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3월 2주차

BOOK SUMMARY
 인문 

나를 숙고하는 삶

저자 제임스 홀리스
출판 마인드빌딩
출간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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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숙고하는 삶


두려움에 지배되지 않는 삶

우리는 모두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남과 동시에 가장 안전했던 곳에서 쫓겨나 이 세계로 내던져져 위험천만한 여행에 나섰다가 이내 사라지는 존재이다. 사무엘 베케트는 ‘무덤에 걸터앉은 채’ 왔다 가 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했다. 인생은 삶과 죽음의 롤러코스터이다. 우리는 충격과 당혹에 사로잡혀 혼자 주변을 둘러보며 이것과 저것,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한다. 그러다 보면 프로메테우스의 선물인 의식이 미세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분리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고통의 원천이자 의심과 두려움과 분열에 내밀히 관여하고, 인식과 윤리적 선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겉만 번드레한 장난감 같은 의식이 점차 머릿속을 채운다.


핏덩이로 태어난 우리는 빛과 중력과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동반된 세상에 충격을 받은 상태로 이 덧없고 부서지기 쉬운 무섭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때로는 비탈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며 그 패턴을 읽어내고, 천 분의 일 초 단위의 속도로 우리에게서 전속력으로 멀어지는 저 반짝이는 둥근 개체들에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경이와 감탄과 경외심 혹은 일종의 환희를 드러내면서 어리석고 잔혹한 우리의 운명을 점시 잊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날은 그저 얼이 빠진 채 겁에 질려 고분고분해진 존재로 한쪽 귀퉁이로 물러나 겨우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지반이 연약해서 세상의 기준에 확고하게 의존할 때 그리고 대안들에 대한 무지로 인해 합리적 분석이 결여된 상황에서 엄청난 메시지들이 가해질 때 우리 모두는 거짓된 ‘자아 감각’을 형성한다. 우리가 거짓말을 해서 거짓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나 ‘그것’, ‘타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각자의 내면이 아닌 타자에 의해, 신의 설계가 아닌 ‘타인의 타자성’에 의해 정의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이 집합체 대부분은 무의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의식이 떠오르기 이전에는 그것을 다룰 수 없다. 무의식의 까다로운 역설은 그것이 무의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중 일부는 그리스어로 영혼을 의미하는 프시케(psyche)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배운다. 프시케는 우리 존재의 총체인 두뇌와 피와 뼈, 사고와 감정, 욕망 전부를 구현한다. 우리가 뒤척이며 선잠을 자는 동안에도 항상 우리를 지켜보면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그 의견을 기록한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 중 많은 것들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졌던 것이 지금은 주된 장애물이 되었다는 선적인 깨달음과 마주하게 된다. 짓눌림과 버림받음이라는 이중의 위협에 직면해 의무처럼 적응했던 것이 이제 우리 위에 군림하는 전제정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적응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만일 자율적인 프시케 혹은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가, 아니면 법정이나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청구인이 문을 두들기지 않았다면 겁쟁이 에고는 결코 현관 앞에 도착한 것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존재들은 그에게 몰려들어 자신을 알아봐달라고 요구한다. 꿈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고 여전히 작은 프시케의 목소리, 어릴 때는 잘 들렸지만 무시하기에는 너무 긴급했던 환경의 요구 앞에 귀를 막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겁쟁이 에고는 자포자기하거나, 계획 혹은 패배를 통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는지, 지금가지 자신을 형성한 그 모든 터무니없는 쇼가 어떠한 두려움에서 추동된 것인지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이 아니다. 결국 그들 또한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의를 덜 품게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이 우리 공통의 적임을 인식할 때 반복적이고 퇴행적인 사이클에 갇히지 않게 될 거라는 말이다.


두려움을 이토록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두려움 탓으로 환원하거나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결국 우리 모두는 두 가지 범주의 실존적 취약성을 두려워한다. 즉 억압받는 것과 버림받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이 적이다. 당신의 적은 인생이 아니다. 대타자도 당신의 적이 아니다. 두려움이 적이며, 두려움이 당신을 신들이 우리에게 제공한 가능성이라는 거대한 저택의 좁다란 복도로 몰아낸 것이다. 모든 딜레마와 모든 선택, 모든 관계, 모든 헌신 또는 모든 태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스스로 질문해보자. “이 선택이 나를 쪼그라들게 하는가 아니면 확장시키는가?”


만일 당신이 두려움이 지배되고 있다면 -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두려움이 당신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심지어 당신이 최고의 존재를 빚지고 있는 세상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인정할 수 있다면, 마침내 당신의 최종 책무가 정말로 누구에게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두렵거든 당신의 묘비를 상상해보라. “이곳에는 여기에 있으나마나 했던 사람이 누워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일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사소한 것이다. 



삶의 확장

“우리는 너무 작은 신발을 신고 걷는다”라는 융의 소박한 금언은 우리 주변의 목소리나 환경의 요구에 순응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또한 우리를 통해 세상에 구현되기를 바라는 본능에 맞춰 살기보다는 심리학적인 도움을 얻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더 나아가 융의 메타포는 우리가 거의 매일 신경쇠약에 시달린다는 사실도 암시한다. ‘작게’ 사는 것은 크게 사는 것보다 쉽다. ‘크게’ 사는 것은 자기애적인 팽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되려는 위험을 무릅쓰라는 소환과 매 순간 마주치는 것을 의미한다.


젊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하고 정해진 운명에 충실히 복무해야 한다는 말에 설득되었다. 혹시 의심이 생기더라도 이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기에 늘 전진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파트너나 부모 혹은 부양자로서의 역할을 우리 자신의 삶의 목적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역할들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난 다음 뒤늦게 그 역할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됐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나중에 충분한 힘을 얻거나 혹은 충분히 절박해진 뒤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질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역할들을 빼놓는다면 도대체 나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 삶의 역사이자 나에게 부여되었던 역할을 그만두었을 때 과연 나는 누구란 말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런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당황한다. 우리는 누구안지, 뭘 하고 있는지 혹은 무엇에 봉사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여기까지 와서야 그 어딘가에서 진정한 나 자신을 찾을 심리적 ‘허가증’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마저도 매우 드물다.


‘허가’의 문제는 우리 여행의 기원을 찾는 근본적인 사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조건부이다.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제시한 조건인 우리의 유전자와 원가족 그리고 그것의 핵심 역학과 우리의 시대정신에 종속된다. 이 모든 사회적 배경은 메시지를 구현하며 어느 정도 순응을 요구한다. 우리 모두가 받은 한 가지 메시지는 이렇다. “세계는 커다랗지만 너는 그렇지 않다. 세계는 힘이 세지만 너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모든 것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두려움은 적이다. 무엇보다 우리 영혼의 광대함이 가장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자주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다. 리무진 심지어 헬리콥터를 탄 두건을 쓴 구루들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는 것을 듣겠다고 강당이나 예배당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이것이 ‘종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영혼의 더 큰 위험이나 신비로운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으로 나오라는 소환장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날마다 마음을 괴롭히는 두려움과 환원주의를 불러내 영혼이 의도한 광대한 여정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면 실제로 세상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에 우리 각자가 대표하는 독특한 선물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줄 수 있는 우리의 선물을 부정하는 것이 실제로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의 광대함으로 발을 들이는 것은 자기애가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자신의 광대함을 겸허하고 책임감 있게 마주하고, 그런 다음 그 안으로 발을 들여 놓겠다는 결심만 하면 된다.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의 삶

우리는 모두 실재의 본성에 대해 고정되고 구체화된 가정들을 갖고 있다. 한 때 사람들은 ‘저 위’나 ‘저 아래’에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범한 감각들의 증언을 믿으며 3층짜리 우주에서 살았다. 게다가 그들은 에고처럼 만물의 중심에 당당히 서 있는 사탕발림 같은 지구상을 받아들였다.


수 세기가 지난 후, 그때보다 살짝 더 관대해진 시대에 프로이트는 자신의 비전이 인간의 자기 개념에 있어 제3차 대혁명이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인간의 에고의 제1차 폐위는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는데, 브루노와 갈릴레이가 그 일역을 담당했다. 제2차 대혁명은 찰스 다윈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혁명을 통해 이 종들의 독특함과 그 인간 중심적인 창조는 수백만 년에 걸친 긴 발달 여행, 아직 끝나지 않는 여행의 일부로 수정되었다. 제3차 대혁명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광대함과 그 힘을 확인하면서 주장한 것으로, 여기에서 에고는 수면 중에는 파편만 보이는 방산처럼 떠서 무의식이라는 해도를 그릴 수 없는 광대하고 어두운 내면이 바다를 항해한다.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세계를 구체화하고 고정시키고 단단하게 만들고, 그 위치를 결정하고 또 속박하고 싶어 하는 것은 내 옆 사람뿐만 아니라 내 안에도 있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이 욕구가 자연스러운 만큼 그것은 또한 우리의 오해나 소외, 즉 세계로부터 그것을 알려주려는 신비한 에너지로부터 우리가 소외된 주된 원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지배하려는 경향이 서구 세계보다 강한 곳은 없다. 우리는 자연환경에 대한 커다란 통치권은 얻었지만, 점점 더 뿌리 뽑힌 존재인 것 같고 늘 불행해 보인다.


가장 오래된 종교적 이단

애초에 종교적 관념이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고려했을 때, 그것은 결코 ‘관념’으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굉장히 격앙된 감정적인 초월 경험으로서 생기며 훨씬 뒤에는 관념이 된다. 사회는 수평 구조를 이루며 의식적인 목적들로 움직인다. 목적이 바뀌거나 다른 세력이 더 강력해지면 사회는 와해된다.


오직 그러한 집단이 수직적인 것을 경험할 때에만 그 집단은 공동체가 된다. 이 수직적 벡터, 그것이 예언자나 자연적 사건, 사회정치적 순간으로 구체화되면 각 개인을 고양시켜 그 육신으로부터 들어 올리며 상상의 집단적인 경험으로 데려간다. 따라서 초월적인 경험과 연결된 공동체는 사회보다 심리적 유지력이 더 강하다.


의식은 원래 강한 종교적 성질을 되찾고자 하는 희망에서 최초 경험이 재현으로서 발전했다.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 자의적이고 지리멸렬해 보일 수 있다. 음식을 준비하고, 결혼을 하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윤리적 사법적 제도를 발전시키는 등의 컬트적 관례는 Y와 Z가 아니라 최초의 X를 만난 이들을 구별하는 수단이다. 상당히 정교하고 독특한 이 표현들은 항상 신성한 기원 내지는 조상의 권위로부터 인가받았음을 주장하며,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소속감과 애착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일반적으로 인정된 가치체계의 보존을 돕는다.


우리는 최초의 만남, 그 예기치 못한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이미지에 대해 느껴진 경험인 형상에는 우리를 움직이고 흔들고 어쩌면 위협할 수도 있을 만큼의 강한 감정이 실려 있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이미지화된 이 틈이 여전히 작동할 때 우리는 진정한 신비와 잠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우리의 에고는 그 심오한 타자성을 불편해하며 그 경험을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로부터 일어난 어떤 일로 옮기는,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느껴진 만남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어쩌면 통제할 수도 있는 대상으로 옮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이단, 즉 우상 숭배의 위험에 노출된다.


무심코 그러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우상 숭배자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구성물에 매혹되며 지성보다는 안정을 바라는 우리의 욕망에 현혹된다. 우상 숭배는 우리의 감정적인 헌신이 최초의 대타자에서 이미지 자체로 옮겨졌을 때 일어난다. 가령 성경의 다양한 예언자들이 모든 종류의 조각된 이미지를 숭배하는 것을 심하게 책망할 때, 그들은 하나의 이미지에 담을 수 없는 신비에 대해 깊이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익숙한 것 뒤에 무엇이 따라올지 몰라 두려워하며 변화에 저항한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라는 충분한 증거에도 우리는 저항한다. 개인적인 선례와 세계의 모든 위대한 종교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달 단계, 특히 노화와 사멸을 향해 거침없이 표류하는 것에 반항한다.


우리의 주된 신경증은 - 내게 그 말은 소외를 의미하는데 - 영원히 변하고 있는 것을 붙들면서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는, 움직임을 정지 상태에 굴복시키려는 구상화와 경직화를 통해 불멸성을 간구하려는 우리의 욕망이 아닐까?


진창을 밟은 노역이 발자국으로 남긴

가면과 사람의 흔적은

물기가 빠져 딱딱하게 말라

가루가 되고 먼지가 된다.

무진장한 연료가 있어

자연의 화톳불은 타오른다….


이 시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 ‘자연의 화톳불’은 - 되돌아온다. 신성한 ‘동사화’의 덧없음에 대한 홉킨스의 극심한 공포심은 죽음은 명사의 종말에 불과하며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 부른 명사에 에너지를 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훨씬 더 신비한 어떤 것으로 변한다는 부활의 역설을 포용하도록 그를 이끈다.


따라서 홉킨스는 이 탄화된 유기적 흙반죽에서조차 신성이 작용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심오한 동사적 우주에서 보석으로 장식된 그 자신의 죽음의 자리를 발견하고 아연해한다.


이 무지렁이, 농담, 하찮은 질그릇 조각, 가죽 조각, 성냥개비, 불멸의 다이아몬드, 불멸의 다이아몬드이니.


결국 홉킨스가 종교적 시인인 것은 그가 시를 쓰는 성직자이거나 ‘종교적’ 주체를 취해서가 아니다. 신비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예수는 명사이며, 전지적 사건이다. 그의 그리스도는 동사이며, 총체성을 향해 몰아가는 원형 에너지로서 역사 속을 흐르며 역사와 초월이 수렴되는 십자가이다.


특정 신화적 이야기에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개인적인 확신의 문제이지만, 우리에게 공통되는 이야기는 흐르는 신비의 매개자인 우리가 의식적인 삶에서는 명사에 불과하지만, 시공을 지나는 우리의 여행에서는 모두 동사라는 점이다. 현대 과학과 한 성직자의 직관이 모두 별들이 이끄는 우리 여행의 역설로 수렴된다. 여기서 탄소에 지나지 않는 우리는 명사이지만, 에너지화된 탄소는 동사화하고, 동사화하고, 언제나 동사화하는…동명사이다.



죽음과 충만한 삶

인간은 언제나 내세라는 관념을 가정했다. 만일 내세가 있다면 그것은 이 삶과는 다른 삶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여기에 있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 삶에…….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세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신경증적인 열정으로 그 말을 하든 간에. 직관적으로는 이 에너지 시스템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지만, 그것은 분명 어딘가로 간다.


영혼이라는 끈질긴 관념은 비물질적인, 육신을 초월한 뭔가를 상정한다. 햄릿에 나오는 수사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 필멸하는 육신의 고리를 벗으면 우리는 어디선가 육신이 없는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혼이 될까? 아니면 몸을 갖게 될까? 그렇다면 어느 발달 단계로 돌아가는 것일까? 유대인들처럼 인간이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전적으로만 본다면 분명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3~4대까지 가면 어찌 됐든 우리 세대는 상당히 잊히지 않을까? 


우리의 가장 영웅적인 모델 중 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시간을 다룬 플라톤의 설명에 묘사되어 있다. 그 아테네의 현자는 거짓혐의 때문에 민주적이었지만 편파적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제자들은 도망쳐야 한다고, 특히 이렇게 명백히 오심인 사건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간청했다. 하지만 도시국가의 충실한 시민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법과 그 형벌을 받아들이며 기꺼이 독미나리즙을 들이킨다.


죽음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깊은 잠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세계가 있거나 할 거라고, 그리고 깊은 잠에 든다면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고, 내세가 있다면 앞서간 철학자들과 대화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이야기했다.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향한 이 여행에 끌린다. 성찰하는 영혼은 항상 신비로 소환되며 또 신비를 존중하고 신비를 생각하고 신비에 복종하는 데서 나오는 확장으로 소환되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전범이다. 그의 삶과 그의 가치관은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이 가져오는 심오한 변화라는 신비들을 매끈하게 연결시켰다. 깊이와 존엄성 그리고 열정으로 살았던 그의 사례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어쩌면 그의 철학적 결론보다 호기심과 고결함으로 살았던 그의 삶이 훨씬 더 의미가 클 것이다.


프시케와 영혼

그렇다면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무엇이 지속되는 것일까? 그런 것이 있다면 무엇이 연속성을 제공할까? 이 문제를 고려할 때는 어쩌면 기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프시케란 무엇인가? 언어적 차원에서 보자면 프시케는 그리스어로 영혼을 뜻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어원적 뿌리가 있는데, 하나는 ‘숨쉬다’를 뜻하는 동사(psychein)이고 다른 하나는 ‘나비’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책의 물질적 형태, 그 책을 들고 있는 손, 그 책을 생각하며 들여다보는 마음은 모두 항상 유동적이며 명사가 아닌 동사임을 상기하자. 그러면 무엇이 남고 무엇이 계속보며 무엇이 연속성을 제공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프시케다.


확실히 프시케는 죽음 그 자체에 동요하지 않는다. 적어도 의식적 에고의 방식으로는. 자연은 아마도 그것이 뭐든 우리에게 주어진 기능을 다 마치고 나면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프시케, 즉 영혼은 에고의 삶이 끝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어떤 식으로 지속된다는 것 또한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자연이 ‘생각하는’ 것, 프시케가 ‘생각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하는가이다.


우리는 죽음을 철천지원수이자 우리를 위협하는 대타자처럼 생각하면서도 죽음이 내내 무화의 심연 위나 실존적으로 불안정한 횃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죽음에 있어서도 우리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우리의 세포들은 죽고 있고 우리의 이해도 죽고 있으며 기억조차도 충분히 오래 살면 사라지지만, 무언가는 사라지지 않고 또 무언가는 이 죽음으로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여러 가지 죽음들과는 별개로 보다 음흉한 죽음이 있다. 삶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신비들을 회피함으로써 오는 죽음이다. 죽음이란 죽는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부분적으로 사는 것, 두려워하며 하는 것이 우리의 보다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죽음과의 결탁이다. 융의 주장처럼 “피 같은 진실로부터의 일탈이 신경증적인 불안을 낳고… 불안은 무의미를 낳는다. 그리고 삶에서 의미의 결핍은 영혼의 병이다.” 따라서 우리의 피 같은 진실, 즉 우리가 나온 바다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환상과 산만함 그리고 축소된 사이비 세계로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니 신비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 보다 건설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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