 보태거나 지워서 고치기가 힘들다. 게다가 양피지를 생산하려면 젖과 고기를 제공하는 귀중한 가축을 도살하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슬람 세계는 제지공이라는 뜻밖의 귀중한 ‘전리품’을 획득한 것이다. 머지않아 사마르칸트에서는 페르시아만 연안의 특산품인 아마포 조각을 원료로 양질의 종이를 제조하는 기술이 확립되었다. 종이를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이슬람제국 내에서 사마르칸트산 종이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천일야화]로 잘 알려진 아바스왕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는 제지 산업을 국영사업으로 정하고 수도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에 제지 공장을 신설했다. 이는 793년의 일이다. 국내에서 종이가 대량 생산됨에 따라 종이는 국외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다마스쿠스산 종이는 비잔틴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이 시대는 바야흐로 이슬람 세계가 급속도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이슬람 문화권이 널리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제지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면서 제지 기술 또한 각지로 퍼져나갔다.

제지 기술 전파 경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북아프리카 서쪽으로 전파된 경로다. 10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동 전역으로 확산된 제지 기술은 10세기 후반 이집트, 12세기 초 리비아를 거쳐 모로코 페스에 도달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12세기 중반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했고 마침내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와 영국에 전해졌다. 프랑스 남부 에로 지역에 유럽 최초의 제지 공장이 설립된 것은 1189년의 일이다.

둘째는 이집트에서 지중해를 끼고 시칠리아섬에 이르러 이탈리아반도로 건너간 이후 북상해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북유럽으로 전파된 경로다.

유럽은 이슬람권에 비해 한참 늦게 제지 기술을 습득했다. 이후 제지 기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은 몇 백 년이 지난 15세기 무렵의 일이다. 유럽에 제지 기술이 일반화됨으로써 구텐베르크의 세계 최초 ‘활판 인쇄’ 발명을 촉진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인쇄 혁명이 일어나 여전히 필사가 중심이던 이슬람 문화를 추월할 수 있게 되었다.

제지공이 타의에 의해 걸어간 길에서부터 세계사의 커다란 흐름이 전환점을 맞이했다. ‘기록 기술’ 전파의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럽의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바꾸고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씨앗을 품게 한 콜럼버스의 항해길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니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에 다다랐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항해자이자 탐험가 콜럼버스가 이 항해에 성공한 것은 1492년이었다. 훗날 ‘신대륙 발견’이라고 불리게 된 이 기념비적인 항해를 기점으로 세계의 향방이 완전히 바뀌었다.

콜럼버스는 왜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을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우겼을까?
중세 유럽인은 지구는 평평하고 바다 끝은 막다른 길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발상은 콜럼버스 시대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콜럼버스가 무모한 모험에 나선 건 아니었다. ‘지구는 둥글다’는 주장이 15세기 초부터 서서히 퍼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프랑스 추기경이면서 천문학자인 피에르 다이의 [이마고 문디(Imago Mundi)](1410) 등을 읽고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아시아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또 피렌체 출신 천문학자이며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에게 서쪽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문의한 결과 이 새로운 항로가 아프리카를 도는 항로보다 아시아에 가깝다는 답변을 얻어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가 이끄는 배 세 척에 선원 120명을 태우고 스페인 항구를 출발했다. 그리고 오로지 서쪽으로만 나아갔다. 그런데 가도 가도 육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선원들이 뱃머리를 돌리자고 요구했다. 가까스로 선원들을 설득해가며 70일 남짓 항해를 계속한 끝에 콜럼버스 일행 앞에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바하마제도에 마침내 도달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부근 섬을 돌며 정찰하면서 그곳이 ‘미지의 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아시아의 일부인 인도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콜럼버스가 특히 무지해서 일으킨 착각이 아니었다.

애초에 당시 유럽인은 아시아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라비아반도에서부터 동쪽 지방을 뭉뚱그려 인도를 뜻하는 ‘인디아스’라고 불렀다. 바이킹 시대 항해 기억은 이미 아주 오래 전에 모두 잊혔고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태평양의 존재도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스페인에서 귀환한 콜럼버스는 대대적으로 환영받았으며 곧바로 두 번째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이사벨 여황의 기대가 한층 커졌기에 콜럼버스가 이끈 선단은 배 17척, 선원 1,400명이라는 대대적인 규모로 대포와 말까지 실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 섬 중에서도 특히 큰 에스파뇰라섬에 도착하자마자 탐색에 나섰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향신료는 발견하지 못했고 선주민을 착취해 채굴한 금의 양도 많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이후로도 계속 항해에 나서 총 네 차례 ‘인도’로 건너갔지만 수확은 보잘것없는 수준에 그쳤다.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던 스페인은 콜럼버스의 사업에 크게 실망했다. 그럼에도 콜럼버스는 150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이 아시아에 도달했다는 주장에 굽히지 않았다.

콜럼버스가 상륙한 곳이 아시아가 아니라 그때까지 유럽인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대륙’이라는 사실이 판명된 때는 1513년 무렵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콜럼버스의 주장을 부정하고 ‘신대륙설’을 강조했고, 파나마지협을 횡단해 태평양으로 진출한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가 ‘신대륙설’을 증명했다.

교황의 중재로 유럽 이외의 세계를 동서로 양분해 차지한 오만한 두 정복 국가, 스페인과 포르투갈
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과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스페인은 신항로 개척시대에 선두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양국이 획득한 영토 소유를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지며 언제든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두 나라 모두 소모적인 전면전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교황 알렉산데르 6세(Pope Alexander VI, 재위 1492~1503)가 중재에 나섰다.

카보베르데제도 서쪽 약 500킬로미터 자오선을 경계로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이 소유한다는 조약이 성립했다. 이때 교황은, 이교도의 토지는 모두 포르투갈과 스페인에게 주기로 했다. 이는 1493년의 일이다.

그런데 포르투갈이 이 ‘교황 자오서’ 위치에 불만을 제기하며 항의했다. 포르투갈의 항의가 받아들여져 이듬해인 1494년에 경계를 1,300킬로미터 정도 서쪽으로 이동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16세기에 이르러 포르투갈은 인도와 아프리카에, 스페인은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다만 필리핀제도와 브라질은 예외로 쳤다. 필리핀제도는 이미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었기에 스페인령으로, 브라질은 포르투갈 출신 항해자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탐험해 포르투갈 깃발을 꽂았기에 포르투갈령으로 인정했다.

한편 이 무렵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국내 산업 발전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식민지는 북아메리카 일부에 머무를 뿐이었다.

유럽의 신항로 개척으로 세계사의 중심축이 지중해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이동하다
신항로가 열리면서 불러온 파장은 엄청났다. 유럽의 무역권이 급속도로 확대되어 오래도록 세계 무역을 주도한 지중해의 역할과 중요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이들 도시와 연결되어 있던 남부 독일 도시들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세계 무역의 주 무대는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옮겨왔고 그 주인공은 포르투갈, 스페인과 더불어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번영은 그들의 바람과 달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들 국가에서는 왕가가 식민지 경영과 무역을 장악함으로써 식민지에서 획득한 이익은 모조리 본국으로 보내졌지만 왕가가 그 대부분을 탕진해 나라 전체에 부가 돌아가는 사업이 되지 못했다.

또 이들은 식민지 무역에서 중요한 품목인 모직물과 견직물 생산을 비롯한 산업 육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이로써 17세기에 들어서자마자 기회를 엿보던 영국과 네덜란드에 추월당했다. 아시아 물품이 대량으로 유럽에 들어오게 되면서 신항로 개척의 주요 동기 중 하나였던 향신료 가격이 폭락한 것 역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발견했을 때는 별다른 수확을 올리지 못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량의 은이 발견되었다. 스페인은 선주민을 착취해 은광을 개발했고 대량의 은이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은 가격이 급락하며 물가가 폭등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토지를 소유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던 봉건 영주는 몰락의 길로 떨어졌고 대신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신항로 개척은 유럽의 ‘경제 구조’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리고 새로 열린 바닷길은 전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밀히 움직이는 세계화 시대의 문을 열었다.


미국 재통일의 버팀목이 된 대륙횡단철도 부설의 길
미국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 본격적으로 서부 개척에 나섰다. 서쪽으로 진출하며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아가다 마침내 태평양 연안에 도달한 것은 19세기 중반 무렵의 일이다. 미개척지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교통의 중요성이 강하게 대두했다. 이에 적합한 교통수단으로 거론된 것이 당시만 해도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철도였다.

철도의 유익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미국 동부에는 일찍이 철도망이 부설되었다. 원래 철도는 증기기관의 발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탄생했다. 1814년의 일이다.

이후 영국 발명가 조지 스티븐슨이 기술적인 완성도를 높여 철도를 실용화했다. 이는 1825년의 일이다. 1830년 영국의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었고 철도 실용화는 영국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그 무렵 영국에서는 주력 제품인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생산한 제품을 운송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전까지 운송을 대부분 책임진 것은 운하였으나 이제 운하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물량이 늘어났다. 그래서 화물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리버풀 하구와 면직물을 가공하는 공업도시 맨체스터를 한 시간 만에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했다.

철도를 활용해 신속한 대량 운송이 가능해짐으로써 영국은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 면제품이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주요 도시를 잇는 철도 노선은 영국 산업혁명을 뒷받침했고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발돋움하는 데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최초의 ‘철도전쟁’으로 불리는 까닭은?
미국에서도 일찍부터 철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부 개척이 진행됨에 따라 동부의 철도망을 연장하는 형태로 미국 동서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두고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849년에는 뉴욕의 포목상 출신인 아사 휘트니가 대륙횡단철도 실지 조사를 시행하고 ‘태평양 철도 프로젝트’라는 팸플릿을 작성해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의 필요성을 환기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재임 1861~1865)대통령도 원래부터 새로운 교통수단에 관심이 많았다. 1861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링컨은 개발이 진행되어 비교적 풍요로운 동부와 사막과 로키산맥 등에 가로막힌 서부 및 서해안이 분단되는 상황을 염려해 연방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대륙횡단철도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1862년에 태평양 철도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만 이즈음 미국은 동서 격차 이상으로 심각한 국가 분열 위기를 맞이했다. 바로 남부와 북부의 대립이었다. 상공업 도시로 발전한 북부와 면화 플랜테이션을 주축으로 한 농업이 발전한 남부는 그 산업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두 지역은 흑인 노예문제를 두고 대립의 골이 나날이 깊어졌다. 북부에서는 자유로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예제 폐지론이 힘을 얻었다. 반대로 남부에서는 노예 노동력 없이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할 수 없었기에 노예제 유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렇게 미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남북전쟁을 치르는 동안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 하지만 북군은 연락선, 무기 보급, 운송 등에 철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이전과는 다른 구도로 전쟁을 주도했다. 이로써 남북전쟁은 최초의 ‘철도전쟁’으로도 일컬어지며 근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을 겪으며 철도의 중요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신속하게 법안이 통과되자마자 대륙횡단철도 건설이 시작되었다. 동쪽에서는 유니언 퍼시픽 철도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샤이엔으로 가는 철도 건설을 진행했다. 서쪽에서는 캘리포니아의 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새크라멘토, 리노로 가는 철도에 침목을 놓기 시작했다.

불과 4년 만인 1869년 5월 유타주 프로몬토리에서 두 선로가 연결되며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되었다. 철도의 마지막 못을 박는 개통 기념식이 열린 것은 5월 10일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동부와 서부가 철도로 연결되었다. 이제 서부 개척을 이끌던 포장마차를 대신해 철도가 교통의 대동맥이 되었고, 서부 개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미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신속한 대량 운송 시스템을 갖춘 덕분에 공업 분야에서 급성장을 이루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침내 미국은 세계 일등 공업국으로 우뚝 섰다. 대륙횡단 철도는 남북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미국이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분수령 역할을 했다. 동서가 연결되면서 한 차례 분열을 경험한 후 ‘미국 재통일’분위기로 빠르게 전환된 것이다. 서부 개척을 촉진하고 미국을 세계 경제 대국 최상위권에 올려놓은 철도는 미국이 20세기 패권 국가가 되는데 있어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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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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