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8월 5주차

BOOK SUMMARY
 인문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저자 리디아 더그데일
출판 현대지성
출간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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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잘 죽고 싶다면 먼저 삶이 유한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기껍고 반갑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니 언젠가 죽는다”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다.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생명을 연장해준다는 온갖 방법에 끝없이 매달리면서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잘 준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메멘토 모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는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가르쳤다. 고대 히브리인의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히브리어 성경을 풀이하던 전도자, 즉 코헬레트(Qohelet)는 신의 뜻을 구하는 자들에게 젊고 건강할 때 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전했다. “고난의 날이 닥치기 전에, 아무 낙도 없다라고 이야기할 해가 다가오기 전에 신을 기억하라 … 흙은 땅으로, 숨은 그를 창조하신 신의 품으로 돌아갈지니.” 전도자는 육체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때를 미리 준비하라고 일렀다.


이렇게 고대부터 죽음을 상기하던 관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시각적인 요소로 이어졌다. 이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한다. 이 표현은 ‘기억하다’ 또는 ‘명심하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메미니(memini)’와 ‘죽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모리오르(morior)’가 결합해서 탄생했다. 두 단어를 연결하면 “잊지 마라! 너는 죽는다!”라는 경고가 된다. 현대 영어권 국가에서는 죽음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메멘토 모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표현은 회화와 조각에서부터 음악, 문학, 춤, 보석, 심지어는 해골과 머리카락 다발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해골은 죽음을 상징했고, 날개 달린 해골은 사후 세계를 의미했다. 묘비 위에 시계나 모래시계를 그린 그림은 인생의 덧없음을 떠올리게 했다. 얼핏 보면 지나치게 죽음만 강조하는 듯하지만 ‘메멘토 모리’는 중세 유럽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도구였다. 중세 유럽 사람은 죽음을 바라보며 삶을 꾸려나갔다.


바니타스 회화는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린 정물화다. 상파뉴(Philippe de Champaigne)가 1671년에 그린 <바니타스>라는 제목의 정물화는 검은색을 배경으로 회색 판 위에 있는 물건 세 개를 그린다. 회색 판은 선반이나 식탁 상판, 또는 석관의 뚜껑으로 보인다. 왼쪽에 자리한 물건은 이파리 끝이 노랗게 물든 빨간 튤립으로, 물을 가득 채운 둥근 유리병에 담겨 있다. 움직임 없는 튤립은 얼마 못가 시들 것만 같아 보인다. 중간에는 해골이 있다. 튤립과 마찬가지로 움직임은 없지만 이미 생명을 잃었다. 오른쪽에는 모래시계가 있다. 모래시계에는 움직임은 있지만 생명은 없다.


이 그림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삶(튤립)과 죽음(해골)이 시간문제(모래시계)일 뿐이라는 해석이다. 또는 삶과 아름다움, 시간은 모두 헛되며 확실한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구성이 워낙 단순해 다른 해석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우리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공동체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

먼저 우리는 젊고 건강할 때도 언제든지 죽음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죽음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흔쾌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을 전할 뿐이다. 죽음이 먼 훗날의 일처럼 느껴질 때에도 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죽음을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공동체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가장 좋은 죽음으로 여긴다. 혼자 죽으면서 잘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때로는 모두가 병실을 떠나길 기다렸다가 혼자 남았을 때 숨을 거두는 사례도 있다. 살았을 때 남에게 부담주기 싫어하던 사람은 죽을 때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밤이 깊어 다들 병실을 떠나면 그제야 편히 눈을 감는다. 이런 배려심 깊은 죽음은 예외적인 사례이고 여기에서 말하는 외로운 죽음은 곁에 남은 이 하나 없어 혼자 죽는 경우다. 아무런 정신적 지지 없이 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형편없는 마지막을 맞이한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외로운 죽음을 예방하기 위한 상세한 지침을 제공했다. 가족과 친구는 죽어가는 이의 침대 곁에 모여 죽음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때, 곧 병을 이겨낼 것이라는 둥 환자에게 거짓 희망을 심어주지 않도록 해야 했다. 공동체 구성원은 죽어가는 이가 죄를 뉘우치도록 격려했다. 자신의 영혼을 무시하고 몸이 회복될 것을 믿기보다, 두렵지만 육체적 한계를 인정하고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논리였다. 공동체 사람들은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했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과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더라도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길 조언했다. 15세기에 죽음은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사건이었다.


어떤 일이든 잘해내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죽음도 예외는 아니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짧은 질문과 답변을 반복하며 짧은 기도문을 암송한다든지 신념을 긍정하는 등 죽어가는 사람이 하면 좋을 행동을 자세히 묘사했다. 이는 페스트 확산 등 극단적인 사건으로 성직자가 부족해졌을 때 큰 도움이 됐다. 아르스 모리엔디는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독자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달지 않았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도 이 지혜를 적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로운 죽음을 피하려면

죽음을 연습하다

아르스 모리엔디의 두 가지 핵심 주제는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하는 것과 누군가의 죽음에 있어 공동체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대신해 기도하는 한편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병상에 누운 뒤에는 이미 늦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가올 미래를 미리 그려보아야 한다.


아르스 모리엔디 문학은 모리엔(morien), 즉 죽어가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두고 나머지를 조연으로 그려내곤 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죽어가는 이의 침상을 둘러싸고 생의 마지막을 목격했다. 아직 죽음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이웃의 임종을 지키며 자신이 모리엔이 될 날을 상상했다. 그날에는 자신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죽음을 함께 기다려줄 손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미리 연습하는 관행은 공동체를 끈끈히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가치

일부 아르스 모리엔디 문학은 죽음을 앞둔 병자의 집에 평소 적대적이던 사람의 방문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씁쓸함, 분노, 탐욕 등 부정적인 감정을 품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죽음을 앞두고 절대 화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관계가 개선되는 사례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죽음은 다른 무엇으로도 풀 수 없는 심각한 갈등을 해결할 기회를 제공한다.


죽음이 공동체 구성원의 관계를 더욱 깊고 돈독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는 건 사실이지만 죽음이 공동체를 새로이 구성해주지는 않으니 아르스 모리엔디가 전하는 메시지를 오해하지는 않길 바란다. 전 생애에 걸쳐 좋은 죽음을 준비하듯, 사는 동안 꾸준히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공동체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디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병을 앓으면서 생활 반경은 좁아졌지만 그보다 큰 의미를 찾았다는 환자를 지금껏 많이 만났다. 이들은 여행은 고사하고 간단한 외출조차 힘에 부치는데다가 결국에는 침대를 벗어나기도 어려운 신세가 됐지만 생각만큼 바깥 활동이 그립지는 않다고 말했다. 게다가 몸이 불편해진 덕분에 새로운 즐거움을 찾게 됐다. 가족, 친구와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좋아하는 음식을 천천히 즐기는 시간은 외출보다 더 큰 기쁨을 줬다. 해질녘에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변해가는 방의 색깔을 관찰하는 시간 또한 무척 즐거웠다.


또한 공동체는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에 더 몰두할 수 있게 도와준다. 어떤 환자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사교적인 일상을 유지했다. 몇몇은 사회를 바로잡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 종교에 더욱 몰입하는 환자도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한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해줄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도 했다. 죽어가는 이들이 선택한 모든 활동은 공동체 안에서 구상되고 또 실현됐다.


또한 공동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가?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는 삶과 죽음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 나름의 답변을 제시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이 답변을 수용 혹은 거부하고, 가공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간다.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덮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인간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두려움을 느낀다. 생물의 기능을 연구하는 의학 분야인 생리학에서는 두려움이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킨다고 설명한다. 즉, 위협을 느끼면 상대와 맞서 싸우거나 도망친다는 것이다. 호르몬 과다 분비로 신경계가 활성화되면 심박이 증가하고,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커져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이고, 소화기능이 저하된다. 목숨을 구해야 할 상황이 오면 싸우거나 달아날 수 있도록 소화 목적으로 사용되던 장기의 피가 근육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달아난단 말인가?


환자가 조력자살을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투쟁-도피’ 중 ‘도피’를 선택해 스스로 죽음을 통제함으로써 공포를 완화하려는 욕구가 크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어떤 부분이 가장 걱정되느냐고 물었을 때, 환자의 90퍼센트가 자율성을 잃고 삶을 즐겁게 만들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점이 가장 우려된다고 답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제할 수 없음을 가장 걱정했다.


또, 환자의 4분의 3 정도가 존엄성을 잃을까 봐 두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리건주에서 ‘존엄성’이 무엇인지 따로 정의하지 않았으니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자. 존엄성은 “인간이 지니는 가치와 명예”를 뜻한다. 그럼 아픈 사람은 왜 죽음이 가치와 명예를 앗아간다고 생각할까? 이 질문은 현대인이 죽음의 기술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잘 보여준다. 아르스 모리엔디에 따르면 생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여정에 동행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희망과 축복의 말을 건넴으로써 존엄성을 고양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존엄성을 손상하기는커녕 오히려 고취한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통제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죽음을 통제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단순히 순간의 공포를 떨쳐내려는 시도는 아닐까? 가망 없는 치료나 이른 죽음을 선택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는 어떻게 두려움을 감당할까?


삶 속에서 찾는 죽음

최초의 아르스 모리엔디는 죽어가는 사람이 마주하는 다섯 가지 유혹을 떨쳐내는 방법을 안내했다. 믿음으로 불신을, 희망으로 절망을, 인내로 조급함을, 겸손으로 오만을, 속세를 초월한 태도로 탐욕을 잠재우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15세기에 이를 소책자로 펼쳐낸 글쓴이는 죽음의 공포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15세기 유럽인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졌으니, 죽음을 향한 공포는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중세를 살던 유럽인에게 죽음은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의학의 놀라운 발전 덕분에 죽음으로부터 한층 더 멀어진 현대인과 달리 과거 유럽인에게 죽음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건이었으니 기왕이면 잘 죽을 수 있게 노력해야 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어떤 공포를 느끼는지, 또 공포를 마주한 사람이 어떻게 두려움의 원인을 통제하려 하는지 확인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완화하려고 죽음과 맞서 싸우거나 일부러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달아난다. 하지만 결국 눈앞에 닥친 문제를 회피하기는 마찬가지다. 또한 의사조력자살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의 존재를 소멸시켜 공포를 없앨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했던 ‘애도의 5단계’에 따라 일단 죽음을 사용하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모두가 퀴블러 로스의 주장대로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치지는 않는다. 각 단계를 차례대로 밟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둘째,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단계를 따른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죽음이 주는 불안을 피해갈 수 있는 지름길은 없다.


지금까지 책을 읽은 독자는 공포를 없애주는 마법의 약이나 주문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수전 손택의 일화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죽음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던 손택은 결국 실존적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반면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페스트의 중심지로 당당히 걸어가 병든 사람을 돌보고 쥐를 퇴치하고 위생을 개선했다. 명예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할 뿐이었다. 이들은 언제 병에 걸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힘을 합쳐 가치 있는 일을 했다. 손택이 남긴 글을 인용하자면, “카뮈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 즉 도덕적 아름다움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와이먼은 두려움과 공포의 수용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마치 주어진 과제를 해치우듯 감정을 삼키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와이먼은 죽어가는 이들이 수전 손택이 이야기한 도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길 응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두려움과 슬픔을 똑바로 마주하며 자신이 남길 빈자리를 향해 용감하게 걸어가라고 등을 떠민다.


죽음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이 순탄할까? 아니다. 계속 의문이 남을까? 그렇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슬프고, 혼란스럽고, 화가 날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천 와이먼은 삶에서 멀어지는 대신 삶 속에서 죽음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우리는 와이먼의 조언이 지니는 의미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만든다

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비소세포폐암은 예후가 나쁘다. 그리고 메사추세츠 병원 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이 암을 진단받은 환자를 두 그룹으로 분류했다. 한 그룹은 비소세포폐암 표준 치료를 받았고, 다른 그룹은 표준 치료와 조기완화 치료를 병행했다. 조기완화 치료 전문 의사와 간호사는 주기적으로 두 번째 그룹에 속한 환자를 만나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확인하고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고, 치료를 조정하고, 환자가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는지 대화를 나누는 등 다방면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조기완화 치료 팀은 치료 전반에 걸쳐 환자를 보조했다. 반면 특별한 요청이 없는 이상 표준 치료 그룹에 속한 환자에게는 조기완화 치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연구 결과는 의학계를 충격을 빠뜨렸다. 표준 치료와 조기완화 치료의 통합은 놀라운 효과를 보였다. 조기완화 치료 그룹에 속한 환자가 진단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걸린 기간은 표준 치료 그룹에 속한 환자보다 두 달가량 길었으며, 연장된 기간 동안 환자가 느끼는 기분과 삶의 질 또한 개선됐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겨우 두 달일 뿐이지만 진단 후 생존기간이 1년 이내인 질병에 걸린 환자에게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같은 병에 걸렸지만 병원 밖에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메사추세츠 병원 연구는 예후가 좋지 않고 죽어가는 상황이더라도 공격적인 치료를 줄이고 죽음을 준비한다면 더 오래,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심폐소생술을 결정하기 전 다시 한번 생각하기

심장이 멈춰도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면 어렵지 않게 심박을 되찾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텔레비전과 영화가 이런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디어 속 심폐소생술의 성공 확률은 무려 70퍼센트에 육박한다. 하지만 사실 심폐소생술 성공 확률은 보통 10퍼센트에서 많아야 20퍼센트에 불과하다. 심폐소생술을 받은 환자 중 살아서 퇴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심폐소생술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환자에게는 이 방법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무릎 인공관절 교체 수술과 마찬가지로 심폐소생술 또한 올바른 대상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환자가 ‘올바른 대상’에 해당하는지 판단하려면 나이, 폐 기능, 쇠약함의 정도, 심장절개수술 경험 유무를 비롯한 다양한 요소를 확인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심폐소생술이 주는 이익보다 부담이 더 클 수 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면 삶의 질을 대가로 내놓아야 한다. 심폐소생술로 목숨을 되찾았지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이야기하는 환자도 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중요한 것들

우리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를 찾아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삶의 목적을 지닌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알츠하이머에 걸리거나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얻을 확률이 낮은데다가 더 오래, 행복한 삶을 산다.


사람마다 가치를 두는 부분이 다르니 정확히 어떤 요소가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첫째, 궁극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내는 데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가볍게 흘려보내는 생각이 아니라 깊고 진지한 생각이 필요하다.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는 주기적으로 삶의 목적을 논의하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심사숙고 끝에 공동체가 추구하는 신념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은 같다.


둘째,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는 데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가족이라고 해보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인생에 의미를 더하고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사회생활보다 손주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손주와 멀리 떨어져 살아 일 년에 두어 번밖에 못 만나다면 어떻겠는가? 정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삶의 목적이라면 여러분은 일을 그만두고 손주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죽어가면서도 삶이 빛났던 사람들

이 책에는 죽어가면서도 좋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들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잘 죽기 위해, 또 잊힌 죽음의 기술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우리가 평생에 걸쳐 길러야 하는 덕목은 무엇일까?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죽음이라는 적에 맞서 싸우도록 용기의 미덕을 키우라고 권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죽음의 공포를 정복하려고 노력해서는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두려움과 슬픔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괴롭지만 고귀한 임무이다.


서양에서 강조하는 미덕인 ‘자기 결정 능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 능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개척자와 탐험가는 혼자만의 힘으로 척박한 땅을 일궈 길을 만들었다. 얼핏 생각하기에 홀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모험가는 잘 죽는 것을 포함해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혼자서는 누구도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만큼 죽음은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할 사건이다.


이는 다른 미덕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하다. 죽음이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절망은 평생에 걸쳐 연습한 희망으로 이겨낼 수 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오만한 사람은 겸손을 연습함으로써 타인을 포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물질에 집착하는 사람은 관용을 실천해 탐욕을 눌러야 한다. 세상을 살며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해도 언젠가 우리가 속한 세상은 작아질 것이고 마지막에는 빈손으로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 나눔을 연습하자.


결국 인내, 희망, 겸손, 믿음, 초월의 덕목은 풍성한 삶과 죽음을 가져올 것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주제를 하나하나 돌이켜보면 세상을 초월하는 습관은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태도와, 겸손의 습관은 공동체 구성원을 수용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유한함을 깨닫고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죽음의 기술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희망과 믿음은 죽음을 향한 두려움을 완화하고, 가장 심오한 실존적 불안에 답을 제시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인내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죽음을 약속한다. 그러니 우리는 당장 오늘부터 위에서 이야기한 5가지 미덕을 함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성품들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매일 삶에서 연습하며 함양해나가야 한다. 잘 살아낸 오늘이 모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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