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1주차

BOOK SUMMARY
 인문 

세계사에 기억된 50개의 장소

저자 제이콥 필드(역:김산하)
출판 미래의창
출간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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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기억된 50개의 장소

문명의 시작 : 대시대
나일강 - 문명을 낳은 강 
이집트에서 나일강은 사하라사막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오아시스다. 나일강 유역에는 두 곳의 중요한 지역이 있다. 하나는 약 13킬로미터 폭의 계곡이며, 다른 하나는 삼각주 저지대(하천이 바다나 호수와 만나 퇴적물이 오랫동안 쌓여 만들어진 평평한 지형)다. 240킬로미터의 석호와 습지가 펼쳐진 이곳은 지중해안까지 이어져 이집트와 유럽 간에 선박을 통한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일강 유역은 고대 이집트인에게 아주 중요했다. 기원전 5000년경 이후에는 오늘날의 이집트 지역인 나일강 유역을 따라 최초의 농경사회가 형성됐다. 보리, 밀, 아마, 과일과 야채는 물론 가축도 길렀으며, 강을 따라 야생 파피루스도 자랐다. 

그리고 나일강의 중요한 특징은 매해 주기적으로 범람했다는 것이다. 늦여름 동안에 강이 범람하면서 토지에 쌓인 독소와 염분이 씻겨나갔고, 많은 양의 퇴적토가 쌓여 주변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그때 이집트인들은 이를 두고 ‘나일강의 범람’이라고 불렀다. 

언젠가부터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서 더 이상의 주기적인 범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해마다 공급될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관개수로를 만들기 위해 댐과 수문을 건설하는 수많은 사업들이 연이어 진행됐다. 이 사업의 목적은 일 년 내내 물이 공급될 수 있도록 나일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고대 나일강은 노동력과 물자 운송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일강에 모인 최초의 배는 갈대로 만든 어선용 작은 뗏목이었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뗏목은 사람을 태운 유람선이나 곡류나 화강암 같은 특대 화물을 실어 나르는 바지선으로 바뀌었다. 

최초의 이집트 도시국가는 기원전 3100년경에 등장했다. 나일강 유역에 있던 여러 개의 도시국가는 고대 이집트 제1왕조의 창시자이자 반전설적인 통치지였더니 메네스에 의해 통합됐다. 그는 나르메르 도시국가의 왕이었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집트어로 ‘위대한 집’이라는 의미의 ‘파라오’였다. 수 세기를 거쳐 오면서 파라오는 나일강 삼각주의 가장 정점이자 전략적 위치였던 멤피스를 수도로 두고, 왕권 중심의 행정체계를 점점 강화해나갔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나일강의 작은 섬 엘레판티네섬에서 삼각주까지를 원래의 이집트 영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비아(엘레판티네섬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오늘날 수단의 대부분 지역에 해당한다)는 외부의 침략이 빈번했던 곳이었다. 이 지역은 이집트만큼 땅이 비옥한 곳은 아니었지만, 흑단과 황금이 풍부했다. 더불어 향신료와 상아를 생산하는 아프리카로 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기원전 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집트는 파라오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자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영향력을 잃은 이집트는 외부로부터 침략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더불어 누비아의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키시 왕국과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네오아시리아 제국이 여러 차례 이곳을 장악했다. 기원전 525년에 나일강 삼각주 동쪽에 위치한 펠루시움에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와의 전투가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멤피스가 함락됐고, 고대 이집트 왕조는 결국 최후를 맞았다.  

이후 페르시아의 아케메니스인들이 이집트 국왕의 호칭인 파라오를 그대로 따라 쓰면서 통치했지만,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속국과 다름없었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비잔틴, 아랍, 오스만, 영국과 같은 외부 세력의 지배를 잇달아 받아오다 1953년이 되어서야 이집트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문화의 발전 : 중세시대
팅벨리르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 민주주의의 개최지
게르만과 북유럽 사회의 사람들은 분쟁을 해결하고 결정을 내리기 위해 자주 만났다. 이 모임들은 단체로 발전했는데, 가장 오래된 단체는 아이슬란드 의회로 팅벨리르라는 아이슬란드의 남부 지역 평원에서 열렸다. 

바이킹족은 스칸디나비아 출신으로 서기 8세기 후반부터 유럽의 해안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략 덕분에 바이킹족이 타고 다녔던 배, 롱십(Longship)은 유럽대륙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까지 통상 관계를 구축했으며 영국, 아일랜드, 노르망디와 같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탁월한 항해술을 지닌 바이킹은 북해와 대서양에 있는 섬들을 식민화하기 시작했다. 이중 가장 큰 지역이 아이슬란드로, 이곳은 8세기 말까지 아무도 정착해서 살지 않았던 곳이었다. 867년경, 노르드인 잉골프 아르나르손은 아이슬란드에 도착하여 870년 최초의 바이킹 정착지를 세웠다. 이후에 다른 가족들도 이주하면서 아이슬란드에 최초로 정착한 노르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930년 아이슬란드 전역에 의결권을 행사하는 최초의 총회 알팅그(Althing)가 열렸다. 이는 국가 전체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지역 간의 분열을 방지하는데 아주 중요했다. 알팅그는 재판관과 같은 결정을 하는 구성원들을 통해 공동이나 국가 전체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이었고, 네 개의 지역 법원이 있었다. 알팅그는 매년 6월 2주간 ‘알팅그의 평원(Thing Plain)’에서 열렸는데, 이곳은 날씨가 온화해서 회의가 열리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모든 회의는 야외에서 열렸고, 인근에 있는 건물이라고는 교회 두 개와 농장 하나가 다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텐트를 치거나 부스를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행상인과 무역상들은 옥사라라는 팅벨리르 근처 강변 쪽에서 장사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었으나 입법 결정권은 고다르드라고 하는 지역의 족장에 있었다. 

965년부터 족장들의 수를 39명으로 제한했는데, 그들은 뢰그레타라고 하는 다수의 입법 의회를 구성해 법률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했고, 다른 나라들과 조약을 맺었다. 세 개의 동심원을 그리며 둘러앉은 참가자들 중에 족장이 그 중간에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 옆으로 둘러앉았다. 그 누구에게도 집행권이 없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법학전문위원인 뢰그쇠구마드로 3년의 임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역할은 위원회의 자문 역할을 하며 위원회에서 통과된 법률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10세기 말 기독교인이었던 노르웨이 왕은 아이슬란드에 선교사를 파견했다. 원주민들이 선교사들에게 적대감을 표출하자 노르웨이 왕은 선교사들이 아이슬란드와의 교역을 도맡도록 지원했다. 알팅그가 열린 1000년, 아이슬란드의 구성원들은 전통적인 민간 신앙을 유지할 것인지 혹은 기독교로 개종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어떤 의견도 제출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입법관이었던 쏘르게이르 료스베트닌가고디의 손에 맡겼다. 그는 비 기독교인이었지만 아이슬란드의 미래를 위해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택했고, 그의 결정대로 아이슬란드인들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13세기 무렵 아이슬란드는 족장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내부 분열이 시작됐다. 1262년, 평화를 찾기 위해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의 속국이 되는 것을 선택했고, 그렇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노르웨이 왕국에 예속됐으며 노르웨이에 세금을 바쳤다. 1397년 노르웨이는 스웨덴, 덴마크와 함께 칼마르 동맹을 결성했는데, 1523년이 되던 해, 스웨덴은 아이슬란드의 일부를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1690년대부터 법 자문위원회는 작은 텐트에서 열렸다가 목조 건물로 옮겨졌다. 팅벨리어에서 열린 알팅그의 마지막 회의는 1798년이었으며 1800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814년, 덴마크-노르웨이와의 동군연합이 해체되면서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의 소유가 됐다. 아이슬란드는 1918년에 완전한 독립국가가 됐고, 이는 알팅그가 진정한 정부 의회로서의 역할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지막 알팅그는 아이슬란드가 공화국으로 선포됐던 1944년 6월 17일 팅벨리어에서 열렸다. 


전쟁과 절대왕정의 시대 : 근대시대
알함브라 궁전 - 기독교와 이슬람의 융합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반도는 무슬림의 통치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곳은 그라나다로, 에미르가 이곳에 이슬람 건축의 미적 정수인 알함브라 궁전을 지었다. 

711년에 우마이야 칼리프가 이베리아를 공격했고, 알 안달우스를 건설했다. 이어진 내부 분열로 우마이야는 아바시드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756년 우마이야는 코르도바 아랍제후국을 건설했지만, 11세기 초 내전으로 붕괴됐고, 타이파스라고 하는 작은 도시국가로 쪼개졌다. 이러한 권력 공백 덕분에 모로코의 베르베르부족은 알모라비드를 거쳐 알모하드 왕조를 세워 121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이베리아 북쪽에서는 기독교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소위 레콘키스타(국토회복운동)을 일으켰고, 기독교도와 이슬람 교도 간의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들은 일부 독립 왕조를 건설하고 무력을 이용해 타이파와 조공관계를 맺어 공물을 받았다. 1212년 기독교 연합군은 알모하드 왕조를 상대로 한 라스 나바스 드 톨로사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이를 통해 스페인 남부의 무슬림 기반을 없앨 수 있었다. 스페인 왕국의 절정기는 1217년에서 1252년으로, 페르디난드 3세가 지배했던 카스티야 왕국 시절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세르비야와 코르도바까지 손에 넣었다. 그중 알 안달루스 왕조의 한 곳만은 남겨뒀는데, 그곳이 바로 그라나다였다. 이곳은 페르난도 3세의 지원을 받았던 타이파왕인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반이 세운 곳으로 그의 나시리드 왕국은 그라나다를 1492년까지 통치했다. 

그라나다는 해안과 산지로 이뤄져 있다. 비단과 설탕, 말린 과일과 같은 값비싼 물품을 수출하면서 경제적 수익을 냈지만, 척박한 토지로 인해 북아프리카에서 곡물을 수입해야만 했다. 북쪽에 있던 사크티야는 그라나다에 해마다 금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조금이라도 지체되는 날에는 국경을 넘어 이곳의 농장과 거주지들을 짓밟아 놓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그라나다를 지키기 위해 무함마드 1세는 ‘붉은 요새 궁전’을 지었다. 줄여서 ‘알함브라’라고 부르는데, 이는 주변에 있던 붉은 흙으로 지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평탄한 지형을 골랐다. 궁전을 짓는 데만 수 세기가 걸렸고, 그의 후계자들이 건물을 계속 중축해나갔다. 

알함브라 궁전의 외부는 13세기 말에 완공됐다. 두꺼운 벽은 약 2.23킬로미터 둘레로 제작됐으며 22개의 탑이 있다. 설치된 송수로는 알함브라 궁전 내의 분수와 공중목욕탕에 물을 공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메수라르 궁, 코마레스 궁, 사자의 궁이라는 중요한 세 개의 궁이 있다. 메수라궁은 13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공적인 업무를 위해 나시리드 왕조가 사용했다. 코마레스궁은 14세기 중엽에 세워졌으며 손님이나 외교사절단을 위한 리셉션용으로 사용됐다. 마지막으로 사자의궁은 14세기에 추가로 지어진 것으로, 나시리드 왕조의 개인 주거용으로 활용됐다. 모든 건물들에는 이슬람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기하학적인 복잡한 문양들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알함브라의 동쪽에는 ‘건축가의 정원’이라는 의미의 헤네랄리페가 있는데 그라나다 왕의 여름 별궁으로 지어진 헤네랄리페는 1310년부터 11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됐으며, 정원과 분수가 그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궁전의 맨 서쪽 끝에는 알카사바로 다양한 병영과 군대 창고 및 감옥이 있는 성채다. 

나스리드 왕조는 내전으로 곤경에 빠졌을 뿐 아니라 10년간 북쪽으로부터 침범해 오는 상대와 전투를 이어가다 결국 1492년 1월 2일에 멸망하고 만다. 이 당시 스페인의 권력을 잡았던 인물들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그녀의 남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였다. 이 둘의 결혼은 스페인을 통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다. 알함브라는 이들에 의해 왕궁으로 지정됐다. 이들은 무슬림 장인을 고용해 궁궐을 복원했고, 그곳에 교회 예배당을 지었다. 이들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이곳으로 불러 대서양 횡단을 지지했다. 이 항해는 1516년에 왕위를 계승한 손자 찰스 5세 황제가 스페인을 전 세계의 강력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찰스 5세가 알함브라 궁전을 처음 방문했던 것은 1526년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 궁궐이 예술적으로는 손상이 없는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궁궐로 사용하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가 훼손됐다. 하지만 궁궐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그 작업은 1세기가 지난 후에야 포기됐다. 

17세기 중반, 알함브라 궁전의 상황은 너무나도 참담했다. 궁전은 죄수를 수감하거나 다친 군인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짓다 만 궁궐의 목재를 떼어내 불쏘시개로 사용하면서 주변에 있는 탑 여덟 개를 날려버렸다. 웰링턴 공은 반도전쟁(1808-1814)이 한창일 때 그라나다에 도착해서 유럽 느릅나무를 알함브라 궁전 주변 정원에 심으며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19세기의 알함브라 궁전은 야생동물들의 서식지가 될만큼 잡초가 무성했고, 지진과 화재로 건물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알함브라 궁전을 보존하기 위한 보수 작업이 계속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됐다.  


세상에 반기를 들다 : 혁명의 시대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 - 러시아의 역사적, 정치적 중심지 
러시아의 역사와 모스크바는 불가분의 관계다. 이 도시의 중심부에는 요새처럼 서있는 크렘린궁이 있고 그 주변에 붉은 광장이 있다. 모스크바가 러시아 역사에 처음 기록된 때는 1147년이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서쪽을 지배했던 키예프의 대공 유리 돌고루키가 만찬을 했던 곳이었다. 

9년이 지난 후, 모스크바에 요새 하나가 지어졌다. 토성 성벽 위에 나무로 둘러싸인 이 성곽은 크렘린의 기반이 됐고, 결국 도시와 공국으로 성장한 작은 마을의 중심지가 됐다. 몽골족은 황금군단으로 모스크바를 포함해 러시아의 많은 영토를 장악했다. 몽골에 충성하라는 강요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왕자들은 도시를 재건하며 크렘린궁을 강화하고 다른 영토를 흡수하면서 세력을 점점 더 키워나갔다. 결국 14세기에서 15세기에 모스크바 왕자들의 힘은 몽골족에 대항할 만큼 강해졌다. 

1480년에 ‘위대한 이반’, 이반 3세가 몽고의 황금 군단을 물리치면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는 크렘린궁을 대대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기술자와 건축가를 고용했다. 크렘린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교회가 세워졌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1475년에서 1479년에 세워진 승모승천 대성당이다. 그다음은 1489년에 완공된 수태고지 성당으로, 한때는 러시아 지배자들이 개인 미사를 보단 곳이었다. 하지만 화재로 인해 소실됐고, 1564년에 재건됐다. 마지막은 1508년 완공된 성 미카엘 대천사 성당으로 14세기 기독교의 성지이자 러시아 차르의 시신을 안장했던 자리에 세워졌다. 

1547년, 이반 3세의 손자 일명 ‘이반 뇌제(그로즈니)’로 불리던 이반 4세는 ‘러시아의 차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했으며 모스크바의 세력 확장을 위해 다른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치렀다. 그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반 4세는 상트 바실리 블라제누이 성당을 붉은 광장 남쪽 끝에 세웠다. 1712년, 그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다. 

19세기 초의 러시아는 유럽에서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나폴레옹 전쟁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하고 같은 해 9월에는 모스크바까지 진군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로 들어왔을 때 큰 화재가 발생해 모스크바의 건물 3분의 2가 파괴됐다. 나폴레옹은 황폐화된 지역의 지배권을 갖고 한 달 후에 떠났다. 남은 19세기에 모스크바는 재건됐다. 

러시아 제국은 1917년에 몰락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오랜 전쟁에 지친 러시아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니콜라스 2세를 퇴위시킨 2월 혁명이 일어났다. 니콜라스 2세는 이미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상태였고,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혁명당인 볼셰비키당이 10월 혁명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레닌은 자신의 권한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반공산주의 부대와 오랜 내전 끝에 1922년에 승리하게 되면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했다. 레닌은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고, 붉은 광장에는 소련의 힘과 단결을 보여주는 수많은 볼거리가 펼쳐졌다. 레닌의 사망 후, 방부 처리된 그의 시신은 붉은 광장 서쪽에 있는 묘소에 전시되어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모스크바에 위협이 됐던 마지막 존재는 바로 독일의 나치 정권이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펼치며 러시아를 급습했다. 10월에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모스크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치열한 수비 탓에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더 나아갈 수 없었고, 결국 독일군은 물러났다. 모스크바 전체가 전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은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박해와 변혁의 시대 : 현대시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 우주전쟁의 서막
냉전 체제 때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지구를 넘어 우주를 포함한 경쟁의 관계였다. 1950년대부터 두 초강대국은 우주 개발 경쟁에서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맞붙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양국의 탄도미사일 기술을 엄청난 성장을 보였다. 1950년대 중반에 미사일은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보낼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가졌다. 

소련 미사일과 우주 프로그램의 주요 특징은 비밀 유지였다. 1955년, 탄도 미사일 발사를 위한 새로운 장소로 카자흐스탄 남부에 위치한 건조한 사막 지대인 튜라탐이 낙점됐다. 비밀유지를 위해 그들은 암호명으로 320킬로미터나 떨어진 광산촌의 이름인 ‘바이코누르’로 명명하기도 했다. 1966년에 이곳은 시로 승격됐고, 이름을 레린스크라고 바꾸었다. 

소련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한 로켓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미국와의 우주개발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1957년 10월 4일,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R-7 우주로켓을 이용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첫 위성을 발사한 지 한 달 뒤에 소련은 스푸트니크 2호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워 발사했는데 이 개는 우주에 간 최초의 생명체로, 물리적인 공포와 과열로 인해 임무 수행 6시간 만에 죽었다.

우주 분야에서 소련의 가장 최고의 절정기는 보스토크 1호에 이전 비행기 조종사였던 유리 가가린을 태워 우주 밖으로 보낸 때였다. 108분 동안 우주여행을 한 뒤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사람이 됐다. 이러한 최초 유인 우주 비행은 소련에 있어 아주 대단한 정치적 선전이었다. 

가가린은 세계적으로 유명 인사가 됐지만 이후 추가적인 우주 비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련 입장에서 가가린과 같은 거물급 인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애지중지 여겼던 그였지만 1968년 훈련 비행 중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중반에 유인 우주선에서 차지한 소련의 우위는 끝이 났다. 1960년대 말까지 달에 인류가 착륙할 것을 계획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미국 우주 항공국(NASA)은 5백 퍼센트의 예산을 투여하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소련을 넘어섰다. 1969년 미국이 달 착륙에 여섯 번을 연속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1971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최초의 우주 정거장 살류트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것을 제외하고는 네 번의 달 착륙 시도가 매번 실패로 끝났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이 아폴로-소유스 실험 계획을 통해 지구 궤도에 도킹하고 우주인들이 실험을 공동으로 진행하면서 사실상 미국과 소련 간의 치열한 우주개발경쟁은 1975년에 끝이 났다.  

1991년, 소비에트 연합이 붕괴되면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카자흐스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그대로 두는 대신 일 년에 1억 1천 5백 만 달러의 임대료를 지불하라고 했다. 이곳은 우주선과 우주 탐사의 중요한 허브로 우주 왕복선과 무인 우주선을 위해 사용됐다. 현재 이 우주기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과학자와 우주 비행사. 그리고 전 세계의 우주 여행자들을 유치하는 지구 궤도 시설이 있는 국제우주정거장으로 가는 출발점으로 1998년 건설된 이후에 계속 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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