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4주차

BOOK SUMMARY
 인문 

믿는 인간에 대하여

저자 한동일
출판 흐름출판
출간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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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생각의 어른을 찾다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른을 찾다

2001년 로마에서 유학을 하던 시기, 저는 혼자였습니다. 혼자 있음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금요일 저녁이면 삼삼오오 어울려 외출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기숙사에 남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럴 때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는 외국이라서 그래. 한국에 돌아가면 달라질 거야.’


하지만 2010년,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도 혼자였어요. 아니, 사실 어디에 있든 저는 늘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이 서울이든 로마든 또 다른 어디든 간에, 제 삶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기만 하느라 그 속에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부터 <루가복음> 속 사마리아인처럼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나의 이웃을 찾고 기다렸으나 제가 먼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줄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겁니다.


우리 사회에 ‘멘토’ 열풍이 불던 때가 있었습니다. 멘토라 불리던 사람들 중에는 승려, 가톨릭 사제, 개신교 목사 등 종교 인사가 꽤 많았던 것도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이 종교계에서 헌신하는 분들 가운데에서 생각의 어른을 찾는 듯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은 ‘어른’을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다 자랐거나 나이가 든 사람, 지위나 항렬이 높은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보다 더 성숙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누군가를, 이 혼란한 삶 속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생각의 어른’을 바란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그런 생각의 어른을 찾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누구도 본인 스스로가 그와 같은 어른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인간의 성장에 비유한다면,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어가는 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여전히 아이로 머물고 있고 싶고, 상대는 나에게 어른처럼 행동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신이 있다면 신의 큰 뜻은 ‘작은 것’에 있다

삶의 본질 앞에서 질문하는 사람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변화가 ‘코로나 블루(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을 넘어 ‘코로나 레드(코로나로 인한 분노)’에 이를 정도로 사람들의 심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의 심신이 피폐해질 법한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수없이 벌어지고 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린 자식을 학대하고 방치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프랑스에서는 성당에서 기도하던 노인이 다른 종교를 가진 청년에 의해 참수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 즈음 한 지인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도 아닌 데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도 아니지만, 최근엔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맞닥뜨리면서 신을 만난다면 묻고 싶어졌어요. ‘이 고통과 괴로움이 예정된 것이라면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라고요.”


그의 지인 중 모태 신앙을 가진 가톨릭 신자의 배우자는 “코로나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 신이 만든 게 아니야”라고 하고, 교회를 다니는 다른 한 친구는 “이 시험의 끝은 영생이야. 고통이 없는 세계”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제게 다시 물었습니다. “만약 이 고난에 결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도한 걸까요? 이것이 종교적인 질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무고하게 세상을 떠난 테러 피해자를 만난다면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해주실까요?”


부조리한 신, 그보다 더 부조리한 인간

<마태오복음> 11장 19절에는 예수 시대에 예수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불렀는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별명은 ‘먹보’요, ‘술보’였지요. 그런데 예수가 이렇게 함께 먹고 마셨던 대상은 당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기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Ne contemnatis unum ex his pusillis.

네 콘템나티스 우눔 엑스 히스 푸실리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위의 성경 구절 속 ‘보잘것없는 사람들’, 이 부분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편찬한 성경 파본에는 ‘작은 이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작은 이’를 ‘미크론’이라고 씁니다. 영어 ‘마이크론micron’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작은 이’가 꼭 사람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겁니다. 자연계의 모든 ‘작은 것’을 함부로 업신여기는 인간의 마음이, 현재진행형의 시대적 암울함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부조리해 보이는 신, 그보다 훨씬 더 부조리한 인간! 신의 부조리함보다 인간의 부조리함이 더 크기에 인간은 신앙을 갖는 걸까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가져온 질병에 전 세계인이 고통 받는 이때에도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사악함 그 사이 어디쯤에서 각자가 믿는 신을 향해 그 뜻을 물으며 종교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질문하는 인간에게는 분명히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답이 온다는 것을 믿으며,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아니면 법학자 출신의, 최초의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160?-220?)의 저서 <그리스도의 육신(203-206)>에 언급된 그의 말로 답을 대신해야 할까요?


Credo quia absurdum est.

크레도 퀴아 압수르둠 에스트.

부조리(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함께 견디는 아픔, 함께 나누는 고통

2020년 1월 초, 동방 교회의 성탄절에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교회에서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미사가 끝난 후, ‘성 빈센트 자비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보호시설에 들렀습니다. 그 시설은 광야에 버려진 아이들을 구해와 돌보고 있었는데, 영아에서부터 초등학교 진학 이전의 어린이 40명가량이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지요.


무슬림 사회에서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생명이 생기는 경우 아기를 광야에 내다 버린다고 합니다. 제게 설명해주던 안내인은 연신 이 아이는 어느 광야에서 상자에 담겨 버려져 있던 아이였고, 저 아이는 또 어느 광야에서 구해왔다, 하면서 아이들이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습니다. 얼마간 준비해 간 돈을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수녀님들께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과 사고

어느 시대든 인간은 특별히 거룩하지도, 그렇다고 속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성에 대한 호기심 등과 같은 본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본능과 본성에 대한 문제에서만큼은 종교적 심성이나 의지도 그렇게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인이든 무슬림이든, 인간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인간 본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참혹한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슬림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태어난 아이를 광야에 내버리는데 이를 두고 ‘명예 살인’이라고 합니다.


고대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기혼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면 가장은 아이를 땅으로부터 들어올리는 행위를 통해 아이를 자기 자녀로서, 또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를 ‘톨레레 리베룸(자녀를 들어올림)’이라고 일컬었는데, 로마 시민은 세상에 ‘자식을 낳는다’  라고 여기기보다 ‘자녀를 들어올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아버지가 자녀를 들어올리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 아기는 문 앞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졌고, 그러면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 아이를 데려다가 기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 이집트인과 유대인은 태어난 자식을 모두 거두어 키우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곳에 좀 더 머물며 과연 무엇이 명예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사회가 무엇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비단 이슬람 사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느 사회나 명예와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명예가 더럽혀지면 스스로 생명을 거두는 일조차 생기기도 합니다. 문화나 사회적 배경에 따라 ‘명예’의 개념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그런 문화적, 사회학적인 배경에서 정의하는 ‘명예’ 말고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할 명예는 무엇일지 돌아봅니다.


그날 그곳에서 저는 누군가의 아픔, 실수와 실패가 불명예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이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나 공동체가 불명예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진장한 명예는 누군가의 아픔이나 실패를 받아주고 어루만지며,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는 개인이나 사회가 명예로운 것이 아닐까요?



페니키아인의 협상법

예수를 감동시킨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영어의 알파벳은 페니키아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는데 이들의 후손이 레바논 사람입니다. 알파벳을 처음 체계화한 만큼 이들은 타고난 언어 감각을 가졌지요. 페니키아라는 명칭은 ‘자주색’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포이닉스’에서 유래했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따르면 이 색을 발견하고 염색에 이용한 사람들이 페니키아인이라고 합니다.


페니키아인은 고대부터 선박 기술이 뛰어났고, 대략 이집트 제4왕조 시대인 기원전 2613-2498년부터 이집트와 활발히 교역해 무역업이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셈이 빠르고 정확하며 뛰어난 협상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내용은 <레바논 사람처럼 협상하기>란 책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영학자이자 협상 전문가인 하비브는 책에 여러 가지 비즈니스 요령을 설명하는 협상법을 나열해두었는데요. 그 가운데 제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이라는 <마르코복음> 7장 24-30절의 성경 내용이었어요.


역사적으로 레바논의 티로와 시돈(오늘날의 사이다)은 예언자 이사야와 에제키엘이 자나갔던 곳이자 예수도 방문한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는 이방인 여인과 만나게 되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으로 고생했고 고통을 경험했기에, 이방인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자 하느님(하나님)의 백성이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예수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자, 그 여인은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예수는 여인의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까요?


협상과 설득의 마지막 카드

페니키아의 이 여인이 바로 오늘날 레바논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으로 여기는 예수를 감동시킨 사람은 성경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아픈 아이를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을 겁니다. 그녀는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자신을 돌려보내려고 하는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서 소리를 지르며 예수께 다가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에게서 되돌아온 답은 모욕적이리만큼 냉랭했습니다. 이때 페니키아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현명하게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하고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분리와 배척의 상징인 이방인의 낙인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얻기 위해 집요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진심을 담아 상대방을 설득하며 다가가지요. 아마도 예수는 이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사고와 인식의 외연이 확장되었을지 모릅니다.


이 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일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그 여인의 이야기가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 소속되어 일하며 먹고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상충되는 욕망과 필요 속에서 상대를 설득하고 협상해야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라면 온전한 설득과 협상은 불가능할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 어디까지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해질 겁니다. 설령 이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제대로 된 방식으로 청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신에게 드리는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에게 많을 것을 원하고 바라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미래를 희망하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방향을 모르면 올바른 기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희망하는지, 그 희망의 방향성이 맞는지, 그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거기에서 나아가 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칭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고 성찰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그러자면 페니키아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장벽을 넘어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진심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설득하는 자의 진심은 최선이자 최후의 협상 카드일 겁니다. 우리는 진정 무엇을 원하며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는 때입니다.


Desidero ergo exerceo.

데지데로 에르고 엑세르체오.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실천한다.



시대를 건너는 길목에서

세계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강제적 각자의 공간에 갇힌 형국이 됐지만, 인간은 갇혀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출구를 생각합니다. 또 출구를 나왔을 때 맞이할 세상에 대해서도 상상하고 준비합니다. 확실하고 선명한 것은 없지만 지나온 시간을 바탕으로 추측하고 분석하며 한 보씩 나아갈 뿐이지요.


고대 로마와 중세 시대는 비록 먼 과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인간 삶의 양식의 바탕이 된 큰 사건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종교, 정치, 경제, 생활면에서 혼돈의 시대이자 지옥의 시간이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든 장점과 단점이 공존합니다. 어느 시대라고 특별히 거룩하거나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기술의 진보는 다른 문제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고는 지나간 역사나 인류 문명의 자산에 쌓인 데이터를 통해 통찰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역사는 똑같지는 않아도 조금씩 다르게 되풀이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참조할 만한 가장 좋은 예가 되어주지요. 그것이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일 겁니다.


중세의 끝과 현대의 끝

서로마 제국이 폐망한 476년부터 시작된 중세 시대는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을 끝으로 1천여 년의 세월을 마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어떨까요? 현대의 시작을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이 있겠지만 그 끝만큼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출현을 기점으로 인류는 현대를 마감하고, 초현대 시대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들이 이번 팬데믹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저 나라가 선진국이 맞나?’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어제의 장점이 오늘의 단점이 되고, 오늘의 단점이 내일의 장점이 될 수 있는 것은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대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종료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주일 미사나 예배에 빠지면 큰 죄를 짓는 것처럼 가르쳐왔던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는 그리스도교인을 비롯한 모든 종교인에게 나날이 삶이 신앙인의 교회이자 종교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살피고, 거기에서 우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곁가지를 뻗어나가야 합니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잘 내리고 나면 가지가 있는 것은 언제든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뜻하지 않게 초현대 시대를 눈앞에 둔 지금, 개인과 사회 모두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장점,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단점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우리는 다문화 사회의 한 요소인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 백화점’과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적 이념은 이웃을 배려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희망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보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참되고 옳다고 주장하는 종교적 배타주의를 더 많이 목격하게 되지요.


이 때문에 종교적으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이나 특정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자행하는 종교에 대해 극도의 피로감과 함께 모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종교적 반감은 생각보다 강하며, 종교가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서 종교 자체에 배타적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종교는 일상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다가 일요일 하루, 성탄절, 석가탄신일과 같이 정해진 날 등 특정한 상황에서만 ‘기호 식품’처럼 취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시설을 찾아가 종교 행사에 참여하는 그 하루만이라도 ‘내 종교’, ‘내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태도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해봅니다.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교인은 주일이면 미사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갑니다. 다른 종교인도 자신이 믿는 종교 교리에 따라 각자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고요. 우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신을 찬미하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라고 믿고 있습니다.


과연 신이 인간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은 그 자체로 완벽한 지성이므로 인간에게서 취하고 싶은 것이 달리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때로 신은 인간의 찬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할 뿐입니다. 인간사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는 그 괴로움을 줄이고자 삶의 대소사부터 존재론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두고 기도로 청합니다. 기도를 통해 마음의 고통을 줄일 수는 있지만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부족해서 고통받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는 그런 신은 믿고 싶지 않습니다.


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신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신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옹졸하고 속 좁은 또 다른 ‘인간’처럼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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