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5주차

BOOK SUMMARY
 인문 

삼국지연의보다 재미있는 정사 삼국지. 1

저자 써에이스
출판 원너스미디어
출간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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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보다 재미있는 정사 삼국지. 1


황건적의 난: 부패한 정치가 난세를 부른다

난세의 시작, 십상시와 황건적

중국 한나라 말 조등이라는 환관이 있었다. 관직은 비록 환관이었으나 뛰어난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가진 덕에 그는 환관의 반대파였던 청류파(외척과 척을 진 재야의 유학자 집단)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조등은 146년에 환제가 황제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외척까지 몰아내어 황권을 강화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이러한 공로 덕분에 조등은 환관이었지만 양자를 들이는 게 허용된다. 그리고 이때 양자로 들인 아이가 바로 조숭이며, 이 조숭의 아들이 바로 삼국지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조조이다.


조등을 필두로 한 환관들은 권력을 차지하게 되고, 당고의금이라는 사건으로 반대파였던 청류파 수백 명에게 누명을 씌워 잡아들이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168년, 환제가 죽자 그 아들인 영제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환관들은 어린 영제를 주무르면서 부패한 정치를 계속하는데, 이 환관들을 대표하는 무리를 바로 십상시라고 불렀다. 십상시는 오늘날까지도 부패의 대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이들의 전횡은 극에 달했다. 십상시는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아 부를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관직은 받은 관리들의 임기가 대부분 1년을 넘기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십상시가 더 많은 뇌물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자리를 교체해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관직을 산 사람들은 짧은 임기 안에 십상시에게 바쳤던 본전이라도 뽑으려고 백성들에게 과다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다. 나라꼴이 이렇다 보니 당연하게도 백성들의 삶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어려워져갔다.


184년, 결국 백성들의 불만은 ‘황건적의 난’이라는 농민봉기로 표출된다. 황건적의 난을 이끈 사람은 장각이라는 인물인데, 이 인물은 매우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이었다. 태평요술서를 손에 넣은 장각은 태평도라는 종교를 창시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주술과 부적으로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어 수많은 신도를 모으게 된다.


수십만에 달하는 장각의 황건적은 한나라를 뒤엎을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184년, 한나라 전역에서 거병한 황건적은 그 수가 백만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실상은 30만에서 40만 정도의 규모였을 거라고 추정된다. 이렇게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 멸망에 직격탄이 되었고, 이후 400년 동안 이어진 혼란기의 시발점이 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삼국지》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황건적은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병력이 한꺼번에 봉기했기 때문에 정말 한라라를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다. 파도처럼 세력을 늘려가는 황건적으로 인해 수도 낙양까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조정은 그제야 큰 위기감을 느낀다. 하지만 군대를 지휘할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당고의 금 사건을 통해서 벌을 받거나,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결국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환관 세력은 청류파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을 하기에 이르고, 복직하게 된 여러 장군들이 관군을 조직하여 황건적 토벌에 나서게 된다.


황건적 토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에는 황보숭, 노식, 주준, 동탁, 조조, 손견 등이 있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유비, 관우, 장비도 이때 500명의 의병을 이끌고 황건적을 무찌르기 위해 출전했다. 40만에 달하는 황건적에 비해 관군은 7만이라는 작은 병력으로 토벌에 나서지만, 오합지졸이었던 황건적과는 달리 관군은 훈련이 잘 된 정규군이었다는 것에서 강점을 갖고 있었다.


황건적 토벌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격인 조조나 유비와 달리 바로 당고의 금 사건으로 물러났다가 복직한 청류파의 황보숭과 노식이었다. 특히나 한나라의 마지막 에이스와도 같던 황보숭은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동탁과 반동탁 연합군

정사에 따르면 여포는 궁술과 기마술에 능했으며, 힘 역시 남보다 뛰어나 비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비장은 행동이 신속하고 용맹한 장수를 뜻하는 말로, 한나라 시대를 통틀어 비장의 칭호를 받은 무장은 전한 시대에 흉노족을 물리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광과 후한시대의 여포까지 단 둘뿐이다. 원소가 여포와 싸우게 되었을 때 병사들이 여포를 두려워해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그 위용이 정말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여포는 하내에서 병주자사를 지내던 정원의 눈에 띄어 그의 휘하에서 무용을 높이 평가받아 주부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주부는 본래 사무직이지만 여포는 병사들을 통솔했다는 《자치통감》의 기록으로 보아 주부직과 함께 병사들을 통솔하는 다른 직위를 겸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여포의 휘하에서는 물론 조조의 휘하에서까지 대활약하는 무장인 장료 또한 정원에 의해 스카우트된 인물이다.


정원 역시 투박한 스타일의 무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원은 여포를 굉장히 잘 대해주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정원은 여포를 자신의 친아들처럼 대했다고 할 정도다.


변방에 속하는 지역이었던 병주에서 자사직을 맡고 있던 정원은 북방에서 마적들을 소탕하면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하진이 환관에게 죽기 전에 보낸 소집 명력에 응하고자 낙양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원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세력이 전부 원소를 비롯한 하진의 수하들에게 살해당한 후였다.


헛걸음한 셈이 되어버린 정원은 낙양 근처에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그런데 이 짧은 틈을 노리고 동탁이 여포에게 접근한다. 정원 모르게 동탁의 회유를 받게 된 여포는 자기를 아들에게 대해주었던 정원을 죽이고 정원의 군사들을 동탁에게 바치는 짓을 저지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동탁은 크게 기뻐하며 그런 여포를 환영했다. 동탁과 여포, 둘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서로 부자의 연을 맺었다고 한다. 동탁은 이렇게 여포를 회유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하진의 병력뿐 아니라 정원의 병력까지 흡수하는 데에 성공하고, 뒤이어 수도의 군사 대부분까지 차지했다. 어마어마한 병력을 갖추게 된 동탁은 낙양의 군권을 차지하게 되고 점차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정사에 기록된 동탁의 악행은 그 수가 너무 많은데, 몇 가지만 짧게 언급하자면 이전 황제들의 능 도굴과 공주 강간, 그리고 주민 학살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사소한 잘못만으로도 신하들은 서슴없이 죽였다는 기록도 많다.


낙양에서 동탁이 폭정을 일삼고 있던 그때, 유비 또한 나름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유비는 황족출신으로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돗자리와 신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유비는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옷 입는 것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던 유비는 우연히 장세평과 소쌍이라는 상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유비의 생김새가 범상치 않음을 보고 대화만 조금 나눈 뒤 많은 재물을 줬다고 한다. 그리고 유비는 이 돈으로 많은 무리를 모으게 되는데, 유비의 의형제로 유명한 관우와 장비 역시 이때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비롯해 자기만의 사람들로 유협 무리를 조직한다. 유협이란 나라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단체는 아니었지만 자발적으로 그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무리로 쉽게 말해 ‘동네 어벤저스’ 같은 개념이었다.


유비는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자신의 유협무리를 중심으로 한 5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출전해 여러 차례 공을 세우는데, 조조와 처음 만난 것도 이때라고 한다.


이후 유비는 패국으로 가서 자신의 세력을 모으기 시작한다. 패국은 조조의 고향이기도 해서 비슷한 시기에 낙양으로 도망친 조조 또한 패국에 있었다. 즉 유비와 관우, 장비가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같은 조조의 장수들과 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관도대전: 천하의 절반을 손에 넣는 조조

형주를 날로 먹는 조조, 손권과 유비의 동맹

208년 하북을 평정한 조조는 4공(3명의 최고위 재상)을 폐지하고 스스로 승상의 자리에 오른다. 이로써 조조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는데, 헌제는 조조가 황위를 찬탈하지 않고 목숨을 연명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조조의 지령에 도장만 찍는 존재가 된다.


같은 해 7월, 조조는 형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군을 집결시킨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형주의 유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유포의 나이는 67세였다. 유포가 죽음으로써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유종은 조조를 상대로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후원 세력이었던 채모와 괴월은 승산이 없다며 이를 반대한다. 유종이 계속해서 항전 의지를 보이자 유표시절부터 형주를 섬겨온 부손은 유종에게 “새로 나라를 건설해서 대항한다 하더라도 조조의 세력을 막을 수 없으며, 유비가 조조의 적수가 된다 하나 또한 당해낼 수 없으므로 조조군에 맞서는 것은 반드시 패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만에 하나 유비가 조조에게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그는 장군의 곁을 떠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호족들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확인하게 된 유종은 전의를 상실한다.


유종이 조조와 맞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은 조조와 싸운다 하더라도 호족들이 배신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할 의사를 밝히고, 조조는 손쉽게 형주를 날로 먹게 된다.


한편 번성에 있던 유비는 조조가 완에 도착할 때까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유종은 자신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유비에게 알리기가 민망해서 그때까지 따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 양양에 입성한 조조는 쉬지도 않고 직접 5,0000의 최정예 기병부대인 호표기를 이끌고 유비를 맹추격한다. 자기를 배신하고 끊임없이 괴롭혀 온 유비를 드디어 잡아 죽일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유비는 그를 흠모한 10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기에 조조군과 달리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조조에게 따라잡힌 유비는 대패하고, 백성들은커녕 또다시 처자식까지 버리고 도망한다. 그나마 유비는 장비와 조운이 대활약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다.


형주를 손에 넣은 조조는 손권에게 ‘최근에 죄지은 자들을 토벌했고, 이제 군기를 남쪽으로 돌리니 유종이 항복해왔소. 이제 수군 80만을 단련하여 바야흐로 오 땅에서 손장군과 자웅을 가려보려고 하고.’ 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손권이 조조가 보낸 편지 내용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자 다들 겁에 질려 싸우기도 전에 항복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제갈량이 시상에 도착한다. 제갈량은 손권을 만나자마자 “저희 유비님은 조조와 천하는 다투고 있지만 장군께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빨리 조조에게 항복하십시오.”라면서 손권의 심기를 건드리며 결정을 촉구한다.


제갈량을 만난 뒤 손권은 조조와 싸울 마음을 먹게 된다. 손권은 주유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노숙을 찬군교위(사령관을 보좌하며 전투 계획을 수립하는 핵심적인 역할)로 임명하여 그를 보좌하게 한다. 손권은 주유에게 3만의 병력을 맡기는데 유비가 보유한 2만의 병력을 합쳐 총 5만 명이 조조의 대군과 맞서게 된다.


한편 조조 측에서도 강동을 공격하자는 계획에 반대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가후였다. 가후는 “굳이 전쟁을 벌이지 않아도 가만히 있으면 손권이 알아서 항복해올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조조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기회를 다음으로 미룰 이유가 없다고 보고 이를 무시한 채 출진을 명한다. 그리고 드디어 양군은 적벽에서 격돌한다.



적벽대전: 위촉오 삼국시대의 문이 열리다

적벽대전

208년 10월, 25만의 조조군과 5만의 손권, 유비 연합군은 적벽에서 격돌한다. 조조가 다섯 배나 많은 병력을 갖고 있었지만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데다 수전에는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육지에서만 활약해온 조조 진영에는 질병이 유행해 많은 인명피해가 나고 있었다.


시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던 조조는 결전을 앞두고 술을 마시며 단가행이라는 시를 짓는다. 조조가 술과 감성에 취해 있을 때 주유와 정보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궁지에 몰린 유비에게 도착한다. 당시 손권의 군에서 가장 고참이었던 정보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 주유와 공동으로 군을 지휘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주유와 사사건건 충돌했다고 한다. 때문에 주유는 3만이라는 턱없이 부족한 병력에 단결까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조조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유비가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주유를 만나기 위해 홀로 배에 오른 유비는 주유에게 데리고 온 병사가 얼마나 되는지 묻자 주유는 3만이라고 대답한다. 유비가 그것밖에 안 되냐면서 실망하자 주유는 “이 정도면 부리기에 충분하니 앉아서 나 주유가 적을 격파하는 것을 구경이나 하시오.”라고 말한다.


주유의 말처럼 이 대화 이후에 모든 군과 작전의 지휘권은 주유에게 돌아갔고, 유비가 적벽에서 주도적인 활약을 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물론 유비가 손권의 군대와 함께 조조의 군을 물과 뭍에서 협공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전투가 끝나고 패잔병을 쫓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주유는 조조와의 첫 번째 전투에서 성공하고 장강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킨다. 주유가 군대를 남쪽에 주둔시킨 것과 반대로 조조는 자신의 군을 장강 북쪽에 위치한 오림에 자리잡게 한다. 그리고 이때 적벽대전의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손씨 가문을 3대째 모시고 있던 노장, 황개였다.


황개는 주유에게 조조군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어서 불을 지르기 좋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주유는 황개의 말이 옳다고 여겨 수십 척의 배에 풀을 가득 싣고 기름을 부어둔다. 그리고 황개를 시켜 조조에게 항복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게 한다.


얼마 후 조조군 진영으로 남쪽에서 여러 척의 배가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모습이 목격된다. 조조군은 배 위에 보이는 병사들이 항복을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황개가 주유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가만히 쳐다만 본다.


이때 배에 타고 있었던 황개는 배가 조조 진영에 가까워지자 미리 준비해 둔 기름 부은 땔감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배들은 화살처럼 미끄러져 조조 진영의 배와 충돌한다. 때마침 세찬 바람이 동남쪽에서 불고 있었기 때문에 불은 빠른 속도로 조조의 배를 모두 태우고 물가의 진영까지 모조리 태워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조조의 강동 정벌은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적벽에서의 패배로 조조가 천하통일의 꿈을 미루어야만 했던 반면 손권과 유비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유비의 익주 정벌기

211년, 유비는 제갈량과 관우를 형주에 남기고 방통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익주에 도착한다. 유비는 부현에서 유장을 만나는데, 이때 방통은 “이제 이 회담을 이용하여 곧바로 유장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장군은 싸우지도 않고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유비에게 진언한다. 하지만 유비는 남의 나라에 막 들어온 터라 은혜와 신의를 아직 보이지 못했다며 방통의 제안을 듣지 않는다.


유장의 가신들은 기어코 유비를 익주에 초대했다는 소식을 듣자 성문에 거꾸로 매달리면서까지 격렬하게 유비가 익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유장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비를 맞아들인 유장은 잔치를 열어 그를 크게 환대한다. 이때 법정 역시 방통이 진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유장을 죽이라고 간언한다. 하지만 역시나 유비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며 이를 거절한다.


유비가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약 3만의 군을 이끌고 가맹으로 향하자 유장은 유비에게 군량미를 지원하고 군의 지휘권까지 내준다. 하지만 가맹에 도착한 유비는 장로를 공격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 유비는 진짜 목표였던 유장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며 지역 백성들의 인심을 모으는 데 힘쓰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일전에 마초를 진압한 조조가 군을 이끌고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기 전, 양주의 지방 관리였던 양부는 조조를 찾아가 “마초는 한신, 영포의 용맹을 갖추고 강족과 호족의 마음을 얻었으니 만약 대군이 돌아가며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이곳을 다시 빼앗길 것입니다.”라고 충고한다.


이 말은 들은 조조는 양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기주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을 돌려야만 했다. 덕분에 마초는 재기할 틈을 얻었고, 조조의 공백을 틈타 양주에서 다시 군을 일으킨다. 마초가 거병하자 양부의 말대로 양주 일대의 여러 호족을과 이민족들이 호응하고, 뿐만 아니라 한중의 장로 또한 군을 보내 마초를 지원한다. 오직 양주자사 위강과 양부가 지키고 있던 기성만이 마초에게 항복하길 거부하며 대항하고 있었다.


마초는 1만여 명의 군을 이끌고 기성을 공격한다. 당시 기성에는 마초가 가진 병력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1,000명이 병력의 전부였지만 위강과 양부는 결사항전을 펼치며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린다.


기성은 약 8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을 마초를 상대로 버티지만 식량이 부족해져서 성안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린다. 결국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한 위강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리라 생각하여 마초에게 항복할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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