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주차 |
BOOK SUMMARY | ||
독선과 아집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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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바바라 터크먼(역:조민 외) 출판 자작나무 출간 20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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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요약 보기독선과 아집의 역사 국익을 무시한 오만한 통치자들 3천 년 동안 이어진 바보들의 행진 독선은 시대를 초월한 현상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우리의 눈길을 분명하게 잡아끄는 현상이 있다. 각국 정부가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인류는 모든 영역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통치술만은 다른 영역에 비해 별다른 발전 없이 정체된 느낌을 준다. 지혜란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통치의 영역에서는 그러한 지혜와 상식과 유용한 정보 따위가 정당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꺾여 버리곤 한다. 인류는 통치 이외의 영역에서는 눈부신 업적을 쌓았으며, 지구의 대기권을 벗어나 달까지 날아가기에 이르렀다. 과거에는 바람과 전기를 활용하고, 땅속의 돌을 쌓아올려 우뚝 솟은 대사원을 만들고, 누에가 친 실에서 찬란한 비단을 짜내고, 악기를 만들고, 증기에서 동력을 끌어내고, 질병을 억제하거나 없애고, 북해를 간척해서 육지를 만들고, 자연현상을 분류하고, 우주의 신비를 밝혀냈다. 하지만 “다른 모든 과학은 진보하고 있는데도 정치만은 옛날 그대로이다. 지금도 3,4천 년 전과 거의 차이가 없다”라고 미국이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탄식했다. 악정에는 네 종류가 있지만, 몇 가지가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첫 번째는 폭정, 또는 압정이다. 이것은 역사상 유명한 예가 워낙 많기 때문에 예를 들 것까지도 없다. 두 번째는 지나친 야심이다.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전쟁 중에 시칠리아를 정복하려 했던 아테네의 야망이 그렇다. 독일이 두 차례나 시도했던 자칭 우수민족에 의한 유럽지배의 꿈도 그렇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도 빼놓을 수 없다. 세 번째는 무능, 또는 타락이다. 로마제국 말기나 로마노프 왕조의 말기,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좋은 예이다. 마지막인 네 번째가 독선, 또는 아집이다. 이익이란 국민의 복지와 편의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독선이란 이런 관점과 어긋나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정책을 가리킨다. 독선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등장한다. 독선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습관이지만, 독선 자체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독선은 정치구조와도 관계가 없다. 군주정치와 과두정치뿐 아니라 민주정치도 독선을 낳는다. 독선은 민족과 계급에 고유한 것도 아니다. 아집과 독선은 개인의 타고난 성격이기 때문에 통치에 대해서도 그 이상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치상의 독선은 개인의 독선보다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므로 정부는 이성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분명한 의무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주의를 기울여 방어수단을 강구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분명한 몇 가지 시도는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어떤 계급을 선별하여 통치전문가로 훈련하자는 플라톤의 제안이었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올바른 사회의 지배계급은 이성적이고 현명한 사람들 중에서 선발되어 치세술훈련을 받은 남자들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반인 중에서 손을 꼽을 만큼 적기 때문에, 플라톤은 우생학적으로 이런 인종을 만들어 내고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기만의 원천을 이루는 우둔함은 통치에서 대단히 큰 역할을 하는 요소이다. 이것은 편견이 가득 찬 고정관념을 품은 채 상황을 판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개념에 반하는 징후는 무조건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전투에서 전형적인 예를 찾는다면 제17계획, 즉 1914년에 수립된 프랑스의 전쟁계획이 있다. 이것은 전면전의 정신에 입각해서 수립된 공격계획이며, 전력을 다해 프랑스군을 라인강까지 진격시키려고 한 결과 프랑스군의 왼쪽 진영을 사실상 무방비상태에 빠뜨렸다. 이 전략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독일군에는 벨기에 서부와 프랑스의 해안지역까지 침공군을 전개할 병력이 없다는 고정관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군은 예비군을 제일선에 투입해서 서부국경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 결과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었고, 20세기의 유례없는 비국적인 사태를 부른 것이다. 역사상 가장 현명한 통치자, 솔론기원전 6세기,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불안에 허덕이던 시대에 아르콘(archorn)이라 불리는 집정관에 뽑힌 솔론은 나라를 구하고 갈등을 막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가혹한 착취가 서민을 굶주리게 하고 분노케 하여 폭동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채권자가 담보로 잡은 토지를 빼앗거나 채무자를 노예로 삼아 혹사시키는 것을 법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솔론은 부자들의 압제에도 가담하지 않고 빈자들의 입장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물게도 양쪽 모두의 신뢰를 받았다. 플루타크에 따르면 부자들은 솔론이 부유한 명문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뢰했고, 빈자들은 정직했기 때문에 신뢰했다고 한다. 그가 공포한 법률의 본문을 보면 솔론이 관심을 가진 것은 당파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이고, 강자와 약자 간의 공정한 거래와 안정된 통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세계를 둘러본다는 구실로 배를 사서, 10년 동안의 유랑에 나섰다. 솔론은 정치가로서 공정하고 공평했지만, 인간으로서도 현명했다. 그는 자기의 권한을 전제군주의 권한으로까지 확대해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확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법률을 개정해 달라는 탄원과 청탁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고,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원한을 살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다. 그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법률을 순수하게 뇌두기 위해서라도 여행에 나서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솔론은 3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생활기록을 남겼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그는 하루하루 늙어갔지만, 나날이 새로운 것을 배웠다.” 솔론처럼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때때로 강력하고 능력 있는 지배자가 다른 지배자를 누르고 우뚝 서는 일이 있다. 페리클레스는 건전한 판단과 중용과 명성을 앞세워 전성기의 아테네를 다스렸다. 로마에는 놀라운 통치능력을 자랑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다. 그 뒤에는 안토니누스 왕조 때의 ‘사현제(四賢帝)’, 즉 조직가이자 건축가로 이름을 날린 투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인정이 깊었던 아토니누스 피우스,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에서 로마시민들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선정과 번영과 개인의 존엄을 향수했다. 아둔함의 원형, 트로이 목마 무지와 어리석음의 상징, 트로이 목마 서유럽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자 인간의 갈등을 묘사한 모든 글의 원형이고, 인간이 독서를 시작한 이후(그 이전부터) 동서고금의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읽힌 서사시가 있는데, 그 안에는 목마의 전설이 담겨 있다. 역사적 사실의 흔적은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다. 트로이, 즉 일리움(고대 트로이의 라틴어 이름)의 이야기에는 인간 경험의 모든 측면이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기원전 약 850 ~ 800년에 호메로스가 처음으로 서사시의 형태로 묘사했다. 트로이는 10년 동안의 무익하고 애매하고 비열하고 모략적이고 질시에 넘치고 영웅 하나 낳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전쟁 끝에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 이야기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최고의 전략으로 목마를 끌어들인다. 이 서구인의 가장 오래된 연대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러한 행위가 인간의 고유한 습성이었음을 암시한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절정에 달하기 전에 끝나 버리는 『일리아드』가 아니라『오디세이아』속에 처음으로 등장해, 맹목의 음유시인 데모도쿠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어슴푸레한 기억 속에서 호메로스가 끌어올린 목마 이야기는 뒤이은 2~3세기 동안 곧바로 호메로스를 계승한 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들은 이 이야기에 정성스런 가필을 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서사시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에 라오콘을 등장시킨 점이다. 경고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라오콘의 극적인 역할은 그 후에 나온 모든 판본 속에서 목마 이야기의 중심적인 주제를 이룬다. 트로이를 함락시킨 책략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줄거리를 완벽하게 정리한 것은 기원전 20년에 완성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아이네이아스의 노래라는 뜻)이다. 이때는 이미 천 년 이상에 걸쳐 쌓인 다양한 이설(異說)이 목마이야기에 스며들어 있었다. 사건이 줄거리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동기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우리는 목마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서 아이네이아스가 넋을 잃은 여왕 디도에게 들려준 대로, 또한 라틴의 계승자들이 수정하고 더 극적으로 꾸미면서 중세까지 전하고 그 뒤에 중세에서 현대까지 전해져 내려온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개혁보다는 타락을 택한 르네상스시대의 교황들 하나님도 돌아앉은 여섯 교황의 탐욕 권력과 이권을 추구한 교황정치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 즉 현세의 가치를 내세의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꽃을 피웠다. 이러한 시대에 힘입어 개개인은 신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서 운명의 계획자이자 추진자를 찾아냈다. 자신의 필요성, 야심과 욕망, 쾌락과 소유물, 지력, 기술, 힘, 영광에서 생명의 원천을 찾았다. 대략 1470년에서 1530년까지 60년에 걸쳐서 연이어 즉위한 여섯 사람의 교황(다섯 사람은 이탈리아인이고 한 사람은 스페인인)은 당시의 현세적인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그들의 지배는 신앙심 돈독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교황청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그들의 타락은 완고함에서 비롯되었고, 몇 세기나 계속된 적의와 형제끼리 물고 뜯는 전쟁을 불렀다는 결과를 놓고 생각하면 아마 서양사상 가장 중대할 것이다. 여섯 교황의 권력 남용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교황정치의 관습에 뿌리를 둔 타락의 극치였다. 교황정치는 14세기 전 기간에 걸쳐 진행된 교황의 아비뇽 유폐에서 시작되어 르네상스보다 150년 앞서서 발달한 것이다. 1378년에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키고자 한 시도는 대분열을 불러 로마에 한 사람, 아비뇽에 또 하나사람의 교황이 자리 잡게 했고, 각각 계승자가 이어져 반세기 넘게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 이후 각 국가, 또는 왕국이 두 사람의 교황 가운데 누구에게 복종하는가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청은 철저하게 정치화되었다. 르네상스의 활기 넘치는 인문주의 아래에서 1430년에 교황청이 최종적으로 로마로 돌아오자, 교황들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제후들의 후안무치한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따라 배웠다. 이탈리아인을 지배하는 제후들은, 부유하고 우아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도 서로 끝없이 다투었다. 냄새를 쫓는 사냥개처럼 교황직이 가져다주는 이권을 추구했고, 보르자가의 한 사람과 메디치가의 두 사람의 포함하는 여섯 사람 각자가 자신의 뒤에까지 이어질 일문의 재산을 쌓아 올린다는 야심에 사로잡혔다. 이 야심을 추구하기 위해 교황들은 번갈아가며 당시의 세속정치 속으로 뛰어들었다. 정치적 균형은 위태롭고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책은 항상 역정과 배신을 되풀이한다. 신념과 계획 대신에 거래와 매수와 음모가 활개 치도록 허락할 뿐 아니라. 사실은 그것 없이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정치적 요인으로는 3대 강국 즉, 프랑스, 스페인, 합스부르크제국이 이곳저곳의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반도나 그 일부를 정복하려고 앞다투어 이탈리아로 침입하던 상황을 꼽을 수 있다. 교황정치는 이 다툼에 깊숙이 빠져들어 있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할 만한 군사력은 없었다. 항상 좋지 않은 결과만을 초래하면서도 교황정치가 이 현세적이 다툼에 가담하면 할수록 제후와 나란히 무력한 모습만을 드러냈고, 사실 점점 무력해지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조국인 이탈리아를 전쟁과 외국의 압력의 희생물로 전락시키고 독립까지 잃게 한 주역이었다. 또한 신의 대리인으로서는 교황직을 만인의 비웃음을 사는 자리로 만들어, 루터가 자랄 수 있는 요람을 제공했다. 부관참시까지 당한 클레멘스 7세 1523~1534 개혁을 하느니 계란으로 바위를 쳐라교황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에야 마치 운명이 교회를 조롱하듯이 개혁자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의식적인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력한 경쟁자들이 힘을 겨루는 사이에 우연의 일치로 뽑혔던 것이다. 루반대학의 전 총장이자 카를 5세의 전 가정교사로서 그때는 스페인 총독이었던 네덜란드 태생의 우트레히트의 아드리안 추기경의 이름이 제출되었다. 사실상 무명이고 게다가 한심하게도 외국인을!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나왔는지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을 때, 성령의 뜻 때문이라는 해석이 제기되어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교황에 선출된 본인 자신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아드리안의 평판에 고무되어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개혁공의회의 초안과 성직자의 부패를 일소하는 데 필요한,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교회규정의 시행목록을 만들었다. 아드리안은 한편으로는 전염병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출된 지 약 8개월 후인 1521년 8월 하순까지 로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로마의 악평은 전 세계의 소문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하며, 추기경들에게 “여러분의 생활에서 부패와 사치를 몰아내고 나와 함께 개혁의 대의에 힘을 합쳐 성직자의 책무로서 세상에 좋은 모범을 보이자”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이 간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교황청의 관리, 예전의 아첨꾼들, 추기경들조차 소환되어 문책을 받거나 심문과 형벌을 받았다. “단 여드레 동안 교황이 이룬 일에 모두가 떨고 있다”라고 베네치아의 대사는 보고했다. 그는 규정을 만들어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비용지출을 줄이고, 면죄부의 판매를 억제했다. 나아가 사제에게 성직록을 주는 것이지 성직록에 사제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혁신적인 이론에 기초해서 자격이 있는 성직자에게만 성직록을 주고 한 사람이 하나 이상의 성직록을 받는 것도 제한했다. 한편 로마의 가톨릭교화가 “성스러운 것이 오용되고 계율이 어겨지고 모든 것이 악화되는 추세에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교황의 궁정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드리안은 일반대중의 항의와 데모, 풍자시, 벽에 휘갈겨진 모욕스런 낙서와 관리의 비협조에 직면했고, 현행 제도는 너무나 견고해서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제거할 수 없을 깨달았다. “인간의 노력은 당사자의 일을 주조해낸 시대에 다라 좌우되는가!” 하고 그는 슬픈 심정을 밝혔다. 이 이방인은 완전히 좌절해서 1년과 2주일 동안의 격무에 시달린 뒤에 1523년 9월, 누구 하나 애도하지 않는 가운데 죽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길었던 베트남 전쟁 인도차이나를 둘러싼 갈등 1945~1965 미국을 협박하여 인도차이나의 주권을 되찾은 프랑스미국은 대통령이 무려 다섯 번이나 바뀔 동안 베트남에서 악전고투를 계속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무지를 변명으로 들고 나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무지는 진정한 요인이 아니었다. 맞싸운 상대의 국민성이나 문화에 대해서 무지했을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또는 무엇이 장해가 되는가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어리석음은, 장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목표를 추구한 데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고, 결과는 미국의 국익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사회와 대외위신과 국력을 손상시킬 것이라는 증거가 산더미처럼 많은데도 고집스럽게 그것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의문은 왜 정책입안자들이 이러한 증거와 그 외미를 외면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독선의 전조이다. 즉 증거에서 결론을 뽑아내기를 거부하고, 국익에 반하는 것에 집착하는 태도이다. 발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몇 개월 전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지배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고 결코 원조도 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결의를 뒤집은 데서 시작되었다. 결의를 뒤집은 까닭은 집요한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일의 점령으로 손상된 프랑스의 자부심을 어루만지고, 프랑스를 소련의 진출을 막는 서유럽의 보루로 삼고자 하는 정책 때문이었다. 1943년 1월,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에 반환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코텔 헐 국무장관에게 말했다. “상황은 명백하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3천만 주민을 1백 년 가까이나 지배했고, 국민은 처음보다 생활이 나빠졌다. 그들은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낫게 살 자격이 있다.” 1943년에 카이로회담이 열렸을 때 루스벨트의 인도차이나 계획은 스틸웰 장군의 일기에 대문자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프랑스에게는 반환하지 못한다!” 루스벨트는 ‘필리핀과 완전히 똑같이 그들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25년 남짓’ 신탁 통치하자는 안을 제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마음에는 자치를 허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프랑스가 출현하기 전의 베트남(코친차이나, 안남, 통킹을 통합한 국가)은 중국의 지배에 저항하며 수많은 항전을 거듭한 역사가 말해 주듯이 오랫동안 자치에 집착한 독립국가였다. 이 문제를 간과한 루스벨트의 견해는 종속민족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태도의 전형이었다. 저항의 역사와는 관계없이 구미의 지도 아래 준비를 갖출 때까지는 그들에게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절한 패배의 씨앗, 세 대통령의 독선 계속되는 실패와 케네디의 선택 1960~1963 공산주의의 남진을 무조건 막아라케네디는 젊은 의원시절이었던 1951년, 단독으로 인도차이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남진을 막으려면 ‘주민들 사이에 굳건한 반공산주의적 정서를 쌓아올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대부분의 미국인 관찰자의 눈에는 명확해 보이는 결론에 도달했다. 베트남을 둘러싼 오랜 착오를 통해서 미국인은 끊임없이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자신의 예측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취했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1956년에 케네디는 이미 냉전주의자에 가깝게 소신을 바꾸어 ‘주민의 굳건한 정서’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적어졌고, 다양한 비유로 도미노현상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많아졌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 자리 잡은 자유세계의 촉석이고 아치 꼭대기의 요석, 제방의 구멍을 틀어막은 손가락’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붉은 물결이 베트남을 덮치는 날’이면 잇달아 쓰러질 불쌍한 이웃국가의 명단에 인도와 일본을 덧붙였다. 말장난의 허구가 그를 덮쳐 2개의 덫에 빠뜨렸다. 베트남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시험하는 장이고’,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책임과 결의를 검증하는 곳’이라는 덫이었다. 케네디가 백악관에 들어가기 2주일 전, 소련의 총리 니키타 후르시초프가 민족주의적‘해방전쟁’은 공산주의의 대의를 추진하는 매개물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해서 미국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러한 ‘정당한 전쟁’은 쿠바, 베트남, 알제리아 등 어디에서 일어나든 소련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케네디는 이것을 받아 취임연설에서 ‘이 가장 큰 위험에 직면한 시대’에 자유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