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3월 4주차

BOOK SUMMARY
 인문 

관계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저자 권수영
출판 21세기북스
출간 2021.12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적정 거리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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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서 대화하고 있습니까?

누구나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나 상대방의 첫인상을 먼저 파악한다. 그 사람의 외형이나 말투 혹은 태도에서 풍기는 이미지 등을 보고 어떤 사람인지 짐작해보는 것이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연예인 같다’거나 ‘교수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지금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고 나이를 머기 전에는 머리를 꽤 길게 길렀는데, 그러다 보니 음악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또 TV에서 내가 강의했던 심리나 상담 관련 방송을 시청한 사람들은 나를 당연히 심리학과 교수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내가 신학대학원 소속이고, 예전에 잠시 목회한 적도 있는 성직자라는 말을 들으면 모두 깜짝 놀란다. 나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에는 아마도 캐주얼한 복장이나 길고 곱슬곱슬한 머리가 한몫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판단할 때 사용되는 겉모습을 ‘그것(it)’이라고 해보자. 어떤 사람의 정체성은 바로 그것에 따라 순식간에 결정된다.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음악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대중 강연을 자주 하고 방송에 가끔 출연한다는 이유로 심리학 교수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것은 진짜 ‘나’가 아니다. 단지 나의 모습 중에 겉으로 드러난 일부일 뿐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사회철학 교수였던 마르틴 부버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이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제에 천착해 연구한 덕분에 그는 ‘만남과 대화의 철학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너’인 상대방의 머리털, 말투, 성격 등을 끄집어낼 수 있다. 사실 언제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상대방은 나에게 ‘너’이기를 그치고 만다. (중략) 이때 내가 고정시키고 있는 것은 ‘그’ 혹은 ‘그녀’, 즉 ‘그것’일 뿐이다. 그때 나의 ‘너’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이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볼 때 시선을 고정하는 곳은 머리카락이나 반지처럼 극히 존재의 일부분인 외형적인 것, 즉 그것(it)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진짜 ‘너’는 사라지고 없어진다.


이 책에는 관계와 관련해 이런 말도 나온다. “사람에게 세계는 두 겹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나와 너’의 구조에서 만나는 사람이 있고, ‘나와 그것’의 구조에서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본질을 꿰뚫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단지 ‘그것’, 독일어로는 ‘es’에만 집중하는 관계도 있다고 지적한다.


부버는 이를 독일어로 ‘그룬트월트’라고 했다. 번역하자면 ‘근원어’라는 뜻이다.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사고의 틀이 ‘나와 너’인지 혹은 ‘나와 그것’인지 묻는 것이다.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두 겹 중에 하나의 몸가짐과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와 너’의 대화가 어긋나는 이유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들은 광장에 모여 삼라만상에 관한 논쟁에 몰두하곤 했다. 논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논쟁을 지켜보는 모두가 혼란에 빠지기 일쑤다. 우리가 흔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일이 그중 하나일지 모른다. 닭이 없는데 어찌 달걀을 낳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달걀을 깨고 나오지 않는 닭은 없지 않은가?


반나절 이상 끝나지 않는 논쟁을 지켜보고 있자니 결국 회의론자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어떠한 논리도 판단도 반론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천명하고 에포케를 주장했다.


에포케 개념을 가장 깊이 연구하고 새로이 정립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이다. 그는 의식에 직접 부여되는 현상의 구조를 분석하는 철학인 현상학의 대가로, 에포케의 개념을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로 새롭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의 시간과 죽은 공간에 머물러 있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서 출발한다.


지금 바로 앞에 있는 현상을 알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바로 에포케다. 당신은 머리가 긴 음악가를 만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굵은 삼단 은반지를 낀 로커를 본 적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예전에 만났던 머리 긴 음악가는 아니다. 로커 같은 반지를 끼고 있다고 해서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예전에 보았던 그 로커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이 경험한 틀에 갇혀 눈앞에 있는 현재의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리곤 한다.


이럴 때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경험으로 빨리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에포케다. 최대한 지금 여기 이 공간에서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이다.


후설은 에포케를 ‘괄호 치기(bracketing)’라는 별명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누구나 과거에 매여 있고, 과거의 판단을 가지고 현재를 가늠하는 버릇이 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잠시라도 괄호 안에 묶어두어야 한다. 지우개로 과거 경험을 모두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윤리학의 대가도 아닌 평범한 우리가 에포케 혹은 괄호 치기를 하면서 지금 여기의 대화나 만남을 진행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나는 대화법을 하나 소개하려고 한다. ‘비폭력 대화’. 영어로는 Non-Violent Communication, 줄여서 NVC라고 하는 소통 방법이다.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시작하는 마음의 거리두기

비폭력 대화의 창시자인 로젠버그는 이것을 ‘Compassionate Communication’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상대방을 애틋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의 대화’라는 의미다. 나는 이것을 ‘에포케 대화’라고 바꿔 부르고 싶다. 이 대화법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상대방의 그것(es)만 보고 파단하면 절대로 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상대방을 너(du)로 만나는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판단만 난무하고 본심을 만날 수 없는 대화를 많이 하면서 살았다. 어떻게 하면 나와 너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비폭력 대화, 에포케 대화를 잘 활용해보면 이런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속이 복잡하다. 오랜 시간 다른 시간을 살아온 나에게 너는 단순히 나의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존재라서 너는 늘 오묘한 세계다. 마치 눈앞에 광대하게 펼쳐지는 대자연처럼 겸허하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의 과거 경험으로 쉽게 판단하는 순간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너라는 존재 안에 감추어진 신비를 겸허히 인정하지 못한다면, 누구든지 심지어는 가장 가깝게 느끼는 부모와 자녀 사이라도 폭력과 갈등의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자꾸 화가 치밀어 오르고 이상하게도 못된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들을 향해서는 남들보다 더 큰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존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그런 욕구가 좌절되면 자동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향해 분풀이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상대방 때문이라고 판단해 퍼붓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과거 경험 때문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 경험과 지금 여기의 경험 사이에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가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부터 마음의 거리두기를 익혀보자. 그래야 한다. 우리는 가족과 지인들을 가장 쉽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본심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실지로는 진짜 그들의 존재에는 전혀 다가갈 수 없다. 에포케, 마음의 거리두기를 통해서 타인을 만날 때라야 비로소 상대방을 그것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나와 너라는 기적 같은 관계로 끌어올 수 있다.



나를 조종하는 내면의 매니저와 거리두기

불행한 관계주의자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는 공통적인 주장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관계를 잘 맺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를 잘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인들은 어떤 민족 못지않게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행복지수를 포함한 여러 정신건강 지표에서는 OECD 국가들 중 거의 바닥을 차지한다.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했고, 청소년 행복지수 역시 하위권에 머물렀다. 2020년 발표된 주관적 삶의 만족도 역시 조사 국가 33개국 중 32위로 최하위였다. 인간관계를 어느 나라보다 소중하게 여기지만 행복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가 관계주의자로 살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타인과 나 사이에 건강한 거리두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만성적으로 자기주장 결핍증을 안고 살아간다. 자기주장 결핍증을 안고 사는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살지 못하고, 늘 평가받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마음속 매니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자기주장 결핍증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마음의 거리두기가 있다. 나도 모르게 들리는 무의식의 목소리, 내면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가 착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내면 현실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맞추게 하고, 자신의 의견은 없는 것처럼 그림자 뒤로 숨게 한다. 나를 자주 아프게 하는 목소리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목소리가 생겼을까?


내시경은 위나 장처럼 보이지 않는 속을 점검할 때 받는 검사다. 나는 그다지 불편감이 없어서 가끔 비수면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는데, 그럴 때면 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게 너무 신기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는 내시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우리에게도 내시경처럼 마음속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가 있다. 나를 관리하고 때로는 움츠러들게 하는 내면의 매니저다. 연예인 매니저는 더 낮은 자리에서 궂은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속 매니저는 우리의 상태를 살피며 가끔은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내리기도 하는 존재다. “빨리 일어나. 아니면 지각해!”, “무조건 네가 한다고 해!”, “인사해!”, “화내면 절대로 안 돼!”, “이번에는 승진해야지”, “저 사람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등의 말로 우리를 통제한다.


마음속 매니저는 누구를 위해서 이러는 것일까? 매니저가 연예인의 말이나 행동을 단속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의 매니저도 마찬가지다. 실은 내 편인 매니저를 우리는 다른 편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가족치료를 가르쳤던 리처드 슈왈츠는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의 보호자라고 주장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려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 목소리가 우리에게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도 사실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매니저의 밑바탕에 깔린 것은 ‘다시는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우 관계에서 크게 덴 경험이 있다면 앞으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계속해서 주지시키는 것이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한 에포케, 즉 판단중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목소리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들리지만, 그것은 결코 나를 해치려는 나쁜 소리가 아니다. 우리가 또다시 아픔을 겪지 않도록 우리를 돕는 보호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잠시만이라도 괄호 안에 매니저에 대한 부정평가를 묶어놓는 일이 궁극적인 치유에 큰 도움이 된다.


나를 망가뜨리는 나와 거리를 두자

그렇다면 내면의 매니저와 어떻게 거리두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매니저에게 쩔쩔매면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니게 된다. 하지만 명심하자. 매니저는 나를 보호하려는 내면의 목소리다. 당당하게 “나를 걱정해줘서 고마워. 네가 나를 불안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그런데 잠깐 내가 내 주장을 할 수 있도록 잠시 지켜봐주면 안 될까?”라고 말하며 잠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면 조금 다르게 매니저를 다룰 수 있게 된다.


마음속 매니저를 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내 편이자 나의 보호자다. 늘 나를 위해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주었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고, 현재의 경험을 과거의 상처로부터 떨어뜨리면서 아픈 과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안의 매니저와 단번에 멀어질 수는 없다. 과거의 나로부터 현재의 나를 서서히 분리해가면서 거리를 두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래야만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타인과 나와 너로 관계 맺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를 전문적으로 도울 수 있는 심리상담사에게 찾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은 당연하지 않다

‘가족=나’라는 환상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리두기와 관련해 오해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친밀감이다. 보통 우리는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없어야 상대방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문을 잠그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다그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당수의 부모가 여전히 친밀감과 거리감을 반대말이라고 이해한다.


부모의 눈에는 물리적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녀가 생각하는 친밀도와 부모가 생각하는 친밀도 사이에 괴리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문제로 한번은 어떤 어머니가 딸의 결혼 후 충격을 받고 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온 적이 있다.


이 어머니는 딸과 취미생활도 즐기고, 쇼핑도 다니면서 거의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 딸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적극적으로 선을 보다가 미국에 사는 교포와 결혼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친밀했던 딸이 미국으로 갈 생각을 하니 못내 속상했는데, 딸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에 엄마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엄마, 그동안 엄마랑 나는 가장 친한 사이라고 여겨서 좋을 때도 있었지만, 나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일부러 미국으로 이민 가려고 결혼 상대자로 미국에 사는 사람을 찾았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서 떠나게 됐네. 엄마, 우리 이제 적당히 만나자. 나한테 가끔만 놀러와. 나도 내 생활이 있으니까 한국에 가끔만 갈게.”


엄마는 이 편지를 받고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왜 갑자기 자신과 한 몸처럼 지내던 자녀가 거의 단절에 가까울 만큼 물리적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걸까? 가족치료에서 단절은 오히려 엄청나게 친밀해 보였던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둘이 한 몸인 것처럼 물리적 거리가 가까웠는데, 알고 보면 내면에는 엄청난 불안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엄마는 아빠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아빠는 사업차 출장이 잦았고, 틈만 나면 골프 치는 일에만 열중했다. 운동선수인 오빠도 1년 중 기숙사에 있거나 훈련을 가는 시간을 빼면 집에 머무는 날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집에는 오직 엄마와 자신뿐이었다. 어린 딸은 엄마로부터 버려지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불안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또한 가정 전체에서 느껴지는 균열의 불안을 덜기 위해서 딸은 엄마를 바짝 밀착 마크하면서 보호해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딸의 마음속 심리적 거리를 침범하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마음의 거리두기’란 친밀감과 안전감을 담보하는 심리학적 개념이다. 누구나 스스로 이 정도면 적절하게 친밀하고, 안정한 거리라고 느끼는 기준이다.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물리적 거리와는 상관이 없고, 서로 관계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야 한다.


상담을 통해 어머니는 딸의 불안은 물론 자신의 불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남편과의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불안한 자심이 또 누군가의 심리적 공간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통찰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남편을 설득하여 부부상담을 시작했다.


여러 차례 상담을 통해 부부 관계를 공고히 하기 시작하자, 자신과 딸의 관계가 적절한 거리감을 가질 때 더욱 친밀해질 수 있겠다는 확신도 생겼다. 서로에게 안전감과 친밀감을 주는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적절한 거리두기에서 진정한 사랑이 싹튼다

과거 상처와 거리를 두어야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가족사랑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나와 배우자, 혹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부단히 노력해서 만들어내야 한다. 불같은 사랑 끝에 결혼했다고 해서, 둘이 한집에 산다고 해서 어제의 감정이 저절로 오늘의 감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저절로 자라나지도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자.


결혼 후 원가족에서 ‘그것’으로 살았던 과거 경험을 지금 내 핵가족에서도 똑같이 재현한다면 나와 너로 관계를 맺는 일은 요원해진다. 지금은 누구나 현재의 가족과 나와 너의 관계로 새롭게 태어나는 실천과정 중에 있다. 그렇게 가족은 서로 그것이 아니라 너로 공평하게 존중하는 관계로 서로 성숙해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그간 라디오나 TV의 자녀양육 관련 프로그램에 여러 해에 걸쳐 참여해왔다. 그러면서 어린 자녀나 사춘기 자녀들 모두 공통적으로 가장 힘들어하는 부모의 태도를 하나 발견했다. 형제끼리 혹은 남과 비교하며 비난하는 부모에 대해 자녀들은 자신을 공평하게 대해주니 않는 깊은 아픔을 토로하곤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자녀의 언급에 대부분 부모는 펄쩍 뛰면서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여러분은 만약 어느 날 자녀가 차별받는다는 생각에 내게 화를 버럭 낸다면 어쩌겠는가? 부모는 크게 박수를 쳐야 한다. 그 어린 나에게 부모에게 당당하게 ‘나와 너’로 만나달라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부모나 용기 있게 표현한 아이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부모는 언제든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럴 때 확실하게 사과할 줄 알아야 좋은 부모로 거듭난다. 그리고 다음부터 또 그런 느낌이 든다면 꼭 그때마다 이야기해달라고 자녀에게 부탁해보자. 아이는 당당하게 서서히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아이로 성장해갈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보자. 우리가 자녀를 부정적인 판단의 대상으로 여겨 비난하고 공격하면서 상처를 주었다면, 어쩌면 우리도 과거 그런 ‘나와 그것의 관계’로 인해 상처를 받지는 않았었는지 찬찬히 살펴보자.


“분명 네 잘못이 아닌데, 아빠가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었나 보다. 정말 미안하다.”


과거 상처와 적절하게 거리두기를 할 때, 우리는 현재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연습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자.


비록 지금까지 가족 구성원 모두와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이 책을 통해 에포케, 판단중지를 연습하고 나와 너의 대등한 관계로 발전해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멋지게 변모할 때까지 우리 모두 조금씩 노력한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사회도 의미 있는 파장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마음의 거리두기, 에포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행복한 대한민국 만들기의 첫 단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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