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2월 2주차
 인문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저자 투에고
출판 한국경제신문
출간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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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격려가 필요할 때

겸손

‘허세’는 적이 공격할 허점을 만들 뿐이고 ‘겸손’은 방패가 되어 나를 보호해준다.


화려했던 지난날을 자랑거리 삼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대화는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밌을지 모르지만 잠자코 들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자신감이나 기쁨을 표현하는 것도 자기애의 일부지만, 너무 자주 과장되게 표현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반발심을 살 수도 있다. 훗날 그 말들이 독이 되어 화자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독일에는 ‘타인의 불행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는 속담이 있다. 속담이 가리키는 심리를 손해(Schaden)와 고통(Freude)의 합성어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다른 사람이 불행할 때 뇌에서 느끼는 불편한 기쁨)’라고 한다. 온라인 공간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는 유명인을 향한 시기와 질투의 배경에도 이 단어로 표현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당사자 앞에서는 위로해주는 척하면서도 돌아서면 ‘그럴 줄 알았다’며 숙덕거리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하던가. 타인의 이율배반적인 감정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그건 바로 ‘겸손’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천재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지식을 발견되지 않은 진실의 대양 앞 해변에서 놀고 있는 소년에 비유했고,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또 다른 천재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똑똑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더 오래 고민했을 뿐이라 말했다. 그들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이루고도 단지 좀 더 오래 생각하고 좀 더 빨리 발견했을 뿐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공감

공감(empathy)은 독일어 아인필룽에서 유래된 말로 ’감정을 이입한다‘는 뜻의 단어다. 인간의 감정을 여러 색깔로 나눈다면 색의 채도는 감정의 세기라고 할 수 있겠다. 서로의 채도가 가장 비슷해지는 순간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내 마음과 연결된다. 이는 연민이나 동정 그리고 단편적으로 어림짐작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공감이야말로 ’이해‘라는 영역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행위다.


가끔 가까이 있는 사람보다 내 감정과 코드가 맞는 영화 한 편이나 책 한 권, 익숙한 멜로디 한 마디에 더 깊이 이입되어 빠져들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는 예술가의 작품에, 이미 유명을 달리한 몇 백 년 전 철학자의 말에 공감과 위로를 느낄 때면 기분이 묘하다. 어떻게 주변 사람들도 잘 모르는 내 심정을 본 적도 없는 외국 작가나 몇 백 년 전 사람이 이토록 잘 안다는 말인가?


어쩌면 공감이라는 것은 꼭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다수의 보편적인 감정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공감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단절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에서 맺을 수 있는 인맥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한다. 이른바 마당발이라 불릴 정도로 관계의 폭이 넓은 사람도 인맥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관계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단절의 기술이 필요하다.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과도 각자의 사정이나 시간 때문에 멀어지고 마는데, 굳이 진심이 담기지 않은 관계를 억지로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본래의 취지를 벗어나 자랑과 험담을 일삼는 모임, 나를 낮잡아 보거나 무시하는 사람, 끊이지 않는 다툼으로 좀처럼 타협점을 찾기 힘든 사이 등 나를 지치게 하는 관계와는 서서히 거리를 두고 멀어질 필요가 있다. 관계의 숲엔 150그루의 나무밖에 심지 못하는데, 심긴 나무들이 모두 상해 있다면 차라리 몇 그루 없더라도 튼튼한 나무만 골라 심는 것이 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자라지 못하는 관계는 자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 시간과 감정을 지키기 위함이다.



매일의 다짐이 필요할 때

몰입

몰입이란 모든 잡념, 방해물을 차단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몰입 이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미술가, 음악가, 스포츠 선수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표본을 연구하며 이들이 작업할 때 몰입 여부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명받았다. 같은 시간을 들여도 몰입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인상파의 창시자인 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화폭에 담고자 여러 악조건에서도 야외 작업을 고집했고, 연작할 때는 10개가 넘는 캔버스에 순서 없이 그렸다. 모네는 이렇게 작업할 때 가장 몰입이 잘된다며 이런 작업 방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마다 자신만의 몰입 방법이 있다. 나는 주로 잔잔한 음악을 듣는다. 찬찬히 일렁이는 생각의 파도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새 글감이라는 섬에 도착한다. 이는 현실 속 ’나‘를 잠시 잊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생각의 섬에는 나를 괴롭히는 현실적인 방해물들이 없으며 시간이라는 개념마저 망각하게 한다. 때로는 녹록치 않은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될 수 있으며 몰입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언가 잊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각자 몰입의 섬으로 떠나보면 어떨까.



바람만 불어도 흔들릴 때

뿌리

만일 사람이 한 그루의 나무라면 거목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거나 다른 이의 표본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일 것이다. 튼튼하고 굵은 줄기, 하늘을 향해 끝없이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지, 생기가 넘쳐흐르는 푸른 잎까지 누가 봐도 가히 아름답다 할 만하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거목의 위대함을 고개를 들어 우러러본다. 누군가는 부러움과 존경이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도 저런 나무가 되고 싶다며 롤 모델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으로는 그 성공의 진면목을 전부 알 수는 없다. 나무 밑동 아래 감춰져 있는 것은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두운 땅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이긴 만큼 뿌리를 내려야 양분을 받아 성장할 수 있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나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다.

수많은 실패를 겪어도 나를 지탱해줄 정신력만 있다면 언제든 다시 줄기와 잎을 틔울 수 있다.



삶의 가치를 생각할 때

선의

체코 태생 독일 사업가였던 오스카 쉰들러는 1939년 나치 당원이 된 후 사업을 위해 폴란드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식기 공장을 세우고 무임금으로 유대인 노동자들을 부렸다. 공장은 갈수록 커졌고 부유해졌지만 독일인들의 만행과 끔찍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쉰들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민에 빠졌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연합군에게 패색이 짙어지자 수많은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바로 나치에 의해 유대인 400만 명이 학살된 바로 그곳이다. 그때 쉰들러는 자신의 양심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약 1,1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명부에 적어 전 재산을 들여 보호하기로 한 것이다. 과거 행적을 떠나 이 많은 생명을 구한 그의 행동은 분명 선의였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그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즈음 그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쉰들러의 무덤에 조심스레 돌을 얹어주는 장면이 깊은 울림을 줬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관점은 가치관이나 종교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다만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의가 온갖 악의에 대항해왔기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은 알겠다. 때로 눈앞에 마주한 현실이 한없이 차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꽁꽁 언 한겨울의 얼음도 봄의 햇살 아래에서는 녹기 마련이다.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을 녹여줄 온기가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온기가 되어주고자 한다면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아픔을 이겨내고 싶을 때

안녕하다

우리말에 ‘안녕’이 있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한 상태를 뜻하는 단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서 이 단어를 일상의 언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안녕하라는 인사말에는 그 말을 듣는 이들이 편안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도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나 육체적인 쇠약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안녕이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이 말은 내가 평상시 버릇처럼 하는 말 중 하나다. 육신이 아프면 판단력이 떨어지고, 정신적으로 힘들면 기력을 잃게 되고, 사회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개인의 안위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난과 스트레스의 연속인 우리의 일상에 완벽히 안녕한 삶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서 안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가 나로서의 신념과 판단력을 갖고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림 없이 삶의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상태를 뜻할 것이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라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때로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시련이 올 때도 있고, 반대로 내 마음으로부터 시련이 시작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상대의 안녕을 바랄 때는 바깥에서 그의 마음을 흔드는 일이 없기를, 또 그의 내면이 스스로의 상념 탓에 고통받지 않기를 모두 염원하는 것일 테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안녕하길.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때

자아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이 본디 지니고 태어나는 충동인 원초아(id), 사회나 도덕적 학습으로 습득해 내면화된 초자아(superego) 그리고 ‘원초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자아(ego)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설명을 읽는 순간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원초아’보다는 ‘초아자’와 ‘자아’가 우리를 좀 더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때 투에고(twoego, 두 개의 자아)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어쩌면 글을 쓰는 과정은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꺼내는 시간이나 다름없다. 일상을 살아가는 표면적인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물론 자아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관점은 저마다 다르다. 최근 읽은 프랑스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의 저서 《자아의 초월성》에서는 많은 철학자들이 자아를 의식의 거주자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자아가 의식의 바깥에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솔직히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말이었지만, 줄곧 자아는 나의 내면에 있다고 믿어왔던 터라 새롭게 다가왔다.


자아는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내면에 있을 수도, 경험과 인식의 범위를 벗어난 초월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자아도 마찬가지다. 정신의 구조를 지도로 만드는 것 자체가 허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몸이 무수한 세포로 구성되어 있듯이, 정신도 무수한 자아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고 해도 의식의 주체인 내가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느냐에 따라 표면적인 내가 되는 것이다.


적당한 거리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딜레마’는 고슴도치들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침에 찔리게 되고,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면 다시 추워지는 딜레마에 빠지는 데서 유래한 용어다. 가까이 다가가자니 다칠 것 같아 두렵고, 멀어지자니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비유한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적당히 친밀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심지어 겉으로 보이는 고슴도치의 가시와 달리 우리 마음속 가시의 길이는 제각기 다르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다가가봐도 뾰족한 가시에 찔려 상처 입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때 느낀 아픔의 크기만큼 타인에 대한 방어기제도 커지게 된다.


도대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정 거리는 얼마일까? 그것을 정확히 수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관계에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길가의 나무들만 봐도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도록 가지치기를 해줌으로써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가끔 우리는 너무 바짝 붙어 작은 감정까지 모두 나누려 하기 때문에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시작할 때

초연함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는 말이 있다. 심기제가 지은 침중기《枕中記》에 나온 말이다. 당나라 현종 때 여옹이라는 도사가 한단이라는 곳의 어느 주막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노생이라는 젊은 사람이 들어와 신세 한탄을 하다가 여옹의 베개를 베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온갖 부귀영화와 영욕을 누리고 80세의 나이로 죽음까지 맞이하고는 깨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간이 현실에서는 고작 메조로 밥을 짓는 동안이었다는 것이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생에게 여옹은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인간의 세속적인 욕망이 덧없음을 알려주는 노생의 일화는 욕망 앞에서 초연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매스컴은 온갖 감언이설과 화려한 이미지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성공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욕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말년에 의외로 ‘욕망을 덜어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왜 추구하는지를 모른다면, 욕망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욕망을 더하는 것보다 덜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덜어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더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루를 되돌아볼 때

행복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비관론자에 가까웠던 쇼펜하우어가 행복을 주제로 책을 쓴 것을 보면, 행복에 관한 질문은 어쩌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가능한 고통스럽지 않게 근근이 버티면서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행복의 정도를 측정할 때 기쁨보다는 괴로움이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쇼펜하우어는 괴로움이 적을수록 행복의 크기가 커진다고 본 듯하다.


쇼펜하우어는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잃었다. 우발적인 사고일 수도 있었던 그 죽음을 두고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숙덕거렸다. 그의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우울한 성향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종종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머니와는 의절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않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망상이 커져 나중에는 기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일평생을 그늘 속에서 보냈던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이기에 그의 말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더욱 인상 깊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일명 ‘행복 강박’이다. 나 또한 우울한 와중에도 행복이 인생의 목표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 더 힘든 사람도 있는데... 나 정도면 괜찮은 거야, 가진 것에 감사해야지. 동시에 결국에는 행복해지지 못한, 행복하지 못할, 내 나약함과 타고난 성향을 비난하며 점점 더 깊은 우울의 늪으로 빠지기도 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순이었다. 도리어 행복에서 벗어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고, 과거의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무뎌지고 줄어들었다. 지금은 지난날과 비교했을 때 조금은 행복해졌다고 느낀다.


어떻게 보면 행복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저마다의 기준이나 가치 그리고 놓인 환경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형태가 다른 일종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거대한 환상의 집을 매일 드나들며 행복감을 느끼지만, 어떤 이의 행복은 마치 신기루처럼 멀리서는 선연히 떠올랐다가도 다가서면 금세 사라져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그 환상을 자신에게 어떻게 대입해 추구할지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이다. 어떤 모습이든 될 수 있는 행복에 공통된 진리가 있다면 이것 하나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


혼자

인생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긴 터널을 걷다 보면 그 안에서 수많은 인연들이 어슴푸레한 빛을 남기며 스쳐 지나간다. 잠시나마 빛을 비춰줄 수는 있어도 밖을 향해 걸어 나가는 것을 결국 자신의 의지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혼자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을 의미하는 ‘혼자’라는 단어는 고적하고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영향도 받지 않고 홀로 있기에 온전한 나를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혼자인 시간을 통해 걱정이나 근심 같은 케케묵은 감정들을 정리하거나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찾고 삶의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실제로 인간의 삶에서 의미 있는 수많은 발견은 혼자인 시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때로 고독하고 쓸쓸한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로 삼아보자. 어쩌면 나에게 할 말이 가장 많은 사람이 나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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