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승화

저자 배철현
출판 21세기북스
출간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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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


엄격, 품위 있는 나를 만드는 법

걸음, 속일 수 없는 내면의 품위

나는 매일 3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그리고 1시간 30분 정도 걷는다. 앉기와 걷기는 상호보완적 신체 동작이다. 걷기 위해 앉고, 앉기 위해 걷는다. 가야 할 곳만 가기 위해 다리를 묶고, 나의 걷기가 올바른지 관찰하기 위해 좌정한다.


미국의 자연주의자이자 철학자이며 「월든」과 「시민 불복종」을 쓴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일생을 '전문적'으로 걸었던 사람이다. 동시대 미국 사상가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소로의 걷기를 이렇게 평가했다.


소로는 걸은 만큼 글을 썼다. 집 안에만 있었다면 글을 전혀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에머슨의 이런 평가에 온전히 동의한다. 걷기는 나에게도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소로가 1862년 결핵으로 사망하자 미국 월간지 《애틀랜틱》은 그를 추념하며 그해 6월호에 소로의 미발표작 「걷기(Walking)」를 실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만의 대표적 상징이 '걷기'였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소로는 자신의 삶에서 걷기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걷는 행위'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영어 단어가 'saunter'다. 번역하자면 '산책'이다. 'saunter'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소로는 이 단어의 어원을 'la sainte Terrer', 즉 '거룩한 땅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순례자' 혹은 프랑스어 표현 sans terre', 즉 '집 없이 (떠도는 사람)'에서 찾았다.


인생의 중요한 의미를 배우는 데는 걷기만한 게 없다. 하지만 혼자 터득해야 한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 제각기 아무렇게나 걷는다.


나의 아침 산책은 자연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내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수정하는 훈련이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제대로 걷는 연습을 했지만, 아직도 몸에 배지 않아 의식하지 않으면 여전히 왼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다. 운동화 뒤축을 보면 번번이 오른쪽 바닥이 더 닳아 있다.


육체와 정신은 동전의 앞뒤일 뿐만 아니라 영혼과도 하나다. 서양 철학과 그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들에게 육체는 정신과 영혼에 비해 열등한 개체다.


움직임은 그 개체의 정체성이다. 움직임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자세, 자태, 태도, 동작은 그것의 음성 기관을 통해 나오는 소리보다 원초적이며, 소리를 초월하는 언어를 구사한다. 마음과 신체의 연관성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다.


로웬은 신체를 단련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개성을 고양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몸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듯이, 몸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방법이 우리의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준다.

감정적으로 불안한 사람은 몸의 움직임이 충동적이거나 강압적이다.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몸은 굳어 있고, 에고의 노예가 되어 기계적으로 불안하게 움직인다. 자발에 근거한 즉흥적인 유연함을 찾을 수 없다.


건강하고 건전한 신체를 지닌 자는 언제나 품위가 있고 단아하다. 그런 사람은 자기 몸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기에 어디에서나 눈에 띄며 매력적이다. 그의 움직임은 즉흥적이나 단호하며 절제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마치 촛불처럼 쉼 없이 변화하지만 안정적이다.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 역시 건강한 신체가 건강한 정신의 모체라고 여겼다. 나는 지금 바로 앉아 있는가? 나는 오늘 바로 걷고 있는가?


도야, 나만의 임무

요즘 ‘인생이 하루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래서 그런지 전보다 일찍,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도 변함없이 창밖의 벚나무를 응시하며 방석 위에 좌정한다.


오늘 하루,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또 다른 나'와 마주한다. 부산한 일과 생각을 정지시키고 나만의 제단에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묵상이란 좌정과 몰입을 방해하기 위해 계속 짖어대는 사납고 무시무시한 한 마리 검은 개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기개다.


나의 순수한 열망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온전히 나에게 몰입하는 집중과 만나면, 새로운 경지가 등장한다. 그것이 묵상이다. 열망이란 자신의 육체와 세상의 쾌락보다 더 숭고한 빛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시키기 위해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몰입은 세속적인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다. 인간은 몰입을 통해 과학, 예술, 상업과 같은 분야에 필요한 기술을 획득할 수 있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통해 명성과 권력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자신의 소명에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묵상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성공을 위한 필연의 조건이다. 묵상의 목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데 있다. 자기를 넘어선 자신, 초월적인 자신이자 신적인 자신을 찾기 위해 필요한 예술이 묵상이다.


인간은 몰입을 통해 천재적인 예술가나 위대한 카이사르가 될 수 있지만, 초인(超人)은 될 수 없다. 인간의 상태로는 깨달을 수 없는 신적인 지혜와 붓다의 평정심을 묵상을 통해 얻을 수는 없다. 몰입의 연마가 권력이고, 묵상의 완성은 지혜다. 정심(正心), 정언(正言) 그리고 정행(正行)은 묵상의 결과다.


묵상을 수련하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연을 그냥 보지 않는다. 만물은 인과응보의 결과이며, 인과응보를 넘어선 것을 신의 섭리로 이해한다. 진리 안에 거주하는 사람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의 경중을 따져 한 번에 하나씩 고요하게 해결한다.


묵상은 집중보다 엄격한 자기절제를 요구한다. 집중의 성과는 가시적이지만, 묵상의 성과는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매일 정결하게 닦는 과정이 없다면 묵상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몸에 훈습으로 배인 열망과 절제는 하루라는 경기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묵상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는 자신을 스스로 제3자가 되어 가만히 지켜보는 행위다. 나의 생각들을 복기해보면, 그것들은 내가 습관적으로 해오던 생각들이다. 그러므로 나를 절제함으로써 다음 단계에 어울리는 행위를 생각해낸다. 그런 생각을 연습하고 자신의 몸에 익히는 것이 나의 개성이며 나의 운명이다.


일념, 고유한 임무를 찾는 마음 훈련

생각은 말과 행동을 일으키는 나의 중앙 제어 장치다. 내가 생각을 장악하고 정교하게 다듬는 훈련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나의 말과 행동도 허접해질 것이다. 정교하게 훈련한 말과 글이 생산되는 가시적인 주체인 몸을 함부로 다루면, 흩어진 몸이 다시 생각과 말에 영향을 주어 나를 어눌하게 만들 것이다.


요가는 이 세 가지 인간 활동을 최적화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훈련이다. 생각 훈련이란 자신에게 알맞은, 그래서 나의 최선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대상을 찾는 연습이다. 그래야 무아 상태로 진입해 나만이 완수할 수 있는 고유한 임무를 발견할 수 있다.


인도인들은 그 고유 임무를 '다르마(dharma)'라고 불렀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다르마는 한자 '法(법)'으로 번역됐다. '법'이란 강물의 흐름과 같이 당연하고 저돌적인 것으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유기하려는 삶의 규범이다. 만약 자신의 다르마를 발견하고 발휘할 수만 있다면 그의 삶은 행복할 것이다.


자신의 다르마를 찾기 위한 방안이 '일념'이다. 요가 수련에서는 일념을 산스크리트어로 '에카그라타(ekagrata)'라고 부른다. 에카그라타란 자신이 발견한 '하나(eka)'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agra)' 마음 훈련이다. 일념의 훈련을 통해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개조할 수 있다. 일념은 파도처럼 분산된 생각들을 제어해 잠잠하게 만든다.


인간은 깊은 곳을 두려워한다. 사실은 깊은 곳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두려워한다. 그 길을 막는 괴물은 바로 자신이다.


깊은 곳은 어느 누구도 가본 적이 없어서 나의 힘과 의지로 정복해야 하는 미궁의 한가운데다. 정신을 차리고 그 진입하는 여정을 분명히 기억하면, 나는 능히 그 안에 존재하는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살해할 수 있다. 이 괴물을 물리치는 무기가 바로 일념이다.


신중, 허상으로부터의 탈출

아침이면 수면 상태에 들어갔던 나의 의식이 다시 돌아온다. 밤은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창세기> 1장에는 '하루'라는 시간을 표현하는 문구가 등장 한다. 저자는 하루를 항상 “저녁이 된 후, 아침이 됐다. 첫째 날”이라고 기록했다. 하루의 마무리는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완성된다. 내가 아침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하루의 질이 결정된다.

요즘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적이 없다. 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만 그것에 잘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늘 아쉽다. 그 아쉬움을 방치하면 소홀과 게으름이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고 싶은 실의의 늪으로 데려간다.


영국 시인 새뮤얼 콜리지의 「실의에 대한 송가」라는 시가 있다. 그는 절친인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처제 새러 허친슨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그녀에게 무한한 안타까움을 느껴 실의에 빠진다. 콜리지는 그 마음을 「실의에 대한 송가」라는 시에 담아 발표했다. 다음은 요즘의 내 심정이 그대로 담긴 그의 시구다.


이 은은하고 고요한 저녁 내내

나는 서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특이한 황록색 하늘을

나는 아직 응시하고 있다. 아 내 눈이 얼마나 공허하던지!

저 높이 있는 조각난 막대 모양의 긴 구름들이

별들이 나타나자 움직이기를 포기하는구나!


내가 시골로 이사를 온 이유는 저녁노을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골은 감사하게도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매일 새롭게 알려준다. 산, 강 그리고 숲은 태곳적부터 이곳에 있었고, 나는 그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려 이곳으로 이주했다. 나는 자연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 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나를 다시 관찰하는 사람이 됐다.


자연은 이른 아침에 최선의 모습을 드러낸다. 아침은 하루라는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출발선이며 어제의 잠으로부터 나를 깨우는 시간이다. 저녁노을이 아닌 이른 아침은 보람된 하루를 결심하는 최적의 시간이다. 오늘 하루가 어제보다 거룩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오늘은 어제와 같이 기억에서 벗어나 흘러가버리기 일쑤다.


아침이 오면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 일어나고, 소수의 인간들은 지적이며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하루를 영적인 시를 쓰기 위해 사용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거룩한 예술은 하루를 감동적으로 조각하는 수고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순간의 하찮아 보이는 세부 항목까지 자신의 깊은 숙고를 통해 결정한다.


신중만이 내게 쌓여 있는 허영과 허상으로부터 나를 탈출시키고, 내가 원하는 자유의 여신을 조금씩 보여준다. 신중은 행복한 삶의 열쇠이며,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삶의 도전을 용감하게 응전하도록 독려한다. 삶은 영광스럽다. 그러기에 삶은 나의 전부를 요구한다. 나는 오늘 활기차게 나의 홰에 오를 것인가? 그때 나는 무엇을 외칠 것인가?



승화, 위대한 변화의 시작

각성, 무엇으로부터 깨어날 것인가

12월은 죽음을 생각하기에 좋은 달이다. 푸르던 나뭇잎도 자신이 왔던 땅으로 다시 돌아가고, 앙상하게 남은 가지는 죽음을 준비한다. 이런 죽음의 준비는 다시 봄의 새싹으로 이어질 것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역설적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각성하게 하고 감사하게 만드는 처방전이다.


인생을 마지막 날처럼 살리라 말은 하지만, 하루라는 시간을 스스로 장악하지 못하면 각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하루를 또 그럭저럭 보내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새로운 심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전선에 투입되는 군인의 마음과도 같다.


나는 오늘 하루 사소한 일, 남의 눈치와 체면 때문에 해야 하는 일, 나 스스로도 창피하게 여기는 쾌락을 쫓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라는 전선에 투입되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밤을 상기하며 하루를 산다면, 그것은 어떤 마음가짐일까?


스토아 철학자들은 니체의 운명관이 담긴 '아모르파티 (amorfati)'를 유행시킨 사상가들이다. 결코 실패한 적 없는 예언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심오한 생각을 씩씩하게 말하고 자신의 삶으로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자가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고민하고 제시하는 자라면, 그 각성은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죽음에 대한 숙고에서 온다. 키케로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심오한 공부와 그 공부에 대한 깊은 묵상은 이전까지 들어가본 적 없는 '미개척의 영역(terra incognita)', 즉 이전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내면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 완전한 진입은 쉽게 감각과 감정에 휩싸이는 육체로부터의 이탈에서 시작한다.


그와 같은 행위가 바로 죽음의 연습이다. 그것은 무술을 배우는 초보자가 과거의 습관을 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학은 인간의 존재를 없음으로 만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 있다는 마음가짐에 대한 훈련'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잊기 위해 쾌락을 즐긴다. 실제로는 죽음으로 부터 도망치는 비겁한 행위다.


오늘 하루는 '다모클레스의 칼'과 같다. 신은 인간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사고로 위장해 한순간에 가져갈 수 있다. 그런 위협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다. 그 죽음을 두려워해 도망치거나 아니면 죽음과 직면해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마주하는 가족에게 친절한 눈빛과 말을 건넬 것인가?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경주할 것인가? 나는 죽음을 각성해 오늘 이 순간을 살고 있는가?


변모, 존재의 의미

경칩은 겨울잠이라는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나는 날이다. 지구와 자연은 태양 주위를 돌며 자연스럽게 자신을 변모시키지만, 인간은 그런 시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제의 잠에 취해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현대인들이 변모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 수 없이 절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체념이라는 것은 확인된 절망입니다.

인간의 놀이나 오락 속에는

진부하지만 무의식적인 절망이 숨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진정한 놀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놀이는 노동과 분리되어

노동 다음에 오기 때문입니다.

지혜에는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일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150년이 지난 지금도 소로의 예언은 진리이며 유효하다. 절망이란 희망이 떨어져나간 상태다. 희망이란 자신이 원하는 꿈이 있어서 그것을 추구할 때 생기는 자신감이다. 봄이 왔지만 우리는 여전히 절망에 휩싸여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고약한 전염병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절망감은 여기에서 온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진부한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하는 좌절감이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한 게 없고 그저 그렇다. 새해 결심은 창조 신화가 되어 이미 사라졌고, 그저 그런 하루를 연명한다. 이 절망감을 오래 방치하면 우울의 늪이 되어 더 이상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기변모'를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체크 포인트가 있다. 지금까지 지나온 자신의 삶을 가만히 회고한 뒤 그런 삶에 대한 나의 감정 반응을 살피면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작년에 혹은 이번 겨울에 시도한 일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후회, 죄책감,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삶은 자신을 조금씩 허약하게 만들어 삶 전체를 마비시키는 고약한 전염병이 된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확인하고 강화한다는 희망이 없다면, 그런 일은 실패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 시도는 대부분 수고와 노력 없이 습관적으로 행하던 쉬운 일들이며, 쾌락과 안정이라는 편함을 추구하는 넓은 일이다. 거기에는 일시적 쾌락의 자극과 타인의 환호가 잠시 머물 뿐이다. 그런 넓은 일은 한 사람의 개성을 말살하는 병이다.


어떤 임무는 힘들지만 지나고 보면 보람차다. 그런 임무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목표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헌신하게 만든다. 그 일은 언제나 도전적이며 어렵다. 그 임무는 자신도 아직 확인한 적 없는 잠재력을 일깨우는 일이며,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하루 종일 몰입할 수 있는 매력이다.


자기실현은 자신의 생각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에게 도전적인 일을 지속하는 인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란 자신도 잘 모르는 외국 철학자의 난해한 이론을 소개하고 강연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심오한 생각을 삶을 통해 실험하고 그 성공과 실패를 주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철학자는 침묵을 실천하고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자기변모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른 아침 숭고한 생각을 자신의 심연에 뿌리고, 그날에 완수해야 할 혹은 완수를 시도해야 할 목표를 상정하려는 습관을 들이는 사람이다. 무엇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완수할 때 따라오는 포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추구가 선사할 자기변모다.

인간은 불지불식간에 죽는다. 길다고만 여겼던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는 삶은 죽음이다. 나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나의 정신을 가다듬어 최선을 경주하고 있는가?


광휘, 끝을 알 수 없는 빛

우리에게는 안내자이자 동반자가 있다. 아주 멀리서 찾아온 자비롭고 친절한 손님이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만물을 깨우고, 무의식 상태의 나를 일깨우는 태양이다. 태양은 어떤 수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분신인 빛을 보낸다. 태양은 인간이 자신을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 멀리서 나를 찾아온 햇빛이 강 물결 위에서 찬란하게 춤을 춘다. 빛줄기를 보지는 못하지만 물결에 반사된 여러 개의 태양을 본다. 수면에 비친 햇빛은 위로 치솟아 오르면서 옥빛의 다양한 기하학적 모형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햇빛이 햇빛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까? 사람들은 그 인식 능력을 라틴어로 '콸리아(qualia)'라고 명명했다. '콸리아'는 그 개체가 그것이 되게 만드는 특별한 가치, 즉 '질(質)‘을 의미한다. 사과를 한입 베어 먹었을 때 오감을 통해 '이것이 사과다'라고 느끼는 그 어떤 것이다.


나라는 인간을 나답게 만드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이며, 나라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것이며,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어떤 것이다. 콸리아는 어떤 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나 신념과는 달리 그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 실재를 '신'이라는 용어를 취해 두 가지 배타적이며 융합적인 형용사를 덧붙인다. 하나는 '내재하는 신(God immanent)'이며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신(God transcendent)'이다. 내재란 인간, 세상, 마음속과 같은 한정된 공간에서 유유자적하는 콸리아다.


'내재적인 신'은 역설적으로 동시에 '초월적인 신'이다. 그 신은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제일자’를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에서는 히브리어로 '아인 소프 오르(AIN SOPH OR)', 즉 '그 끝을 알 수 없는 빛' 혹은 '무한한 빛'으로 표현한다.


이 빛은 빅뱅 이론에서 말하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원초적인 한 점‘이다. 한없이 작은 이 점은 더 이상 응축되거나 수축될 수 없는 하나의 상태이자, 동시에 무한한 공간이다. 모세오경에 자주 등장하는 '바로 그 장소'라는 의미의 하마콤(hammaqom)'이기도 하다. 신은 내재에 숨겨져 있기도 하고, 동시에 만천하에 드러나 있기도 하다.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사물의 위치를 알려주고 내가 가야 할 목표 지점을 알려준다. 빛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광휘는 움츠려 있는 나를 일깨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다.


당신은 새로운 곳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가? 빛이 인도하는 당신만의 천국을 향해 두 발을 움직이고 있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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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근 외
출판 21세기북스
출간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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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사이토 다카시(역:장은주)
출판 한국경제신문
출간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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