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4월 3주차

BOOK SUMMARY
 인문 

군자론: 리더는 일하는 사람이다

저자 이현우
출판 쌤앤파커스
출간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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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론


군자의 ‘말끝’이 향하는 곳 - 언言과 논論

모든 말하기는 공적인 것이다

직언(直言)하지 말라

나라나 조직에서의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직언이다. 그런데 내가《논어》를 오랫동안 강의하면서 강조하는 말 중 하나가 ‘직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아마도 독자들은 방금 보았던 사례, 즉 염유에 대한 공자의 비판도 결국은 직언을 하라는 뜻이 아니냐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용상의 직언, 직간과 방식이나 행태로서의 직언, 직간은 다르다. 이 점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 말이 광직(狂直)해지고 자칫 자신의 몸만 망치게 된다.


여기서 공자는 윗사람에게 간언하는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법어(法語)로 해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손어(巽語)로 해주는 것이다. 즉, 하나는 모범[法]을 통해 곧바로 타이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에둘러서 공손하게[巽=恭遜] 타이르는 것이다. 모범을 통해 곧바로 타이르는 것은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에둘러서 공손하게 타이르는 것은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곧장 타이르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치는 것이 중요하고, 에둘러서 타이르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譯]이 중요하다.


여기서 뛰어난 방식은 법어보다 손어다. 그래야만 윗사람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법어가 반복되면 윗사람은 점점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잘 보여준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 직언, 직간으로 유명했던 급암(汲黯)에 대해《한서》<급암전(汲黯傳)>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급암은 사람됨이 천성적으로 거만하고 예를 소홀히 하여 면전에서 사람을 꺾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 뜻에 맞는 자는 잘 대해주고 맞지 않는 자는 그냥 두고 보지 않았기에 선비들 역시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협(游俠)을 좋아하고 기개와 절의를 중시했으며 행실을 잘 닦아 깨끗하게 처신했다. 그의 간언은 주군의 안색을 범할 정도였다.”


그릇된 직언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직언, 직간이 능사가 아닌 까닭이 있다. 요즘은 잘 안쓰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용어 중 하나가 ‘간(諫)하다’는 말이다. 간한다는 것은 임금이나 부모님 등 윗사람이 옳지 못한 생각을 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비판이 될 수도 있고 설득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모시고 있는 윗사람을 비판하거나 설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이 ‘되게 하는’ 사람 - 군자와 선비

선비처럼 일하지 말라

‘곧은 자’와 일을 도모하지 마라

우리 사회의 선비론이 가진 문제점을 몇 가지만 짚어보자.

첫째, 선비라는 말의 몰(沒) 역사성이다. 조선시대 때 아무리 순기능을 했다 해도 과연 지금 그 같은 선비상이 꼭 필요할까? 흔히 도덕성 회복을 꼽는다. 그러나 정말 선비가 있어야만 도덕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반대로 지금의 도덕성 저하가 정말로 선비가 없기 때문일까?


둘째, 선비라는 말에 뒤따르는 도덕주의의 그림자다. 그런데 도덕적인 사람과 도덕주의적인 사람은 전혀 다르다. 도덕적인 사람은 스스로 도덕적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덕적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다. 도덕주의적인 사람은 남에게 도덕을 강요하는 사람이다. 도덕과 도덕주의가 엉키면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먼저 도덕적이면서 도덕주의적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지행합일, 언행일치라는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현대 사회에는 맞지 않다. 우선 도덕이 하나일 수 없는데 자신의 도덕을 남에게 강요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다만 조선과 같은 전근대 사회에서 이런 인간형은 선비[士]라고해서 이상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도덕적이면서 도덕주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가장 좋은 평을 듣게 된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인간형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자신에게 엄격하기는 어렵고 남에게 관대하기란 더 어려워서 그런지,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가능한 한 스스로 도덕을 지키고자 노력하며 살아간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가지다. 도덕적이지도 않고 도덕주의적이지도 않은 경우와, 도덕적이지 않으면서 도덕주의적인 경우다. 앞의 것은 필부들이라면 대부분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다지 지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만 산다는 것은 극소수의 성직자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욕망의 억제보다는 욕망의 정당한 분출을 인정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가장 일반적인 인간형이기도 하다.


문제는 도덕적이지도 않으면서 도덕주의를 내세우는 인간형이 가장 안 좋은 경우다.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과거를 밑천 삼아 오늘날의 부도덕을 가리는 정치인이 그런 경우에 속할 것이다. 이들이 신봉하는 가치는 분명하다. 바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다. 자신들의 부도덕이 문제 되면 "당신들이 더 부도덕했잖아?"라고 반격하는 한마디면 된다. 참으로 편리한 논법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스스로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남에게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상당히 민망하거나 낯 두꺼운 짓이다. 이런 자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지면 도덕주의는 더욱 강화된다.


셋째, 과연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선비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일단 특정 직업군으로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선비의 존재 방식이 현실 속에서 가능했다. 유학의 훈련을 받은 선비들은 벼슬에 나아가거나 나아가지 않거나 선비 정신으로 무장하여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며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유학의 훈련을 전제 조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선비는 마땅히 생계를 유지하며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차단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억지로 찾자면,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사서삼경을 가르치며 미미하게 존재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렇게 되면 선비라는 개념이 아무리 좋다 한들 쓰일 데가 없다.


선비는 ‘일’을 모른다

조선을 대표하는 선비 정신의 소유자로 누구를 떠올리는가? 물론 이는 순전한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우리 역사교육의 방향과 수준에 의해 영향을 받은 선택이 되겠지만 말이다.


성삼문은 아마도 절의(節義)라는 면에서 보면 현대사에서 김구가 차지하는 위상을 조선시대 때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공유 지점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19세기 말 조선에서 과거 시험을 볼 때 “장차 과거에 급제해 성삼문 같은 선비가 되고 싶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 후에도 성삼문은 사육신(死六臣)의 대표 인물로 여겨져 나머지 다섯 사람은 잘 몰라도 성삼문은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조선 초의 대표적인 선비의 표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성사문은 사육신의 대표적 인물로 벗 신숙주와 대비를 이루면서 절의의 상징처럼 이야기되어 왔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조선시대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보자. 성삼문이 복권된 것은 숙종 17년(1691년)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1456년이니 무려 235년이 지나서였다. 조선이 500년이나 이어졌기에 망정이지 중국의 여러 나라들처럼 200년 정도 만에 왕조가 바뀌었더라면 조선 내에서는 끝내 역적으로 남을 뻔했다.


성삼문이 죽은 때와 복권된 때의 딱 중간쯤인 1576년(선조 9년) 선조는 경연관이 추천한 남효온의《육신전(六臣傳)》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아 3정승을 급히 불렀다.


“한 가지 논할 것이 있다.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겨줌)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백이숙제의 고사처럼)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 이미 몸을 맡겨 (세조를) 임금으로 섬기고서 또 시해하려 했으니 이는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우리 조정을 섬기다가 필부(匹夫)의 꾀를 도모하여 자객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의사(義士)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열장부(烈丈夫)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백이와 숙제 등을 거론하며 성삼문 등은 기회를 엿보다가 실패한 것이지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옛 임금을 위하겠다는 진실된 마음[忠]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불충한 신하로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 물론 여기서 성삼문이 진짜 충신인지 아닌지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주류의 경우 선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선조의 이 같은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시로서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묻는다. 우리가 선비 정신의 ‘회복’을 위해 표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이 정말 성삼문일까? 다소 부정적 의미의 선비의 표상이라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게 될 바람직한 군자의 표상으로는 부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일[事]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질’을 갖춰야 군자다

문질을 가져야 일과 사람에 밝다

위나라 대부 극자성은 노골적으로 ‘바탕’을 강조한다. 문질이라는 척도는 사람을 판단할 때뿐만 아니라 사물을 판단할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예컨대 어짊[仁]이 바탕[質]이면 예악(禮樂)은 꾸밈 [文]이된다. 그리고 예(禮)만 놓고 볼 때는 정성스러운 마음이 바탕[質]이라면 격식은 꾸밈[文]이 된다. 공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문질(文質)이 골고루[彬彬] 갖추어져야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조금은 질에 우선을 두는 입장이었다. 이 점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다. 특히 <팔일>에는 문보다 질을 중시하는 공자의 발언들이 다수 나온다.


공자는 말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한데 예를 행한들 무엇 할 것이며 사람이 어질지 못한데 음악을 행해서 무엇할 것인가?”


임방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었다. 공자는 그 질문이 훌륭하다고 칭찬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예제를 행할 때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검박하게 하는 것이 낫고 상제를 행할 때도 형식적인 겉치레에 치우치느니 차라리 진심으로 슬퍼함이 낫다.”


자하가 물었다.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선명하도다. 하얀 본바탕에 화려한 꾸밈이 가해져 더욱 빛나는구나!’라는 시는 무슨 뜻입니까?”


공자는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素)을 마련한 후에 이루어진다.” 자하가 말했다. “예가 (인이나 충신보다는) 뒤에 있겠군요.” 공자는 말했다. “나를 흥기시키는 자는 자하이구나! 이제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다.”


말은 어눌하게, 일은 명민하게

예(睿)는 일에 밝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일에 밝다는 것이 무엇이냐?”로 바뀌어야 한다. 시킨 일을 잘하는 사람이 일에 밝은 것은 아니다. 예지력에 미래의 의미가 살짝 담겨 있듯이, 여기서도 일에 밝다는 것은 일을 하기에 앞서 사전에 잘 준비하는 능력을 말한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대학 시절 MT를 가거나 모임에서 단체여행을 갈 때 그에 앞서 사전 답사를 보내게 되는데, 이럴 경우 어느 집단에서든지 일정한 유형의 사람이 지목을 받게 된다. 빈틈이 없어 만약의 사태에도 대비하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아서 그에 맞는 숙소와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일에 밝은[睿]’ 사람, 요즘 자주 하는 말로 기획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이제 일[事]의 문제를 통해 ‘일에 밝다’의 구체적인 의미와 내용을 정해야 할 차례다. 다행히《논어》에는 일과 관련해서 많은 언급들이 나오는데, 지금 우리의 문맥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들이 있다. 먼저 <학이>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후국을 다스릴 때라도 매사에 임할 때 삼감으로써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내고 [敬事而信], 재물을 쓸 때는 절도에 맞게 하여 사치를 멀리함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해야 하며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공역 등에) 부려야 할 경우에는 때에 맞춰 (농사일을 하지 않는 농한기 때 시키도록) 해야 한다.”


“매사에 임할 때 삼감으로써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내라[敬事而信]”고 했다. 사전 답사자의 핵심 덕목은 바로 이 믿음이다. 믿음을 주지 못한 사람은 결코 사전 답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경사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을 삼간다는 것은 바로 일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이해하고 사전에 그 같은 다양한 요소들에 조심스럽게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 안연에게 말했다. “(인재로) 써주면 행하고 버리면 숨어 지내는 것을 오직 너하고 나만이 갖고 있구나!” 이에 자로가 물었다. “만일 스승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여 죽어도 후회할 줄 모르는 사람[暴虎憑河 死而無悔者]과 나는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서는 두려워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세우기를 즐겨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사람[必也臨事而懼 好謨而成者]과 함께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에 임하여 삼감이 없는자[不敬]인 자로와 삼감이 있는자[敬]인 안연(안희)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마침네 예(睿)의 정확한 의미에 이르렀다. 삼감[敬]이 명민함[敏]으로 풀어졌고 다시 여기서는 ‘두려워하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세우기를 즐겨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懼好謨而成者]’으로 구체화되었다. 이것이 예(睿), 즉 일에 밝다의 정확한 의미다. 참고로 공자는 의로움을 앞세우는 자로에 대해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했고 실제로 자로는 비명횡사했다. 일을 알고 모르고는 적어도 옛날에는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중대한 사안이었다.



일을 알고 하는 것, 모르고 하는 것

일을 알고 하는지, 거듭 되묻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황희를 직접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의외로 당혹감이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식의 능수능란, 우유부단의 황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결과론적인 초상화의 한 단면이고 위인전식 인물 서술의 폐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혹감의 이유는 다름 아닌 그의 지나칠 정도의 과단성 혹은 곧은 성품 때문이었다.


사실 세종의 입장에서 황희는 불쾌한 존재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의 세자 즉위를 가장 앞장서서 반대한 신하였기 때문이다. 10월에 세종은 황희를 한직인 의정부 참찬에 임명했다. 이런 황희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듬해 7월 강원도에 혹심한 기근이 들었는데, 당시 관찰사 이명덕이 구황과 진휼의 계책을 잘 못 써서 백성들의 고통이 심화되었다. 이에 세종은 당시 61세이던 황희를 관찰사로 임명해 기근을 구제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놀라울 정도로 단기간에 강원도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때부터 황희는 일을 통해 세종의 신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당시 그가 맡았던 관직은 이를 말해준다.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 관찰사를 계속 겸직했다. 세종 6년 (1424년) 의정부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세종 8년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병조판서를 겸직했다. 이제 건강만 허락한다면 그가 최고의 실세인 좌의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세종 8년 (1426년) 3월 15일, 좌의정 이원이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 (功臣錄券, 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礪山)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복권의 기회는 없었다. 그로부터 1년도 안 된 세종 9년 (1427년) 1월 25일, 잠시 우의정을 거쳤던 황희는 마침내 좌의정에 오른다. 그를 좌의정에 임명하면서 세종이 그에게 했다는 말이 <문종실록> ‘황희 졸기’에 실려 있다.


“경(卿)이 폄소(貶所, 귀양지)에 있을 적에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시기를, ‘황희는 곧 한나라의 사단(史丹)과 같은 사람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사단(史丹)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시중(侍中, 재상)을 지낸 명신(名臣)으로 원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부소의(傅昭儀)의 소생 공왕(恭王)이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세자를 폐하고 공왕을 후사로 삼고자 하므로 극력 간(諫)하여 마침내 폐하지 않게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후 20여 년 재상으로서 황희의 업적은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다.


일을 몰랐던 정철의 비극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1591년) 2월, 막 우의정에 오른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와 영의정 이산해와 더불어 3정승이 임금을 뵙고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산해와 유성룡은 동인(이어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당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을 못 낳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암암리에 ‘광해군 세자론’이 퍼져 있던 때이다. 정철은 유성룡의 제안이 있었고 이산해와 유성룡은 같은 당파이니 서로 의견을 나누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3정승 중에서 가장 힘이 막강한 좌의정이니 임금을 만나는 경연에서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순서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경연에서 정철이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선조의 분노는 폭발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 경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문제는 그 순간 이산해와 유성룡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산해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다. 결국 정철은 파직당해 마천령 넘어 함경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여기서 정철이 옳고 이산해가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당시는 정여립의 난 직후였기 때문에 서로 피 말리는 경쟁을 하던 중이었다. 문제는 이산해가 구사한 술수가 지극히 고전적인 수법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조선 선조 때로 돌아간다. 만약에 정철이 당시 고위관리들의 필독서였던 진덕수의《대학연의》를 제대로 보았다면 거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낡은 덫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충신이냐 간신이냐를 떠나 정철은 사람을 알아보는 데 어두웠고, 제대로 된 독서가 없었기 때문에 버젓이 책에 나와 있는 사례를 답습해 귀양까지 가는 고초를 겪었다는 점에서 크게 동정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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