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5주차 |
BOOK SUMMARY | ||
과학자의 흑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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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양젠예(역:강초아) 출판 현대지성 출간 202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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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실패를 겪은 과학자들의 이야기 | ||
도서요약 보기과학자의 흑역사 천문학자의 흑역사 호킹이 이런 짓을 하다니! 1942년 1월 8일, 갈릴레이 서거 300주년에 우주를 깊이 탐구한 또 한 명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대학의 도시 옥스퍼드다. 원래 그의 가족은 런던 근교 하이게이트에 살았지만 호킹의 아버지 프랭크와 어머니 이사벨은 첫 아이를 옥스퍼드에서 낳기로 했다. 스티븐 호킹은 두 살 무렵 하마터면 폭격으로 사망할 뻔한 적도 있었다. 당시 가족들이 전부 외출한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자칫 인류는 위대한 과학자를 잃어버릴 뻔했다. 호킹은 굼뜨고 서툰 편이었지만 상상력은 놀라울 정도로 풍부했다. 그의 사고는 여러 주제를 넘나들며 휙휙 바뀌었다. 호킹은 확실히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아홉 살에 자신이 장래에 과학자가 될 것임을 알았다. 열여섯 살이 되자, 호킹과 친구들은 시계 부품과 버려진 전화 교환기를 이용해 간단한 컴퓨터를 제작했다. 호킹은 이 ‘논리 회전식 컴퓨터(LUCE)’의 주요 설계자 중 한 사람이었다. 1959년 호킹은 옥스퍼드대학교에 합격했다. 호킹은 물리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가 의학을 전공하기를 바랐고 둘은 논쟁을 벌였다. 그해 10월, 호킹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식 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물리학과에 합격했을 뿐 아니라 장학금도 받았다. 호킹이 한창 빛과 행복 그리고 찬란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거대한 불행이 몰려와 그를 파괴했다. 그해 겨울방학, 호킹은 어머니와 스케이트를 타러 나갔다가 아무 이유 없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한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발생한 후 의사를 찾아갔는데 검사 결과 루게릭병(ALS)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루게릭병은 불치병이었고, 의사들은 호킹이 최대 2년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죽는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는 학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호킹은 몸이 마비되어 전동 휠체어에 의존해 움직여야 했고 1985년 이후에는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해 컴퓨터로 타인과 소통해야 했지만, 이처럼 세계 최악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76세까지 살았을 뿐 아니라 최고의 우주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가 된 것은 기적이다. 호킹은 주로 블랙홀을 연구했다. 블랙홀은 중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총알은 물론이고 미사일이든 빛이든 모두 일정 거리까지 날아간 다음에는 꼼짝없이 급커브를 돌아 블랙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빛이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지점을 r라고 할 때, 이 r을 반지름으로 그린 원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사건의 지평선은 곧 블랙홀의 경계다. 호킹의 위대한 공헌이 바로 이 원의 면적 πr²을 연구한 것이다. 1989년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럼에도 호킹의 실수와 고집으로 또다시 풍파가 일어났다. 사건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호킹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는데, 그때 만난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는 자신이 연구 중인 우주의 새로운 팽창 이론을 호킹에게 들려주었다. 호킹은 비판 의견을 내놓았고, 린데는 호킹의 의견에 따라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다. 모스크바 방문이 끝난 후, 호킹은 곧바로 미국 필라델피아로 날아가 필라델피아 프랭클린 인스티튜트가 수여하는 벤저민 프랭클린 메달을 받은 후 우주학 토론회에 참석해 발언했다. 토론회가 끝난 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젊은 물리학자 폴 스타인하트와 우주 팽창 문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중에 문제가 생겼다. 호킹이 19888년에 출간한『시간의 역사』에서 이 일을 언급했는데, 단순히 부주의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몰라도 이렇게 썼던 것이다. 필라델피아 토론회에서 나는 우주 팽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린데의 이론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의 오류를 어떻게 바로잡아주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당시 청중 가운데 스타인하트가 있었다. (…) 나중에 스타인하트는 나에게 논문을 하나 보내주었다. 그와 안드레아스 알브레히트가 같이 쓴 것인데, 린데의 이론과 매우 유사했다. 나중에 스타인하트는 내가 당시 린데의 이론을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며, 게다가 그들의 논문을 거의 완성한 시점에서야 린데의 논문을 읽었다고 말했다. 1982년에 호킹은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학 토론 강의를 열었다. 이 강의에서 우주 팽창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했는데, 예정된 강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 주최 측에서 토론 내용을 기록물로 작성했다. 이 강의에 참가한 미국의 물리학자 터너와 배로가 초안을 보고 스타인하트의 공로를 내용에 추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호킹은 ‘공로를 나눠 주자’라는 그들의 제안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타인하트와 알브레히트의 이름을 빼는 대신 호킹-모스의 이름으로 된 논문을 참고자료에 넣으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터너와 배로는 호킹의 무분별한 태도에 크게 화를 냈다. 터너와 배로는 호킹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무시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호킹이 오해를 했던 듯하다. 스타인하트가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강연을 듣고 린데의 새로운 팽창 이론에 대해 알게 된 후에 논문을 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타인하트는 이 일을 알게 된 후 곧바로 자신의 수첩과 편지를 호킹에게 보냈다. 그것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호킹의 강연을 듣기 전부터 이미 새로운 팽창 이론에 관한 상당히 진척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호킹이 린데의 새로운 사상을 언급하는 것을 들은 바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또한 우호적인 태도로 앞으로 같이 협력 연구를 하자는 뜻을 비췄으며, 명백하게 이 일은 여기서 일단락되었음을 밝혔다. 이것이 1982년의 일이었다. 만약 호킹이 자신의 말을 지켰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 그는『시간의 역사』를 쓰면서 자신이 1982년에 스타인하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했던 말을 전면 부정했다. 이 일로 스타인하트의 명예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고, 미국의 정부과학기금에서는 그에게 연구비 지원을 중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원인은 전부 호킹이 쓴 책이었다. 다행히 1981년에 열린 어떤 학술회의를 촬영한 비디오를 찾아냈고, 그 영상에서 스타인하트는 매우 확실하게 새로운 팽창 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었다. 몇 달 후, 호킹이 답신을 보냈다. 『시간의 역사』다음 판에서는 스타인하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그 부분의 내용을 수정하겠다는 편지였다. 그러나 호킹은 스타인하트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힌 사건을 두고 당사자에게 직접 사과를 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생물학자의 흑역사 노벨상 수상자 세 사람의 이상한 법정 다툼 1990년대 미국에서는 첨단 과학기술의 특허권, 즉 우선권을 놓고 소송이 벌어졌다. 미국의 듀폰 사(社)가 세터스 코퍼레이션을 권리 침해 및 불법 이익 취득으로 고소한 것이다. 이 소송은 미국 과학계, 기술계, 공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소송에 깊이 관련된 두 노벨상 수상자는 미국 분자생물학자 아서 콘버그(1918~2007)와 미국 생화학자 캐리 멀리스(1944~)이다. 콘버그는 1959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고, 멀리스는 1993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콘버그는 1918년 3월 3일에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1933년에 뉴욕주 장학금을 받고 뉴욕대학교 의과대학교에 입학했고, 1937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로체스터대학교 의학대학원에 입학하여 1941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당시 그는 효소에 큰 흥미를 느꼈다. 특히 유전학에서 중요한 학문적 문제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세포가 어떻게 효소를 생성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 유전학에서 생화학 연구 영역은 여전히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제임스 듀이 왓슨(1928~)과 프랜시스 크릭(1916~2004)이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의 세베로 오초아(1905~1993) RNA를 합성할 때 사용한 방법으로 DNA 고분자를 인공 합성했다. 콘버스가 DNA를 합성한 일은 인류가 처음으로 유전 물질의 기초적인 제작 방법을 알아냈다는 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 콘버그는 이런 공로로 1959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멀리스는 1944년에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컬럼비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략 16~17세가 되었을 무렵, 멀리스는 설탕과 질산칼륨을 가열한 것을 연료로 삼아 청개구리를 태운 작은 로켓을 지상 1.5마일 높이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1972년에 멀리스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지도교수조차 놀라게 한 일이 있었는데, 1968년에 자신의 전공 분야와는 전혀 상관없는「시간 역전에 대한 우주론적 의의」라는 논문을 발표한 데다 그 논문이 수준 높은 학술지『네이처』에 실렸던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성장호르몬 억제 인자를 사용해 유전자 합성과 복제에 영향을 주는 연구에 흥미를 가졌다. 그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DNA의 유의미한 조각을 화학적 방법으로 합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79년 가을, 멀리스는 세터스 코퍼레이션에 입사했다. 세터스 코퍼레인션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바이오테크놀로지 회사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회사에서 DNA 합성법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실험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이때가 그의 과학자 생애에서 특히 빛나는 시기였다. 1983년 4월이 어느 주말 저녁, 멀리스는 집 근처 숲을 산책하다 PCR 기술과 관련된 초기 구상을 떠올렸다. 세상에! 만약 이 과정이 정말로 실행된다면 DNA이 생산량이 얼마나 늘어날 것인가? 2의 10제곱은 대략 1000이고, 2의 20제곱은 약 100만, 2의 30제곱은 약 10억……. 정말로 엄청난 증가폭이다! 그날 저녁 멀리스의 머릿속은 DNA의 ‘증폭’에 관한 신기한 상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닌가? 월요일 아침, 그는 급히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가 자료 조사를 했다. DNA 증폭에 대한 논문은 전혀 없었다. 1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들려주었지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멀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해 봄과 여름을 온통 이 구상을 심화하는 데 바쳤다. 결국 1983년 12월 16일, 실험에 성공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분자생물학의 규칙을 바꿨어!” 현재 PCR 기술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는 위험한 전염병의 병원균을 신속히 검사하고, 법의학에서는 혈액, 모발, 정액, 타액, 피부조직 등에서 DNA 샘플을 얻어 분석, 감정하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 이 기술은 계속 개선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생물학 영역에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멀리스가 명성과 재산을 모두 얻으며 전성기를 누릴 때, 생각지도 못했던 악의적인 소송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PCR 기술이 큰 이익을 거두는 기술로 자리 잡은 후, 세터스 코퍼레이션은 수억 달러의 이윤을 올렸다. 다른 회사들도 이 기술을 써보고 싶어 안달했다. 그때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듀폰 사가 세터스의 권리 침해로 고소하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듀폰 사의 주장은 이러했다. PCR 기술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교수이자 196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하르 고빈드 코라나(1922~2011)가 1970년대 초에 연구한 결과물을 기초로 만들어졌으므로 세터스가 코라나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코라나는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학자로, 1948년에 영국 리버풀대학교에서 유기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66년에 유전자 코드(유전자 암호)를 전부 해독했다고 발표했고 그해에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어서 더욱 지난한 연구 과제, 즉 DNA합성을 시작했다. 그후 코라나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유전자의 총체적 합성」이라는 논문에 기술했다. 그러나 그의 논문에서는 구체적인 온도, 시발체의 농도 등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 후 이 실험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듀폰은 코라나의 논문 두 편과 이 논문에 관한 저작권 양도 증명 서류를 주요 증거로 법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코라나는 법정에 출석하여 증언하기를 거부했는데, 이 때문에 듀폰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럼에도 듀폰 사는 이 소송을 계속 진행했다. 재판 결과, 법원은 듀폰의 고소에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세터스 코퍼레이션은 그들의 이익을 지켰고, 멀리스의 명성도 높아졌다. 코로나 또한 증언을 거부하면서 이 소송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가 어리석게도 이 소송에 발을 들였다. 그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아서 콘버그다. 콘버그는 듀폰의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했고, 당당하게 말했다. PCR 기술은 멀리스가 새롭게 발명한 것이 아니다. 1950년대 중반 무렵, 나 역시 DNA 중합효소에 대한 연구를 했고, PCR 기술은 DNA 중합효소가 가진 특성의 합리적인 파생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 효소를 발견한 사람이 나 자신이다. (…) 내 실험실의 연구원 혹은 우리 연구팀과 비슷한 환경을 가진 실험실의 연구원이라면 언제든지 DNA 증폭을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멀리스는 한가해서 나나 내 학생들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했다. (…) 할 일이 없어 그 일을 한 덕에 그가 DNA 증폭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콘버그가 세련되게 비꼬았지만, 멀리스의 변호사는 화를 내지 않고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 『DNA 복제』라는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1983년에 개정판을 내셨고요. 맞습니까?”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983년의『DNA 복제』에는 DNA 증폭기술에 대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렇죠?” 콘버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예감했다. “여기, 최근 개정판에는 DNA 증폭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군요. 이게 무슨 뜻이죠?” 콘버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람들이 콜럼버스에게 달걀을 세우라고 요구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달걀 끝을 탁자 위에 가볍게 내리쳤고, 달걀은 흔들림 없이 탁자 위에 섰다. 말하자면 멀리스는 달걀을 세운 콜럼버스였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손을 움직이는 게 싫습니다. 발명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한 간결한 행동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죠.” 화학자의 흑역사 멸시받은 ‘독가스 화학자’ 하버는 1868년 12월에 독일의 어느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천연 염료를 취급하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하버는 자연스럽게 어려서부터 화학공업에 흥미를 가졌다. 대학생 시절에는 몇몇 공장을 돌아다니며 화학지식을 실제로 활용하는 경험을 쌓았다. 하버의 관심은 화학공업에 있었다. 베를린대학교에 다닐 무렵, 그는 상급 학년의 수업 과정까지 미리 독학하곤 했다.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는 학부 졸업 논문을 쓰겠다고 신청했다. 그가 선택한 지도 교수는 유명한 화학자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호프만(1818~1892)이었다. 호프만 교수는 하버가 보기 드문 화학 천재라는 것을 금세 알아보고, 그의 논문 신청을 받아들였다. 하버의 학부 졸업 논문은 독창적이고 심오한 견해를 갖춰 논문 심사를 맡은 교수들을 감동시켰다. 그들은 하버의 논문이 박사 논문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1904년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을 공업화하여 대량 생산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기업가 두 사람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몇 년간의 험난한 연구 끝에 1909년, 하버는 작은 성공을 거뒀다. 그는 여러 기업가들 앞에서 마술을 부리듯 공기에서 100세제곱센티미터의 암모니아를 합성해냈다. 기업가들은 하버의 신기한 방법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의 방식을 사용하길 결정하고 실험공장을 건설했다. 1911년,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암모니아 제조 공장으로 문을 열었다. 1913년부터 정식 생산을 시작했는데 그해 6500톤의 암모니아를 만들었다. 암모니아를 대량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인류가 천연 질소 비료에 의존하는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 농업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버도 이때부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과학자로 자리매김했다. 1911년 어느 날, 빌헬름 2세가 하버의 실험실이 있는 작은 도시를 방문해 하버의 전기화학연구소로 향했다. 사실 빌헬름 2세가 직접 이곳에 온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황제는 하버를 베를린에 세워질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 및 전기화학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빌헬름 2세가 하버에게 좋은 직책을 준 데는 암모니아 합성 연구의 성과를 치하하는 것 외에 숨은 의미가 있었다. 빌헬름 2세는 하버에게 전쟁에서 적군을 무찌를 수 있는 신기한 무기를 발명하라고 명령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발발하자 영국 해군이 독일의 대서양 해상 운송로를 철저히 틀어막았다. 그러나 독일에는 프리츠 하버가 있었다. 그는 독일의 암모니아 생산량을 빠르게 증가시켜 1919년에는 이미 여난 20만 톤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암모니아는 독일 농업의 질소 비료 수요를 채워주었을 뿐 아니라 폭약 제작에 필요한 재료로 군수공업에도 제공되었다. 하버는 맹목적인 애국심과 황제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열정을 쏟아 군수공업에 필요한 연구에 매진했다. 한랭한 기후에서 쓸 수 있는 휘발유를 연구하고, 폭약의 재료를 생산했다. 그중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은 염소 가스, 이페리트 가스 등 독가스를 연구 개발한 것이었다. 하버는 하루아침에 예비역상사에서 대위로 진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독일 군대가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914년 말이 되자 독일군의 우세는 사라지고 양측이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1915년 4월 22일에 처음으로 하버가 개발한 염소 가스를 사용했다. 프랑스군은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독가스 공격을 당해 5만 명이 사망하고 1만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끔찍했던 날 이후 두 나라는 살상력이 더 강한 독가스를 사용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났을 때, 독가스로 사망한 숫자는 1백만 명을 넘었다. 하버의 죄악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 과학자의 비난을 받았다. 아내도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남편의 죄악에 항의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독가스 과학 연구를 책임졌던 하버는 오랫동안 숨어 살아야 했다. 하버는 정말 많은 사람에게 멸시받았고, 때로는 대놓고 그를 모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다시 말해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살상력 강한 독가스를 만든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했다. 하버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일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자신의 민족인 유태인을 박해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었다. 하버는 독일에 살던 많은 유태인과 마찬가지로 독일을 떠났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로 향했다. 이때 하버는 이미 65세의 노인이었다. 뛰어난 과학자이며 독일을 위해 46년간 일했지만 노인이 된 후에는 독일에서 냉정하게 버림받았다. 1934년 초, 하버는 팔레스타인의 다니엘 시프 연구소의 소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던 중 1월 29일에 스위스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하버의 일생은 공로도 크지만 과실도 작지 않았다. 그는 천재 학자였지만 맹목적인 애국자였다. 친구였던 아인슈타인은 여러 차례 그를 비판했다. 하버의 행동은 아무런 이익도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모욕하는 짓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하버는 아인슈타인의 비판이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반대로 아인슈타인 같은 행동이 유태인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하버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과학자는 매우 똑똑하고 예민한 감각을 보이지만, 사회적인 지식은 보통 사람보다 떨어질 때가 있다. 이런 사례는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쉽게 볼 수 있고, 하버는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사례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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