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7월 2주차

BOOK SUMMARY
 인문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저자 우스이 류이치로(역:김수경)
출판 사람과나무사이
출간 2022.06
커피는 권력을 원하고 권력은 커피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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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검은 음료’ 커피

‘커피는 본래 와인이었다’라는 말의 숨은 의미는?

커피는 별난 음료다. 사실 대체로 몸에 나쁜 편이다. 마시면 쉬이 흥분하게 되고 잠들기 어려워진다. 식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런 커피의 부정적인 특성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전 세계로 전파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 바로 수피교 수도사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커피를 마시고, 식욕을 줄이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수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서 맨 처음 인류 역사에 등장했을까? 8세기 말 메소포타미아 지역 바빌론 인근의 쿠파라는 마을이었다. 수피는 양털을 의미하는 ‘수프’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양털로 된 하얀 망토를 몸에 두르고 광야에서 종교적 고행을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하얀 양털 옷은 흰옷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데, 광야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교도 은수자(세속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된 채 고행하는 수도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후 흰 양털 옷이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킨다며 격렬한 비난을 받은 뒤 여러 색 망토를 입게 되었지만, 아무튼 수피라는 단어는 이슬람 신비주의자를 총칭하는 말로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슬람 커피 세계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커피 탄압 사건, ‘메카 사건’

커피가 수피교도와 수도사에 의해 퍼져 나가면서 하나둘 문제점이 드러났다. ‘카와’라는 명칭은 커피가 생기기 이전에는 가벼운 백포도주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커피와 와인이 별개의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생각이다. 커피도 카와이고 와인도 카와였던 과도기에는 각 음료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슬람 세계에는 와인을 경계하는 속담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신앙과 와인은 영립할 수 없다.

-와인은 모든 악으로 통하는 길이다.

-와인을 마신 자의 기도는 알라에게 도달하지 않는다.

-와인을 마시고, 팔고, 사고, 또 다른 사람이 마시도록 부추긴 자에게는 저주가 내릴지어다(사막의 와인 상인은 유대교도 혹은 그리스도 교도였다).

-이 세상에서 와인을 마신 자는 저 세상에서 와인을 마실 수 없다.

-일부러 와인을 마신 자는 부활의 날에 고름을 마셔야 한다.


마침내 많은 사람이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사건은 다른 곳도 아닌 메카에서 일어났다. 1511년 6월 20일 금요일, 예언자 무함마드의 탄신일 전날 밤의 일이다. 메카의 총독 카이르 베그 알미마르는 성스러운 모스크에서 하루 일과를 기도로 끝내고 늘 그랬듯 신전의 신비한 보석인 흑석에 입을 맞추었다. 흑석 반대쪽에는 잠잠성수가 있어 그는 성수를 마신 뒤 다시 기도했다. 그가 이렇게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을 때 경내 한곳에 등불을 켜고 모인 수상한 무리가 있었다. 그 수상한 무리는 뭔가 술 같은 걸 돌려 마시고 있었다. 그즈음 신전 근처 식당에서도 팔기 시작한 카와가 틀림없었다. 카이르 베그는 발칙한 무리를 호되게 꾸짖고 내쫓았다. 그리고 다음 날 메카의 간부회의를 소집해 카와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각본은 이미 짜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이르 베그는 미리 대기시켜 둔 페르시아인 의사 두 명을 불러들여 전문적 의견을 구했다. 학식이 높은 두 의사는 미리 준비해둔 답변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카와는 차고 건조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을 마시면 신체 균형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몇 사람이 그 주장에 동조해 논리를 폈다.


엉성한 각본에 어설픈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메카의 총독 카이르 베그 알미마르는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었으며, 이후 본격적 커피 탄압이 시작되었다. 메카의 길거리에서 커피콩을 볶거나 커피를 판매한 자, 그리고 커피를 마신 자는 모질게 채찍질을 당했다.


그러나 커피 탄압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의에서 커피 전면 금지에 찬성하지 않은 온건파 몇 명이     카이로에 의사록을 보내 중앙정부의 의견을 물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카이로 중앙정부는 공식 답변을 보내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카이로 중앙정부는 무리하게 커피를 탄압한 카이르 베그를 해임시켰다. 회의에 증인으로 출석한 두 의사는 그 후 메카를 떠나 카이로로 이주했다. 그리고 카이로가 오스만제국에 정복되었을 때 그 두 의사는 오직 ‘신만이 아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역사에 기록된 대표적 커피 탄압 사건인 ‘메카 사건’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이는 커피가 승리의 브이 자를 그리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예멘 커피상인이 만든 희대의 히트 카피-‘커피에 잠잠성수와 같은 효과가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사람들이 처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는 그것을 마시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밤에 모스크나 수도원 숙소에서 수도사나 세속 신자들이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셔서 잠을 쫓기 위한 것, 그것을 바로 커피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탄생한 ‘커피하우스’라는 이 독특한 메커니즘은 커피와 함께 유럽 시민 생활에 흥취를 더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 세계를 석권해버린 커피하우스가 하나의 산업으로 널리 확산한 데에는 이슬람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다.


이스탄불의 커피하우스는 ‘카흐베하네’라고 불렸다. 여기서 ‘하네’는 카라반(Caravan, 통상이나 성지순례 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겸하여 무리를 이루어 여행하는 상인 집단)을 위한 여관이나 선술집이라는 의미다. 1511년 ‘메카 사건’ 때 많은 커피가 압수된 곳이 바로 멀리서 찾아온 젊은 남녀를 맞이하는 여관 겸 선술집인 ‘하네’였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술을 금지한 문화권에 선술집이 존재했다는 사실부터 기묘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겉모습이야 어떻든 양탄자처럼 보기 싫은 뒷면도 존재하는 것이 인간사 아니겠는가. 선술집도 필요악처럼 반드시 존재해야 했기에 존재했을 것이며 그 나름대로 활기가 넘쳤다.


초기 카페가 겉으로 보기에 선술집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해도 그 메뉴 중심이 와인이 아닌 ‘이슬람 와인’으로 공인되어 가는 음료였다는 점에서 ‘카흐베하네 산업’의 비약적 발전은 그야말로 떼어 놓은 당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술집이 뭔가 떳떳하지 못한 장사였던 만큼 선술집에서 커피하우스로의 전환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커피가 선술집 메인 메뉴 자리를 꿰찬 시점부터 커피는 확산일로를 걷기 시작한 셈이었다.


전 이슬람 세계에서 독실한 신자들이 메카를 찾아온다. 카바 신전을 참배해 흑석에 입 맞추고 잠잠성수를 마신 순례자는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검은 잠잠성수’를 마셨을 것이다. ‘커피에 잠잠성수와 같은 효과가 있다.’ 이는 ‘알리 이븐 우마르의 커피 발견 이야기’를 만들어낸 예멘 커피상인의 공전의 히트 카피였다.


사막민족에게 물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고향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병자를 위해 잠잠성수를 가지고 돌아가는 순례자라면 아마도 ‘그것을 몸속에 넣고 죽은 자는 초열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알려진 검은 액체의 원료를 산지에서 악착같이 구해 몸에 지니고 돌아갔을 것이다.


또 그로 인해 커피의 존재는 순식간에 전 이슬람 세계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순례, 그것은 거대한 상품수송기관이며 정보전달기관이다. 머지않아 그 운반과 교환에 이슬람 세계의 거상이나 유럽제국의 상인자본가가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근대 상품교환사회의 대표적인 상품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세계 시장에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혁명의 인큐베이터가 된 커피와 카페

프랑스 커피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커피나무’

18세기, 유럽에서 커피 재배에 관한 한 확실한 선진국은 네덜란드였다. 암스테르담시는 자바에서 커피나무를 들여왔다. 그 나무는 전 유럽에서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이후 암스테르담시에 부임해 있던 프랑스 영사가 암스테르담시와 오래 교섭한 끝에 커피나무 한 그루를 루이 14세에게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은 1714년의 일이다.


서인도제도에 프랑스 커피를 뿌리내리게 한 것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에서 근무한 해군대위 가브리엘 드 클리외다. 당시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커피나무는 왕립식물원 온실에 있었다.  그 후 커피나무는 왕성하게 개체수를 늘려갔다. 르 클리외는 식물원 원장에게 커피나무를 나눠달라고 부탁했지만 쉽사리 허락을 얻지 못하자 특별한 연줄을 활용하기로 했다. 르 클리외는 어느 지체 높은 부인을 통해 드 시라크에게 여러 번 부탁했으며, 드 시라크는 거듭되는 부인의 간청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드 클리외는 어린 커피나무 한 그루를 소중히 지닌 채 낭트를 떠나 마르티니크로 향했다. 드 클리외가 가져온 커피나무는 순식간에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했다. 이후 마르티니크와 과달루페는 1,120만 파운드의 커피를 수출했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양의 커피는 저 멀리 이슬람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전반 이슬람 세계의 커피무역을 장악한 이들은 카이로의 거상이었으나 프랑스 커피가 그들을 타격했다. 서인도제도의 커피가 마르세유를 거쳐 서아시아로 역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인도 커피는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이것이 주요한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드 클리외는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과달루페 총독으로 부임했다. 훗날 그가 파리에서 여든네 살로 생을 마칠 때는 프랑스 최고 영예로 인정되는 레지옹도뇌르 명예훈장이 주어졌다. 신문은 그의 죽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한 시인은 커피와 ‘행복한 아라비아’라는 오래된 모티프에 변주를 더해 ‘행복한 마르티니크’를 구축한 드 클리외의 위업을 서사시로 칭송했다. 


행복한 마르티니크! 아, 기분 좋게 사람을 환대하는 바닷가여!

그대는 신세계에서 최초의 것을 열매 맺었다

아시아의 향기로운 과실을 처음 받아들여

프랑스 토양에서 신의 음식을 풍성하게 했다


커피가 ‘니그로의 땀’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으로 불리게 된 은밀하고도 잔혹한 이유

커피를 ‘니그로의 땀’이라고 부르는 무시무시한 어휘가 남아 있다. 왜 이런 어휘가 생겨났을까? 흑인이 손이 많이 가는 커피 재배를 뒷받침한 주요 노동력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서해안에 집결한 흑인노예는 그리스도교 목사의 축복을 받은 후 서인도제도의 플랜테이션으로 실려 갔다. 한데 충격적인 것은, 흑인노예를 옮기는 과정에 세심한 주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배에 탄 흑인 가운데 무려 3분의 1이 배 안에서 사망했다고 하니 살아남은 흑인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 환경을 견뎌냈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추정하기로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1,500만 명의 흑인노예가 실려 갔지만 18세기 말 아메리카 대륙에 살아남은 흑인노예는 300만 명뿐이었다고 한다. 서인도제도의 대지는 처음부터 ‘니그로의 땀’을 받아들여 유럽인을 위한 ‘신의 음식’을 풍성하게 한 셈이다.


프랑스혁명의 아지트이자 도화선 역할을 한 역사적 카페

카페 프로코프

미국과 프랑스는 통상조약과 공수동맹을 맺었다. 1778년 2월 6일의 일이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프랭클린은 카페 프로코프의 단골이 되었다. 1790년 미국에서 프랭클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페 프로코프는 조기를 내걸고 그의 넋을 기렸는데, 이는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이어주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카페 드 푸아

1789년 5월 4일, 선거가 끝났다. 다음 날인 5월 5일에는 베르사유궁에 거대한 회의장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팔레우라얄의 카페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베르사유궁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걸까?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던 사람들조차 읽고 쓰기가 자유롭지 못했던 사정은 제쳐놓고라도 사람들은 뉴스를 입소문에 의지해 모을 수밖에 없었다. 카페라면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운 사실을 파악할 수 있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들을 수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도 있었다. 팔레우아얄의 카페들은 그야말로 대화를 위한 장이었다.


팔레루아얄의 카페 가운데 가장 과격한 단골로 붐빈 곳은 카페 드 푸아였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대부분 파리 이외의 지역에서 찾아온 지식인, 일거리가 없는 변호사, 의사, 배우, 문인이었다. 카페 드 푸아는 과격파 앙라제(‘미치광이’라는 뜻으로, 프랑스혁명 당시의 급진적 사회주의 세력을 말한다)가 늘 모이는 곳이었다. 그들은 팔레우아얄 광장에 마련된 판자를 덧대 임시로 만든 작은 가건물에서 회의를 마치면 카페 드 푸아로 장소를 옮겨 논의를 이어갔다.


논쟁은 항상 목소리가 커지면서 서로 욕설을 퍼붓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주먹을 휘두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중 가장 급진적인 오피니언 리더는 몰락한 귀족 생튀뤼주 후작, 작가 엘리제 루스탈로, 젊은 변호사 카미유 데물랭 등이었다. 데물랭은 7월 12일, 카페 드 푸아를 뛰쳐나가 “무기를 잡아라!”라고 외친 다음 갈기갈기 찢은 나뭇잎을 전쟁 표식처럼 자신의 모자에 붙였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후 모든 사람이 이 짓을 따라 하는 바람에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뼈대만 남게 되었다. 데모대는 경비병과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고, 사소한 분쟁이 파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 상황이다. 지금도 팔레루아얄에는 데물랭의 동상이 남아 있다.



커피를 원하는 권력, 권력을 원하는 커피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왜 ‘커피’에 집착했을까

프랑스혁명 시대에 ‘이탈리아’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다. 이는 각 정파의 비밀회의에 이용되던 고급카페였다. 총재정부의 주요 인사인 바라스 자작은 이 카페를 즐겨 찾았다. 한때 그는 어느 유능한 젊은 중위를 대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93년 9월, 그가 공화군 사령관으로 남부 프랑스 반혁명 운동의 거점 툴롱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 파리로 돌아갔을 때 바라스 자작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극심한 정계다툼에 휘말려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라스 자작 앞에 누군가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그 중위가 다시 나타났다. 1795년 8월의 일로, 그의 이름은 보나파르트였다. 그 사이에 보나파르트는 여단장군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자신의 상관인 이탈리아 주류군 사령관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군무에서 해직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신세 한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든든한 연줄을 이어가기 위해 바라스 자작을 찾아갔다. 당시 바라스 자작은 프랑스 정계에서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총재정부는 한쪽 날로는 우익 왕당파를 제압하면서 반대편 날로는 좌익 팡테옹협회를 궤멸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라스 자작은 한때 자신의 수하에 두었던 부하 보나파르트를 부관으로 삼았다.


폭동 진압을 명받은 보나파르트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그 후 ‘방데미에르 장군’으로 추앙받았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파리 정치 카페의 숨통을 끊고 부르봉 왕조의 왕관을 탈취하는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는 동쪽의 맹주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해 사지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정부 사절단에 으름장을 놓았다. 이는 1797년에 일어난 일로, 강화조약을 계속 거부하는 사절단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귀하의 나라도 이렇게 만들 수 있소’라고 엄포를 놓았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곧바로 조각난 커피잔 같은 처지가 된 독일을 빗자루로 쓸어 담듯 공략하며 독일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해버렸다. 1804년의 일이다. 이후 1806년에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베를린 칙령을 선포해 대륙을 봉쇄했다.


‘대륙봉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넘어가자. 여기서 대륙봉쇄라는 것은 대륙을 봉쇄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바다를 봉쇄하는 것이다. 강대국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항복한 상황에서 대서양과 지중해에 이어 발트해마저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단행한 해양봉쇄조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해안이 봉쇄되면 커피도 봉쇄된다는 점이다.


대륙봉쇄령을 내리면서 나폴레옹이 커피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식용 음료로 군대에 커피를 최초로 도입한 이가 바로 나폴레옹이기 때문이다. 그는 커피를 접한 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커피에 매료되었다. 군대에 대량의 커피를 보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프랑스 정부는 여러 분야의 발명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이 그런 예다. 그러나 커피에 관해 우리가 배워야 할 위대한 전례는 독일 프로이센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의사들에게 명령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는 거짓 소문을 내게 한 까닭은?

프로이센은 남성적인 국가의 전형이었다. 이 나라에서 ‘남자다움’은 가장 큰 미덕이자 매력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남자다웠으며 ‘대왕’이란 칭호에 가장 어울리는 걸출한 인물이다.


7년간 유럽을 누비며 동분서주하던 프리드리히 대왕.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영토를 재건학도 국가를 부흥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프로이센은 ‘군국(軍國)’, 즉 군대가 중심을 이루는 나라였다. 군국이란 강력한 군대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를 수단화하고 도구로 삼는 국가를 말한다. 이런 국가 체제에서는 민생 경제가 어마어마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경제정책은 중상주의다. 그의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늘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수입품이 있었다. 바로 커피다. 그의 계몽적 이성으로는 왜 위대한 프로이센 국민이 이런 음료를 마시는지, 그리고 결국 매년 70만 탈러의 막대한 자금이 네덜란드로 빠져나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의사들에게 명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고 소문을 내게 한 것이다.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 효과는 제로에 가까웠다.


일반 서민들이 ‘커피가 무서워서 감자를 먹으랴’ 하는 심정으로 그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가 독성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감자가 지닌 몇 가지 탁월한 장점(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재배하기 쉽고 소출량이 많은 데다 쌀, 밀 등의 주식 대체용으로도 손색없다는 점 등)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차 독일의 고질적 식량난을 해결해줄 미래형 주식으로 만들기 위해 감자 재배를 장려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프로이센에서 커피 소비는 철저히 억압되었다. 이러한 기본적 정책의 연장선에서 놀라운 급성장을 이룬 것이 바로 ‘대용커피산업’이었다.


프로이센 시대 독일인이 반나폴레옹 해방전쟁에 나선 이유는 ‘진짜 커피’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이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독일인이라 해도 더는 참지 못하고 떨쳐 일어설 때가 있다. 반나폴레옹 해방전쟁이 그런 대표적 사례다. 이제 나폴레옹이 씌운 굴욕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했다. 온 나라 국민이 각성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연합군이 라이프치히전투(1813)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무찔렀다. 아마도 그 과정에 복잡다단한 정치적 요인, 경제 사정, 이데올로기적 입장 등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관해 놀랍도록 간결하고도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에 의해 발생한 설탕과 커피의 결핍은 독일인을 반나폴레옹 봉기로 내몰았다. 빛나는 해방전쟁의 토대는 이렇게 마련되었으며, 설탕과 커피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19세기의 의의를 과시했다.

-K.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2845~1846)』


독일 낭만주의 국가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철학자 아담 뮐러가 있다. 1806년, 그는 드레스덴에서 반나폴레옹 순회강연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반대하면서 독일이 갖춰야 할 신분적, 유기적 국가론을 주창해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인의 관점으로 볼 때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약속하는 국가는 ‘대용품’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인은 온갖 대용품, 예컨대 ‘커피대용품’, ‘홍차대용품’, ‘설탕대용품’에 질려 있었다. 그런데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까지 대용품이 된다는 논리에 발끈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진짜 독일’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실제로 뭘러의 국가론은 이후 독일이 유럽의 민주주의 전통에서 멀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프랑스인은 커피에 여러 가지 대용품을 섞어서 마시는 데 거부감이 덜했으나 독일인은 ‘진짜’ 커피에 이상하리만치 강한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유럽연합(EU)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과거 비참했던 시절의 트라우마가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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