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8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기시미 이치로의 삶과 죽음

저자 기시미 이치로(역:고정아)
출판 에쎄이출판
출간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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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의 삶과 죽음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도움이 될까?

저는 얼마간 방황하다 스물다섯이 돼서야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해 어머니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지요. 어머니가 병으로 쓰러지셨을 때, 아버지는 일을 하셔야 했고, 여동생은 결혼해서 출가한 상태라 학생이었던 제가 병간호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모 대학 교수님의 자택에서 열리던 플라톤 독서회에 매주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간병해야 해서 한동안 독서회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그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게 바로 철학이라네.”


그 말씀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철학을 두고 ‘도움이 된다’는 얘길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해봤으니까요.


교수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머니는 마침내 의식을 잃고 병원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는 상태가 되셨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철학을 배우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저 절망하기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철학을 배우고 있었던 덕분에 차분하게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지요. 몸도 못 움직이고 의식까지 잃게 되면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을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병상에 계신 어머니 곁에서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철학의 정의

일반적으로 중고등 학생은 물론 그 부모님까지도 입시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가고 일류 기업에 취직하는 게 소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요.


저는 오랫동안 심리 상담을 해왔습니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분들 중 대부분이 우리 사회가 당연시하는 ‘인생 코스’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찾아오시는 분들과 함께 성공을 해야만 행복한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라고 일단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는 기성의 가치관이나 상식에 의문을 품어야 함은 물론이고,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며, 정치가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를 항상 의심해 봐야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랬습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의 열정적인 벗이자 제자였던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없다.”라는 신탁을 받아 돌아왔지요. 신탁의 내용을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의문을 품습니다. 자신에게는 ‘크든 작든 간에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소크라테스는 언젠가 신탁의 내용에 반박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라도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자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지자(知者)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문답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 결과 정치가, 작가, 장인 등 현명하다고 말해지는 사람,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소크라테스는 그제야 비로소 신탁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데,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의 무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이 자신을 가리켜 지혜롭다고 했음을요. 이 문답의 과정을 통해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고 비방했습니다. 반대로 신탁의 의미를 풀기 위한 문답의 과정을 지켜본 젊은이들은 이윽고 소크라테스를 따르며 그의 문답법을 흉내 내기 시작했지요. 얼마 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집니다.


철학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

그렇다면 이제 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겠습니다. 철학은 사실 구체적인 학문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있는데 그중 한 마리를 총으로 쏴 떨어뜨리면 전깃줄에는 과연 몇 마리의 참새가 남아 있을까요?


산수나 수학에서라면 답은 네 마리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네 마리가 아니죠. 총소리에 놀란 참새들이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날아가 버릴 테니까요. 그러므로 현실에서는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이 정답입니다. 참새가 총소리에 놀라 날아가 버린다는 조건도 더해서 생각해 나가는 것이 철학입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죠.


구체적인 학문이라는 측면에서 철학은 상상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상상력을 이용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반대로 상상력이 부족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전쟁 시에는 눈앞에 나타난 적을 먼저 쏘지 않으면 순식간에 자신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지키려면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0% 정도의 병사가 방아쇠 당기기를 주저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총을 쏴서 죽이게 될 상대방에게도 가족이 있겠거니 상상하며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는군요. 그래서 후의 전쟁에서는 게임 훈련을 도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거나 미사일 발포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상상력 차단 훈련을 한 셈이지요.



행복해지는 법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플라톤은 선을 제대로 안다면 아무도 불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의 『크리톤』이라는 대화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지요.


‘잘(올바로)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방식을 취한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본인에게 ‘선’일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죠. 플라톤은 이 ‘선’을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악'은 반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는 ‘해를 입다’라는 표현으로 바꿔 말합니다. 나아가 ‘불행해진다’라는 말로 치환하지요. 어느 누구도 해를 입는 걸 바라지 않을 테고, 곤경에 처하는 걸 원치 않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그 누구도 스스로 불행해지기를 원치 않는다.”라는 것은 뒤집어 말해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다시 말해 ‘행복하게 산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사는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므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지, 또 행복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행복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행복인지는 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생각해도 무엇이 행복인지 자명하지 않습니다. 불행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플라톤은 그런 전제하에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 역시도 불행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을 잘못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잘 올바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만, '잘 살기 위해서’ 또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존재 그 자체

먼저 행복은 성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키는 자신의 저서 『인생론 노트』를 통해 행복과 성공을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행복은 궁극적인 것이고 성공은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행복과 성공의 차이에 관한 미키의 주장을 읽어 보면 행복이 어떤 것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키는 “행복은 존재, 성공은 과정”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생각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모두가 성공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면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습니다. ‘성공은 과정’이라는 말의 의미는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의 인생은 거짓 인생이며 준비 기간일 뿐이고, 미래에는 가짜가 아닌 진짜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는 말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한편, ‘행복은 존재’라는 말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지 않아도 ‘지금 여기’에 이미 ‘행복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행복에 ‘진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행복해지는 일은 없는 것이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 미래가 되어도 우리는 계속 행복한 것이지, 행복이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일은 없으며,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게 되는 일도 없음을 미키는 ‘행복은 존재’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행복은 독자적인

남들 눈에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실제로 행복한 게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미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합니다.


“행복은 독자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의 행복이 타인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행복은 성공처럼 ‘일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식에게 자신의 일을 물려받게 하고 싶은데 자식이 그걸 거부하면 부모나 주변 사람은 이해를 못 하겠다며 실망하죠. 게다가 다른 걸 해봤자 성공하지 못할 게 빤하다 싶으면 자식이 마음을 고쳐먹도록 강요합니다.


그에 반해서 성공은 일반적인 개념으로서 성공을 지향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미키는 출세 지향적인 사람은 다루기 쉽다고 말합니다. 출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넌지시 승진 얘기를 꺼내 두면 그는 상사나 조직의 꼭두각시가 되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게 되지요.


그런 가운데도 양식 있는 젊은이는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하고 멈춰 섭니다. 일전에 어느 청년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입사 후 얼마 안 되어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더군요. 세상이 말하는 일류 기업이라는 곳에 취직한 청년을 성공했다고 여긴 사람도 많았을 텐데요. 그만둔 이유를 물었더니 바로 대답을 하더군요. 첫째는 회사에서 무조건 나가서 고객을 찾아오라며 신규 개척영업을 시켰는데 계약을 충분히 따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청년은 우수한 사람이었으므로 그전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도 좌절감을 맛본 적이 없었을 겁니다. 그때 처음으로 좌절을 경험했던 거죠. 하지만 퇴직을 결심한 진짜 이유는 선배나 상사를 봐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였다고 합니다.


청년이 퇴직을 결심하기까지 쉽지는 않았겠죠. 어쩌면 이대로 이 회사에 다니다가는 “서른 즈음에 집을 사고, 마흔 즈음에 무덤에 들어간다.”라는 요즘 말이 자신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지도요. 저는 청년에게 잠시 멈춰 서서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인지를 생각해보기를 권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나이 듦과 질병을 통해 배우는 것

나이 듦이라는 현실

나이 듦을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은 인생 후반의 일입니다. 젊을 때, 나이 듦이라는 현실을 접하는 방법은 가족이 차츰 나이 들어가 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가능하죠. 제 경우는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그대로 자리보전하게 되면서 나이 듦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늙어 가는 모습에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언제부터인지 당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아프다는 얘기를 전화로 절절히 호소하시더군요. 목소리에 힘이 없고 활기가 없으셨지요. 그런데 제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자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겠다 싶으셨는지 갑자기 열 살이나 스무 살쯤 젊어지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건강해지셨습니다. 부모는 내 자식이 이제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으면 급격하게 늙어 갑니다. 반대로 아직 우리 아이에게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 건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치의 저하

나이를 먹거나 병에 걸리는 것이 신체적인 또는 정신적인 기능의 열화나 퇴화일 뿐이라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늙은 나이와 병 때문에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태도이지요. 아들러는 신체가 약해지거나 나이와 더불어 건망증이 심해지고 나아가 그로 인해 생활에 지장이 생기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어 ‘열등감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열등감과 대조를 이루어 쓰이는 말이 ‘우월성 추구’입니다. 우수해지고자 노력하는 것이죠. 아들러는 열등감과 한 쌍으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건전한 우월성 추구와 그렇지 않은 우월성 추구가 있습니다. 전자는 인간이 무력한 상태에서 그렇지 않은 상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지속적인 도움이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우월성 추구는 건전하다고 해도 되겠지요.


문제는 위와 같은 설명에 이어 아들러가 “인간 생활의 전체는 이러한 활동의 선에 따라, 즉 아래서 위로,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패배에서 승리로 나아간다.”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또, “인생은 진화하는 것이다.”라고도 말했죠.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가 일어서서 걷는 노력을 하는 모습은 ‘아래서 위로,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라는 이미지와 일치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패배에서 승리로 나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이가 일어서지 못하는 상태는 패배일까요? 일어서면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 될까요? 저는 이런 시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해지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건강해지려는 바람이 나쁜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건강을 지향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추구해도 좋습니다. 다만, 무엇을 위함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구는 보다 좋은 상태인 편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바람직하겠죠.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건강하기를 바라는 이유를 제대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건강해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무슨 목적으로 건강해지려고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해지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평소 약을 복용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 저도 심근경색을 앓고 나서부터 매일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병이 재발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약을 복용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약을 먹고 건강해지려고 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해지려는 노력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셈이지요.


목적은 행복하게 사는 것

건강을 목표로 삼아서 안 될 이유는 없습니다만, 건강이 무얼 위한 것이냐 하는 목표를 잃어버리면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건강해지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은 행복하기 위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 꼭 건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죠. 다시 말해 건강이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목적이라고 하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인생은 진화하는 것’이라거나 ‘목표를 향한 움직임’과 같은 표현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아들러 역시도 목표는 먼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자, 여러분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미키 기요시는 행복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뭔가를 달성하지 못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이 곧 목적이죠. 행복은 먼 미래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살다

자흐리히하게 산다

물론 아들러가 이 말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아들러는 ‘언자흐리히(unsachich)’라는 말을 사용해 현실과의 접점이 없는 삶의 방식을 문제로 삼았지요. ‘unsachlich’는 ‘사실’ 또는 ‘현실’을 뜻하는 ‘자헤(Sache)’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 ‘자흐리히 (sachlich)’에 부정 접두사 ‘un’을 붙여 ‘사실이나 현실에 근거를 두지 않다’, ‘현실과의 접점을 잃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부정 접두사 ‘un’을 떼어낸 ‘sachlich’는 ‘사실이나 현실에 근거를 둔’이라는 의미가 되지요. 저는 이것을 ‘사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자흐리히하게 산다’라는 말은 현실과의 접점이 있는 삶의 방식 또는 더욱 쉽게 설명하자면 ‘실제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첫 번째 수업에서 철학은 생활인으로서 실제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며, 또한 철학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철학을 배운 사람의 삶의 방식도 현실에 근거를 둔 실제적인 방식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남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는 태도

하나는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종종 오해가 빚어지는데 타인을 전혀 신경 쓰지 않거나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기회가 닿아 대화를 나눠 봤던 젊은이들은 모두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언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의식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가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을 씁니다. 그것을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그러나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못 하게 되어 결국에는 바라지 않던 일을 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우선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친절한 사람이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구나가 좋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을 주변에 맞추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삶을 살게 되므로 인생의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남의 안색을 살피며 의견을 바꾸므로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신뢰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자신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다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자신의 가치나 본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남에게 좋은 소릴 들었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많은데, 누군가로부터 무슨 말을 듣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맞추며 사는 사람의 삶은 자흐리히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흐리히하게 산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도구와 달리, ‘나’라고 하는 도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른 ‘나’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나’와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젊기만 할 줄 알았겠지만,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젊은 사람이라도 갑자기 아파서 쓰러질 수 있고요. 그럴 때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나'’이며, 자신의 몸 상태가 달라졌다고 해도 ‘나’라는 존재는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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